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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물역사관(한민족역사탐방) 원문보기 글쓴이: 별미르
북방고토 역사문화탐방 서문
한민족의 역사와 혼이 살아있는 우하량홍산유적과 고조선의 의무려산 탐방 !
웅대한 영토와 찬란한 문화,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자랑스런 고조선,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것이며 다른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단재 신채호선생)
제대로 된 역사인식 없이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역사가 있어야 국가와 민족이 비로소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찾기는 국력의 한 부분이며 미래를 위한 투자!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후세를 위한 투자입니다.
그동안 많은이들의 수고로 북방고토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져 있는 지금, 잃어버리고 잊혀져버렸던 우리민족의 북방고토, 역사와 문화유적를 찾아 떠나는 “북방고토 역사문화탐방”을 안내합니다.
역사상 가장 큰 대국과 영토를 차지 했으며 수많은 작은 민족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들을 계도하기도 했던 한민족의 역사는 세월의 흐름에 묻혀져 갔지만 그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 한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땅, 한민족의 포효와 기상이 넘치던곳! 그곳 북방고토는 비록 중국의 땅이 되었지만 그곳에 살아숨쉬는 선조들의 기상과 자취들을 찾아내고 발굴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잊혀진 역사가 아닌 현재도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임을 깨우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방고토 역사문화탐방”은 한민족의 발자취와 북방을 호령했던 선조들처럼 되고자 하는 우리들의 바람을 찾아 가는 행로입니다. 그 행로는 웅대한 대륙의 제국 고조선과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 역사에 살아 있는 것이 바로 한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요녕성 금주주변지역인 의무려산 산맥은 우리 고조선의 선혼들이 아직도 숨쉬며 후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빼앗겨 타민족의 땅이 되었지만 그 유적과 발자취는 아직도 숨쉬고 있습니다.
하얀 화강암으로 뒤덮인 백악과 산줄기 곳곳마다 신령스런 모습의 기암괴석으로 남아 웅대한 정신만은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그시대 훌륭한 문화는 현재 홍산문화로 명명되어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원류라 하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하량홍산문화유적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우리민족의 원류인 배달국시대의 유적이라 사료됩니다.
북진의무려산은 이미 우리민족 고조선시대와 중국민족의 순임금(동이족으로 그부친은 고수이며 단군왕검시대에 벼슬을 하였음)의 역사기록이 남아 있고 현존하는 북진묘는 594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숭흥사쌍탑은 641년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그시대 이 지역의 주권은 고구려의 영토이었으니 당연히 고구려의 유적이고 우리 민족의 유적입니다.
의무려산의 신령함은 조선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꼭들러 제를 지내고 갔으며 현재도 그 신령스러움이 살아 있어 중국 요녕송사람들은 일년에 한번씩은 꼭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의무려산은 866.6미터로 하나의 산이 아니 10여개의 산령으로 그 경구마다 신령스런 기암봉과 계곡에 항상 운무가 서려 있는 영산입니다.
의현 만불당 석굴은 499년 건립되었으며 광승사와 봉국사는 발해시대인 800년대이며 금주대광제사와 보타산사는 600년대 초에 건립되었다는 현지지방지의 기록으로 우리민족의 유적임을 알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 와서 영토의 개념만을 가지고 타민족을 탓하는것은 어찌보면 아둔하지만 그 영토에 숨쉬는 웅대한 민족혼만은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의 원류와 고조선의 웅대한 기상을 찾아 떠나는 “북방고토 역사문화탐방”에 여러분을 초대하오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북방고토 역사문화탐방 신청안내
1. 탐방기간 : 2016. 9. 23(금)~27(화), 4박 5일
2. 탐방지 : 릉원 우하량홍산유적지, 북진 의무려산과 북진묘, 조양남북탑과 화석박물관, 의현 만불당석굴.봉국사
대련 여순감옥과 박물관, 영성자한묘와 고려박물관
3. 주 최 : 민족회의
4. 인 원 : 20명~30명 (선착순)
5. 참가비 : 940,000원(여행비 90만원+중국비자비 4만원)
90만원 (중국 비자 발급비, 유류세, 왕복 교통비, 숙식비(숙소: 2인 1실 호텔, 관광지 입장료, 여행자 보 험료, 가이드.기사비용과 팁) 등 포함.
별도로 단체비자비 40,000원/중국비자가 있는 분은 제외. 추가 비용 없음.
6. 입금 계좌 : 농협은행 301-0132-6092-81 예금주: 다물투어(정선애)
7. 참가 신청 기한 : 8월 31일(수)까지
8. 참가 신청 : ① 예약금 20만원 입금
② 여권 사본 (사진 있는 쪽)을 카톡이나 문자로 보냄
③ 담당자 : 이 규용(010-7773-6919) jllky@hanmail.net
※또는 댓글에 신청하셔도 됩니다.
9. 참가비 잔액 완납 기한 : 9월 10일(토)까지
10. 참가자 예비모임 : 추후 통보함
11. 북방고토 역사탐방 자료집
* 카페 (민족회의/한조선역사탐방/역사탐방본부) http://cafe.daum.net/grandcorea
* 카페 (다물역사관(한민족역사탐방/역사탐방여행) http://cafe.daum.net/damooltour
(역사자료 및 역사지도 등 역사박물관)
다물투어 TEL/02-889-7204. FAX/02-889-7205
수 신 | 민족회의 귀중 | 연락처 | TEL/ | ||||
발 신 | 이규용 상무 010-7773-6919. | 인원 | 20명이상 | 일자 | 2016. 9.23금~9.27화 | ||
제 목 | .북방고토역사탐방-우하량 홍산문화유적과 고조선시대의 북진묘와 의무려산 탐방 대련/조양홍산문화/금주/의현/북진의무려산.북진묘/대련 5일(중국남방항공) |
여 행 일 정 표
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주 요 일 정 | 비 고 | |
제1일 9/23 금 | 인 천 대 련 조 양 | CZ686 전용버스 | 11:20- 11:40 12:30- 17:30 | 인천공항3층 H 카운터앞 10시모임. 인천출발 대련도착. .요하유전등 요동벌판 차창투어하며 역사도시 조양도착. .대릉하강변 산책후 석식 및 호텔투숙. | 조양빈관 | |
중식:기내식 | ||||||
석식:현지식 | ||||||
제2일 9/24 토 | 조 양 릉 원 금 주 | 전용버스 | 08:00- 12:00 13:00- 16:30- 18:00 | 호텔조식후 .조양남북탑과 박물관/485년 건립된 고탑과 출토박물관탐방. .조양화석박물관/1억5천만년전의 발굴화석 박물관 탐방. .우순사/1600년대 건립되었으며 조양시박물관인 고찰탐방. 중식후 조양출발 릉원도착. .우하량홍산유지/5천년전의 고문화,고국,고성자취인 고대유적지 탐방 릉원출발 금주도착후 석식 및 호텔투숙. | 대하빈관 | |
조식:호텔식 | ||||||
중식:현지식 | ||||||
석식:현지식 | ||||||
제3일 9/25 일
| 금 주 의 현 북 진 | 전용버스 | 08:00- 12:00 13:00- 14:00- 16:00- 18:00 | 호텔조식후 .대광제사/수나라시기에 건립된 목조사찰로 사찰내에는 고탑,천후궁,대웅보전,배전,천왕전,비정,관제전등이 있는 중요 고건축사원탐방. .금주박물관/원시고생물화석관(공룡등),원시시대의 유물,각시대별유물등 역사적가치를 지닌 문물전시관 탐방. 금주출발 의현도착. .만불당석굴/북위/고구려시대(499년)에 만들어진 동북불교예술의 보물로서 요녕성 최고,최대의 석굴탐방후 중식. .의현화석박물관/1억3천만년전의 화석전시관 탐방. .봉국사 의주칠존대불/요나라시대 건축된 중국유일의 흙으로 만든 채색불상 사원탐방후 의현출발 북진도착. 호텔투숙. | 대조양성 북진대하 | |
조식:호텔식 | ||||||
중식:현지식 | ||||||
석식:한 식 | ||||||
제4일 9/26 월 | 북 진 대 련 | 전용버스 | 08:00- 12:00- 13:00- 14:00- 18:30 | 호텔조식후 백악의무려산 탐방. .의무려산 관음각/조선시대 연행사들의 혼이 담겼으며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요순 때부터 중국12대 명산의 하나로 불리워지며 한민족의 영산으로 추정되는 백악산 탐방. .북진신사(북진묘)/고구려(수나라)시대에 건축되어 하늘에 제사를지내며 기원 하던곳으로 순임금대부터 하늘에 제를 지낸 천제묘 탐방. 중식후 .숭흥사 쌍탑/당/고구려시대644년 건립된 사찰 및 쌍탑 탐방. .북진석패방거리/명나라시대 이여송일가의 군사력 근거지 탐방. 북진출발 대련도착. 석식후 호텔투숙. | 대련호텔 | |
조식:호텔식 | ||||||
중식:현지식 | ||||||
석식:현지식 | ||||||
제6일 9/27 화
| 대 련 여 순 인 천 | 전용버스 CZ675 | 08:00- 12:00- 13:00- 18:50- 20:50 | 호텔조식후 .여순감옥과 여순박물관 탐방후 중식. .대련고구려박물관과 영성자한묘 탐방. 대련출발 인천도착. | 조식:호텔식 | |
중식:한 식 | ||||||
석식:기내식 | ||||||
※상기 일정은 항공 및 현지 사정으로 인하여 변경될수 있습니다. ※포함사항 : 항공료,여행보험,호텔(4성급),식사,차량,현지가이드,입장료,중국공항세,인천공항세TAX, 유류할증료,가이드/기사팁 ※불포함사항 : 비자비(단체40,000원), 기타개인경비 ※노팁, 노쇼핑, 노옵션 | ||||||
여 행 비 | 1인당 900,000원 |
.요서역사탐방-우하량 홍산문화유적과 고조선시대의 북진묘 탐방안내 위치도
.요녕성(遼寧省)과 요하유역(遼河流域) 설명
중국 동북[東北] 지방 남부의 성.
면적 15만 km2. 인구 약 4,000만(2000년).
성도(省都)는 심양[瀋陽]/선양.
1954년에 요서성[遼西省]과 요동성[遼東省] 일부의 합병으로 요녕성(遼寧省)이 성립되고, 56년에 열하성[熱河省]의 동부를 병합하였다. 남동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북동쪽으로 길림성[吉林省], 북서쪽으로 내몽고[內蒙古]자치구 및 하북성[河北省]과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발해[渤海] 및 황해(黃海)에 접한다.
지형은 남동부의 산지와 북서부의 구릉․고원 및 그 중간의 요하[遼河]평원 등 3지역으로 구성된다.
요하평원(遼河平原)은 요하강이 형성한 해발고도 50m 미만의 충적평야로, 요하강 하구부의 요동만[遼東灣] 연안 일대는 해발고도 2~5 m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저습지를 이루었다. 평원 동쪽은 100 m급의 산봉이 이어지는 장백[長白] 산지이고, 그 지맥인 천산[千山]산맥이 500m 이하의 고도로 남서주(南西走)하여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형성한다.
요동반도는 침강지괴(沈降地塊)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어, 남동쪽의 장산[長山] 군도를 비롯하여, 연안에 많은 섬들이 분포한다. 평원 북서부는 내몽고 고원으로 이어지는 해발고도 400m를 넘는 구릉․고원지대인데, 그 남서쪽의 해안평야는 이른바 요서주랑[遼西走廊]을 이루어 화북[華北]과의 주요 교통로가 되고 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해안지대는 비교적 온난다습하다. 1월 평균기온은 동부 산지에서 -20℃, 북부평야에서 -15℃, 남단부에서 -5℃이나, 7월 평균기온은 평야부에서 24~26℃로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강수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적어져서, 동부산지에서 1,000mm 이상, 평야부에서 600~700mm, 서부에서 500mm의 연강수량을 보이나, 그 대부분이 여름에 내려, 농업에는 비교적 유리하다. 한편, 3~5월에는 속칭 몽골풍으로 불리는 서풍이 불어 심한 풍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옛부터 화북지방과의 관계가 깊었고, 부여 이래 고구려,신라,발해,고려,조선의 영토였으며, 일제의 만주국 이후 한국과 국경을 접하기 때문에 유사 이래 한민족의 많은 역사유적들이 남아있다.
현재 주민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만주족․몽골족․회족[回族],조선족 및 한국인 등이 산다. 요하 평원은 동북 지방에서 농업개발의 역사가 가장 오랜 곳으로, 수수,조,옥수수,쌀 등 자급작물 외에 콩,땅콩,목화 등 상품작물의 생산이 많고, 랴오둥만 연안에서는 사과를 비롯한 과실류, 동부의 봉성[鳳城],수암[岫岩]을 중심으로 잠사(蠶絲)의 생산이 많다.
동부산지의 압록강 및 혼하강[渾河] 유역은 삼림지대를 이루어 임업이 성하고, 연안부에서는 대련[大連]장하[庄河]웅악성[熊岳城] 및 장산 군도의 여러 어항을 중심으로 어업이 성하며, 요동만 동안(東岸)에는 염전이 많다.
광업은 안산[鞍山],본계[本溪],요양[遼陽]의 철광석, 무순[撫順],북표[北票],부신[阜新] 등지의 석탄, 대석교[大石橋]의 마그네사이트 외에 망간,몰리브덴,아연,구리,유모셰일 등 다종류의 자원 매장량과 생산량이 많다. 그들 자원과 수풍(水豊)댐을 비롯한 수력의 개발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의 발달이 현저하여, 중국 제일의 중화학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안산에는 중국 유수의 철강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제철공업 외에 기계,화학,내화벽돌 등 여러 부문의 공장들이 입지하고 있다.
본계,심양에도 제철공업이 발달하고, 심양에는 알루미늄,구리 제련소, 무순에는 석탄화학,인조석유 공장이 있다. 기계공업은 공작기계,농업기계,광산기계,전기기기,정밀기계,차량,조선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고, 화학,제지,방직,제사,식품․요업 등 공업도 성하다. 특히 반금에는 중국3대 유전이 있어 화학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중국에서 철도망이 가장 발달한 성(省)으로, 심산[瀋山:瀋陽~山海關],장대[長大:長春~大連], 심단[瀋丹:瀋陽~丹東] 등의 간선철도와 많은 지선이 각지를 있고, 버스 교통망도 정비되어 가고 있다.
해운은 대련[大連]을 비롯하여 영구[營口],호로도[葫蘆島],단동[丹東] 등 항구가 널리 이용되고, 항공로는 심양,대련을 중심으로 장춘[長春],하얼빈[哈爾濱],북경[北京],북한평양 등지와 전국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고속도로망이 발달하여 중국의 첫 번째 고속도로인 심양과 대련의 심대고속도로, 심양과 북경.하얼빈 고속도로, 심양과 단동, 단동과 대련의 주요 고속도로가 있으며 대련에서 영구,반금,금주,북경으로 연결된 고속도로, 대련에서 심양,철령,장춘,하얼빈으로 연결된 고속도로가 있으며 단동,본계,요양과 심양,북경,하얼빈으로 연결된 고속도로등은 편리한 교통을 제공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요하유역은 고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요하문명이 융성했던 곳으로 홍산문화등 고대원류문화의 발상지로서 그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신생대 1억3천여만년전의 화석들이 출토되고 있다.
요하유역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로 조선시대까지도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으나 조선멸망후 일본은 그 지역에 만주국을 세웠으며 국권을 찬탈후 만주지역 철도부설을 조건으로 청나라에 지역을 넘겼다.
근대에 요하유역 동서지역은 간도지방으로 명명되어 왔으며 일제가 청나라에 불법 양도한 후 현재까지도 중국의 영토로 다스려지고 있으니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그 역할과 공로가 컸으며 이주한 우리민족이 현재는 조선족이란 이름아래 중국 56개소수민족중의 하나로 정해져 있다.
현재 지역을 요하를 경계로 동쪽은 요동, 서쪽을 요서로 분류하고 있으며 요동지역은 근대이후 기독교의 전래역사로 우리에게 그 의미가 있으며 요서지역은 한민족 역사의 근거지로서 옛불교.도교.선교문화의 융성지로 그 문화유적이 현재도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 요녕성 주요도시
심양시,대련시,단동시,안산시,본계시,요양시,금주시,조양시,무순시,영구시,부신시,반금시,철령시,호로도시등 14개도시
◈ 요서 5시(市)
금주시(錦州市),조양시(朝陽市),부신시(阜新市),반금시(盤錦市),호로도시(葫芦島市)
(요녕성 유적분포도)
(1418년 세계지도와 고려지도)
(1688년 조선천하도)
(1747년 서양제작 조선영토지도)
.조양시(朝陽市) 개요
조양시는 요녕성의 14개행정구역의 하나로서 면적은 2만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330만명이다. 개혁개방이래 조양시의 면모는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조양시는 하북성, 내몽고자치구, 요녕성 세개성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요녕성 중부성시, 서로는 북경, 천지, 탕산지구, 북으로는 내몽고, 남으로는 발해와 인접하고 있어 연해 개방도시일뿐만 아니라 국내외 주목을 받고 있는 환발해경제구역의 중요한 도시의 하나이다.
조양시는 공로, 철로, 항공, 행상운송이 일체인 입체교통 운수회로망이 잘 형성되였다.
조양시 경내에서는 우하량홍산(牛河梁弘山)의 문화유적을 발견되어 중화민족 5000년 문명사에 증거를 제공하였다. 조양시는 대량의 고생물(古生物)과 고문화(古文化)가 남겨있으며 새, 고기등 식물화석의 자연유적수량이 제일 많은 곳이다. 조양시 경내에서 또 매장 광물 67종을 발견하고 저장량이 전 요녕성의 70%를 차지한다고 확인되었으며 그중 망간저장량이 동북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철생산량은 전국적으로 제2위를 차지하므로 전국 8대황금생산구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대리석, 진주암, 석회석 등 저장량이 많고 품질이 좋으므로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양호한 개발전경을 가지고 있다. 조양시 농업도 작물, 보호지, 경제림, 과일업, 목축업을 개발중점으로 하는 종합적 개발방식으로 형성되였고 농업경제구조는 다원화적 현대화 농업구조로 전변되고 농업산업화도 이미 시작하여 거대한 개발잠재력을 드러냈다.
조양시 농부제품자원은 200여가지가 있으며 약재료가 600여가지이다. 옥수수, 밀, 모피, 꿀, 고기 등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조양시는 전국 12대 토끼생산기지의 하나이고 전국 4대 은행(杏仁)생산구의 하나이며 요녕성에서 두번째로 큰 과일생산구이다. 전시의 과일나무 총면적은 8만헥타르, 5000여만그루로서 총생산량은 35만톤이다. 조양시는 세계적으로 제일 큰 인공 가시덤풀림이 있고 총면적은 10만헥타르, 전국의 11%를 차지하고 세계의 9.1%를 차지하며 연생산량이 5만톤이다. 조양시 공업도 석탄, 화공, 기계, 전자, 건설재료, 방직, 의약, 식품, 음료, 종이업을 위주로하는 비교적 완벽한 공업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조양시 위원회, 시정부은 투자유치를 전체 시장경제발전의 전략중점으로 하고 새로운 개방관을 수립하고 전국 제일 특혜정책을 제정하여 전 시민 투자유치를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국내외 경제기술합작을 추진하기 위하여 조양시는 기술함량이 높고 저장량기초가 좋고 시장전망이 넓은 투자유치항목을 준비하였고 광범위적으로 합작파트너를 찾는 동시에 일련의 특혜정책을 실행하여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민족에게는 고조선의 흥망역사가 서린곳이기도 하다.
조양시 전경
조양 대릉하
.조양고생물화석국가지질박물관(朝阳古生物化石国家地质博物馆)
고생물화석보호구는 의현과 북표시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공룡시대의 옛유적 문물지역이다. 1억3천만년~1억5천만년전의 공룡화석, 고기화석, 생물화석, 나무화석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융성했던 지역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또한 부근지역에는 풍하유적지,흑성자유적지등의 여러 유적지들이 흩어져 있다.
면적은 46.3평방킬로미터이고, 동물화석 80여종, 식물화석 50여종이 분포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다양한 화석의 보고이다.
조양고생물화석박물관은 건축면적이 12,300평방미터이고 지구청(地球厅),과보청(科普厅),공룡청(恐龙厅),열하생물군화석전청(热河生物群化石展厅),규화목공예품청(硅化木工艺品展厅),화석표본실(化石标本室)이 있다. 화석표본의 종류는 무척추생물(无脊椎),곤충(昆虫),거미(지주/蜘蛛),어류(鱼类),양서류(两栖类),조류(鸟类),공룡(恐龙),익룡류(翼龙类),포유동물(哺乳动物),고식물등(古植物等)이 있다. 전람품이 온전하고 아름다우며 내용이 또한 풍부하여 고대생물과 식물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데 매우 유익한 박물관이다.
.조양 우순사(朝陽佑順寺)
우순사는 조양시 노성구에 위치하고 있다. 청 강희37년인 1698년 건립되었으며 강희황제가 우순사라 이름을 지었다. 강희황제가 성경(심양)의 황제릉에 제를 지내기 위하여 북경을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 조양에 들려 중간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점지면적은 1만여평방미터로 건축면적은 4,100평방미터이며 현재 조양시 박물관으로 겸하고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남북방향으로 산문(山门),천왕전(天王殿),경각(经阁),대웅보전(大雄宝殿),경의전(更衣殿),후전(后殿)등이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희루와 관제묘(戏楼和关帝庙),종고2루(钟鼓二楼),동서배방(东西配房),동서배전(东西配殿),동서경당(东西经堂)등이 있다.
사원의 경각장(经阁藏)에는 400여종의 진귀한 경전이 있으며 매년 6월15일이면 부근의 사찰화상들과 불자들이 모여 묘회를 지내며 1988년 요녕성의 중요문물보호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양남북탑(朝陽南北塔)
조양 북탑은 조양시 쌍탑가 북단에 남탑과 마주보고 있다. 조양시내에는 삼탑이 정립하고 있는데 속칭 동탑,남탑,북탑이라 하며 북탑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웅장하다.
동북지역에서 제일오래된 고탑으로 13층 밀산식 전탑이며, 높이가 42.6미터이며 탑의 사면 넓이는 20미터,각층높이는 5미터,남면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으며 탑신의 사면은 공통적으로 8탑8비 12불이 새겨져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오호16국위 전연,후연,북연이 지금의 조양에 도읍하고 용성이라 했다. 북위에게 망한 연나라 손녀가 북위의 황태후가 되어 연나라를 생각하며 효문제 태화(477~490년)연간에 세웠다. 수문제 인수(仁寿)연간에 밀산식전탑(密檐式砖塔)으로 중건하여, 보안사탑(宝安寺塔)으로 불렀으며, 당천보(唐天宝)연간에 새롭게 중수(曾修)하였다.
요대 중희(重熙)13년에 수리를 하고 연창사탑(延昌寺塔)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북탑으로 이름이 불리워지며 새롭게 수리로서 보완을하였고, 조양북탑은 동북지구의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많은 국내외인들이 찾는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조양북탑
조양남탑
.금주시(錦州市)
이 지역을 우리는 고조선 문화의 원류라고 하며 중국은 중국문화의 원류라 하는 곳으로 중국12대 명산인 의무려산은 광개토대왕시대의 부산으로 추정되며 의현에는 고구려시대 대능하가 있으며 북위,요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여 중국북방의 불교성지로 불리우며 오래된 많은 불교유적들이 있다.
.위치 : 중국 요령성 서남부 요령성에서 심양, 대련, 안산, 무순, 본계시 다음으로 6 번째로 큰 도시
.인구 : 300만(도심인구 80만) .면적 : 10,301㎢(파주시의 15배)
.민족 : 20여개 소수민족(만주족, 몽고족, 회족, 조선족등) 한족이 95%차지
.기후 : 온대대륙성 계절풍기후 연평균기온 9.1℃ 연강수량 600m
.자연지형:북부는 낮은산의 구릉지역으로 과일이 풍부하고 남쪽은 발해만을 접하고 있어 드넓은 평원에 양곡이 풍부하고 광활한 해산물양식지구가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함.
.역사배경:"徒河"로 불리다가 遼代에 금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1954년 요서성정부 소재지에서 요녕성으로 편입
.행정구역 : 2개 현급시와 3개 현(1개 자치구), 4개 구(1개 경제개발구)
凌海,北寧, 義縣, 北鎭滿族自治縣, 凌和區,古塔區, 太和區, 經濟技術開發區
.금주지역은 수당시기 여라수착성,로하진이였으며 고구려주민과 고구려의 별종인 속말갈인이 생활하였다. 근래에 대량의 고구려 유적이 출토되어 이지역의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盖因此地区其时为高丽别种——粟末靺韍人生存空间,后世有大量高句丽遗物出土,可谓佐证)
.상기 고구려유물의 대량출토로 금주지역은 고구려,발해,고려의 영토임이 입증되었으며 보제사(대광제사),북보타사의 건립년대로 보아 고구려.고려불교 유적임을 알수 있다.
송나라시대 고려를 방문하고 고려도경이란 책을 쓴 서긍의 설명에 의하면 고려의 수도는 산동성의 등주,래주,빈주,체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명주(영파)에서 동으로 가다가 북으로 올라가면 고려수도가 있는 해안에 도착한다 하였으며 광통보제사와 안국사라는 대표적인 큰사찰이 있다 하였다. 또한 도성은 평지로 되어 있어 번성하나 외적이 침범시 방어하기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금주의 대광제사의 원명은 보제사이며 금주지역은 거의 평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00년대초의
금주사진들에 의하면 금주외곽이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성임을 알수 있다.
아마도 고려수도인 개경이 금주일 가능성이 많다.
금주시 전경
.대광제사(大光濟寺)와 금주요탑(錦州遼塔),금주박물관(錦州博物館)
원명은 보제사(普濟寺),대광제사 또는 대불사로 불리우며 고탑구 구성의 부쪽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내 명비는 요나라때 건축되었다가 원나라 말년 전쟁으로 훼손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에 재건을 하였다. 사찰의 건축물은 밀집되어 있고 장방형으로서 불전,배전,천왕전,비정등이 있으며 주요건축인 불전은 목재건축물이고 현재불상은 존재하지않는다. 사찰동쪽에는 중일전쟁시 희생된 열사들을 위하여 건축된 조충사가 있으며 동쪽의 천후궁은 해방후 보수하여 지금은 금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금주요탑은 대광제사앞에 있으며 요나라시대에 건축되었으며 1507년에 황후의 사리를 보존하였다.
탑의 높이는 57m,13층 8면으로 되어있다.요서에서 제일 높은 탑으로 금주고성의 상징으로서 웅장하고 아름다움은 역사와 예술부문에서 가치가 뛰어나다.
금주박물관은 금주시의 고탑역사문화공원내 북측에 있다. 으며,초기이름은 요서 성지지박물관준비처소속 지방종합 성박물관으로 금주시박물관은“광제사고건축군”내에 1953년 설립되었다.
다년동안 수리와 복원을 통해 2001年6月“광제사고건축군”은 전국중점문물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박물관 보호사업을 위하여 2000년 시정부예산 인민폐 천여만원을 투자,고건축군의 정비와 금주시박물관 신관사를 신축하여 면적 13,00여 평방미터의 박물관과 광제사탑 고건축군을 2001年12월 정식개관을 되었다.
금주시박물관 개관후 많은 문화재들이 전람되었다.
소장품들은 시대별 도자기,청동기、서화등 16대류등으로 만여건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도 국가 이급문화재 문물이 많이 있으며 기타 국가문화재급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금주시박물관 보관,진렬된 문화재와 주자료는 공룡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많은 유물로 1억3천만여년전의 많은 공룡계역과 어패류, 목류,초류등의 화석, 신.구석기의 돌무기와 농기,청동기시대의 동검 및 제작물품, 철기시대 각왕조별 유물들과 문화재가 있으며, 많은 문서류등도 이곳지역이 유구한 역사의 문화,문명이 발생하고 융성한 지역임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요서고생물화석 출지역으로서 보물같은 많은 화석군과 청나라 도광시대의 문물들은 금주문아박물관의 소장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今锦州隋代时建普济寺(即大广济寺前身),唐武德元年建北普陀寺.(금주 지방지 기록)
(현재의 보제사(즉 대광제사 전신)는 수나라시기(581~618년)에 건립되었으며,북보타사는 당무덕원년(618년)에 건립되었다) 대광제사의 고탑은 북진의 숭흥사쌍탑과 탑의 형식이 같다.
대광제사
.의현(義縣)/옛 이름 의주(義州)
의현은 요녕성 금주시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진의무려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2,482평방킬로미터이며 초인구는 44만명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예부터 요서고도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거점역할을 해왔다.
민족의 구성은 한,만,회,조선족등 15개민족이다.
대릉하를 끼고 있으며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규석,갑장석,철광석,수정등 동부지역에 많으며 금,은,중정석,형석,백운암등은 서부지역에 많고,중부구릉지역에는 많은 매장량의 석탄을 보유하고 있다.
대소하류는 많은 건축자재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의현은 한나라시기에 설립된 고대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고구려시기 중국과 고구려의 접경지역으로 고구려 서쪽의 방어선으로 중요한 지역의 역할과 정치,경제,문화의 주요 거점도시기도 하며 고대의 불교유적은 이지역의 발달한 문화의 발자취를 알게 한다.
만불당석굴과 광승사(가복사),봉국사 의주칠존대불은 그역사적가치가 매우크다.
의현은 금주시 관할 현급도시로 금주시의 동북쪽 6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동쪽의 북진시와 60킬로미터 접해있어 3개 도시는 매우 밀접한 관계속에 특히 불교문화가 잘 발전된곳이며 추정컨대 유적의 건립년대로 보아 고구려의 영토로서 불교문화가 융성했던곳으로 사료된다.
.봉국사 의주대불(奉國寺 宜州大佛),화석박물관(化石博物館)
봉국사는 금주시 의현성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나라개태9년(1020년)에 지어졌고 전내에 7존의 대불이 있어 대불사라고도 불린다. 봉국사는 산문,비방,무량전,종정,비정,대웅전,서궁선원등 고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이 3만평방미터로서 웅장하고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사찰이다. 대웅전은 건축면적1,800평방미터,9개의방,길이 55미터,넓이33미터,높이가 24미터로서 현존하는 요나라시대의 최대목조사찰로서 대웅전은 중국에서 규모와 면적면에서 최대이다. 봉국사 대웅전에는 채색불상인 과거칠불이 있는데 흙으로 빚어진 불상으로 현재 불교계에서는 유일하다. 불상은 거대하고 장엄하며 천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국내외 불교계에서 특수한 영향력과 지명도가 뛰어나다. 대웅전의 건축과 유물,채색불상은 역사적인 가치와 예술적가치면에서 뛰어나기에 중국불교계의 보배로 숭상되며 중국의 유명한 불교성지로 많은 신자들의 순례가 발길을 끊이지 않는 금주의 자랑인 사찰이다.
(이곳 또한 고구려,고려의 영토로서 고구려시기의 사찰이 아닌가 사료되며 북진,의현,금주로 이어진 불교양식의 동일성을 보이고 있으며 근처의 광승사(구명 가복사)탑은 발해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广胜寺塔塔高四十四米,建于公元八百九十九年,距今已一千二百余年(광승사탑은 높이가 44미터로 899년(발해) 건립되었으며 1,200여년의 역사이다)/현 지방지
또한 이곳지역은 고생대에 이루어진 지역으로 공룡시대 활발한 활동을 한 고.중생시대의 공룡,조류,어류,패류등 많은 생물 화석들이 존재한곳으로 이곳 지방에서 출토된 많은 화석들을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의현 의주화석박물관/1억2천만년~1억3천만년전의 고생물화석박물관으로 공룡화석,공룡알,어패류,파충류,곤충류,목화석등의 다양한 화석들의 전시관이다.
.만불당석굴(万佛堂石窟)
만불당석굴은 금주시 의현성 서북쪽에 위치한 대릉하북쪽의 절벽에 있다. 석굴은 동서로 양분되어 있으며 동굴이 16개가 있고 길이 60m,높이 20m의 거대한 암석에 석불이 새겨져있다. 만불당석굴의 서구는 북위태화23년(서기499년),동구는 북위경명3년(서기502년)에 영주자사(현조양) 원경이 효문황제와 자기권속들의 복을 빌기위해 세워졌으며 1,500년의 역사는 요녕성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큰 석굴이다. 서쪽의 경구는 9개의 석굴이 상하2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층에는 3개석굴,하층에는 6개의대표적인 제1석굴은 굴문이 3개 있으며 높이5m,길이7m로 정면에는 불광보조(拂光普照)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굴문에 들어서면 2~3명이 함께 거닐수 있는 복도가 있으며 백여명을 수용할수 있는 굴실이 있다. 석굴내의 벽면에는 천자백태의 불상군이 있으며 석굴내의 모든벽면이 전부불상이어서 만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쪽의 경구는 7개의 석굴이 있으나 모두 풍화되었으며 다섯 번째 석굴에는 한정조상제기(韓貞造像題記)새겨져 있고 동구산정에는 명나라시대(1474년)에 건축된 원형의 소탑이 있다.
또한 근래에 강에서 철제 천왕상이 발견,전시되어 있으며 석굴이 건축된 시기 이 지역은 고구려 영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불당석굴
.북진시(北鎭市)
중국 역사서 주례《周礼》의 기재에 의하면 중국에는 5대 진산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동진청주기산,서진옹주오산,남진양주금계산,북진의무려산,중진기주곽산을 5대진산이라 칭한다.
(东镇青州沂山,西镇雍州吴山,南镇杨州金稽山,北镇医巫闾山,中镇冀州霍山 合称五座镇山) 또한 의무려산은 요순시대부터 중국 12대 명산중의 하나로 칭하였다.
북진은 한나라시기에 무려현, 당나라시기엔 무려수착등 의무려산의 명칭으로 지역명이 불리워졌다.
의무려산에는 많은 명사찰들이 곳곳에 보존되어 이 지역민들과 주면 지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현재 북녕(北寧)에서 북진으로 이름이 바뀐 광녕(廣寧)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감시하는 중요한 군사기 지였다. 순무(巡撫)와 총병(摠兵)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성곽 위에는 창검과 깃발이 늘어서 있어 조선 사신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광녕성 한가운데에는 이성량(李性樑)의 패루(牌樓)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량은 16세기 후반 요동 지역을 책임졌던 군인으로 그 할아버지는 죄를 짓고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 사람이었 다. 이성량의 아들은 이여송(李如松)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에서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패루는 문(門)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로 용이나 호랑이 등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이성량이 오랑캐를 정벌한 공을 기려 세운 이 패루는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신들이 꼭 둘러보는 명물 이었다. 광녕의 북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 또한 조선 사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북진시는 1995년 북녕시로 명칭되었다가 2006년 북진시로 옛 명칭을 찾게 되었다.
.숭흥사 쌍탑(崇興寺双塔)
선탑쌍표 禪塔双標 라고도 불리우는 승흥사쌍탑은 금주시 관할의 북녕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요(遼)나라와 금(金)나 라 시기에 건립된 2개의 자매탑으로, 8각형의 전탑(8각면에 불상조각)이며, 탑 모양도 같고 층수도 13층으로 같다.
동서 방향으로 43m 떨어져 있다. 모두 벽돌로 쌓은 쌍탑은 밀산식구조로서 하부의 탑받침돌은 탑신을 보호하기 위해 후 세에 증건하였으며 매층마다 조각한 꽃무늬가 다르다. 제하층에는 부증력사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에는 두공이 있 으며 두공에는 곡수,만자란반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의 돌계단에는 동으로된 거울이 3면에 있으며 다양한 각종 조각들이 새겨져있다. 쌍탑의 보존상태는 매우 완전한 상태이다.
탑의 북쪽에 숭흥사[崇興寺]가 있어 숭흥사쌍탑이라 불린다. 동쪽에 있는 탑은 높이 43.8m이고, 서쪽에 있는 탑은 높이 42.7m이다. 탑 아래의 수미좌(須彌座)에는 벽돌 재질의 두공(斗拱)과 난간, 앙련(仰蓮)이 장식되어 있다. 난간에는 '萬(만)' 자를 비뚤어지게 새겨놓았다. 수미좌 허리 부위의 모퉁이마다 조각된 역사(力士)는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제1층 탑신이 높고 2층 위로 올라갈수록 처마가 좁아지는 밀첨식(密檐式) 탑으로, 제1층 탑신의 정방향 4면의 중앙에 벽 돌로 아치형 불감(佛龕)을 만들고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조각해놓았다. 불감 밖의 양쪽에는 보살이 서 있고 그 위에 보개(寶蓋)와 비천상(飛天像)을 장식하였다. 제1층 탑 처마 밑에는 벽돌로 두공을 장식하였다. 제1층 탑신을 제외한 각 층 에는 내물림 구조로 처마가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탑찰(塔刹)의 연좌(蓮座)·보병(寶甁)·찰간(刹竿)·보주(寶珠) 등은 지금까 지도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숭흥사쌍탑은 중국 요나라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비정하나 역사서인 금주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당정관18년 (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그시기 이곳은 고구려의 통치지역으로 고구려불교양식으로 추정되는바 전문가들의 지세한 조사 가 필요한 부분이다.
(중국 사서 기록)
清康熙年间广宁(今北镇)知县张文治在《广宁崇兴寺复修记》碑文中写道:“寺建于唐贞观十八年,太宗征高丽旋师命尉迟敬德监修,并建浮图二座。
在北镇曾流传一首民谣:“唐修塔,朱修圈,大清家修佛殿。”也表明塔是唐朝所修。
(청나라 강희황제때에 장문치의 광녕숭흥사 복수기의 비문에는 사찰은 당태종 18년(644년)에 건립되었고 2좌의 탑이 있으며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시 지경덕이 감수하였다.
북진의 전래 민요에 의하면 당조시에 탑을 건립.
※ 광녕현지(廣寧縣志/(清)張文治)
誓臺: 【 城東三十里唐太宗征高麗築以誓師】
(당태종이 안시성을 함락하면 성내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맹세 한곳)
唐壘: 【 城東南三十二里唐太宗征高麗駐兵於此今名高麗坂】
(당태종이 안시성을 살펴보던곳)
광녕현지의 역사 기록으로 살펴보면 광녕(현 북진)의 동쪽(우측)에 안시성이 위치함으로 북진지역은 고구려가 다스리던 곳이 었으므로 숭흥사쌍탑은 고구려의 불교양식으로 사료.
중국 백과/应在辽代清宁~天庆年间(1055~1123年)所建(요대 11055~1123年 건축).
북진 숭흥사쌍탑
.북진신사/북진묘(北鎭神詞/北鎭廟)
북진신사는 요녕성 금주시관할 북녕시의 서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거리 240m, 동서거리 109m,면적26,000평방미터로서 중국5대 진사묘중 유일하게 완전 보존된 고건축 산신묘로 수나라시대(594년)에 건축되어 여러차례 중수되었다(그러나 순임금시기의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한다).
주요건축물들은 갈산식목재구조로 지붕은 유리와로 되어 있으며 산세에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배열되어 있다. 신사묘뒤의 동북각은 4m높이로 청나라 건륭황제가 장기를 두던 곳이기도 하다. 서북쪽에는 천연기석으로 된 병풍같은 취운정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바위를 보천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북진신사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신의 보호를 기원하였다.
북진신사가 위치하고 있는 북진묘는 금나라때에 재건되었으며 명,청대에 재건과 확대건설되었으며 역사적 예술가치가 인정되어 1988년 중국의 중요 문물보호단위로 지정,공포되었다.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북녕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선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청나라 건륭제가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조선학자들이 남긴 무수한 흔적은 청의 건륭제가 의무려산을 여러차례 둘러본 뒤 지은 `무술어제의무려산사영'이란 시에서 “산위에 새겨진 많은 조선인의 글들, 발해·고구려·기자의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네”라고 읊은 데서도 입증된다. 이 비석은 현재 의무려산에서 2㎞ 떨어진 북진묘내 비림에 남아 있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령을 모시는 도교 사원이다. 연암도 이곳에 들러 두루 살피면서 북진묘를 보고 "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정교함이나 조각의 세밀함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복을 기원한 말들이다."고 했다. 의무려산은 요동벌이 끝나는 곳에 우뚝 솟아 고대 순임금 시절부터 청나라에 이르기 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전국 열두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북진 시내는 명나라 장수 이성량의 패루이다. 이성량은 본래 조선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20년 동안이나 요동.요서 지역의 군벌로 군림했다. 임진왜란때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은 그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명나라 200년 역사상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명나라 장수가 된 인물로 만주 전역의 군사권 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던 총관이었다.
.북진묘비림(北鎭廟 碑林)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북진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선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청나라 건륭제가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북진신사(북진묘)
의무려산 천제혈/천제를 지냈던 곳으로 100여명이 들어갈수 있는 공간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
고조선과 고구려,조선시대 연행사들의 혼이 담긴 의무려산(醫巫閭山)
의무려산은 그 이름 자체가 이채롭다. 의(醫), 무(巫)는 모두 '무당' 또는 '치료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만주어로는 '크다'(大)는 뜻이 된다. 굳이 새기자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열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였다. 아울러 장백산(長白山).천산(千山)과 더불어 중국 동북지역의 3대 명산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한편 고구려의 옛 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연행사들은 이래저래 옛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이산을 탐방하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구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부산(富山'이 의무려산이라고 한다. 광개토대왕이 거란족을 치기 위하여 이곳 의무려산을 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곳까지 고구려가 지배했다는 뜻도 된다.
조선 연행사로서 처음 이 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 이정구(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여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 김창업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에 올랐다. 김창업은 의무려산에 오른 감상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을 하였고, 샘물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틈으로 난 나무 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옛터로 올랐다. 특히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의 남쪽에 있으며, 예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실제 현재도 1만 그루도 넘을 복숭아가 농원에 즐비하다.
김창업 이후 50년이 흐른 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이 산을 또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소설을 남김으로써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가 됐다.산의 입구에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친필로 '醫巫閭山'이라 새겨진 웅장한 돌기둥을 만날 수 있다.
의무려산 중턱까지 올라 성수분(聖水盆)에서 케이블카(閭山索道)를 타고 왼쪽 능선을 넘으면 옥천사(玉泉寺)에서 남쪽으로 아스라하게 바라 보이는 발해(渤海)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자그만 정자에 앉아 백두산, 천산(千山)과 함께 중국 동북 3대 명산이라는 의무려산의 절경을 감상하며 오랜만에 한가한 한 때를 보낸다. 음산(陰山)산맥 의 가지인 이 산은 길이 45㎞, 넓이 630㎢이고, 이름난 봉우리만도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요순 때부터 12대 명산의 하나로 불렸다. 이 산이 신령한 산으로 꼽혀 절, 문묘, 전각, 정자 같은 것들이 많이 지어졌고, 산기슭엔 북진고성도 있다. "황산의 기묘함(黃山之奇), 아미산의 수려함(峨嵋之秀), 태산의 웅장함(泰山之雄), 계림의 아름다움(桂林之美)을 모두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이곳은 이제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동호족 말로 의무려란 말은 크다는 뜻이라고 한다. 의무려산은 중국12대명산으로 수나라때는 "광녕공", 요.금나라때는"광녕왕", 원나라때는 "정덕광녕왕", 명나라때는 "북진의무려산지신"으로 봉해져 불리워졌다.
대릉하와 요하사이에 위치한 험독과 의무려(醫巫閭)는 <한서>에 함께 기록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현(縣)이름으로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의무려’를 탄생시킨 ‘의무려산’은 하나의 독립된 산이 아니고 남북으로 길게 연이어져 있는 산줄기로 마치 중국대륙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을 막아 주는 울타리역할을 할 수 있게 지형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산의 형태가 마치 금강산처럼 흰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흰바위산’으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줄기이다. 즉 의무려산줄기는 기자, 위만조선의 험독을 막아주는 주산이며 자연 성벽이라 할 수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도읍을 정하였다는 전설적인 지명인 아사달은 평양과 구월산설이 있다. 단군은 처음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백악산(白岳山)으로 옮겨 1,5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 뒤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 또는 莊莊坪)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아사달은 ‘왕이 있는 대읍(大邑)’이라는 뜻으로 평양과 의미가 유사하다’ 고 기록되었으나 하가점하층문화의 발굴결과나 기자, 위만조선의 유적과 고대기록을 상고, 검토해 보면 ‘백악산 아사달’의 적지는 의무려산으로 추정된다.
의무려산의 주요풍경구는 관음각풍경구와 대조양풍경구이다.
대조양의 뜻은 아침해가 가장 일찍뜨는곳이란 뜻으로 순수 우리말로 “아사달”이다.
의무려산은 온산이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져 하얀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대조양과 백악산아사달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많은 사람들은 요녕성 조양을 아사달이라 한다. 조양이란 지명이 아사달이란 뜻이기 때문이고 조양의 주변지역에서 구석기와 청동기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양시의 명칭은 명대이전에는 없었고 명나라 후반대부터 조양이란 지명을 사용했다.
의무려산의 대조양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지명으로서 참된 백악산아사달로 추정된다.
대조양구에는 상중하 삼청관이 있으며 그곳에는 천신을 모시는 사당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천신은 바로 우리의 조상, 환인이 아니던가
또한 의무려산이 있는 북진시에는 천신을 모시고 천제를 지내는 북진묘가 있으며 중국에서는 수나라시대인 594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그보다 훨씬이전에 존재했음이 지역의 자료들에 의해 밝혀져 연구가 필요한 입장이다.
중국 연행사신들은 북경으로 오가는 왕복여정 중에 광막한 평야에 불쑥 솟은 의무려산에 올라 지친 심신을 달래며 느낀 감회와 탄성을 기행문과 기록에 담아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인 주나라 때 동북방의 진산(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수나라 때 북진묘가 들어선 뒤 명나라 때 `북진의무려산지신'으로 봉해졌으며, 청대까지 나라의 제사를 지낸 곳이다. 또한 당나라 때인 8세기께부터 불교사찰이 본격 들어서면서 신성한 터로 자리잡았고 북진현내에 있는 숭흥사쌍탑은 중국 요나라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비정하나 역사서인 금주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당정관18년(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그시기 이곳은 고구려의 통치지역으로 고구려불교양식으로 추정된는바 전문가들의 지세한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무수한 중국 시인들이 의무려산의 수려함을 노래했다.
의무려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선조 7년인 1574년 조선학자 허봉(1551~1588)이 중국을 방문한 뒤 쓴 `하곡선생조천기'에 남아 있다. 이후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중 한명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월사 이정구(1564~1653)가 1604년 세자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한 뒤 중국 문인들의 요청으로 간행한 `조천기행록'과 `백사선생집' 속에 도화동 유람기를 쓰면서 연행사신들에게 본격 소개됐다.
의무려산중국싸이http://www.lvshan.co/
의무려산 전경
.여순(旅順)과 여순감옥(旅順監獄)
여순구는 인구가 25만명, 면적은 500㎢, 석회석, 규석등 지하자원 풍부하고 항만시설이 발달되었으며 중국 해군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러.일전쟁의 해상격전지이도 하다. 대련 시내에서 약 46km 떨여져 있고버스로 2시간정도 달리면 여순감옥에 닿을 수 있다.
여순감옥은 여순구구(旅順口區) 원보방(元寶坊) 향양가(向陽街) 139호에 있다. 1902년 짜리러시아가 건축하였으며 1907년에 일본군이 확대 건축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이 여순을 점령했을 때 두번 공사를 거쳐 지은 건물이며 많은 사람 잔혹 하게 학살한 장소이다. 까만색 벽돌과 빨간색 벽돌로 구분되였는데 까만색은 러시아가 지은것이고 빨간색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여순감옥은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85실만 짓고 중단했으며 전쟁시 잠시 야전병원 과 군대병영 장소로도 쓰였었다.
일본군이 여순을 점령후 감옥이 작다고 생각해 러시아가 지은 기초상에서 253칸으로 증축했으며 동북지대에서 제일 큰 감옥으로 변하였다. 감옥 주위에는 4미터 높이, 725미터 길이의 홍색 벽돌로 싼 담이 있으며 점유 면적이 26000평방미터가 되어 2000명의 죄수를 수용할수 있었다. 수감된 죄수는 다수가 당시 정치범, 사상범과 경제범이며 일본사람 과 한국사람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조선민족 영웅 안중근의사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조선통감인 이또히로부미를 하얼빈 기차역에서 암살했다. 안중근의사가 체포된후 이 감옥에 갇혀있었으며 이곳에서 사형을 당했다. 당시 32세 밖에 안 되였으며 사형당시 조선민족 복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개를 보여주었다.
사형 집행 전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아들(준생,베네딕도)을 성직자로 키워 주기를 유언했고, 또한 2천만 형제 자매들이 교육과 실업에 힘써 국권을 회복시키며, 성직자들은 민족복음화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냉담한 교우들에게 신앙을 독려할 것을 당부했으며,“대한 독립 만세”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른 후 순국하였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문필가, 역사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살다간 ‘지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의정원(議政院, 현 국회)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등과 갈등을 빚게 되자 임정을 떠나 이후 언론활동과 각종 조직 활동에 나섰다.
1925년경부터 아나키즘을 신봉하기 시작한 단재 선생은 1927년 좌우합작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기륭항(基隆港)에서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이곳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2월 21일 이곳에서 결국 옥사하셨다.
현재 많은 한국사람이 여순감옥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여순감옥은 일본통치시기 1000여명이 갇혀 있었으며 많을 때는 2000명을 초과했다. 평균 15평방미터되는 감옥에 칠팔명 내지 열명이 갇혀있었다. 감옥안에는 중국어, 조선어, 일어로 감옥규칙을 써서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 내용은 "벽에 기대지 말 것, 마주보지 말 것, 서로 이야기 하지 말 것, 밖을 내다 보지 말 것"이였는데 규칙을 위반했을 경우는 추가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감옥 동남쪽에 사형실이 있는데 독립된 2층건물이며 밖으로는 보통 건물과 차별이 없다.1942년부터 1945년 8월에까지 700여명 항일투사를 처형했던 곳이다.
.여순박물관(旅順博物館)
여순박물관(旅順博物館)은 약 10만여점의 주요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예술박물관이다. 원래 제정러시아의 육군장교클럽이었던 곳이다. 1917년에 일본에 의해 박물관으로 변경된 건축물 내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비롯해 목조 바닥과 높은 천장 등 건물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웅장한 건물 내부에는 청동그릇들을 비롯해 회화, 도자기, 옥공예품, 동전·화폐, 불상, 법랑, 서예작품들이 고루 전시되어 있다. 볼 만한 유물로는 청동기에 새겨진 갑골문자와 기원전 206년에 사용되었던 만두찜통처럼 생긴 청동요강과 송나라 때 사용하던 ‘쌍용세’라는 용의 조각이 새겨진 청동안마세숫대야를 꼽을 수 있다. 2층 마지막 전시실의 신지앙(新疆) 출토 문물전에는 신지앙에서 발굴된 1천3백여년 전의 남자 미라 여섯 구가 전시되어 있다.
.영성자민속문화촌(营城子民俗文化村),박물관(博物館)
위치/요녕성대련시 감정자구 영성자진 영성자촌.
대련시 감정자구에 위치한 영상자는 유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주거한곳으로 사평산,
문가둔,한묘,영흥사등 역사고적들이 존재하며 대련시 서부20킬로의 영성자 중심에 있다.
영성자 지역은 바다에 접해있어 물산이 풍부하고,경치가 수려하며 주거하기에 편리한 지형으로 역사적으로 발전된 문명을 지니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민속풍정과 풍부한 물산은 이곳의 특색이다.
당나라시기에 건립된 영흥사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으며 대련시 서부20킬로의 영성자 중심에 있다.
관내에는 수령이 1,300여년으로 높이가 30여미터,직경,2미터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동북수왕으로 불리운다. 주요 유적으로는 영성자한묘가 있으며 동한시대 벽화묘이다.
촌내에있는 영성자민속박물관은 이곳지역의 역사자료,민속자료,불교유적등이 보존된 역사문물관으로 수백여가지의 진귀한 문물,공예품,민속물품사진등 영성자의 역사적사실을 한눈에 볼수 있다. 박물관의 면적은 2,300평방미터이며 관내의 동쪽에는 군사,민속박물관으로 역사,유물,민속,문화예술과 24가지의 예술진품과 유구한억사 자료집이 전시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당나라시기 건립된 불교유적인 영흥사로 수관음과 해관음,용녀,백일관음등이 있다.
.영성자고려박물관(营城子高麗博物館)
대련시 영성자민속촌내에 2011년 개관했으며 3,000평방미터의 대지에 전시관이 800평방미터이며 고려관,조선관등 5개의 전시관에 2,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려박물관의 관장은 황희면씨로 수년간 중국에 머물며 우리의 역사유물을 수집하여 이 박물관을 개설한 대단한 애국 역사학자이다.
아래는 동북삼성 주요신문(흑룡강신문, 료녕신문)에 실린 관련기사이다.
료녕성 대련영성자민속박물관내에 있는 대련고려박물관이 5월 22일 개관식을 가졌다.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시기의 문물을 국내에서 전시하는 것이다. 이날 대련시 문화국 책임자, 대련시 조선족지명인사들이 개관식에 참가했다.
총 3000평방미터의 영성자민속박물관에 자리잡은 고려박물관은 전시면적이 800평방미터로 고려관, 조선관을 비롯해 다섯 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무려 2000점의 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개관식에 참가한 북경 중박아(中博雅)문물감정중심의 주복충주임은 “소장품들은 문물가치와 력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문물들이 국내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중한 문화동원(同源)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본관의 황희면관장(한국인)은 20년전부터 애호로 고려시기 문물을 소장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는 본격적으로 문물발굴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전시된 문물은 중국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련시영성자민속박물관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고려특별전시관을 설치, 5월 22일 대련시 문물국 및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의 해당 책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전시관에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전,가깝게는 100년전까지의 문물들이 2000여점 진렬되여있는데 조선관, 민속생활관을 비롯해 5개의 전시관으로 되여있다. 그중에 고려청자와 고려백자, 청자삼본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9층탑, 24효 등 진귀한 문물들이 수두룩해 관람자들과 학자들의 관심을 자아냈다.
특히 전시된 문물을 수장애호가인 황희면(한국인)관장이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발굴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커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92년 중한수교후 중국에 와 학교를 꾸리고 생활가이드 잡지를 출판하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문물을 모아두기 시작, 장장 20년동안이나 문물발굴에 정력을 쏟았다. 그 문물을 중국에서 전시하는 목적은 문물을 매개로 중한우의와 교류를 촉진하자는데 있다고 황희면관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개관식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에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 우복충(牛福忠)주임은 전시관을 돌아본후 적지 않은 문물들은 처음 보는것이라고 하면서 력사적 가치와 연구가치가 있다고 관람소감을 털었다.
.기타 참고자료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대부분의 문물,유적들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신임을 받던 조박초는 불교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모택동에게 승인을 받아 사찰중 조박초의 친필을 표시한곳은 파괴당하지 않아 잘 보존되어 왔다.
현재 중국의 불교는 새로건축되는 사찰은 대형화되고 있으나 대외홍보용이란 느낌을 주며 고차들의 승려는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임의 느낌을 지울수 없다.
고찰의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찰의 양식과 비슷하나 관리가 잘안돼 지저분한 생각이 든다.
특히 동북지방의 사찰은 오래된 고찰일수록 한국내의 사찰과 너무도 흡사하여 한국의 불교와 밀접한 양식임을 느 끼게 한다.
잃어버린 호국불교로서의 고구려와 발해의 불교문화, 작고 소박하지만 우리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문화를 접할수 있는 기회가 저 웅장한 이민족의 남방불교를 찾는이들에게 중국 요서,요동지역의 불교문화 탐방은 잃어버 리고 잊혀졌던 전통의 고구려,발해,고려불교를 다시금 느낄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동,요서 북방고토의 고찰의 기록들을 살펴보건데 중국 한나라시기에 건립된 사찰들이 눈에 띈다.
특히 요양의 광우사의 역사기록에는 처음 건립이 동한시기(중국 동한 시대-AD 25~220년)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알고 있는 삼국의 최초 불교전래는 고구려의 소수림왕372년으로 되어 있다.
广佑寺遗址位于白塔公园内。史料记载,该寺建于东汉,是佛教传入中国后最早出现的寺院之一
(광우사유적지는 백탑공원내 있으며 사료에 의하면 동한시기에 건립되었으며 중국불교전래의 최초기의 사원중 하 나이다-중국 불교초기의 사찰이 요동지방에 있다?)
그 이전에 삼국의 영토에 불교사찰이 건립되었다 하니 불교전래의 시기는 앞당겨져야 함이 옳지않은가 사료된다.
※북방고토의 불교유적에 대한 참고문헌
0.만주지방의 불탑
층마다 처마 귀퉁이 마다 물들통만한 풍경을 달았는데 바람이 불면 풍경 소리가 멀리 요동벌을 울린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탑(요양백탑)은 唐의 위지경덕尉遲敬德이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혹자는 漢나라 때의 仙人 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천 년만에 학을 타고 고향인 요동에 돌아오니 성곽과 백성들이 옛 것이 아니어서 슬피 울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 탑이 그가 와서 머물던 (큰 길거리나 고을 앞과 같은 곳에 세우는) 華表柱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요양성 밖 10리도 못되는 곳에 있고 그렇게 높고 크지도 않으므로 잘못된 말이다. 백탑이라 함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백탑의 남쪽에 옛 절인 광우사(廣祐寺)가 있는데 구경 온 만주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나라 때 지어진 절로 당 태종이 위지경덕(尉遲敬德)으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였다고 한다. 절의 碑文을 읽어보니 강희 27년(1688)에 태황태후 내탕고의 돈으로 세웠고 강희제도 일찍이 이 절에 거동하여 비단 가사를 하사한 일이 있다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0. 遼東白塔의 조성 연대
燕巖은 白塔이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시기에 당나라 장수인 위지경덕尉遲敬德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洪淳學의 燕行歌 내용과도 같다.
李石來校註, 『紀行歌詞集-燕行歌』, 新丘文化社, 1976, 53-54면.
한편 18세기 초기 기록인 金舜協(1693-1732)의 燕行錄에는 위지경덕尉遲敬德이 개수한 것으로 적고 있고 崔康賢, 『五友堂燕行錄』, 國學資料院, 1993, 75면.
燕巖도 백탑이 있는 경내의 절인 廣祐寺는 위지경덕尉遲敬德의 중수라 하고 있어 이 탑이 唐代에 중수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遼寧省 遼陽縣志의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백탑은 遼東省 서북 半里에 있으며 13층에, 48丈 5尺 3寸의 높이이다. 남쪽에 廣祐寺가 있는데 天聰 9년(1635)의 重修碑記에 의하면 절과 탑이 漢代에 함께 조성되었으며 尉遲敬德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斐煥星修, 白永眞纂, 『遼陽縣志』, 成文出版社有限公社, 1928(영인), 301면.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뚜렷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이나 유적들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 즉 구전에 기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燕巖의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遼陽縣志의 기록도 17세기의 碑文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초, 이곳의 유적을 방문한 일본 학자들의 조사 기록에서도 잘 들어난다. 遼東白塔에 대한 竹島卓一의 서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竹島卓一, 『遼金時代の建築と佛像』, 龍門書局, 1943, 256-264면. 또 伊東忠太이 1905년 이 탑을 조사하여 『滿洲の佛寺建築』(明治 42년 東洋協會學術報告-東洋建築の硏究 上)에 遼·金代의 유물이라 기술하였는데 遼·金代 건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탑은 만주 本線 요양역 곁에 있어 일반 여행객들의 눈에 쉽게 띄며 백탑으로 이름높다. 그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고 혹자는 漢代 창건되어 唐代 중수되었는데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때 尉遲敬德에게 명하여 고친 東征의 기념물이라고 한다. 또 혹자는 明代 조성되어졌다고도 하는데 전설에 가까운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들은 만주 지역의 다른 유적들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탑은 2중 기단의 8각 13층으로 상륜부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높이는 76m, 기단 한 변이 10.15m로 큰 탑에 속하나 각 부분에서 파손과 후대의 보수로 원형을 잃었다. 기단과 탑신의 塼이 다른 종류이며 탑 감실 안에 있는 불상들은 모두 후대의 것이다. 특히 떨어져 있는 탑의 風鐸에는 隆慶의 연호가 새겨져 있어 明代 穆宗朝에 보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보수의 흔적은 있지만 원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은 기단의 斗 , 탑신의 菩薩·天蓋·飛天 등의 조각 장식, 옥개석 부재, 일부 평와당, 탑 남쪽 건물지에 있는 초석의 연판 등이며 이들에서 遼代의 특징이 감지된다.
백탑의 양식은 錦縣(현 금주시) 廣濟寺塔과 근사하여 두 탑은 근접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崇興寺 雙塔과 같은 유형이다.
錦縣(금주시) 廣濟寺塔은 錦州省 錦縣城內 서북귀퉁이에 있는 8각 13층 탑이다. 唐代 創建이라 전하지만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탑의 원형도 많이 변형되어 있어 원래의 양식도 찾아보기 어렵다. 『盛京通地』에 遼 道宗의 淸寧 연간에 세우고 황후가 내리신 사리를 안치했다고 하며 孫星衍의 『 宇訪碑錄』에는 碑文은 없지만 遼 淸寧 3년의 大廣濟寺塔記라는 石碑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과 초층 탑신, 기단 상부의 양식으로 보아 遼代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 책, 240-243면.
北鎭 崇興寺 雙塔(북진 숭흥사쌍탑)은 錦州省 北鎭縣 城內의 동북 귀퉁이에 마주 보고 서있는 거의 同形의 8각 13층 탑이다.『盛京通地』에 唐 貞觀 연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절 안의 石碑에도 唐 貞觀 18년 太宗의 東征 때 尉遲敬德에게 명하여 절을 중수하고 탑 2기를 세웠다고 한다. 또『東三省古蹟遺聞』에는 탑 남쪽으로 큰 절이 있고 그 절 불상 밑으로 길이 나 있어 탑 밑으로 통하는데 탑 내에는 神牌가 많으며 매 번 朔望이면 祖師가 등을 들고 들어가 분향 예배한다. 모두 唐의 東征 때 죽은 將帥들의 것으로 戰死를 슬퍼하여 탑 안에 모신 것이라 한다.
앞 책, 248-255면.
이상의 기록에서 당시 탑의 상황, 즉 여러 대에 걸쳐 이루어진 훼손과 보수의 혼란된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구전되고 있는 탑의 明代 조성 사실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세 탑의 양식이 다른 만주 지역 탑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 竹島卓一이 같은『盛京通地』의 기록임에도 崇興寺 雙塔의 경우 양식에 비추어 이를 근거없다고 하며『大明一通志』의 義州 崇興寺가 遼代 건축되었다는 기사를 끌어다 遼代 유물로 추론하고 있는 점
앞 책, 248-249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양식적 판단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저자도 이러한 모순을 느낀 듯 요탑으로서의 특색을 보이는 만주 지역의 탑들이 양식적으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전형을 축출하기가 어려우며 이것이 지방적인 차이인지, 혹은 시대적인 차이인지 단언하기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상 遼東白塔의 조성 연대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遼東白塔이 遼·金 시대 유물일 것이라는 학계의 통념과는 달리 漢代 조성되고 唐代 중수되었다는 내용이 구전되고 있고 이것이 熱河日記에 수록되었다.
둘째, 遼東白塔의 양식은 錦縣 廣濟寺塔과 근사하고 北鎭 崇興寺 雙塔의 유형에 속한다. 특히 이들 탑에 조각된 보살상의 양식은 극히 온화한 모습이 특징으로 이는 義縣 嘉福寺塔과도 유사하다. 이들 탑들은 모두 지역적으로 河北省 북부와 遼寧省에 몰려 있으며 만주지역에 있는 여러 탑들과는 양식이 다르다.
셋째, 이 중 北鎭 崇興寺 雙塔은 좀더 확실한 遼代 以前의 조성 기록과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탑들은 정치적 격변과 함께 여러 차례의 손상과 보수가 있어 다양한 시대 양식이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관련 기록들을 볼 때 좀더 세밀한 양식 고찰과 분류가 필요함을 알 수 있겠다. 즉 만주 지역 탑들의 양식 계보가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北凉 小塔의 8괘는 하늘에 제사드려왔던 중국 전통 민간신앙, 기복적 성격의 도교, 주역의 8괘 관념, 불교의 사상이 융합되어 나타났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北凉이 지정학적으로 중국 본토와 실크로드의 문물이 만나는 곳이며 4-5세기에 다른 곳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여러 요소들이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옛 요동성 곁에 있는 유구한 遼東白塔에는 遼代 以前의 양식이 남아 있거나 계승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양식은 오랫동안 요동성이 고구려 영역이었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그 유민들이 살았던 점과 高句麗 五 墳 4號墓의 8괘양식이 北凉小塔들의 양식이나 사상적 배경과 동일함을 고려할 때 고구려 양식일 수도 있다.
현재 지상 건물이 남아 있는 고구려 탑은 없다(그러나 기록으로 보아 백탑형식이 고구려의 탑으로 추정할수 있음). 이 점은 삼국시대 탑은 물론 이를 계승한 통일 신라의 탑을 연구함에 있어서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다. 역사적 유물들은 만들어진 시대의 특징을 간직하면서 때로는 지역적 양식을 계승하기도 한다. 만주 지역은 오랫동안 옛 고구려 땅이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만주 지역 탑들의 존재 의미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
※RePort.net의 "열하일기의 요동백탑" kn109276.hwp 의 실제파일에서 발췌했습니다.
0.조박초(趙樸初)/ 전(前) 중국불교협회 회장 (1907~2000)
조 박초 회장은 중국 문화혁명 시절 주요 사찰과 불교유적을 훼손하지 말도록 하는 내용의 친필휘호를 보내 불교와 불교유적을 지켜냈으며, 특히 95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중국·일본 3국불교 교류를 강조해 한중일 불교우호교류회의 산파역할을 했다.
조박초 회장은 안후이성 안경시 출신으로 동우(東吳)대학 졸업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모택동 주석 당시 공산당 서열 4위에 오르는 등 정치적 영향력도 매우 컸다.
0.조선시대불교통사의 불교전래시기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4년 혹은 5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사 기술론자들은 서기 4년으로 잡고 있다. 서기 4년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후 약 4백여년이 흐른 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불상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왕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는데 얼마뒤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하여 지금의 금강산 유점사에 점안하여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왕은 그 사실을 고을 수령 노춘으로부터 전해 듣고 절을 지어 금불상을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일이 있은후 38년이 지난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임시 궁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지 6년 후, 서기 48년 7월에 서역 중인도의 옛나라 아유라국의 공주 허황옥이라는 여인이 석탑을 싣고 바다를 거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하였다. 김수로왕은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으므로 아들 열을 낳았다.
장남인 거등은 대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석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외 아들들은 가야산에 입산케 하여 불교와 선도를 수업케하였으니 이것이 불교포교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조선시대불교통사]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