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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4:1 ~ 9
제 목 : 이삭의 하나님
본 문 : 창세기 24:1 ~ 9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 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 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 내를 택할지니라
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 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1. 변한다는 것
사람들은 항상 변화를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특히 그런 기분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두 달 정도 더 보내면 애 궂은 나이만 한 살 더 먹게 되고, 게다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약간은 쓸쓸한 계절이 주는 묘한 기분으로 인해서 그런 마음이 더 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속버스나 밤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단 하루만이라도 지금까지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일탈을 꿈꾸어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변화를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구성해 보면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즐거운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상상에 빠져보는 것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거나 밤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변한다는 것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변화를 그리워하면서도, 그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작 변화되기 힘 든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의 양면적 속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변했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예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변했어. 전도사 때는 참 겸손했었는데, 목사가 되더니 고개 숙일 줄을 몰라. 개척교회 때는 참으로 열심히 섬겼었는데, 이제 교회가 조금 성장하니까 제 살 궁리만 하는 것 같아. 늘 이런 식입니다. 오죽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 한다.’라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이겠습니까? 예. 사람이 변했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한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일어났던 변화에 대해 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2학년 1학기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아내가 갑자기 저에게 요즘 들어 부쩍 변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내가 무엇이 변했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아내에게 무엇인가 섭섭하게 해 준 것이 있나? 아니면 무엇인가 아내에게 잘못한 것이 있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내는 이런 저를 보고, ‘당황하셨어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갑자기 당신이 변했다고 하니까 많이 놀라셨죠?’라고 놀려 줍니다. 그날 아내는 제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여유로워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제가 아내를 대하는 방식과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인지 모르게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칭찬이었습니다. 저의 변화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저는 이날 저에 대한 아내의 칭찬을 지금까지도 최고의 칭찬으로 생각하고 있고, 제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기를 잘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날 아내의 칭찬과, 아내가 인정해 주었던 저의 변화에 대해 지금도 여러 곳에서 많이 자랑도 하고 있고, 간증도 하고 있습니다.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 하던데, 저는 지금 제 자랑하고 있으니 여러분께서 저를 바보로 여기지나 않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갑자기 제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 하나님으로 인한 변화
신학대학원 2학년이던 2011년 5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월요일 종일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여 늦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기 위해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저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던 똑같은 아침 풍경이었지만 그 날 저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야말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5월의 아침 햇빛은 너무나 눈이 부셨고, 초록으로 물든 많은 나무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에 반해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고, 입에서는 그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맴돌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전날 있었던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 동안은 내가 헌신함으로써, 내가 섬김으로써, 내가 봉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고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게 해준 수업이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요,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요, 나를 책임져 주실 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수업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아침의 감동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아름다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시고, 나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저의 입을 통하여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제가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 여유로워지고, 편안해지고,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으시는 분, 아멘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의 본문으로 [창세기 24:1-9]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창세기 23장과 24장 전체, 그리고 [창세기 25:1-11]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죽음까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살펴 볼 내용을 성경에서 읽을 때마다 참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그 내용을 대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한 긴장감도 생기지 않고, 그저 시냇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가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읽어집니다.
‘아니 오늘 내용 중에 사라도 죽고, 아브라함도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있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제는 그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아브라함은 이삭의 제물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니까 아브라함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23장과 24장의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23장은 사라가 죽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헷 족속 중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들이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굴은 후에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의 선영, 즉 가족묘지가 됩니다. 사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사라의 나이는 백이십칠 세였는데 이는 성경 상에서 나이가 언급되는 여자로서의 유일한 경우입니다. 아마도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성경이 배려 혹은 예우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5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배우자를 찾아주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삭의 짝을 찾아 주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과 그 믿음에 부응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5장 초반부는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사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아브라함의 변화
[창세기 23:1-2]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의 죽음이 한 사람이 일생에서 느끼는 충격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사람을 가여워하는 것이고 슬퍼하고 애통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사람이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즉 배우자의 죽음을 겪게 되었을 때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가장 주 된 이유는 ‘이제부터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가나?’입니다. 정작 죽은 당사자를 위한 슬픔이 아닙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합니다. 정말 슬퍼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내가 죽으면 영정 앞에서는 슬퍼하다가 화장실 가서 웃는다.’라는 우수개 소리까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혼자된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아내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라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헷 사람들 눈에 비친 아브라함 자신의 실제 모습을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아브라함 자신의 기업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두고 있는 아브라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겸손 된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겸손 된 마음을 표현하는 내용이 또 있습니다. [창세기 23: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또 [창세기 23: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입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에 죽었으니까 아브라함은 백삼십칠 세가 된 나이입니다. 나이로만 따지고 들자면 어른 중의 어른입니다.
게다가 [창세기 23: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라고 헷 족속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 주변에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고, 존경도 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몸을 굽히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3: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에브론이 소유한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에브론은 그 밭과 굴을 거저 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충분한 대가를 치루고 그 밭과 굴을 사들이려고 했었고, 또 실제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백성 된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아브라함을 보면서 요즘 교회나 기독교 기관 또는 단체들을 생각해 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런 곳의 인건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최저 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환경의 직장,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기독교 기관이고, 기독교 단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싼 임금으로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돈은 지들이 더 밝히면서도 말입니다. 오늘 저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을 바라보며 조용히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24장에서도 아브라함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4: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라는 기록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온전하게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4:7-8]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이삭의 짝을 구해 줄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아브라함이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이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 24:1]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항상 아브라함과 동행하셨고, 그의 삶을 돌보시고 보호하셨고,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구절에 큰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2%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만큼 더 큰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나라 인사말 중에 ‘밤새 별고 없으셨지요?’라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밤새 별고 없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임을 깨닫는 우리 다누림 가족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주변 사람들의 변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아브라함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강 건너 저쪽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그의 삶을 도우시면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방의 아버지 된 자로서 결코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변화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브라함 주변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3: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창세기 23: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는 사람의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마땅히 장사 지낼 곳이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께서는 그 분을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여러분의 가족 묘지의 일부분을 선뜻 제공해 줄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는 사람이 가족묘지 말고, 여러분이 소유한 어느 땅이 아주 명당자리니까 그 땅을 팔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여러분께서는 ‘아이구 팔다니요? 그냥 가져다가 마음껏 쓰세요.’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역시 그렇게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었을까요? 모두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변화된 것입니다. ‘저기 건너 동네에 가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여호와라는 신이 돌보고 계신대. 글쎄 백 살이라는 나이에 아들도 낳았고, 게다가 아주 부자라지.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인격자라네. 그게 아마 다 여호와라는 신이 그 사람을 도우시기 때문일 것이야.’ 예.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억지가 없는, 그 어떤 무리도 없는 하나님의 아주 자연스런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24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종의 이야기나 행동을 통하여 확인 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4: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삭의 배필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24:21],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아브라함의 종이 자신이 하나님께 청원한대로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는지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24:26-27],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짝이 너무나 쉽게 찾아지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24:34-36],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짝이 될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4: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자신이 리브가를 만난 배경을 설명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24:56],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리브가의 가족이 며칠 유숙한 것을 권고하자 아브라함의 종이 빨리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 하는 장면입니다. 기쁜 소식을 주인에게 빨리 알려주려는 심정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충성스러운 종의 이야기와 행동에 대해 몇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그 종도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있고,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으로 인한 종의 변화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하나님 좋으시면 아멘 하시겠습니다. 아무런 억지 없이, 아무런 무리 없이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5. 아브라함의 죽음
그러나 열방의 아버지라 불리어지는 아브라함도 사람인지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창세기 25:7-10],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창세기 11:27]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만났고, 이후 24장까지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개 되었는데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고작 4절에 걸쳐서 아주 간단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도 죽어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에는 그를 아는 모든 일가친척과 지인들이 모여서 그와 그의 가족을 위로하고, 마지막 떠나는 길을 성대하게 환송해 주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성경은 너무나 야박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는 듯이 아주 무심히 그의 죽음만을 단 4절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고했다는 기록도 없고, 큰 상급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천국 들어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저 나이가 들어 기운이 없어 죽었고,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는 내용뿐입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장사된 굴 하나 뿐이었습니다. 조금 허무하시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열방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라함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의 조상이라고 추앙하는 아브라함 그렇게 큰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아브라함이 열방의 아버지가 되고,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것 아브라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아브라함다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었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원무궁한 하나님께서 계속 사람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에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는 것이고, 그래서 [창세기 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라는 말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하나님께서 일하신 그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이삭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내내 거의 아브라함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이삭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죽어 사라져도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하셔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류를 위해 쉼 없이 일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믿으시고,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잘 아시어서,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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