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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딕 양식
중세미술의 업적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경이로운 업적에 필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고딕양식(1200~1500 프랑스 북부中心)의 대성당이다.
고딕이라는 단어는 ‘고트족의’라는 뜻이다. 고트족은 동게르만 계통의 부족인데, 실제로는 고트족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사실 고딕이라는 말이 르네상스 시대에 붙여졌는데, 르네상스 이전의 건축물이 야만적이며, 그리스 로마 문화를 망쳤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 내려져 온 것이다. 고딕 건축은 높은 첨탑으로 인해 수직선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며 육중한 벽과 기둥보다는 갸날픈 기둥과 넓은 창을 가진 내부는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새로운 미술양식의 등장은 훨씬 큰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첨두아치, 교차궁륭 그리고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이라는 외부 버팀목의 발명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고딕양식은 건물 내부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효과를 보여주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교차궁륭-동일한 크기의 두 원통형 궁륭이 교차
플라잉 버레스트(공중부벽)-건물벽을 옆에서 받치는 빗살모양의 지지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1163~1250년 고딕 양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 1163~1250년 고딕성당
고딕양식 건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현관과 창문의 배열은 매우 명료하고도 힘이 안들어 보이며, 회랑의 트레이서리 장식도 아주 날씬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돌더미의 무게를 잊게 되며, 마치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우리 눈 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생트샤펠 대성당 창문-스테인드글라스> 1248년
첨두아치와 이중궁륭, 공중부벽으로 지붕의 하중을 견디기 쉬워지자 벽면이 줄어들고 창문이 많아지면서 창문의 시각적 역할이 증대되어 스테인드글라스가 발달
<성모의 죽음> 1230년경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현관부분
여기에는 고딕 조각가들의 전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성모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눈을 치켜뜨고 열심히 쳐다보는 사도들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애도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사도들 중의 세 사람은 전통적인 애도의 표시로 손을 얼굴에까지 들어 올리고 있다. 더욱 더 표정이 풍부한 것은 성모의 침상 곁에 쭈구리고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과 몸짓인데 이 조각가는 그녀를 평화스럽고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몸에 걸친 옷도 일찍이 초기 중세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텅 빈 껍데기가 아니며 순전한 장식적인 두루마리도 아니다. 고딕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체의 구조가 옷의 주름 아래로 보이게 만드는 잊혀졌던 고전예술을 다시 찾았다. 성모 마리아의 발과 손, 그리고 그리스도의 손이 옷자락 밑에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는 방법은 이들 고딕시대의 조각가들이 더 이상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에 틀림없다.
<수태고지와 방문> 1245~1255년 프랑스 랭스 대성당
왼쪽 두 조각상은 수태고지, 즉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의 임신을 알리는 장면이고, 오른쪽 두 조각상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을 마리아가 방문하는 장면이다.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것은 오른쪽 조각상인데 왜냐하면 옷의 주름, 근엄한 무표정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양식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왼쪽의 천사와 마리아가 입고 있는 옷은 당시(1250년대) 유행하던 옷이라고 한다. 게다가 천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웃고 있다.
<신앙> 1305년경
조토 디 본도네作 프레스코畵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조토(1267~1337이탈리아)와 더불어 새로운 장章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곧 인정하게 될 것이다. 위 사진은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여인상으로 ‘신앙’의 화신이다. 우리는 이 고상한 인물상이 고딕 조각가의 작품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환조 같은 느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그림이다. 우리는 팔의 표현에서 단축법을, 얼굴과 목에서는 입체적 표현법을, 그리고 의상의 흐르는 듯한 주름에서 깊은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천 년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토(지오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5년경 조토 디 본도네作 프레스코畵
조토 디 본도네는 비잔틴 전통에서 탈피하여 르네상스를 이끈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자연주의적 접근을 통해 조토는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을 이용해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한 인물이다. 배경에 구체적인 풍경과 건물들을 그려넣으며 회화에 배경이란 요소를 최초로 도입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성 뿐만아니라 조토는 인물의 감정과 역동적인 동작의 표현을 보여줬다. 이는 이전까지 단순히 사실 기록을 위한 도구였던 회화를 작가의 감정을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레나 예배당의 벽화 <애도>는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역동적인 성 요한의 팔 동작과 전면에 뒤돌아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똑같이ㅎ 슬퍼하고 있음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고, 배경의 산과 나무들과 각기 다른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수태고지> 1333년 시모네 마르티니 & 리포 멤미作 시에나 대성당 제단화 부분, 목판에 템페라
수태고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가브리엘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그의 입 주위에 그 말을 직접 써놓았다. 그의 왼손에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들려있고 오른손은 마치 말을 시작하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다. 성모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천사의 출현으로 매우 놀라고 있다. 그녀는 두려움과 겸허한 몸짓으로 움츠리면서 하늘에서 온 사자使者를 돌아다보고 있다. 둘 사이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흰 백합이 꽂힌 꽃병이 놓여있고, 중앙의 뾰쪽한 아치 밑에는 성신의 상징인 비둘기가 네 날개를 가진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화가들(이탈리아)은 흘러내리는 의상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느다란 몸매의 미묘한 우아함을 즐겨 그렸다. 우리는 이 인물들을 패널의 복잡한 형태 속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방식에, 즉 천사의 날개가 왼쪽 아치에 들어맞게 그렸다든다 뒤로 움츠린 마리아가 오른쪽 아치 속에 그려지고 이 두 인물 사이의 공간을 꽃병과 그 위의 비둘기로 채운 방법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고대 비잔틴의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려고 노력한 화가들의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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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다. 14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피렌체 대성당 팔각형 돔> 1420~1435년경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완성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66이탈리아)였다. 당시 블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1296에 착공된 피렌체 대성당의 대부분은 1380년경에 완성되었으나 돔은 1418년까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전 세기에 건물이 설계되었을 때, 아무도 로마에 있는 판테온의 돔보다 규모가 큰 이 돔을 어떻게 지을지 의견을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래로 이러한 크기의 돔은 없었다. 그리고 고딕양식의 버트레스(공중부벽)는 원래 설계에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사제들 또한 반대하였기 때문에 돔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는 실제로 성공했다. 그것은 그의 기술적, 수학적 천재성의 출중함 덕분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미술의 영역에서도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 김상용이 덧붙임
"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사소하고 별것 아닌 기법도 옛날에는 획기적인 발견이었구나.
또 다시 먼 미래에 후손틀이 우리시대를 돌이켜 보면서 선조들은 이러 이러한 것도 모르고 살았다고 우리를 미개인이라고 생각하겠지. (당황)
<성 삼위일체> 1425년경 마사초作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마사초(1402~1428이탈리아)는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28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 회화에 있어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위 작품은 원근법을 사용한 최초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벽에 뚫린 구멍으로 진짜 교회 안을 들여다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느낌이 이 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사람이 보다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십자가위의 성자,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부, 이 둘 사이의 비둘기 모양이 성령이다)
<세금내는 예수> 1426년경 마사초作 프레스코 페렌체 브란가치 예배당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경 도나텔로作 대리석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였던 도나텔로(1386~1466). 위 작품은 무기 제조자들의 조합이 주문한 것으로 그들의 수호 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피렌체의 한 교회외부의 벽감壁龕 속에 세워두기 위한 것이었다. 한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 있는 것만 같다. 방패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이 접근해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한 그의 모든 태도는 도전적인 결의로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지금도 언급될 만큼 유명하다.
<청동 다비드像> 1444~1446년경 도나텔로作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이작품은 전체적으로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다비드상을 양성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심지어 도나텔로(1386~1466)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졌다는 주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비드상이라고도 한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1457년경 도나텔로作
나무에 채색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
사막에서 고행하는 모습
그들은 무엇을 고민 했을까?
Any comments are welcomed.
<날개를 접은 헨트 제단화>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1432년경
얀 반 에이크作 패널에 유채
얀 반 에이크(1395~1441)는 대부분 플랑드르지방(현 벨기에, 네델란드)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거대한 제단화이다. 많은 장면을 담고 있는 이 제단화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있다.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무엇보다도 놀랍도록 보여주는 부분은 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그림인 타락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그들의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 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다소 충격을 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가 심미안을 지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르놀피니의 약혼> 1434년 에이크作 목판에 유채
유화물감의 창시자는 얀 반 에이크(1395~1441)이다. 그 이전부터 안료를 달걀에 섞어 사용하는 템페라로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지만 정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에이크는 아마인유를 이용해 여러 시도 끝에 갖가지 기법을 정착시켰다. 유화의 발달은 특히 초상화 부분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유화물감으로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 에이크의 예술은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놀피니의 약혼’은 장사차 네델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인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나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않게 그 나름대로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은 미술사 최초로 모델의 전신을 그려 넣은 2인 초상화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현실 세계의 단순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 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니 부부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아마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의 약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거장이 그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보면 그들의 엄숙한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아마도 이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달라고 요청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불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수태고지> 1440년경
프레스코 프라 안젤리코作
프라 안제리코(1387~1455)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修士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위 그림은 그가 어느 수도사의 방에 그려놓은 ‘수태고지’ 그림이다. 우리는 그가 원근법을 구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각 알 수 있다. 성처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회랑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을 뿐이다.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1460년경 프레스코의 부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된 꿈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그린 것이다. 적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 표지 밑에서 당신은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꿈을 꾼다. 열려진 천막 안을 보면 황제는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호위병 한 사람이 침상 끝에 앉아있고 두 사람의 군인이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이 조용한 밤의 정경은 높은 하늘에서 팔을 뻗쳐 십자가의 상징을 들고 아래로 내려오는 천사의 모습으로 마치 섬광을 비춘 것처럼 갑자기 밝아진다. 피에로는 또한 원근법에 완전히 숙달해서 그가 단축법으로 그린 천사의 모습은 어찌나 대담하던지, 특히 우리와 같은 작은 화면에서는 거의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는 무대의 공간을 암시하는 이런 기하학적인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한 새로운 방법, 즉 빛의 처리를 더해주고 있다. 중세 미술가들은 거의 빛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린 평면적인 인물상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마사초가 그린 그림에서 나오는 둥글고 입체적인 인물상들은 명암으로 힘있게 형상화 되어있으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만큼 분명하게 이 새로운 수단이 갖는 엄청난 가능성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앞에 서있는 군인은 밝게 비추어진 천막 입구를 배경으로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이 군인들과 천사로부터 발산되는 빛을 받고 앉아 있는 호위병과의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봄> 1482년 산드로 보티첼리作 패널에 탬페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부유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받아 알레고리 그림(여러 가지 의미가 수수께끼처럼 숨어있는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고, 로마 교황청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봄>의 이야기는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진행된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짝사랑하는 요정 클로리스를 납치해 결혼을 하게 되고, 미안함을 느끼고는 클로리스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만들어 준다. 그러니까 아래 그림의 도망치는 여자와 꽃을 뿌리는 여자는 사실 동일 인물인 것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비너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신의 머리 위에는 그의 아들 큐피드가 날고 있다. 보티첼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아치형으로 그려 마치 여신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를 유도한다. 여신다운 고고하고 도도한 표정과 빽빽한 숲이 만들어낸 명암의 대비가 여신을 더욱 여신답게 하고 그림 전체에 안정감을 더한다.
여신의 아들 큐피드는 꽤나 장난기가 많다. 하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는 또래 애기와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어린 신이 가진 힘은 만만치 않다. 맞으면 처음 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화살을 어딘가로 마구 쏘아대고 있는데 녀석의 화살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여신의 옆에서 세명의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각각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들인데, 가운데 여신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 여신이 큐피드의 장난의 희생자인 모양이다. 여신의 사랑을 받는 청년의 이름은 상인들의 수호신 메르쿠리우스다. 전령 또는 심부름의 신 헤르메스로 더 유명한 존재이며 지성과 유머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질은 '심부름꾼'이다. 신발에 달린 날개가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닐는지. 보티첼리는 수많은 이야기 꾸러미들을 한데 모아 자기 나름대로 각색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를 아름다운 그림 속에 녹여낸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후손들이 발견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그의 그림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시인'의 칭호를 얻은 이유다.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산드로 보티첼리作 캔버스에 템페라
이 그림은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에덴동산의 이브나 성녀들의 고난을 그린 그림을 제외하고 천 년만에 나타난 누드작품이다. 이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는 권세있고 부유한 메디치 가의 일원이었다. 그림에 묘사된 행동은 쉽게 이해된다. 비너스는 조개 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나 장미꽃 세례를 받으며, 꽃의 여신인 플로라를 꼭 껴안은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온다. 비너스가 땅에 발을 내딛으려 하자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가 외투를 들고 그녀를 맞이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상 완벽하게 조화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 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작은 술통이란 의미)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이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이 그림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작품이지만, 그 뒤에 나온 수많은 누드화와 미인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경 보티첼리作 패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전경의 오른쪽 사람이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라파엘로 산티(1483~1520)
16세기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이런 거장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런 질문을 하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천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차라리 천재의 존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
천재는 재능과는 다른 말이다. 천재라는 말은 새로운 영역까지도 개척해야 얻을 수 있는 영광된 명칭이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누구보다도 이점에서 탁월했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광학, 군사학 등 다방면의 자연과학 영역에서 굵직한 발전을 이끌어낸 초인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리치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 새로운 그림은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사도들이 너무 슬퍼서 모두가 예수께 “주여, 나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방금 비극적인 말을 했고 그이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계시를 듣고 공포에 놀라 뒤로 움츠리고 있다. 예수의 말이 야기시킨 흥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혼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 우리는 이 장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지 못해도 여전히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을 즐길 수 있다. 인간들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그 깊은 통찰력과 우리 눈 앞에 한 화면을 생생하게 전개시켜 보여준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한 목격자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레오나르도는 받침대 위에 올라가 그가 그려놓은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붓 한번 대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하루 종일 서 있곤 했었다고 한다. 작품이 이렇게 파손된 상태 속에서도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색의 결과이다.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모나리자> 1503~1506년경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 목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우리는 너무 유명한 이 그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나 안다고 믿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 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기도 한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같아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어로 ‘스푸마토’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우리가 표정이라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부분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김상용 화백이
또 재치있는 장난을...
이강식: 김화백 작품이었구나
김화백: 내가 그리면 요로코롬
된다이.ㅋㅋㅋ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1490년경 다빈치作 목판에 유채 폴란드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표면은 많이 문질러졌고, 배경은 조정되지 않은 검은색으로 덧칠해졌고, 좌측 상단 구석은 깨진 뒤 수리되었고, 모델의 머리 위에 있는 투명한 베일은 사치스러운 머리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손가락들은 심하게 가필된 등의 많은 손상을 입었음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중에서는 양호한 상태의 작품에 속한다.
<살바토르 문디-구세주>
다빈치作 목판에 유채
1500년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며 이 작품은 오랫동안 유실품이였다. 유럽의 궁정 벽
을 전시해오던 살바토르 문디는 1900년에 영국의 미술품 수집가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다 195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단돈 60달러에 팔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다. 그림은 덧칠과 훼손도 심했다. 2011년 다빈치의 진품임이 확인되었다. 진품 판정 이후에도 이 작품의 진품 여부는 계속 논란이었다.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남자 모나리자’라고 적극 홍보했다. 경매를 앞두고 홍콩, 런던,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열린 프리뷰 전시에는 2만7000여명이 몰려 단일 작품 최대 관람객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7년 11월 15일 뉴욕의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4억 5,030만 달러에 낙찰되어 사상 최고액을 달성했다. 매수자는 전화로 경매에 참여했으며, 누가 이 작품을 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 1503~1506년 다빈치作 루브르 박물관
어두운 검정을 배경으로 오른손 검지는 위를 향하고, 왼손은 가슴에 댄 채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이 인물을 세례자 요한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걸치고 있는 털옷과 십자가 때문이다. 세레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벌꿀을 먹고 살면서 고행을 하였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인물로서, 그가 광야에서 살았다는 점에 근거하여 흔히 낙타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화면 전체를 어둡게하고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는 기법)의 테크닉이 함께 사용되었다. 검은 배경으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이의 표정은 모호하고, 신비로우며, 얼굴의 표현은 극도로 섬세하다. 머리카락과 털옷의 표현 또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를 극대화함으로써 뚜렷한 선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인물의 입체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인물이 베일에 싸여 떠오르는 듯한 신비한 인상을 주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대고 있는 왼쪽 팔이 다 빈치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0년에 걸쳐 시행된 작품 분석 결과 'RV' 사인이 밝혀짐으로써 다 빈치의 원작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다만 그림의 일부분에 다른 이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타> 1498~1499년 대리석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作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조각상의 구도를 보면 성모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삼각형 형태인데, 성모를 예수보다 훨씬 크게 조각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지만,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취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미켈란젤로(1475~1564)의 재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 법칙이 생각난다. (우두머리는 그의 하인이나 아내보다 크게 그리고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한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조각 완성 당시부터 있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다비드> 1501~1504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作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
피에타(슬픔, 비탄의 의미)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다비드를 조각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하였다. 현재 다비드 상을 보면 묘하게 비율이 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래 다비드 상이 두오모 성당 중앙 돔 천정 아래 끝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얼굴의 높이가 약 50m지점에 위치하게 된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다비드의 머리 부분을 크게 제작하였다. 현재는 그 높이에서 보지 않으므로 머리가 살짝 크게 보이는 것이다. 또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하트 형태로 눈동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눈이 이글거리는 느낌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