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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공원에서
-공군창군 70주년, 공군사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김 영 욱(대한민국 공군역사자문위원)
올해는 공군창군空軍創軍(1949년 10월 1일) 70주년이면서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1949넌6월 1일) 개교 70주년이다.
공군창군 간부 7인의 한 분이었던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공사 교장으로 6 · 25전쟁 때 피란지避亂地 제주도 모슬포墓瑟浦 대정초등학교大靜 初等學校(재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일부 교사校舍를 공군사관학교 캠퍼스로 쓰다가 1951넌 5월에 경남 진해 캠퍼스로 옮긴 후 공사의 교육이념敎育理念과 사관생도 훈육지침 訓育指針을 재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교가校歌의 노랫말을 짓고 이어서 공사십훈 空士十訓을 재정했다.
우리는 하늘을 배우는 젊은이
높고 빛나는 한배님 정신 이어받아서
누리에 떨치고자 하늘로 솟나니
우리 영혼의 기지 공군사관학교
하늘은 우리의 일터요 싸움터
하늘에 살면서 하늘에 목숨을 바친다
우리는 하늘을 배우는 젊은이
높고 참다운 군대의 정신 새로 이룩해
나라를 지키는 힘 하늘로 달린다
우리들 충성의 원천 공군사관학교
하늘은 우리의 일터요 싸움터
하늘에 살면서 하늘에 목숨을 바친다
공사 교가이다. 노랫말에서 알다시피 공사 사관생도는 졸업 후 소위로 임관되면 배달의 아들로 하늘을 일터로 싸움터 삼아 하늘에 살면서 하늘 에 목숨을 바질 각오로 산다. 현재 청주 공군사관학교에는
용의단정容儀端正하라
청렴결백淸廉潔白하라
성심복종誠心服從하라
책임완수責任完遂하라
신의일관信義一貫하라
공평무사公平無私하라
침착과감沈着果敗하라
신상필벌信賞必罰하라
솔선수범率先垂範하라
은위검비恩威兼備하라
고 새긴 ‘공사십훈탑空士十訓塔’이 있다. 공군의 간성干城인 공군 장교가 되고 조종사의 길을 걷는 동안 공사십훈을 꼭 실천해야 한다.
지금은 공군사관학교가 청주淸州에 있지만, 그 이전에 서울에 있었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대규모의 ‘보라매공원은 공군사관학교의 터다 보라매는 공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새다. 그래서 보라매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공군사관학교가 옮겨가고 조성造成된 보라매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자연과 문화의 공간’으로 에어파크, 잔디광장, 인라인스케이트장, 테니스장, 인조잔디축구장, 농촌 체험장, 청소년수련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공군사관학교의 상징象徵 보라매의 매는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323 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매는 굶어 죽을지라도 이삭은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훌륭한 사람은 아무리 곤궁困窮하여도 탐욕貧慈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매가 아무리 먹이가 없어 굶어 죽을지라도 게걸스러운 까마귀처럼 짐승의 죽은 시체를 파먹지 않는다는 말이고, 깝쭉대는 참새처럼 아무렇게나 논밭에 내려서 벼이삭이나 보리이삭 등의 곡물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의正義로운 사람은 아무리 죽을 지경으로 어려워도 부정한 돈을 받지 않으며 당장 입에 풀질할 땟거리가 없을 정도로 빈곤貧困하더라도 자신이 품은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뜻의 속담을 '꿩 잡는 것이 매다’라고 한다. 승리는 수단이 정정당당正正堂堂해야 한다 승리를 위한다고 수단을 비열하게 쓰면 안 되는 거다. 대한민국 공군은 적이 우리나라 영공領空을 침범侵犯 또는 침공侵攻해 온다면 정정 당당히 맞서 싸우는 보라매들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보라매공원의 서문西門에는 정무대星武臺’라고 쓴 탑이 있다. 그 탑 앞면에 새겨진
부귀와 영화에 눈을 둘소냐
드높고 푸르른 하늘에 진다
부귀와 영화에 눈을 둘소냐
세계를 품고 나르는 의지
영겁을 지나 찬연하리라
청춘의 순결을 한데 모아서
성무대 언덕에 치솟는 불길
보라 어둡고 혼미한 세상이
의연히 선 불사조의 모습이
라는 〈헌시獻詩〉는 보라매들인 사관생도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고 탑의 뒷면에 부착된 동판銅版에는 ‘이곳은 1958년부터 1985년까지 공군사관학교가 주둔駐屯하였던 곳이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뜨거운 염원念願과 의지意志를 상징象徵하여 공군사관생도들의 성금으로 1962년에 세웠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 위하여 새 기지로 옮겨가며 보라매의 꿈을 기르던 이곳에 이 탑塔을 남겨두고 떠나간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여 하늘을 지키려는 우리의 굳은 뜻을 기억記憶하고 조국의 번영 繁榮을 기원하자’라고 1985년 12월 10일에 쓴 글이다.
그 글에서 ‘새 기지로 옮겨가며 보라매의 꿈을 기르던 이곳 이 탑을 남 겨두고 떠나간다’에서 보라매의 꿈을 기르던 이곳이 보라매공원으로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보라매처럼 용맹勇猛을 기르며 마음을 수양修養하고 몸을 수련修鍊했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 보라매공원이 도심 속이나 마찬가지만 1960년대만 해도 이곳은 한적한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밤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은 낭만적浪漫的이었다.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
아침 이슬이 내릴 때까지
별이 지면 꿈도 지고 슬픔만 남아요 창가에 피는 별들의 미소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겨울 눈 내리던 창가에 앉아서 단둘이 나눈 영원한 약속
잊을 수가 없어요
1960년대에 나온 노래로 포크송(통기타음악)이다. 그 무렵 대학캠퍼스에서 청년문화靑年文化가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른바 '청년문화 靑年文化’로 상징되는, 청바지에 맥주를 마시며, 통기타 반주에 포크송을 부르며 젊음을 발산發散했다. 그 당시에 공군사관학교 어느 사관생도는 외출 때마다 사귀던 연인을 만나면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만을 불러주면서 ‘나는 꼭 별이 될 거야!’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진짜 별이 되었다.
그 사관생도는 공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장교가 되었다. 그 후부터 ‘공사십훈空士十訓'를 원칙으로 삼고 복무를 충실히 했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라고 쭉쭉빵빵 거칠 것 없이 진급해서 별이 된 거다. 즉 어깨의 견장眉章에 별 하나를 달았다. 별 하나면 계급으로 '준장淮將’이라 하고 높여서 ‘장군’이라고 불러준다. 남편이 장군이라면 사회적社會的으로 부인도 장군 대접을 받게 된다. 그 어느 사관생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저 별은 나의 별이고, 저 별은 너의 별이라’는 꿈을 이루어 내었고 더불어 연인도 장군 대접을 받는 귀부인貴夫人이 되었다.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도
다 쉬어 넘는 고봉高峯 장성령 고개
그 넘어 임이 왔다 하면, 나는 한 번도 아니 쉬어 넘으리라
누가 쓴 시조時調인지는 몰라도 얼마나 그리운 임이기에 바람, 구름, 매들도 쉬어가는 높은 장성령長城嶺 고개지만 사랑하는 임이 온다면 단숨에 넘어가겠다는 내용이다. 시조에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가 나오는데, 매는 예부터 기상과 용맹을 상징하는 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戀(1741-1793)가 지은 《한죽당섭필寒 竹堂涉筆》에 보라매에 대해 매 중에 그 해에 난 놈을 잡아 길들인 것을 보라매라 한다. 보라는 우리말인데, 담홍색淡紅色으로 그 빛깔이 옅은 것을 말한다. 산에 여러 해 있던 것은 산진山陣이라 하고, 새끼 때부터 집에 있던 것을 수진手陳이라 한다. 매 중에 가장 뛰어나고 깃이 흰 것을 송골매라 한다. 깃이 푸른 것은 '해동청海東靑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해동청은 고려 시대 우리나라의 사냥용 매를 중국으로 수출한데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에 꿩이나 산토끼 사냥에 사람의 손으로 기른 매를 이용했는데 알에서 까고 나온 한 살배기 매를 길들인 것을 보라매, 산에서 다 큰 놈을 잡아와서 길들인 것을 산진이, 새끼 때부터 길들인 것을 수진이라고 했 다. 송골매는 깃털이 희고 가장 뛰어나다고 이덕무는 그랬지만, 푸른빛이 감도는 해동청 보라매를 으뜸으로 쳤다. 그러니까 매를 언재 잡아서 길들이냐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고 사냥할 때 그 사나운 성질性質이 다르다. 사나운 성질이야 당연히 알에서 까고 나온 한 살배기 매를 기른 보라매다.
타고난 매의 성질 뉘 멈추리오
만리萬里라 바람 구름에 굳센 깃을 가다듬는구나
맡은 직분 상구與鳩의 사구司宜였고
교활한 토끼 피 비린내 먹는 생각뿐이구나
깍지 중에 묶였다가 추호秋臺를 언뜻 보고
하늘로 솟구치니 눈빛 날개 재빠르구나
배고프면 곁에 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니
타고난 매의 성질 뉘 멈추리오
拘爪鐵嘴目如星구조철취목여성
萬里風雲刷勁翎만리풍운쇄경령
職名爽鳩司寇氏직명상구사구씨
心思狡兎映臊腥심사교토담조성
韝中羈蟄秋毫瞥구중기칩추호별
天上飄揚雪羽逕천상표양설우경
飢則附人飽則去기죽부인포죽거
物之常性孰能停물지상성숙능정
조선시대 후기 학자 조언유趙彦儒(1767-1847)의 〈호응豪鷹〉이라는 시다 매의 발톱은 갈고리처럼 날가롭고, 부리는 무쇠처럼 굳세고, 눈동자는 별빛처럼 반짝이고 자태姿態는 만리풍운萬里風雲에 굳센 깃을 가다듬는 늠름한 모습을 표현하고 였다. 상구爽鳩는 중국 고대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사구司冠였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사구는 고대 중국에서 경질警察과 형별刑罰을 맡아보던 벼슬이다. 그런데 매의 특별한 이름이‘사구司冠’ 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는 교횔才交猪한 토끼를 잡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발목에 묶어있는 깍지를 풀어 놓으면 하늘 위로 재빨리 힘차게 오르는 용맹성勇猛性과 배고프면 사람의 말을 고분고분 듣다가도 배가 부르면 날아가는 성질을 읊은 시다.
그런데 보라매는 먼저 말했듯이 산진이와 수진이와는 달리 알에서 까고 나왔을 때 붙잡아 와서 길렀기 때문에 그만치 사람과 친숙親熟하여 말을 잘 듣고 사냥도 잘하고 배가 불러도 주인을 떠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라매를 으뜸으로 친다. 그러니 공군사관학교의 상징 보라매는 용맹성勇猛性과 충성심忠誠心의 상징이기도 하다.
보라매공원 안에서도 ‘에어파크Air park 라고 따로 구역을 정하여 ‘공군사관학교 대방동캠퍼스’ 라는 비碑를 설치하였는데 비문碑文에는
대한민국 공군의 정예 장교를
양성하는 공군사관학교는
1949년 6월 10일 1기 사관생도 입교를 시작으로
미래를 향한 웅비雄飛의 나래를 펴게 되었다.
이곳 서울 대방동캠퍼스는 1958년 12월에
진해캠퍼스에서 이전하여 27년 동안 성무인星武人들의
숱한 추억이 깃든 보금자리로서
7기생부터 37기생까지 수학修學하였고
1985년 12월에 충북 청원캠퍼스로 이전하기까지
총 28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배우고 익혀서 몸과 마음을 조국의 하늘에 바친다’는
교훈 아래 영공 수호의 주역인 보라매들의 꿈을 키우던
이곳에 공군사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그 자취를 남긴다
고 새겨져 있다. 1949년은 뜻 깊은 해였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국이 한국 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한 해는 1949넌 1월 1일이다. 그 해 1월 4일, 김포에서 항공사관학교航空士官學校가 창설되어 6월 10일, 1기 사관생도가 입학하였다. 공군이 육군에서 독립하여 10월 1일 공군이 창군創軍하면서 항공사관학교를 공군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불과 9개월도 안되었을 때 6월 25일, 비극의 6 · 25 전쟁이 발발했다.
비가 내린 일요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人民軍의 전면 공격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인민군 7개 사단은 삼팔선三八線에 집결되어 있었다. 상부의 공격 지령指令이 떨어지자 적 보병步兵은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철원鐵原, 의정부議政府를 지나고 서울과 인천仁川을 잇는 경인가도京仁街道를 따라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북한 인민군들이 남침南侵을 한 줄 몰랐다.
서울 시민들은 그저 삼팔선三八線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티격태격하다가 좀 규모가 큰 교전交戰을 하는 줄 생각하였으나,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란민避亂民을 보고 하나 둘씩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피란 짐을 꾸린 서울 시민들도 피난민 행렬에 휩싸여 한강을 건너서 수원水原에 이르게 되었다. 수원역에서는 북쪽으로 철길이 끊기고 남쪽으로 향하는 화물열차貨物列車 꼭대기라도 올라타고 피란 가려는 피란민들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다. 우리 국군은 전쟁준비를 단단히 해 온 북한 인민군을 막아낼 수 없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는 숨지었노라
그대는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너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1910-1990)이 지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이다 모윤숙은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미군美軍이 우리나라를 구하려 곧 올 테니 안심安心하라’ 고 시민들에게 외치댔지만 탱크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손아귀에 넣게 되자. 지식인知識人 여성으로 살아 온 마흔한 살의 모윤숙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보따리를 인 시골 아낙네로 행색을 바꾸고 경기도 광주의 한 초가집으로 숨어들어 식모 살이룰 하면서 지내야 했다. 그때 북한 인민군에 쓰러지는 국군을 보며 쓴 시다.
필자는 휴전하던 해에 태어난 ‘휴전동이’라서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전쟁은 정말 비극悲劇이다. 스물다섯 살 나이로 쓰러진 국군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6 · 25전쟁은 누구 할 것 없이 상처를 주였다. 쓰라린 상처 속에서 한恨 맺힌 노래도 저절로 나왔다. 전쟁이 터진 이튿날이었단다. 작사가 반야월半夜月(1917-2012)은 경북 김천 처갓집으로 혼자 피난 간 뒤였다.
그의 부인이 미아리彌阿里가 인민군의 손에 들어가자 수유리水諭里 집 에서 다섯 살의 어린 딸 수라를 데리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만 전쟁 통에 딸이 잘 먹지 못하고 굶어 있었던 터라 대포소리, 총소리가 요란해 지자 공포恐怖에 질리고 무서워 별별 떨다가 미아리 고개를 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9월 28일, 서울이 수복收復되자 부인에게서 딸의 죽음을 전해들은 반야월은 혼자 피란 간 것을 크게 뉘우치며 통곡痛英해야만 했다. 그래서 반야월은 뒷날 어린 딸을 생각하면서 그때의 비통悲痛한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 그게 1956넌에 이재호李在鎬가 곡曲을 붙이고 이해연李海燕이 노래를 불러 우리나라 가요계歌諦界를 잡고 흔들었던 〈단장의 미아리고개〉이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메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반야월이 창자가 끊어지듯 아픈 마음으로 노랫말을 지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1절과 2절 사이에 가수 이해연 자신이 갸날픈 음성으로 ‘여보! 당신은 지금 어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 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셔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셔요/ 네 여보 여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노래보다도 더창자가 끊어지듯 가슴이 아프고 콧등이 찡하여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미아리고개는 6. 2 5 전쟁 때 북녘 땅으로 오가는 유일한 신작로新作路다. 자동차 두 대가 비켜 가기가 버거웠던 길이었다. 우리 국군이 북한 인민군을 막던 방어망防禦網이 힘없이 뚫리면서 인민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占領했다. 그런데 서울이 점령되던 그 날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피란길에 오른 시민들이 다리 위 상판上板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의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서울 시민들은 인공치하人共治下에 시달려야 했다.
여하튼 인공치하의 서울의 시민들은 세 달 동안의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숨막히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북한 인민군이 후퇴 할 때는 임정요인,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 문인 등 수 많은 인사人士 들을 밧줄과 철사줄로 꽁꽁 묶어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녘으로 끌고 갔다.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런 아픔을 나타낸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 아픔은 공군사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김포에서 수원으로 이동한 공군사관학교는 대전, 대구로 옮겨야 했고 1951넌 1월 25일에 재주도 서귀포시 모슬포기지墓瑟浦基地로 옮겨가서 대정초등학교에 약 3개월 동안 주둔했다가 같은 해 5월 1일, 경상남도 진해기지鎭海基地로 옮겼다.
공군사관학교가 진해에 있을 때 당시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은 씨움에서는 용맹해야 한다는 뜻으로 친히 ‘무용武勇’이라고 붓글씨를 써서 준 것을 교훈校訓으로 삼았다. 1953넌 7월 27일 휴전休戰이 된 이듬해인 1954넌 5월에 4년제 교육과정을 시행했고, 1956년 4월에 제4기 사관생도부터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주었다. 그리고 1958년 12월에 이곳 보라매공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1966넌 4월 11일, 당시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를 '성무대星武臺’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래서 공군사관학교 생도 들이나 졸업생을 '성무인星武人’이라고 부른다. 성무星武의 별'성星'자 는 ‘하늘의 지도자’를 뜻하고 성무星武의 ‘무武’ 자는 무예武藝로 ‘단련한다 는 뜻이다. 그러니, 성무는 공군사관학교의 교육인 지智, 덕德, 용勇을 겸비한 우수한 하늘의 지휘관을 길러낸다는 뜻이다. 보라매공원 서문의 ‘성무대’라고 쓴 탑의 뜻이다. 성무대는 ‘성무인을 길러내는 집’의 뜻이니, 공군사관학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무의 ‘무武' 자는 글자의 뜻이 매우 깊다. 무武는 ‘전쟁戰爭 을 멈추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이기도 하다. 무武 자는 멈춘다는 ‘지正' 자와 창이라는 ‘과戈'자를 합한 글자다. 그러니, 창을 멈춘다는 말은 전쟁을 멈추게 한다는 말이고, 전쟁을 멈추면 평화平和가 된다는 말이고, 전쟁을 멈추게 되면 평화를 지켜야하니, 결국 ‘무武'는 ‘전쟁을 멈추게 하고 평화를 수호守護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현대의 군사적軍事的인 말로 표현하면 무武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 억제개념戰爭仰制槪念’이라고 하겠다. 전쟁억제개념이라고 해서 너무 어려워할 것 없다. 아주 옛날부터 그런 개념이 있었단다.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不戰而屈 人之兵부전이굴 인지병
善之善者也선지선자야
백 번 싸워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군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재나라 사람으로 병법에 대한 책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지은 손자孫子가 한 말이다. 전쟁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일이다. 그래서 손자는 섣불리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전쟁을 해서 만일 이긴다 해도 나라에 많은 피해가 발생해 좋을 리 없기 때문에 전쟁을 억재해야 된다. 그러나 전쟁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필승의 뜻이 ‘무武’에 담겨있기도 하다. 그래서 손자는 '병귀승兵貴勝'을 힘차게 말했다. 즉 ‘전쟁은 이기는 것이 좋다 ’
보라매공원 에어파크에는 훈련기, 통제기, 수송기, 전투기, 헬기 등 여러 임무를 수행하는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눈여겨볼 비행기는 6 · 25 전쟁 당시 맹활약을 했던 F-86F 세이버 전투기다.
F-86F 전투기는 미국 노스아메리컨(North American) 항공사에서 생산한 미국 최초의 후퇴익後退翼 제트엔진 전투기로 애칭愛稱 또는 별명別名이 세이버(Saber)다. 기병검奇兵劍이라는 뜻이다. 6 · 25전쟁 당시 미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서 적기敵機 미그-15 전투기와 공중전이 별어졌을 때 미그기를 꼼짝 못하게 주도권을 잡고 격추시켜 그 이름을 드높였다. 그래서 F-86F 전투기는 ‘미그 15를 잡는 킬러(Killer)’로 알려졌다. 공중전 에서 F-86F가 재공권制空權을 장악함으로서 북한 인민군의 위력은 현저 하게 꺾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공군은 F-86F 전투기를 1955년 공군현대화계획에 따라 6 · 25전쟁 때 맹활약했던 F-51D 무스탕 전투기의 대체 기종機種으로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 최초로 도입되었다. 1966넌 F-5A 초음속 전투기 도입 때까지 공군의 주력기主力機로 쓰이다가 1990년에 퇴역退役했다. 잊지 못할 일은 1967년 4월 11일, 서해 덕적도 대간첩작전對間諜作戰에서 50톤급 무장 간첩선을 격침시기는 전공을 세웠다.
1952년 전쟁이 한창일 때 북한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소련의 최신예 最新銃 제트엔진 전투기 미그-15는 미 공군의 F-86F와 라이벌이었지만 적수敵手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F-86F 전두기를 '쌕쌕이'라고 불렀다.
F-86F 전투기가 지나갈 때 '쐐악’ 또는 '쐐아-악'하고 고막이 찢어 질 정도로 굉음蟲音을 내고 날아가니, '쌕쌕이’라고 불렸던거다. 꼭 F-86F 전투기만 쌕쌕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다른 제트기들이 날아갈 때도'쐐악'하고 날아가니, 쌕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가 여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세계 지리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와 오스트리아Austria를 구분하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6 · 25전쟁 때 참전을 하고 제트전투기도 파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부인令夫人의 고향故鄕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위나라’인 한국을 돕기 위해 비행기를 보내온 줄 알고 전투기가 '쐐액'하고 지나갈 때마다 고마워하며 ‘호줏기’가 날아간다고 그랬다. 왜 호줏기냐 하면, 오스트레일리아를 한자로 ‘호주濠洲’라고 쓴다. 그래서 호주에서 온 비행기, 즉 호줏기라고 했다.실재로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국 오스트리아에선 6 · 25전쟁 때 참전은 커녕, 전투 식량 건빵 한 봉지도 보내오지 않았으니 사위나라 한국을 홀대했다고 할까. 그런데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있는 영국 연방 국가聯邦國家 오스트레일리아와 유럽 내륙 중앙에 있는 오스트리아가 헷갈렸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가 여사를 한자로 ‘호주濠洲’라고 쓰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줄 알았던 거다. 필자가 어렸을 때나 중년이 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제트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호줏기가 날아간다’라고 했다.
에어파크에서 서쪽에 있는 보라매공원 관리사무소 건물은 공군사관학교 회관會館으로 생도들이 배고프면 빵을 사먹기도 하고, 선배 생도들은 후배 생도들을 얼차례를 주는 곳이기도 했다. 보라매청소년수련관은 1중대 건물이고, 2대대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서울대학교 보라매병원이 들어서 있다.
에어파크 앞 쪽의 보라매 중앙잔디광장은 연병장練兵場으로 졸업식 및 임관식에 퍼레이드(parade), 즉 분열식分列式, 사열식査閔式, 열병식 閱兵式을 하던 곳으로 여름철에 잡초가 많이 자라나면 생도들이 잡초를 뽑기 위해 무수히 땀을 훌리며 드나들던 곳이며 육해공陸海空,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三軍士官學校 體育大會'를 앞두고 생도들이 한 달 동안 이나 응원應援을 연습했던 곳이다.
예전에 사관생도들이 신명나던 때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의 다음날 열리던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이다. 오늘날 올림픽이나 월드컵 중계방송 처럼 삼군사관학교三軍士官學校 체육대회를 공중파로 중계 방송하여 텔레비전 앞에 남녀노소가 모여 시청하던 때가 있었다. 각 사관학교의 일사불란한 마스게임의 화려함과 카드섹션 웅원전應援戰이 멋졌다. 각 군의 의장대儀杖隊 사열이나 분열 등 볼거리도 많았다.
주로 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에서 열렸는데, 일반인一般人들에게도 인기가 매우 높아 운동장을 가득 메우곤 했다. 관중들은 경기競技를 응원하는 한편 삼군 특색特色의 화려한 복장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좋아 하며 즐기곤 했다. 그리고 관중 중에는 사관생도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시골서 올라온 부모님들과 여친女親들도 있었으며, 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도 많았다.
보라매공원의 동문東門에는 탑 꼭대기에 동銅으로 만든 보라매가 앉아있는 ‘충효호국비천忠孝護國飛天’ 탑이 우뚝 서있다. 1974 년 11 공군사관학교 22, 23, 24기생들이 세웠다. 그리고 생도들이 기합을 받을 때 선착순先着順으로 돌고 오던 곳이기도 했다. 탑의 뒷면에는
조국과
겨레와
하늘에
충성을 다짐하며
스스로 창조하는
역사 속에
위용威容의 나래를 펴는 쌍매, 충매, 웅비가
이제 패기覇氣찬 보라매의 장한 모습으로 저
푸른 조국의 하늘을
힘차게 날으리니
촌음寸陰의 다발을 모우는
여기 그 혼을 보라
고 새겨져 있다. ‘보라매의 장한 모습’이야말로 생도들의 늠름한 기상을 나타내는 거다.
이곳 대방동시대大方i同時代의 공군사관학교에서 배출한 조종사들은 전쟁을 치루지 않았더라도 일편단심의 충정으로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훈련 중이거나 초계晴戒 임무 중 순직狗職한 조종사들이 있다.
몸부림쳐 믿기지 않는 죽음 앞에 통곡痛突을 하다
울부짖으며 흙바람 일어 대지大地는 체온을 잃고
몸부림쳐 믿기지 않는 죽음 앞에 통곡痛突을 하다
통곡을하다
선지피보다 더욱 붉게 맺힌 너의 마음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비조飛鳥
가슴엔 한 아름 무용武勇
무용의 넋을 안아 내달리며 맹세하던
패배敗北는 죽음보다 두럽다
지금도 들리는 듯 한 너의 음성音聲
여명黎明이 가시어진 조국祖國 하늘에
청춘靑春의 복받쳐 뛰는 가슴 안고
무지개 빛 보람 수놓으며
관악冠岳의 묏뿌리에 발디딤한 네가
이제는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너
차마 마음에 잊을 길 없어
먹물처럼 붉은 마음의 피를 이렇게 목메어 불러본다
머금어 호흡하는 창천蒼天은 너의 소유所有였고
너의 소망所望이었노라고
이제 동작동銅雀洞 국군묘지 위 한줌의 흙으로 변한 너를
휘영청 밝은 달도 차마 멈춰 비쳐주고
한강물도 너를 안고 휘감고 흐르리니
꽃다운 너의 나이 스물하나에
조국을 지키는 불사조不死鳥 되었느라고
1962넌 공사 2학넌 이승배 사관생도가 국립묘지國立墓地인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고故 권오택 동기생의 영전에 바치는 헌시 〈비혼飛魂〉 이다.
공군사관학교에 알에서 깨어난 갓 메추리로 입교해서 보라매가 되어 졸업할 때까지 학과공부 외에 군사훈련軍事訓練과 비행훈련飛行訓練을 받다 보면 불의不意의 사고로 순직狗職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생도도 순직하면 군인에 준하는 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이것은 육사와 해사도 마찬가지다.
사관생도의 확고한 정신무장精神武裝과 사생관死生觀의 확립,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사기진작士氣振作과 도덕심道德心의 배양, 인격지도人格指導에 도움을 주기 위해 종교생활宗敎生活도 필요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서울대학교 보라매병원 옆에 있었던 ‘성무교회星武敎會’ 이다.
성무교회는 1985년 공사가 청주淸州로 캠퍼스를 옮긴 후 서울시립 서울보라매청소년수련관으로 활용되던 중 2007넌부터 창고로 사용해오다가 비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동작구에서 서울시에서 임대를 받아 내부를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해 ‘아트 갤러리’ 로 운영하고 있었다.
공군본부 공군역사기록관리단空軍歷史記錄管理團은 구舊 성무교회의 문화재적文化財的 가치를 꾸준히 강조했고, 최근 서울시와 함께 문화재청文化財廳에 등록문화재登錄文化財 등록을 건의했다. 그리고 문화재위 원회 심의를 거처 2019년 3월 11일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774호로 최종 등록됐다.
구 성무교회는 공군사관학교가 대방동大方洞에 터를 잡은 6년만인 지난 1964년 장지량張志良(1924-2015, 9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교장 당시 미 공군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 대장과 미 공군 장병들, 국내 기독교基督敎 신자와 학생들의 모금墓金으로 건립됐다. 미국 콜로라도 미 공군사관학교의 뾰족 침탑교회尖塔敎會를 벤치마킹Benchmarking한 급경사 형태 지붕의 디자인이 건축의 특색이다.
에어파크에서 남서쪽 언덕에는 조국의 하늘을 지켜 국가 안보의 역군이 되겠다는 장한 뜻을 지닌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1971년 11월, 공군 불교신도들의 염원과 각계의 후원으로 건립된 불사가 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무호국사星武護國寺’ 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공군 제1호 불사佛寺다. 그런데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옮겨가고부터는 ‘보라매법당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공군 항공안전공단에서 관리 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군종특별교구 공군 보라매법당이다.
보라매공원 남문南門 쪽에는 해방 후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반대했던 학생들을 기리기 위한 ‘반탁반공 순국학생 총혼탑’ 을 비롯해 여러 기념비와 조형물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소박하게 꾸며진 공군사관학교 4기생 ‘박웅진朴雄進 시비’ 가 있다. 새겨진 시는 〈씨는 자라서 하늘이 된다〉다.
멀리 바라다 본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의 문을 열고
허름한 꽃씨 하나 심는다
씨는자라서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리고
바람과 구름이
머물고 갈
정갈한 냐의 집이 된다
더 멀리 바라다본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의 문을 열고
허름한 꽃씨 하나 심는다
씨는 자라서 하늘이 된다
허름한 꽃씨 하나지만 심으면 자라서 하늘이 된다는 듯이 1949넌 육군항공사관학교로 출발한 공군사관학교는 이제 하늘을 지키는 주역主役이 되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정所定의 비행과정을 훈련하고 조종사가 된 보라매들이 하늘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날며 대한민국 하늘을 지킨다. 공군사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보라매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