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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世 동계(東溪)공 휘 병호(炳浩) 유사(遺事)
1975년대 수몰 직전 용산리의 사진으로 계천(溪川)<옛이름 호계(虎溪)>의
오른쪽이 인구마을이다.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신 마을이며,
모재공(21世)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셨다.
그 후 증조부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신 후 조부 남매분이 나셨고,
다음 대에 부공(父公) 3남3녀,
또 대를 이어 우리 5남 2녀가 태어나 살았던 마을이다.
동계공께서 1939년 4월 1일 ~ 1941년 3월26일 일본국 니이카다현 유자와(湯澤)심상고등소학교
2년을 수학한 졸업사진이다. 동계형님은 뒷줄 왼쪽에서 4번째이다.
(3남 윤기가 일본 가서 구해 옴)
동계공께서 1941년 유자와(湯澤)심상고등소학교 졸업기념 사진으로 추측된다.
1953년 7월 1일
댐건설로 수몰되었던 증조부 경암공(휘 진우 27世)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 사셨던 집터가 나타났다. 이 터에서 조부 용헌공 남매분이 태어나셨고,
부공(父公) 송당공 3남 3녀분께서도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대를 이어 송당공 자녀 우리 4남 2녀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
동계형님이 자양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 유학 가기 전 까지 살았던 집터이다.
아버지 송당공께서 심혈을 기우려 지은 새집이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버린 그 자리가 댐건설로
용궁이 되었다가 물이 줄어 담과 주춧돌이 나타났다.
이곳은 동계형님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결혼하고 태기, 형기 형제가 태어
났고, 심혈을 기우려 집안에 과수목을 심고 가꾸었던 정든 집터이다.
동계형님 내외분이 1942년 경산하양에서 찍은 결혼 기념사진.
1951년 어머니께서 영천읍내 큰아들 집에 오셨다. 동계형님의 성의로 독사진도 찍고,
어머니 모시고 3남매가 사진도 찍었다.
동계형님이 소유하고 있던 911호 화물자동차로 청송 주왕산에
영천군청직원들과 관광 갔을 때.
영천 창구동에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둘째아들 병목, 둘째 딸 병숙과
그리고 어린 손자 형기, 윤기와 즐거운 한 때를 동계형님이 찍은 사진.
1957년 동계형님의 주선으로 경주불국사관광 때
다보탑 앞에서 우리 6남매와 어린 태기, 형기 형제의 모습.
1994년 9월에 면소재지인 신용산의 수몰 후에 나타난 모습.
이곳에서 정미소를 두 곳이나 인수하여 부공(父公)께서 운영하셨다.
1953년 설날 고향에서 어머니의 7남매 중 6남매의 가족사진(포항누나 부재)
1980년 학야누님의 회갑날 안강에서 누님과 동생댁 4동서 !
서독인과 결혼한 생질녀 이영희가 가족들을 데리고 외갓집을 찾아왔다.
경산형수님이 주선하여 온 대소가 가족들이 효목동 우리 집에 모인
환영의 자리이다.
대양골 부공 송당공의 묘소 아래쪽에 동계형님 내외분의 묘소가 있다.
배위와 떨어져있는 것은 삼촌 백당공의 묘소가 아래에 있어
바로 위에 쓰기가 미안하여 두 분의 묘소 간격을 조금 띄었다.
공의 휘는 병호(炳浩 30世), 자는 중엽(中葉) 호는 동계(東溪) .
동계형님의 30대 중반의 존영 경산형수님의 40대 초반의 존영
1.가계(家系) : 시조공의 29세손이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14세손 이고,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의 12세손이다. 모재공 휘 중교(重喬 21世)의 9세손이며, 자언공 휘 일필(一鉍 22世)은 8대조 되시고. 휘 하주(夏澍 23世) 농와공은 7대조이며. 6대조는 휘 성휴(性休 24世)이시다, 5대조는 휘 유명 (裕明 25世)이시며, 고조부는 휘 치선(致璇 26世)이시고. 증조부는 휘 진우 (鎭禹 27世)이시며, 조부는 휘 연석(淵錫 28世) 용헌공이시고, 부공 송당공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2.생몰(生沒) : 갑자 1924년 1월 10일 생 - 기해1959년 2월 23일 졸. (향년 36세)
o 배위 : 월성최씨 갑자 1924년 8월 3일 생 무진1988년 2월 2일 졸. (향년 65세)
3.배위(配位) : 월성 최을식(崔乙植) 父 동환(東煥) 祖 상준(相駿).
o경산형수께서는 건강이 좋지않는 시어른 내외분과 남편의 간병에 최선을 다했으며, 1958년 부터 1
959년까지 2년간의 셋어른의 별세를 겪는 유례없는 환란을 굳건히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묵묵히
3년 상을 내신 효부요 열녀시었다.
o경산형수님은 동계형님과 사별하고 어린 5남매를 맡아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바르게 잘 키우셨다. 그리고 대소가의 안어른으로서 매사를 앞에 서셔 원만히 잘 이끄셨기 때문에 우애 있고 화목한 오늘의 우리 대소가가 되었다.
4.학력(學歷) : 근면 성실하고 명석한 두뇌로 재학 시 항상 우등상을 받았다, 13살에 일본 중숙부
백당공의 주소만 가지고 혼자 현해탄을 건너 찾아 갔다. 일본 유학은 백당공의 도움을 받으셨다.
1)1933년 4월 1일 - 1937년 3월 23일 자양공립보통학교 4년 수학.
2)1937년 4월 1일 - 1939년 3월 일 유자와(湯澤)심상소학교 5,6년 수학.
3)1939년 4월 1일 - 1941년 3월26일 일본국 니이카다현 유자와(湯澤)심상고등소학교 2년 졸업.
(한국의 초급중학교와 동급)
5.경력(經歷) : 공직생활 시 탁월한 직무수행력으로 누구나 기리는 모범공무원이였으므로 남보다
승진이 빠르셨다.
1)1942년 - 일본국 소재 개인병원에 근무하다가, 가족들의 간병(看病) 차 귀국한 후 결혼하고
농업에 종사하셨다.
2)1945년 6월 20일 - 9월 20일 - 일제의 강제징병으로 마산 소재 일본군부대에 입대하여 복무
하다 조국 광복으로 귀향하셨다.
3)1946년 – 1950년 자양면사무소 서기 근무.
4)1950년 – 1957년 영천군청 서기, 주사, 기사 근무. 상주군청 기사 근무.
6.효성(孝誠)과 우애(友愛) : 어버이를 모시는 효심이 남달랐고. 동생들의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잘
인도하셨다.
1)일본에서 귀국한 것은 부모님 간병(看病) 차 왔다가 그대로 영구귀국이되었다. 장티브스로 온가
족이 전염되어 고생할 때 위생적인 관리 등으로 잘 간병하여 무사히 온 가족이 완쾌되었다.
2)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항상 솔선수범으로 아우들을 선도(先導)하였고, 효(孝)교육을 위해 정철
(鄭澈)의 효도 시조를 크게 써서 벽의 어머니 사진 아래에 걸어 두고 실천에 힘 쓰썼다.
그리고 어머니의 독사진을 찍어 남겨 오늘에 전해 오고 있다.
3)동생들의 진로에 힘을 쎴다. 병목은 공무원을 출발하여 나중에는 사업을 같이 하였다. 병욱은
교직계 인도했고, 병극은 중학교, 사범학교 진학을 시켰고, 병묵은 경북대학교 진학 까지 시
켰다. 종제 병집의 취직에도 힘 쓰섰다.
4)벼농사를 탈피하기 위해 부공께 건의하여 수성 논밭을 팔아 ‘짠드배기’의 사과밭을 샀다.
7.사업(事業) : 시야를 넓혀 그 시대에 맞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하였으나 불행히도 불치의 병환
으로 일찍 작고하셔서 빛을 보지 못했셨다.
1)1952년 - 자양면 신용산에 2개소와 노항동에 1개소의 도정공장을 사서 운영하셨다.
2)195?년 – 195?년 현직에 있으며 화물차를 사서 운영하였고, 나중에 양동형님이 맡아 운영을
하였다.
3)1957년 - 퇴직 후 주유소를 허가받아 운영을 시작하였으나 동계형님 작고 후 권재호에게 팔았다.
4)1958년 – 1959년 : 정부도정공장을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조강환과 같이 동업으로 운영하였으나
동계형님 작고 후 동업자에게 넘겼다.
8.거주지(居住地) 이동 : 독립하여 거주한 기간이 짧아 특별히 이룬 것은 없으나 창구동의 초가집을
사서 수리한 후 온가족이 합가하였다.
1)증조부께서 살림나신 용산동 945번지에서 태어나 1937년 자양공립보통학교 4년 수료까지
13년을 살았고,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2)일본에서 귀국하여 부공께서 새로 지은 지으신 새집에서 결혼하고, 장남 태기와 차남 형기가
태어나 어릴 때 성장한 집이다.
3)일본에서 귀국 후 신주택의 넓은 집 둘레에 유실수인 단감나무, 반시나무, 배나무, 포도나무,
대추나무 등을 심었고, 오동나무를 꺾꽂이하여 남쪽 담가에 몇 그루가 잘 자랐다.
4)1950년 6.25전쟁으로 새집이 불타 온가족이 재종조부 원산댁에 방을 얻어 살았다. 동계형님은
영천군청에 근무했기 때문에 여동생 병숙과 영천읍에서 방을 얻어 살으셨다.
5)1952년 용산동 불탄 집 아래채를 복원하였다. 하양할매의 작고로 여막이 둘째 삼촌댁에 모셔온
것이 죄스러워 불탄 집터에 아래채 4간을 복원하여 여막도 옮겨 3년상을 내셨다.
6)1953년 영천군청 근무 시 자신의 힘으로 창구동에 2간 겹집의 초가집을 사서 대폭 손수 수리하
여 자양의 가족과 합가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집 앞 채소밭 관리, 집안의 꽃밭 관리 등 근면의
극치였다.
9.다양(多樣)한 취미생활(趣味生活) : 음악을 좋아하여 축음기를 사서 많은 음반을 구입 여러 남매가
감상했고, 자주 영화관에서 명화를 감상 하였다, 낚시를 좋아해 고향에서는 꺽지 낚기, 영천에서는
뱀장어, 메기 낚기를 자주했고, 붓글씨에 능하여 군청내의 서류표지는 모두 맡아 쓰썼다.
10.자손(子孫) : 4남 1녀.
o장남 태기(胎基) 配 용궁 전문자(全文子). 父 성호(聖鎬). 祖 상곤(祥坤).
*손자 현수(鉉遂). 配 성주 도현정(都譞正). 父 종운(種運). 祖 무기(武基).
*손녀 명화(明和), 夫 전주 이 설(李楔). 父 병석(秉石). 祖 언호(彦湖).
*손녀 금련(今蓮), 夫 창녕 조동우(曺東佑), 父 상현(象鉉). 祖 영달(永達).
*손녀 문경(文景). 夫 상산 김수현(金秀鉉), 父 정균(正均). 祖 경희(敬熙).
ㅇ차남 형기(亨基) 配 강릉 유순애(劉順愛). 父 용연(龍淵). 祖 한술(漢述).
*손자 영록(暎錄), 配 단양 우지용(禹志蓉). 父 광균(光均). 祖 찬경(燦炅).
*손자 상록(相錄). 配 청도 김가현(金佳炫). 父 점식(點植). 祖 원오(源五).
o3남 윤기(潤基) 配 행주 기은하(奇銀河). 父 양섭(養燮). 祖 소연(昭衍)..
*손자 현석(鉉釋). 配 경주 김수지(金秀智). 父 우진(禹鎭). 祖 공수(貢洙).
o4남 우석(又碩) 配 월성 이수경(李秀慶). 父 광희(光熙). 祖 달순(達順)..
*손자 현룡(鉉龍), 配 전주 이선아(李宣雅). 父 원영(元永). 祖 종한(鐘漢)
*손자 현택(鉉擇).
*손녀 수현(收鉉).
o장녀 미혜(美慧) 夫 나주 정규석(丁奎奭). 父 맹섭(孟燮).
*외손자 정재용(丁齋鏞).
*외손녀 정성민(丁誠愍), 정주현(丁珠玄), 정인경(丁仁敬).
10.묘소(墓所) : 중귀미 대양골 부공묘위 아래에 쌍분이다.
*배위가 떨어져있는 것은 삼촌 백당공의 묘소가 바로 아래에 있어 바로 위에 쓰기가 미안해서 조금
띄어서 묘를 썼다.
11.택호(宅號) : 경산 (경산시 하양읍 한사동)
(자료정리) 아우 병극(炳極)
첫댓글 숙부님 아버지 생애를 상세하게 정리하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님 돌아가시고 이어 아버지께서 36세 돌아가시고 36일만에 할아버지 돌아가시니 사랑방에 빈소를 세분모시고
중학생 시절 옛 법대로 3년상 치르고 초하루 상망 상식차려 올리신 우리엄마 기울어진 가정 형편에 얼마나 고생많이
하신일은 저는 지금도 눈물이 앞섭니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호화롭게 자라 철없이 성장하면서 생활능력이 없서 엄마 애태운일이 너무많아 오래
수 하시지 못하고 일찍 돌아 가시니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영천군청에 근무하시면서 도정공장,주유소,운수업에 저녁이면 장부정리등 무리하셔 일찍 돌아가시니
원통하고 애석합니다,,
자료를 상세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모르고 있던 내용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지금 상록이 나이에 아버님께서 작고하셨다고 생각하니 기가 차고 원통할 따름입니다.
큰집안 장남의 무거운 짐과 없는 돈으로 쪼달려가면서 운수업, 양곡도정업, 주유소를 운영하시면서
군청이라는 직장에서 받으시는 트레스가 한꺼번에 쌓이셔서
당시에는 별로 흔치 않은 대장암이라는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일찍 혼자 되셔서 오남매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영화 한번 못 누리시고 일찍 영면하신
불쌍한 어머님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희들이 자료를 정리하고 유사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숙부님께서 고생하셔서 잘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아버님께서 이야기하신 내용들을 글로써 또 보게되니 반갑내요
일찍 돌아가셨지만 동생들과 자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전해져서 자손들이 잘 살아나가는것 같네요
정리하신 내용 잘보았습니다^^
집안의 장남으로써 집 안팍으로 배려하시고 이끌어가신 행적을 엿볼수 있는 자료 잘 보았습니다.
큰어머님도 어려우신가운데 여러남매들을 곧게 키우시고 집안대소사를 이끌어가신 모습을 떠을려 보았습니다.
아버지 생전에 백부님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면서 큰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일찍 돌아가신데 대하여 너무나 애처러워 하셨습니다.
혼자되신 백모님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조카를 어지간한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해 주시던 생각을 하니 더욱 가슴이 메입니다.
천상에서는 백년회로 하시기 기원합니다.
어릴때부터 아버지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정리해주셔서 할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알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도 여기서 본 내용을 기억하고 2세에게 얘기해주겠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뵌적은 없었지만 아버지께 큰아버지의 훌륭하신 점 많이 들었습니다.
좀더 오래 사셨다면 우리집안도 달라졌을거라 늘상 말씀 하셨습니다.애통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큰형님의 유사를 읽고 며칠째 잠을 설쳐가며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어지렵혀 지금도 이글을 쓰면서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 오늘 우선 인계형님께서 노심초사 자료 수집 편집 수정까지 무진 고생을 하신일에 예의가 아니다 싶어 간단하게 인사 올립니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집은 인구에서 모든 면에서 큰형님의 노력으로 앞서가는 가정이였지요 큰형님의 꿈이 장대하여 우선 동생들 성공하도록 밀고 형님의 능력으로 정부 도정공장허가 불가능하다던 주유소 허가로 주변의 인정을 받아 동업을 하시게되고 불행이도 신께서 짧은 기간에 우리형님의 꿈을 꺽어버렸지요,
저에게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진 아버지 역활을 하셨기에 애통한 마음 평생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저를 법관 시키겠다고 어려운 가운데 대구로 고등학교 보내주시고 끔직히도 사랑으로 뒷바라지 해주셨지요
우리집안에 대들보가 꺽어지면서 모두가 고생아니할 고생들 하였지요 특히 5남매 엄마말씀 거역하지 않고 합심하여 형수가 돌아가시고도 형제 남매간에 우의를 다져 남부럽지 않게 정답게 살아가는 모습에 희망을 느낍니다 특히 남다른 효심은 본받아야할 일입니다 조카들 하늘에 계신 우리 형님내외분 기뻐 하실꺼야 고마워^^
어른들 말씀으로만 전해듣던 큰아버님 !
하신일이 넘 많아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몰려오내요
그많은 일들과 한집안의 맏이로서의 역할하시느라 노심초사하시다 일찍 운명하시니 안타까울따름입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셨네요
이런 역사를 기록하시고 글로 남기시려 애쓰시는 아버지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큰아버님 글 이제야 봅니다.
늘 인자하시고 우리 가문의 큰어른이셨던 우리 큰아버님. 정말 다시 뵙고 싶습니다...
형제간 우애가 두터우셔서 자양 뒷마루에서 인기 돌 잔치때 사진 찍어 주시면서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 합니다.
또 우리 큰어머니, 영천 큰집에 가면 늘 우리집같이 편하게 느끼던 것은 큰 어머니의 큰 사랑 때문 이었네요...
큰엄마 보고 싶습니다...~~
먼저 작은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시작된 에치코유자와 방문은 아버지의 고등소학교 동급생3분과 아들내외분을 만나서 같이 점심과 저녁도 함께하고 아버지께서 사셨던 집터와 졸업하신 소학교도 방문하고 사진도 구해왔습니다. 그분들의 기억속에서 우리 아버지는 인물도 좋고 머리가 비상했다고 했습니다.
그 분들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을 애석해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생존하셔서 방문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버지 어머니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