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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59.12]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
“나 죽은 뒤 십년 이내에 서울 장안에 주문 읽는 소리가 진동하리라!”
- 해월신사의 생애(12. 완)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으로 해월신사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올해는 삼암 표영삼 종법사 환원 10주기 되는 해로 삼암 종법사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해월신사의 발자취를 재구성하였다. /편집실
원주 송골 해월신사 피체지에서 표영삼 종법사와 동학기행팀(147.6)
동학혁명의 전란의 피해 신사 일행은 홍천을 거쳐 1894년 12월 30일(그믐)에 인제로 들어가 남면 느릅정이 최영서의 집에 도착했다. 처음 반년간은 출입을 삼갔다. 한편 이때 신사의 가족들은 옥천관아에 체포되어 모진 악형을 받았다.
황해도에서는 1895년 4월까지 동학군 활동이 계속되어, 강령, 문화, 재령 등지에서는 임종현, 김유영, 원용일, 한화석, 최유현, 오응선, 김응종, 성재석, 방찬두 등이 수십만의 도인들을 모아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수십 차례나 전투를 벌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용강, 강서에서는 김사영 등이, 함흥에서는 김학수 등이, 강계에서는 이백초 등이 기포하여 활동했다 한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수많은 동학지도자들이 무참하게 살상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이도재가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1895년에 이르기까지 무죄로 방면됐던 장흥의 이방언, 금구의 김방서 등 다수의 동학접주들을 색출해서 처형했다.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많게는 30만, 적게는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1895년 1월에 손병희․손천민․김연국․이종훈 등이 신사와 한 달 남짓 동거하다가 최영서의 살림이 가난하여 공찬키 어렵게 되자 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한다. 의암 성사와 이종훈은 북쪽 함경도와 평안도 강계 등지를 다니며 장사를 했으며, 살아남은 각지 두목들도 1년간은 산중이나 타지로 피하여 은신해 있었다. 인제 남면은 김연국의 고향이라 그는 혼자 남아 신사를 모시게 됐다. 이해 10월에 이종훈(종옥)이 전답 10두락을 팔아 신사를 도왔다. 느릅정이에서 신사가 1895년 12월 5일에 원주 수례너미로 떠났으므로 1년간을 은거하였다. 수례너미는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에 속하며 치악산 정상 비로봉 북동간 10리 지점 골짜기에 있다.
집단지도체제를 만들다
1896년을 맞아 1월 5일에 신사는 손병희에게 의암義菴이란 도호를, 11일에는 “하몽훈도전발은荷蒙薰陶傳鉢恩 수심훈도전발은守心薰陶傳鉢恩(가르치시고 도통을 전해 주신 은혜를 입었으니, 가르치시고 도통을 전해 주신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하리)”이라는 시 한 수를 읊으시고 손천민에게 송암松菴, 김연국에게 구암龜菴이라 도호를 주었다. 신사의 나이 70세에 이르자 집단 지도체제를 만든 것이다.
또한 신사는 도인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충주 방면에 손병희를 보냈다. 이때 전라도에서 박치경, 허진, 장경하, 조동현, 양기용 등 여러 도인들이 찾아오면서 왕래가 트이기 시작했다. 동학혁명 이후 소식을 모르던 신사의 가족을 3년 만에 찾아 마르택에 모셨다는 보고였다. 신사는 2월 17일에야 가족을 만나기 위해 마르택으로 갔다. 마르택은 음성군 금왕읍 구계리의 한 마을이다. 능선을 하나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황산(황새마을 동학혁명당시 의암성사의 도소가 있던 곳)이 있으며 주변에는 도인들이 많았다.
원근에서 찾아오는 수가 늘자 지목 받을 염려가 있어 신사는 4월초에 가족과 더불어 마르택을 떠났다. 음성읍 동쪽 보현산 서남쪽 골짜기인 동음리 아래 창골로 깊숙이 들어가 이춘백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각처에 의병이 봉기하여 어수선한데 이 마을에도 이범직이 거느리는 천여 명 의병이 들어와 하루를 묶고 갔다. 이때 신사는 김연국과 같이 윗 창골로 잠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한다.
1개월간 머무르던 신사는 6월에 손병희의 주선으로 가족을 남겨 둔 채 청주 산막 신경진 집에 가서 1개월간 임시로 있었다. 7월에는 상주 하북면 송내(송천리) 깊은 산중 높은터로 올라가 이자성의 집에 머물렀다. 8월 하순에는 상주군 은척면 은척원 남긍칠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족을 이사시켰다. 이때 각지에서 도인들이 높은터에 신사가 계신 것을 알고 용케 찾아왔다. 특히 평안도 용간의 홍기조, 홍기억, 임복언 3인이 불원천리하고 이종훈의 안내로 찾아왔다. 이종훈은 “12월 초순경 광주 곤재에 있는 이종훈 선생과 같이 출발하여 며칠 후 목적지인 문경 은척원에 이르러 남접주 건칠씨의 인도로 그립고 그립던 해월신사와 의암성사 두분을 뵈었다”고 했다.
향아설위법 시행과 도통전수
높은터에서 신사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은 근본이요,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는 단련이니 먼저 근본을 힘쓰고 다시 단련에 힘쓰라”는 설법을 하였다. 내 몸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侍天主)의 그 덕과 그 마음으로 조화스럽게 합일하고 바르게 하는 것(造化定)은 수도의 근본이며, 도를 알려고 하고 그 앎을 경수하여 행하도록 평생 생각하는 것은 단련이라는 뜻이다.
도인들의 왕래가 잦자 지목 받을 염려가 있어 높은터에서 음죽군 앵산동으로 이사했다. 손병희가 주선한 이곳 앵산동은 이천군 설성면 수상1리에 있다. 앵산동으로 오신 신사는 도인들에게 일체 왕래를 금하도록 지시했다. 4월 5일의 득도기념일을 맞아 인근 도인들이 찾아왔다. 이때 신사는 나를 향해 제수를 차리는 향아설위법을 지시했다. 벽을 향해 제수를 차리던 관행을, 나를 향하도록 바꾼 것이다. “앞으로 모든 의례의 차림은 벽을 향해 차리지 말고 나를 향해 차리도록 하라. 한울님이 내 몸안에 모셔져 있거늘 어찌 나를 버리고 다른 곳을 향해 차리겠는가”라 했다. 그리고 음식물을 골고루 차린 작은 상을 각각 자신을 향해 놓고 기념제례를 올리게 했다. 신사는 오래 전부터 제수 차림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오다가 앵산동에서 향아설위로 확정한 것이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이때 서우순(택순)은 청주 병정에게 피착되어 4년간 공주옥에서 체수되고, 편의장 신택우는 한양에서 피착되어 10여일이나 혹독한 심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졌으나 신사의 소재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4월 하순이 넘자 가까운 도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5월에 이르러 신사는 심신회수心信回水 네 글자를 써서 각 포의 두령들에게 반포했다.
6월부터 지목이 풀려 7월에는 팔도 두목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에 포덕이 늘어나 그 곳 두목들의 왕래가 많았다. 아울러 접주와 육임 임첩발행도 늘어났다.
신사는 이때 종전에 북접법헌의 명의로 발행하던 육임임첩을 폐지하고 용담연원龍潭淵源이란 명의로 바꾸어 발행했다. 그런데 더위에 지친 신사는 노환을 앓게 되어 8월이 되면서 하혈이 잦아졌다. 손병희는 연로하신 신사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은밀한 곳을 물색했다. 때마침 여주 임순호가 원주 전거론(지금은 여주군 강천면 도전리)에 새집 두 채를 지어 놓은 것을 알았다. 1897년 4월에 이곳을 찾아왔던 의암은 신사를 모실만한 곳으로 판단하고 순암(임순호)과 협의하여 모시도록 했다.
신사는 추석을 지내고 20일경에 먼저 전거론으로 가시고, 가족(신사댁)은 9월 10일에 이사했다. 9월 14일 전거론에서 아들 성봉이 태어났다. 그러나 신사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12월 24일에 신사께서 도통을 의암에게 전하였다.
신사 72세에 순도하시다
1898년의 새해를 맞은 신사는 노환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정초부터 폭설이 내려 온 산천을 덮어 왕래가 어려웠다. 이 때 충주 외서촌(外西村)에서 지도급 도인들이 체포되는 불상사가 터졌다. 이천 지방 주재병은 충주 외서촌 두의동에서 이상옥(용구)를, 음죽군 앵산동에서 신택우(신사의 사돈)를, 이천 보통리에서 권성좌를 체포했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은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그 중 권성좌는 매에 못 이겨 신사의 소재를 실토하고 말았다.
권성좌로부터 자백을 받은 이천 병정 20명은 1월 3일 오후에 떠나 1월 4일 오후에 전거론으로 들어왔다. 전거론에 당도한 이천 병정들은 곧 신사 댁과 구암장 댁을 포위했다. 먼저 길가에 있는 구암장 댁으로 들어가자 김낙철 혼자 있었다. 최법헌을 찾자 모른다 하니 신사가 있는 곳으로 들어 갔다. 당시 신사댁에는 의암․구암․강암(손병흠)․염창순․임순호 등이 있었다. 병정들은 방문을 열고 최법헌이 누구냐고 했다.
이때 의암이 나서며 “팔십 노인이 몇 달째 병환으로 누워 계신데 이렇게 무도할 수 있는가”고 꾸짖었다. 병정들은 의암을 불러내어 권성좌와 대질시켰다. 의암은 목침을 들어 문지방을 내리치면서 “네가 누군데 자세히 나를 봐라. 알거든 안다고 해라” 하며 호통을 쳤다. 권성좌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며 물러섰다. 병정들은 권성좌를 끌고 나가 난타하며 바로 대라고 다그쳤다. 권성좌는 매에 못 이겨 횡설수설하다가 삿갓봉 마을에 있다고 했다. 병정들은 그를 앞세우고 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고개 넘어 삿갓봉으로 갔다. 권성좌는 마을 글방 선생인 김상률(金商律)을 가리치며 이분이 신사라고 했다. 병정들은 무조건 훈장을 포박하여 끌어냈다. 가족과 동리 사람들이 달려들어 “동리 훈장을 무엇 때문에 잡아가느냐”고 야단이었다.
권성좌에게 속은 것을 안 병정들이 가혹하게 폭행하자 다시 “은진서 왔다는 이가 바로 법헌이라” 했다. 전거론으로 되돌아 온 병정들은 김낙철을 포박하여 끌고 갔다. 신사 일행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으나 김낙철이 신사가 아닌 것이 밝혀지면 다시 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신사를 모시고 산길로 올라갔다. 이춘경과 이용한이 담여를 메고, 의암성사와 구암․강암․임순호 등이 앞뒤를 호위했다. 임순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숲은 깊고 길은 험한데 어찌나 어둡던지 옆에 있는 사람도 잘 안 보이고 길은 눈에 쌓여서 어디로 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등불을 들고 길을 찾는데 의암성사께서 멀리 불빛이 비쳐 오는 것을 보시고 내가 든 등불인가 하여 가보니 큰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주저하고 계시다가 이윽고 호랑이가 사라지므로 호랑이가 앉았던 곳을 보니 길이었다. … 겨우 십리 정도를 가서 산밑에 초가집에 들어가 밥을 끓여서 시장기를 면한 뒤 지평군 갈현으로 갔다. 이강수의 집에서 며칠 있다가 홍천군 서면 제일동 오창섭을 찾아갔다.
오창섭은 가난하여 오래 모실 수가 없어서 사촌인 오문화 집으로 모시도록 했다. 여기서 10여일 후인 1월 22일에는 방아재 용여수의 집으로 갔다. 신사 일행은 1월 28일까지 방아재에 있다가 원주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는 1월 30일에 옮긴 것이다. 약 27일간이나 병든 몸으로 추위에 시달리며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원진여 집, 해월신사 피체지. 원주 송골
평남 성천군 나용환은 1898년 3월에 찾아와 신사를 배알했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의암선생을 처음 뵙던 때는 무술년 3월(윤 3월)이었고 장소는 송산서 약 5리 가량 되는 섬배(계암)란 곳에 있는 이화경씨 집이었다. … 지목도 많고 잡사람도 많아 장석 출입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 72세가 되신 노할아버지가 초당에 단좌하고 계시다가 우리 청년 제자를 인견하시고 “원로에 평안히 오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서북에 포덕이 많이 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기쁩니다” 하셨다. … 낙발이 다 되신 머리에 3층관을 쓰신 그때의 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월 30일(양 2월 28일)에 원주에 오신 신사는 약 3개월간(윤 3월이 있었음) 관의 지목을 잘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4월초에 충청도 옥천에서 자취가 드러나 관군이 동원되었다. 송경인이 이끄는 옥천 보은 관졸에 의해 4월 5일(양 5월 25일) 불행하게도 체포되었다.
전후 경위를 종합하면 송경인은 전 참위로서 옥천 지방에 사는 박가라는 문객을 통해 정보를 입수, 신사를 체포하러 나섰다. 일단 옥천에 내려와 송겸수(송일회)와 박윤경(박윤대)을 체포하여 앞세우고 여주 강천면 도전리 전거론까지 끌고 와서 신사 집안일을 보던 이치경 형제를 체포 심문했다. 이치경으로부터 안백석이란 사람이 소재지를 알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 여주에서 그를 체포한 후 이튿날 5일 미명에 출발, 송골로 향했다. 송골까지는 약 60리 길이라 12시경에 당도했다. 신사는 영감으로 미리 알았던 듯 득도기념에 참석했던 지도자들을 4일에 모두 돌려보냈다.
신사의 명교대로 날이 밝기 전에 모두 돌아갔으나 임순호는 미적거리다가 10시경에 출발, 도중에서 관군을 만나 체포되었다. 신사는 곧장 문막까지 실려갔다가 문막에서 배편으로 여주로 향해 저녁때에 도착했다. 문막에서는 황영식(당시 39세 여주 사람)이 나타나 체포되어 같이 왔다. 여주에 도착하자 임순호 부친이 뇌물을 주고 임순호를 구출하여 4월 6일 새벽에 신사와 황영식만 배에 태워 서울로 압상했으며 박윤경․송겸수는 별도로 압상됐다.
신사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의암․구암․청암이 송골로 와서 확인하고 곧 4월 6일에 지평 갈현에 있는 이강수의 집으로 모여 이 사실을 각지에 알렸다. 며칠 후 홍병기․박희인․손병흠․손천민․이종훈․권병덕 등이 달려와 사후 대책을 의논했다.
우선 신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기 위해 권병덕을 여주로 보냈으며, 임학선에게는 신사 댁을 횡성으로 속히 이사시키도록 했다. 한편 비용 조달이 급하므로 사방에 사람을 보냈다. 박인호와 김명배는 내포로 내려가서 비용을 마련하던 중 “홍주군 홍주면 김주열이 청화가 재무한 수전 10두락을 팔아 비용을 판출했다” 한다.
신사가 서울로 압상된 것을 확인한 의암성사와 송암․구암은 곧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 김모의 집에 머물고 송암은 추후에 상경하여 서문밖에 머물고, 이종훈은 동소문안 참욋다리에 밥집을 차리고 있었다 한다. 정암 이종훈은 김준식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어떤 늙은 내외가 살다 남편이 붙들려 서울 서소문 감옥에 있다 하면서 그 소식을 알아 달라 하여 형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이름은 최법헌이라 하고 생김새는 수염이 많이 나고 머리가 벗어진 노인”이라 했다. 김준식은 “요즘 그 노인이 설사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사가 병환중임을 알게 됐으며 다음날 편지를 써서 노파의 편지라고 속여 전하게 했다. 그날로 회답이 나왔다.
“여러 분의 안부를 몰라 궁금했노라. 내게 관한 일은 조금도 염려 말고 수도에 극진하라. 이번 일은 천명이니 마음 편안하게 최후를 기다리노라. 우리 도의 장내는 대도 탕탕할 것이니 내 뜻을 이어 형통케 하라. 그리고 긴요히 쓸 곳이 있으니 엽전 50량을 넣어 달라”
신사는 엽전 50량으로 떡을 사서 많은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다. 신사는 5월에 접어들면서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도 어렵게 됐다. 관에서는 중죄인을 병사시키는 것은 법의 위엄에 손상을 준다며 재판을 서둘렀다. 5월 11일부터 재판을 열어 여러 차례 심문하다가 급기야 5월 20일부터 신사의 질환이 악화되자 서둘러 진행, 5월 30일에는 교형을 선고했다. 신사의 재판 과정은 너무나 처참했다. 서소문 감옥에서 평리원까지 걸어서 왕래하며 재판을 받을 때 큰칼을 쓰고 걸어가는 도중에 목과 다리가 아파서 수없이 주저앉았다.
이종훈은 신사의 처절한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메어져 피눈물을 쏟았다. 김준식을 통해 신사가 출정하는 날을 알고 있다가 그 날이 오면 새벽부터 감옥문 밖을 거닐면서 기다렸다. 어느 날 10시쯤 신사께서 나오는 모습을 보니 기골이 장대하시던 어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옥중 생활과 질병에 시달려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목에는 전목 큰칼을 쓰시고 나오시는 모습을 보니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신사는 십여 차례 재판을 받았다.
고등재판소 검사는 윤성보, 검사 태명식, 검사시보 김낙헌 등이었고, 재판장은 조병직, 판사는 주석면․조병갑이었다.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은 동학혁명 후 파직되었다가 섬으로 유배되지만 곧장 복직하여 해월신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로 변신해 있었다. 뒤틀리고 어이없는 우리 역사의 뒷면이었다.
교형 선고 판결이 떨어진 이튿날에 의정부찬정법부대신은 상주하여 형집행 승낙을 얻어 교형을 집행할 것을 명령했다. 6월 2일 오정에 서소문 감옥에서 신사를 육군법원으로 옮겼다가 교형을 집행했다. 사형 집행 전에 관은 신사의 최후를 촬영하여 각도 각군에 수백 장을 배포했으며 외국 공관에도 나누어주었다.
해월신사의 시신은 6월 2일부터 4일까지 형장에 두었다가 5일에야 광희문 밖에 내다 묻었다. 이종훈은 5일날 저녁에 신사의 시신을 파다가 6일 새벽에 나루를 건너 송파의 이상하 소유의 산에 안장했다. 1927년 6월의 신사의 최후 모습을 증언한 조기간의 청취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종훈씨는 그날 저녁으로 김준식과 같이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광희문을 향해 나가다가 본즉 좌포청 포교두목 민흥오라는 민배때기가 문통에 떡 지키고 섰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슬그머니 돌아서서 동대문으로 나가서 성밖 길로 돌아서 다시 광희문 밖으로 돌아갔다. 캄캄한 밤인데다 비가 들어붓듯이 쏟아져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지키던 사람들도 다 돌아가고 말았다.
준비한 쇠초롱 하나, 황초 다섯 가락, 우산 하나, 베 한 필, 칠성판 하나를 가지고 김준식과 미리 약조하고 세워 놓은 <동학괴수 최시형>이라고 패를 써 꽂은 신사의 무덤을 찾았다. 초롱과 우산은 김준식에게 들리고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시체를 파내는데 일꾼들은 시체를 손에 대기가 싫어서 흙파는 괭이로 떠 들추려 한다. 이때 두 사람은 하체를 들게 하고 “나는 상체를 들 테니…” 하고 무덤 속에서 시체를 땅위에 끄집어 냈다. 몸에는 못쓰게 된 헌 요 한 겹이 감겨 있을 뿐이다.
칠성판 위에 올려 모시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베를 그대로 칭칭 감으면서 머리를 만져 보니 뼈가 크게 상해 일그러져 있어 다시 바로 맞추어 싸게 되었다. 내리붓는 비속으로 밤새 광나루를 건너 광주에 이르렀다. 의암․구암․춘암 외에 여러 분 교인들과 같이 그 곳 이상하씨의 뒷산에 장사하였다.”
해월신사 순도120년에 묘소를 찾은 시민단체 회원들(159.6.2)
2년 후인 포덕 41년(1900) 이상하는 이종훈에게 신사의 묘소를 이장해 달라고 간청해 왔다. “동리 사람들이 신사의 묘가 내 산에 모셔져 있다고 지목하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의암․구암 등 여러 어른들과 의논했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어 실촌면 삼합리에 살고 있는 윤모와 의논하여 천덕산에 모시기로 했다.
춘암 박인호와 이종훈은 이상하의 산에서 신사의 시신(유골)을 수습하여 짊어지고 광주를 거쳐 2일 만에 삼합리까지 왔다. 오던 도중 경안고개 주막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잠을 자지 않고 시신을 지키자 주막 주인이 드물게 보는 효자라 하며 밤참을 지어 주었다 한다. 천덕산에 모신 것은 1900년 3월 12일이었다. 천덕산 기슭 깊은 산중에 모셔진 신사는 생전처럼 오늘도 대도의 변모를 바라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