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언지하에 무생의 뜻을 안다면 시방법계, 즉 우주의 성품과 같아집니다. 이렇게 안다면 이지(理)와 일(事)에 다 통달하여 걸림이 없을 것입니다. 공부가 부족한 사람은 사에는 통해도 이에는 어두운 경우가 있고, 이에는 통해도 사에는 어두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공부는 반쪽짜리 공부입니다.
예를 들어 참선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이치를 탐구해서 깨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삼근(麻三斤)'이나 '시심마(是甚麽)'에 대해 말을 해보라 하면 잘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살림이나 사무를 맡겨 보면 못합니다. 이치를 깨달았다 해도 철저하게 깨달았으면 사에도 걸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농사를 시키든 고기잡이를 시키든 정치를 시키든 모든 일에 다 밝아야 합니다. '시심마' 하나 안 것으로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한 마다로 무생을 깨닫는다고 하였는데, 무생이라는 말에는 무멸(無滅)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겨난 적이 있어야 멸하는 일도 있는데 우리 마음은 본래 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하였습니다. 이 말 역시 속뜻으로 본다면 "나지 않는지라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마음이 나지 않으면 멸할 것도 없으니 『원각경』에 "어느 때고 망념을 일으키지 마라(居一切時不起妄念)." 하였습니다. 밥 먹고 글 읽고 절하고 참선하고 법문 듣고 하는 어느 때라도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니 쉽게 납득이 가는 소리지요. 그런데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일체 망념을 쉬어 없애려 하지 마라(於諸妄念亦不息滅." 하였습니다.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 해 놓고 또 망념을 없애려 하지 말라고 하나 잘 이애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쉬어서 없앤다고 하는 것도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망상이다. 참 생각이다 하는 이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말이나 글을 따라다니다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망상 경계에 그대로 주하면 그만이지 거기에 아는 것을 더하려 하지 마라(住妄想境不加了知)."고 하였습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 내가 망상을 일으켰나 안 일으켰나, 공부가 잘 되나 안 되나 하고 생각하면 그것이 망상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는 것이 없으면 그만이지, 또 참인가 거짓인가 하고 진실을 가리려 하지 마라(於無了知不辯眞實)."고 하였으니,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 또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 없는 그대로가 마음바탕(心地)입니다.
여기서 무생에 관련된 다른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육조(六祖)스니 때 영가현각(永嘉玄覺)이라고 하는 훌륭한 스님이 있었습니다ㅓ. 선(禪)과 교(敎)에 다 통달해서 『영가집(永嘉集)』, 『증도가(證道歌)』등을 지으신 분인데, 육조에게서 하룻밤 자고 깨쳤다 해서 '일숙각(一宿覺)'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님입니다.
현각 스님이 육조를 찾아갔는데, 초면에 합장 예배도 하지 않고 주장자를 떡 짚고는 몇 바퀴 돌다가 육조 앞에 가서 섰습니다. 육조가 "사문이라면 팔만 사천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어야 하거늘, 그대는 어찌 그리 무례한가?" 하자 영가 스님이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이 빠르다,"고 대답했습니다. 생사문제가 시급하고 세월은 자꾸 가는데 한가히 예의나 차릴 여지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육조가 "어째서 무생을 체득해 가지고 빠름이라는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가." 하니 영가는 "체득에는 생멸이 없고 깨달음에는 본래 빠른 것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음 자체가 본래 남이 없다는 말입니다.
육조가 영가 스님이 무생의 이치를 잘 알았다고 승낙을 하였습니다. 영가가 이제 가겠노라고 하직을 하니 육조가 왜 그렇게 빨리 가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영가 스님이 "무생에 어찌 빠름이 있겠느냐."고 하자 육조가 "빠름이 없다는 것은 누가 분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영가가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니라고 대답하니 육조가 한껏 긍정하면서 하루 저녁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숙각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무생의 이칠를 통달하면 이렇게 걸림이 없는 세계에 노닐게 되는 것입니다.
혜안스님의 『깨달음의 비결』중에서~
2561. 10. 11
법주도서관 불교예술방
종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