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얼 시인
단풍(丹楓)
한얼
바람 속을 걸어가다
내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
눈송이처럼 떨어져 나풀거리는
슬픈 나비를 보았다.
쓰라린 입맞춤을 남 몰래 감추며
어설프게 웃고 있는 울음
울음을 참으려다 참으려다
새빨간 피눈물을 흩날리며
죽어가는 하늘을 보았다.
일지암에서
한얼
숲 속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
**두륜봉 정상을 향해 한 발 두 발 내닫는
팔순 노인의 무거운 어깨 위에 힘을 실어주며,
휘파람을 불며 걷는 그의 등뒤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고즈넉한 언덕배기 감싸고 도는
넉넉한 햇살에 가쁜 숨을 죽여본다
발아래 보이는 세상의 뜻없는 낯설음
왠지 모르게 편안한 안도감에 빠져든다
머릿결을 스치고 유유히 사라지는 바람의
꼬리를 붙들고 울어대는 처마끝 풍경
그 청아한 울음소리 내 귓볼을 어루만진다
허기진 나그네의 손때가 묻어서인지
멋스럽게 이끼 묻은 반쪽 대나무통을
조랑조랑 타고 흐르던 약수는
저 낮은 세상 어디로 갔는지
이제껏 이 암자를 기억이나 하고는 있는지
아늑한 초가집 마루에 앉아
떡차 한 잔의 감미로운 여유를 음미한다
목줄기를 타고 흘러드는
옛 선사(禪師)의
손때 묻은 정성과 너털웃음
속에 깃든 세월
*일지암;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 속한 암자
**두륜봉; 해남군 두륜산의 봉우리
겨울 풍경
한얼
자박 자박 고양이 발자욱을 따라
샤라랑 샤라랑 솜사탕이 뿌려집니다
두무날 하이얀 달빛은 부끄러히 멀찍이
산허리를 붙잡은 채 휘파람만 불고 있다
구름인 듯 구름 아닌
엷은 안개 뭉클하게 짓쳐 들어오고
머나 먼 길 채비하던 샛바람조차
발길 떨구고 실웃음만 나풀거린다
별빛 밝게 물들어가는 한겨울의 산사(山寺)
발자욱을 따라 걷던 까까머리 동자승
흩날리는 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지척에서 재촉하는 老스님의 손짓에
깔깔대며 공양간 문을 닫는다
야! 도~ㄹ겠다
한얼
가끔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내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폐기물 처리장에 파묻어 버리고
싶은 때도 있다
가끔은
시간이란 놈을
밧줄로 꽁꽁 묶어
이 지구라는 공간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은 때도 있다
가끔은
거리에 나가
눈에 띄는 아무 가로등이나
땅바닥에 눕혀놓고
원없이 두드려 팬 다음
제자리에 거꾸로 심어 넣고
싶은 때도 있다
가끔은
이렇게 되지도 않은 글을
시(詩)라고 우기는 미친 짓을
하고 싶은 때도 있다
새벽, 눈이 내리고
한얼
별빛 내려 내 눈물로 흐르나니
가냘픈 풀잎 그 속에 잠자는 눈물
누천년 긴 세월 흐느낌 속에 살다
비바람 눈 먼 가슴에 부서지고 부서지고
그 설움 마침내
얼어붙은 눈꽃으로 날리나니
새벽을 몰고 오는 침묵의 여신 앞에
바람조차 할 말을 잃고 헤매 돈다
어두움의 장막을 살짝 들추고
새하얀 꽃망울
이 거리를 빛내나니
날리는 눈꽃 속에서 너를 본다
희미하게 떠나가 버린 너의 존재(存在)를,
떠나간 너를 애써 잊고 사는
나의 더럽고도 삭막한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