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조각가의 고백 외 1 편 / 구석본
얼음이 여자가 되어 웃고 있다. 그녀의 투명한 웃음이 붉은 형광으로 흘러 얼굴에서 발끝까지 은은하게 번지고 있다.
원래는 얼음덩어립니다. 얼음의 원형 속으로 칼질을 했죠. 칼이 지나는 길마다 얼음의 투명한 속에 숨어있던 얼음의 칼이 일어나 나의 칼과 얼음의 칼이 부딪쳐 다시 핏줄 같은 길을 내고 그 길 끝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일어났어요. 칼과 칼 사이에서 일어난 여자, 입술에 칼을 들이대자 여자가 웃었죠. 왼쪽 눈에 칼을 들이대면 왼쪽 눈을 뜨고 오른쪽 눈을 겨냥하면 오른쪽 눈을 뜨죠. 칼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숨어있는 급소를 찾아내죠. 나의 정교한 칼이 이제 여자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는 급소를 향하면 틀림없이 외로움덩어리가 통째로 드러날 거요.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는 외로움이 얼음덩어리로 딴딴하게 박혀 있기 마련이죠.
얼음조각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가슴부터 조금씩 녹아 붉은 카펫을 따라 내 발바닥을 적신다. 조금씩 몸을 적셔오는 차갑고 투명한 외로움, 누군가가 내 가슴 정면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붉은 꽃
구석본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이쪽의 빛깔로 저쪽의 빛깔을 지우고
저쪽의 향기로 이쪽의 허무를 지우고
이쪽의 허무로
저쪽의 향기를 피우는 것이다
그렇게
그대와 나
이쪽과 저쪽으로 마주서서
서로를 지우고 지우다가,
때로는 피우고 피우다가
마침내
나만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단 한 번의 순간,
가슴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꽃,
약력
*경북 칠곡 생.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
* 시집 『지상의 그리운 섬』,『노을 앞에 서면 땅끝이 보인다』,『쓸쓸함에 관해서』
* 1985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