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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성종실록]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윤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미처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 월산군도 있었다. 제안군은 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기에 제외될 수도 있었겠지만, 16세였던 월산군을 배제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월산군은 명실상부한 세조의 장손이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제안군이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월산군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춰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이에 대해 세조의 유명이라고 말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늘어놓은 변명이 월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특별히 나쁘다는 근거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정치적 결탁
이었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회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왕실 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구성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 불과 28세이었다. 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성종1년)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어쨌든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성공을 거두었고,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은 세조 대부터 누려오던 자신들의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월산군이나 제안대군 등은 정치적 결탁에 의한 희생자로 남아야 했다.
2.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성종이 성인이 되자 7년 동안의 섭정을 끝냈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었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
(소혜왕후로 추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였는데도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에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한 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스무 살까지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예종의 아들 제안군과
성종의 형 월산군을 대군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귀양보냈던 구성군에 대해서도 왕족임을
감안하여 가산을 적몰하지 않고 나라에서 양미식물을 지급하였다. 특히 월산대군은
성장하여 이미 19세의 나이였으므로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녀의 이 같은 조치는 종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한명회 등의 권신들과의 결탁을 위해 성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으나, 그녀는 대의명분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발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1469년 12월에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완료했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재배케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윤대비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들의 등용이
금지되었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섭정을 받는 처지였기에 정사는 신권 중심으로 이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내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 같은 도학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관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나왔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성종 후기의 이런 부분적인 병폐는 옥에 묻은 티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능은 선릉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3. 성종의 가족들
성종은 정비 공혜왕후를 비롯해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에게서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이 부인들 중 정비 공혜왕후 한씨는 17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었고, 폐비
윤씨가 연산군, 정현왕후 윤씨가 진성대군(중종)을 비롯 1남 1녀, 명빈 김씨가 1남, 귀인
정씨가 2남 1녀, 귀인 권씨가 1남, 귀인 엄씨가 1녀, 숙의 하씨가 1남, 숙의 홍씨가 7남
3녀, 숙의 김씨가 3녀, 숙용 심씨가 2남 2녀, 숙용 권씨가 1녀를 낳았다.
이들 가족 중 공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
등의 삶을 약술하면서 가족사를 알아본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의 이해를 돕는 측면에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의 삶을 함께 다룬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은 연산군편과 중종편에서
각각 다루기로 한다.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공혜왕후 한씨(1456-1474)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는 첫째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둘째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래서 이 두 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7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능호는 순릉이며 경기도 파주에 있다.
폐비 윤씨(?-1482)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서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했다. 그래서 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궁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4.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 균형
성종 시대의 정치 세력은 훈구 세력과 근왕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훈구 세력은 세조
시대의 공신을 주축으로 형성되었으며, 근왕 세력은 이른바 도학 정치를 내세운 사림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성종은 이들 세력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중심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의 등용이 법으로 금지되자 성종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훈신
세력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종이 정희왕후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았던
1476년 당시, 세조의 오른팔격인 신숙주는 이미 사망했고 한명회 역시 연로한 탓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 대신에 유자광 등 '남이의 옥'과 관련된 공신들과 인수대비의
친동생 한치인을 주축으로 한 척신 세력이 조정의 중역으로 부상해 있었지만, 그들은
세력권이 달라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성종은 이러한 역학
구도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비축한 다음 그들 훈구 세력들을 견제할 사림 세력들을 빠른
속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사림의 거두는 김종직이었다. 그는 밀양 출신으로 고려말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영남
성리학파의 거두였다. 성종이 성년이 되어 비로소 편전을 넘겨받았을 때 김종직은 자신의
고향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성종은 그의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고, 그의 문하들이
학풍을 드날리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성종은 그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자 그를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하여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소인배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했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홀로 잘난 체하는 야심배들이라고 지탄하며 그들을
배격하였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달랐기에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이맹전, 남효온, 조위, 이종순 등
당대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종직을 중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중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사림파
중용책으로 인해 조정은 14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해졌다.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파의 일차적인 비판 대상은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 척신
세력이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이러한
부패상이 신진 사림 세력들에겐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었다.
사림의 공격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종의 후원 때문에 훈구
세력이 사림에 밀리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림 세력의 지나친 팽창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한 이후 자위책의 일환으로 무오사화를 획책하게 된다.
성종의 후원에 힘입은 사림파는 세력이 팽창되자 세조 말에 혁파된 유항소제도를
부활시켰다. 유향소의 부활은 당시 부패로 치닫고 있던 관료제 중심의 농촌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개국 이후 농촌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곧 관료들의 부패로 이어졌다. 유향소는 이런 부패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조직된 지방의 자치기구였다.
유향소는 고려말에 형성되었다가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태종 때 혁파된 바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유향소의 권한을 향풍을 바로잡는 일에만 한정시킨 후 부활시켰다. 그런데
세조가 등극한 뒤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유향소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시 혁파되었고,
이를 1488년 성종이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
성종이 부활한 유향소 제도는 중앙 집권 체제의 보조 기구에 불과했지만 사림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이는 조정 내에서 사림의 힘을 키워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성종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성종 대에서는 사림 세력이 중앙의 비판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이는 결국 성종이 노린 '힘의 균형'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즉, 성종이 왕도 정치를 표방한 것은 학문을 좋아하는
그의 천성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던 것이다(사림파에 대한 개념적인 규정과 형성 과정 등은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연산군 대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만 사림파의 거두로 불리는
김종직의 삶에 대한 간단한 서술을 곁들이도록 한다).
5.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앙 정계에 사림 세력이 진출한 일이다. 고려말의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사회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1431-1492)
이었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62년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내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 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을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힘을 합해 훈구,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했다.
1483년에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이어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조의 부도덕함을 질책하고 세조 대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훈구 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세조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상소에 그치지 않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조의제문>을 남기게 된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이 글은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김종직은 남이를 죽게 한 유자광을 멸시하였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거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후일 이극돈과 손을 잡고 무오사화를 도모하게 된다.
김종직은 <조의제문>과 훈구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상소들은 그의 도학적인 식견과
절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도리와 덕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성종 역시 김종직의 견해에 동조하여 스스로
도학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하려 했다.
고려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글을 익힌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났으면 사학에도 두루 능통해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제자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 보여지듯이
그가 화려한 문장이나 시문을 추구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절의를 바탕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려는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제자들은 절의와 의리를 내세우며 이를 저버린 훈구 척신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청구풍아>, <점필재집>, <당후일기>, <이존론>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밖의 많은
저술들은 무오사화 때 훈구 세력에 의해 소실되었다.
6.<경국대전> 완성의 의미와 형성 과정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1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져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이 책의 편찬 연혁은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각종 법전들을 총체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법전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통일 법전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까지 조선의 법전은
임시법의 형태를 띠로 있었다. 왕이 즉위하거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였고, 이에 대한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해 보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일 법전의 편찬 작업은 1460년(세조 6년) 7월에 시작되었다. 먼저 재정 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과 <호전등록>을 완성하여 이를 <경국대전호전>이라고 했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을 완성하여 공포 시행했다.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 <예전>, <병전>, <공전>
등을 완성하였으며 이미 만든 호전과 형전도 다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1468년 1월 1일
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때 마련된 법전을 최종적인 것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이 법전이 아직까지 미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세조 대에는 통일
법전 작업이 거기에서 멈추었고, 나머지 작업은 예종 대로 넘어갔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1469년 9월까지 작업을 매듭짓고 이듬해 1월 1일에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일은 성종 대로 넘어가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1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1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각 법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 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편찬, 시행을 통해 조선은 우선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인 통치규범 체계를 확립하고, 다음으로 중국법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던 관행을
없앰으로써 법치주의의 자주성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경국대전>이 시행된 뒤에도 <대전속록>, <대전회통>, <대전통편>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적도 있었지만 그 기본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내려와 조선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은 조선인의
통치관과 인간관, 역사관을 한데 묶은 위대한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조선인들의
법치주의적 염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7. 활발한 문화 서적의 편찬
성종 대의 업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역사, 지리, 문학, 음악 등을
집대성한 서적들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책들이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삼국시대 이후 전승된 4천3백여 편의 시문들을 한데 모은
<동문선>, 당시까지의 의궤와 악보를 총정리한 <악학궤범>, 고조선에서 고려에 이르는
역사를 집대성한 <동국통감> 등이다.
성종은 이러한 서적의 편찬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도학 정치의 이념을 확립하려
했는데, 특히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하여 만든
것으로서 성종과 사림의 역사 의식이 잘 반영된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 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년)에
착수하여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 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길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 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하여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세조가 중점을 두었던 상고사류들을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킨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
(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판 <동국통감>은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 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조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시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명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 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한 것으로 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에서는 성종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양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8. <성종실록> 편찬 경위
<성종실록>은 총 297권 15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성종 재위 25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성종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 4월(연산군 즉위년)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에 따라
춘추관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편찬 과정에서 성종 대에
사관을 지낸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은근히 단종을 추모한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 중에 기생들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한 <화술주시>가 실려 있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조의제문>과 <화술주지>는 김종직의 글로서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그의 제자였다.
이 때문에 김종직 문하생이 중심이 된 사림 세력들이 일거에 숙청당하는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무오사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실록 편찬 작업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 않아
작업 시작 4년만인 1499년 3월 인쇄를 완료하여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에는 영의정 신승선과 우의정 성준이 총재관을, 지관사 이극돈과 안침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을 맡았고, 그 외 74인이 실록청 낭청이 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종 시대의 세계 약사
성종 시대의 유럽은 1474년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가 처음으로 세계 지도를 제작한 것에
힘입어 콜럼버스,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이 새로운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시기였다.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1494년에 서인도 제도의 자메이카 섬을 발견했고, 디아스는
1488년에 희망봉을 찾아냈다.
한편 이 시기는 종교사적으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발행해 중세 시대의 종교가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