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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이름
사람, 회사, 제품 등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특히 사람의 이름에는 성공을 기원하는 축원과 염원이 배어있다.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은 평생을 불리는 동안 그 사람의 인생을 축복해주는 효과가 있고, 나쁜 의미를 가진 이름은 불리면 불릴수록 그 사람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성명학(性名學)의 기본 철학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위해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아서 사주와 오행, 음운을 따진다.
이름엔 늘 심오한 뜻만 담기는 건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내포한 이름도 있고, 튀기위해 코믹하게 지어진 이름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슬픈 사연을 담은 이름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름들 중에 특별히 기억되는 이름을 모아봤다.
치우치(客人)는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칭기스칸의 장남 이름으로 몽골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위대한 왕 칭기스칸은 왜 대권을 이어받을 첫 아들의 이름을 손님이라 지었을까? 칭기스칸이 초원에서 힘을 키워가던 때에 그의 부인 보르테가 적에게 납치된 일이 있었다. 당시 몽골의 풍습 상 전리품으로 남의 여자를 약탈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렇게 빼앗긴 아내를 쉽게 단념하는 것 또한 몽골 인들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테무친(칭기스칸)은 달랐다.
복수를 위해 차근차근 동맹자들을 모았고 결국 전투에서 승리해 아내를 되찾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를 되찾았을 때 적 진영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보르테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테무친은 고뇌에 빠졌다.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부인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자신의 핏줄이라고 믿고 싶은 부정(父情) 사이에서 한참을 고심한 테무친은 결국 그 아이에게 치우치(손님)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을 지어줬다.
그에게 치우치는 자식이 아닌 자신을 찾아온 손님으로 정의 내린 셈이다.
‘아버지’에게 ‘손님’이라 불렸던 치우치는 평생 아버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의 염원만큼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둘은 함께 제국을 건설했지만 칭기스칸이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식을 손님이라 불렀던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손님 대접을 받아야 했던 자식 간의 불행한 관계는 그대로 이어졌다.
쌍용자동차의 대표적 SUV 모델인 코란도는 Korean can Do의 약자로 '한국인은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포니(Pony, 조랑말), 스텔라(Stellar, 종마)같은 초기 한국의 자동차들 이름과 비교해도, 지명을 딴 이름인 싼타페(Santafe), 베라크루즈(Veracruz)등 최근 자동차들과 비교해도 코란도란 이름은 꽤나 거창한 뜻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자동차 이름에 '한국인은 할 수 있다'는 비장한 의미를 부여한 배경이 뭘까? 그 이유는 코란도 탄생과 관련이 있다.
코란도는 1982년 9월 24일 전 세계 938개 업체가 참여한 ‘서울 국제 무역 박람회’에서 첫 국산 4WD 차량으로 소개되었다. 그 이후 무려 2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판매를 이어가고 있는 코란도는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된 국내 최장수 자동차 모델로서, 이 역사적 모델의 태동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프(Jeep)로 알려진 미국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사와 한국 기업의 합작투자로 신진 지프 자동차 공업이 설립된다.
AMC는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고 신진 지프는 조립과 판매를 책임지는 방식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 사는 분쟁에 휘말렸다.
AMC가 판매를 금지한 이란 시장에 신진이 지프를 수출한 게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AMC는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홀로 남겨진 신진은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4WD 차량의 독자 개발에 성공한다면 홀로 설 수 있었지만, 실패할 경우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내 몰린 것이다.
당시 신진 자동차는 ‘할 수 있다’에 올인 했다.
1981년 3월 사명을 (주)거화로 바꾸고 분위기를 쇄신한 신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4WD 차량의 독자 개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자신들의 강한 의지를 담아 코란도란 비장한 모델명을 지은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코란도는 출시 8년 만인 1990년 키프러스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다시 그로부터 9년 후인 1999년 아르헨티나 팜파스 랠리, 멕시코 바하랠리에서도 우승을 거둬 품질과 안정성 면에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대업을 이뤘다.
하지만 코란도를 탄생시킨 의지의 한국인들 (주)거화는 재정악화로 인해 1986년 11월 쌍용그룹에 인수되며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회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꿈인 코란도는 남아서 아직도 이 땅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스티븐 잡스가 타계한 후 IT 업계에선 애플에 대한 우려가 일어났다.
애플이 방향을 잃고 표류할 것이라고도 했고, 이제 더 이상 iPod, iPhone, iPad 같은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란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친 일화처럼 깜짝 놀랄 얘기들이 들려왔다. 죽음을 예견한 잡스가 자신의 사후 2016년까지 애플의 신제품 로드맵을 완성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도 흔들리지 말고, 신제품 개발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는 말도 들렸다. 그의 넓고 깊은 통찰력, 한 그루 해송(海松)처럼 담담히 죽음을 맞이한 그의 의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세상을 변화시킨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한다. 하나가 아담의 사과(성경적으로는 선악과)였고, 두 번째가 뉴턴의 사과였으며, 그 마지막이 스티븐 잡스의 사과(Apple, 애플)다.
스티브 잡스와 사과는 연관성이 많다. 그가 설립한 회사인 애플(Apple)의 이름은 평소 자신이 즐겨 찾던 장소이자 집 주변에 많았던 사과 농장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이뿐 아니라 애플사가 내놓은 여러 퍼스널 컴퓨터들 중 현재도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 같은 전문가들에게 사랑받는 모델로 일명 '맥'이라 불리는 매킨토시(Macintosh)가 있다. 이 모델명도 알고 보면 사과에서 비롯되었다.
사과 품종 매킨토시(Mcintosh), 애플의 PC 매킨토시(Macintosh)
철자 하나만 틀릴 뿐 발음은 같은 매킨토시(Mctintosh)라는 사과 품종이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가 원산지로 단단하고 향이 강한 품종이다.
PC 사업에서 IBM에게 크게 밀리던 애플은 1984년 획기적 GUI를 탑재한 신제품 PC를 출시하면서 매킨토시(Macintosh)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신제품이 매킨토시 사과 품종처럼 강하면서도 고객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매력적인 향을 발산해 주길 기대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사과’라는 회사에서 내놓은 야심찬 신제품 이름이 ‘국광’인 셈이니, 스티븐을 포함한 애플 임직원들은 꽤나 재밌는 작명가였던 것 같다.
츄파춥스(Chupa Chups)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무심결에 츄파 춥스 하나를 집어 들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단순한 막대 사탕 하나가 어떻게 세계적 브랜드가 됐을까?' 츄파 춥스의 성장 배경엔 아이들이 먹는 사탕에 막대를 달겠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와 부르기 쉬운 브랜드 효과가 숨어있다.
스페인 회사 츄파 춥스의 설립자인 엔릭 버넷은 어머니에게서 제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손으로 사탕을 먹다보니 손이 끈적끈적해지고 그래서 자주 혼나곤 했던 그는 아이들이 먹기 편하게 사탕에 나무 막대를 붙인 제품을 생각해 낸 것이다. 부르기 쉽고 외우기 편한 이름을 찾던 그는 심플하게 '빨다'를 뜻하는 스페인어 Chupar를 상품명으로 채용했다.
츄파 춥스가 나오기 전에 사탕은 아이들이 먹는 제품이면서도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곤 했다. 아이들이 몰래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돈 내는 사람은 부모니 부모의 눈높이에 맞춰 상품을 진열했던 것이다.
'빨아먹자' 식의 재밌는 이름을 가진 츄파 춥스는 다른 전략을 펼쳤다. 막대 사탕의 위치를 아이들 손이 닿는 계산대 옆으로 옮겼고 빼기 편하게 유리 그릇대신 반원 모양의 전시대에 꽂아서 판매했다.
사탕 포장지 디자인은 유명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의뢰해서 제작했고, 이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츄파 춥스 금연 캠페인인 “피지 말고 빠세요(Stop smoking, start sucking)” 를 시작해서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들도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살바도르 달리가 한 시간 만에 그려낸 추파 춥스의 로고)
'빨다'라는 동사를 제품명, 슬로건, 회사명으로 일관되게 사용한 츄파 춥스는 2003년 기준으로 전 세계 40억 명이 넘는 사람들 입에 사탕을 물린 대기록을 세웠다.
1958년 회사 설립 이후 현재까지 회사의 주인도, 국적도 모두 바뀌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사탕을 물리겠다'는 심플하지만 원대한 목표다.
샤넬 넘버 5는 샤넬 패션의 종결자이자 디자이너 향수의 효시다.
샤넬이 여성복 패션에서 눈을 돌려 향수를 개발하려고 했을 때 가장 단순하게 접근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여러 향수 샘플들을 세워놓고 각각의 향을 맡던 그녀는 다섯 번째 샘플에서 자신이 찾던 복합적이면서 다양한 향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다섯 번 째 샘플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이름도 정했다.
지금은 상당히 세련되게 들리는 샤넬 넘버 5는 사실 Channel chosen Number 5 (샤넬이 5번째 샘플을 선택했다)는 단순한 의미의 단어들을 나열한 모델명이다.
마케터들이 그런 단순한 이름으로는 향수업계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샤넬은 심플한 모델명을 고수했고 결국 이 향수는 세계적 초대박으로 샤넬의 명성이 어쩌다가 얻은 게 아니란 것을 증명했다.
리복 인큐버스(Incubus)
우리나라 말에 ‘귀접’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잠을 자는 동안 귀신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인터넷에 '귀접'이란 단어를 치면 실제로 이 현상을 겪어본 사람들의 글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대개 ‘귀접’을 경험한 사람들은 거부할 수 없는 쾌감에 매일 밤 그 존재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고, 결국 빙의되어(귀신이 씌어) 큰 화를 당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무속 인들은 ‘귀접’ 현상을 처음 겪었을 때 대처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 귀접한 귀신은 자신을 원하는 사람을 계속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런 뜻을 가진 귀접과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 리복(ReeBok)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을까?
1995년 리복에서 인큐버스(Incubus)라는 신상품을 출시했다.
여성용 조깅화로 한국에서도 순조로운 판매를 개시했다. 스타일 좋은 리복의 신상으로 젊은 여성들 에게 인기를 끌었었다.
시장이 뒤집어 진 건 ‘인큐버스’라는 단어의 뜻이 대중에 알려지면서 부터인데, 인큐버스(Incubus)는 젊은 여성들이 자는 동안 그들을 찾아와 귀접하는 남자 귀신을 뜻하는 영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강간하는 남자 귀신’으로 해석되겠다.
세련된 운동복을 챙겨 입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심을 달리는 젊은 아가씨들의 조깅 화에 저 따위 상표를 붙였으니 난리가 안 나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름을 지은 작명가는 이 일로 치약뚜껑에 머리를 박았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리복은 문제가 불거지자 신발에서 인큐버스 상표명을 즉시 제거했고, 이후 해당 모델의 판매도 중단했다.
마케팅 작명가의 단순 실수였는지,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의 일환으로 알면서도 지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리복의 명성에 먹칠을 한 사고였다.
이름 하나 잘못 지었다가 대 망신을 당한 대표적 케이스가 되었는데, 이 사건 이후 창의적인 마케팅 기법을 몰라주는 시장이 서운했던지, 리복은 최근 신고 다니기만 해도 근육을 키워준다는 또 다른 혁신적인 광고를 시작해 허위과장 광고로 환불에만 300억을 쏟아 썼다.
참기름을 발라서 숯불에 구운 김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반찬이다.
인천공항 면세점에 가보면 맛있다고 소문난 한국산 김을 사가는 중국인, 일본인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고, 심지어 유럽인도 사다주면 맥주 안주로 맛있게 먹곤 한다.
그러면 김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김이 모락모락 난다고 김인가?
조선 시대 인조의 밥상에 네모난 검은색 종이가 진상품으로 올라왔다.
처음 본 이것을 맛있게 먹고 난 임금이 신하들에게 이 별미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신하 중에 한 사람이 이 음식은 아직 이름이 없고 김 아무개라는 전라도 사람이 처음 만들어 진상한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자 인조 왕이 "이름이 없는 물건이라면 이것을 만든 자의 이름을 따서 앞으로 ‘김’이라고 부르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이 음식은 김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해산물에 대해 나온 ‘김’에 내가 사는 곳이 섬인지라 다양한 생선 이름의 유래도 살펴보았다.
생선 이름의 유래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도 있고 생김새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다.
고려 인종 때의 권신인 이자겸은 셋째와 넷째 딸을 연이어 왕에게 시집보내 세도정치를 하다가 욕심이 과해 자신이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지금의 영광 땅인 정주로 귀양살이를 갔다. 마침 그때 그곳에서 굴비가 너무 많이 잡히자 이를 두고두고 먹을 궁리를 하다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말려 보관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런데 그 맛이 기막히게 좋은걸 보고 이자겸이 무슨 맘을 먹었는지 원수인 임금에게 마른 조기를 진상하였다. 그리고는 ‘정주굴비’(靜州屈非)라는 네 글자를 써서 보냈는데 그게 바로 굴비란 이름의 시초가 되었다. 즉, 정주굴비는 ‘비록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지만 결코 굴하거나 꺾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도 고려 인종은 정주굴비를 진상품목에 추가시킨걸 보면 그 기막힌 맛은 이자겸은 물론 왕의 입까지도 굴(屈 굽을 굴)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고기지만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은 생고기는 조기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또 다른 한국인의 입맛을 돋우는 물고기로 명태가 있다.
함경도 관찰사가 부임해서 명천군을 방문하여 명태 요리를 처음 먹고는 맛이 좋아 이름을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지 못했다. 그러자 이렇게 최상의 맛을 가진 고기에 이름이 없는 게 안타까왔던 관찰사는 즉석에서 이름을 지었다.
명천군의 명(明)자와 관찰사에게 명태를 바쳤던 어부 태(太)씨의 이름을 따서 명태라 하였는데 어부 태씨는 졸지에 자기 성이 대대손손 불려지는 영광을 얻은 셈이다. 그리고 명태에게도 또 다른 이름들이 있는데 건조하면 북어, 반 건조하면 코다리, 얼리면 동태, 얼렸다가 녹여서 누렇게 말리면 황태라고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갓 잡으면 생태, 말린 새끼는 노가리다. 아무튼 동태 눈깔이 처럼 흐릿한 내 머리로는 이 녀석의 이름을 다 외우는 건 포기해야겠다.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애용하던 목로주점의 소주 안주 감으로 명성을 날린 정신없이 지어진 이름의 물고기 도로묵도 있다.
임진왜란 때에 피난을 가던 선조에게 어떤 이가 생선을 선물했는데 그건 당시에 묵이라고 불리던 물고기였다. 그런데 피난 중이라 엄청 배가 꼻은 선조가 이걸 먹고는 너무 맛이 좋아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임금이 이름을 하사하는데 본시 이름이 무슨 상관이며, 당자이지만 잠을 자면서도 눈깔을 부릅떴어도 까막눈인 물고기와도 상관이 없으니 그의 이름은 당연히 은어가 되었고 조선의 백성들은 이제 무조건 은어라고 불러야만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궁궐로 돌아온 선조가 피난 시절 너무도 맛있었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게 되었는데 그때 그 맛이 영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처럼 배가 꼻지 않았기 때문에 맛이라곤 대가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 물고기의 이름은 다시 “이제부터 이 ‘은어’를 도로 ‘묵’이라고 하라”는 어명으로 순식간에 자기 이름자도 모르는 본인(어)과 상관없이 '묵'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임금의 명은 실수라도 지엄한지라 '묵'이라 하지 않고 '도로묵'이라 하여 충성심 대단한 조선의 온 백성들은 이후로 '도루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 후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을 쓰는 유래가 되기도 했다.
이제 이생(異生)으로 건너간 이름에 대해 알아보자.
불교에서는 중생이 생전에 쌓은 업에 따라 여섯 종류의 다른 이생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한다. 그 여섯은 천상도, 아수라도, 인간도, 축생도, 지옥도, 아귀도인데, 그 중에 아귀도는 살아서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가 아귀가 되어 떨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아귀가 된 악인은 굶주림의 형벌을 받아 입이 크고 흉하지만, 그 큰 입으로 아무리 음식을 먹으려해도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작아서 늘 굶주림에 시달린다 한다. 이 처럼 몸은 넓적하고 가뜩이나 머리가 큰데 입이 그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餓鬼)로 불려지는 물고기가 있다. 하지만 이건 오해다. 실제의 아귀는 위장을 몇배로 팽창시킬 수가 있어서 자신의 몸 만한 물고기도 삼켜버린다. 그래서 큰 아귀 한 마리를 잡으면 그 위장 속에는 다른 물고기를 여러 마리 얻을 수 있는 횡재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의 물고기 이름을 더 살펴보겠다.아가미 근처에 침을 놓은 듯한 구멍이 있는 꽁치는 구멍 공(孔)에 물고기를 뜻하는 '치'가 붙었다가 꽁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갈치는 몸이 길쭉하여 비늘이 없고 은백색의 광택이 나며 그 모양이 칼처럼 생겼다 해서 신라시대에 ‘칼’을 ‘갈’이라고 불려진데서 붙여진 이름이 갈치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또 등이 부풀어 오른 물고기란 뜻의 고등어(皐登魚)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푸른 무늬를 가진 물고기'라는 뜻의 벽문어(碧紋魚)라고도 했는데, 일본에서는 고기 어(魚)변에 푸를 청(靑)이 붙은 글자로 '사바(鯖)'라고 하여 역시 푸른 물고기란 뜻을 담았다. 그리고 뇌물을 주고 잘 보이려 할 때 ‘사바사바’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의 고등어란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사람들이 이권문제를 두고 사람을 찾아갈 때 고등어 두 마리를 싸가지고 갔던데서 유래 하였고 한다.
조선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구역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으로도 불리고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팔도는 현재에도 행정구역상 명칭으로 사용되는 각 도(道)로서 그 이름은 오래된 역사와는 달리 아주 심플하게 지어졌다.
경기도(京畿道)는 경성(京城)과 근처 기(畿)를 합친 명칭으로 서울 근방 500리 이내를 칭한다,
강원도(江原道)는 강릉 + 원주를 합친 명칭이다.(관동이라고도 하며, 영동은 영동 방언을 영서는 경기 방언을 원주는 강원도 방언을 쓴다.)
경상도(慶尙道)는 경주 + 상주를 합친 것으로(영남이라고도 하며, 동남 방언을 쓴다.)
전라도(全羅道)는 전주 + 나주를 합친 것으로(호남이라고도 하며 전라 방언을 쓴다.)
충청도(忠淸道)는 충주 + 청주를 합친 것으로(호서라고도 하며 충청 방언을 쓴다.)
평안도(平安道)는 평양 + 안주를 합친 것으로(관서라고도 하며 서북 방언을 쓴다.)
함경도(咸鏡道)는 함흥 + 경성을 합친 것으로(관북이라고도 하며 함경도 방언을 쓴다.)
황해도(黃海道)는 황주 + 해주를 합친 것으로(해서라고도 하며 황해도 방언을 쓴다.)
그리고 조선 태조가 정도전(鄭道傳)에게 지역별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묻자, 조선 8도의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4글자로 평가한 4자평(四字評)을 했는데, 경기도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미인과 같다하여 경중미인(鏡中美人), 충청도 사람들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 같은 품성을 지녔다하여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 사람들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가는 버드나무와 같다하여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 사람들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가 특징이라 하여 송죽대절(松竹大節), 강원도 사람들은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와 같은 품성을 지녔다하여, 암하노불(岩下老佛), 황해도 사람들은 봄 물결에 돌을 던진 것과 같다하여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 사람들은 산 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와 같다하여 산림맹호(山林猛虎), 마지막으로 함경도 사람들은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처럼 악착같다하여 이전투구라고 했다.
이와 같은 말을 들은 함경도 출신의 태조는 함경도 인의 기질이 이전투구라는 말을 듣고 안색이 붉어졌다. 그러자 정도전은 다시 왕의 비위에 맞춰 함경도는 돌밭을 가는 소와 같은 우직한 품성도 지니고 있다는 석전경우(石田耕牛)라는 4자평을 더하여 태조의 기분을 누그러 뜨렸다. 이 4자평은 이름의 또 다른 이름인 별명과 같은데 이를 보면 이름만 잘 지어야 되는 게 아니라 별명도 잘 지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만일 태조의 심기를 불편케 한 ‘이전투구’ 대신에 ‘석전경우’라는 기지를 발휘한 추가 별명을 말하지 않았다면 정도전의 목숨이 까마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별명도 당사자를 생각지 않고 보이는 특질대로 쉽게 짓는데, 이런 데서도 배려심을 가져야 되겠다.
누구든 자신의 마음 안에선 왕이지 않은가? 그 왕국 안에선 내 목숨이 위태로울 걸 생각해야겠다.
이렇게 논하다 보니 이름도, 그리고 이름의 또 다른 이름인 별명도 잘 지어야겠다.
거의 이름 하나로 성공하거나 낭패를 당한 예가 많은 걸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