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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꼬살라(Kosala) 8
제 1 장 첫 번째 품
말리까 경
말리까(Mallikā)라는 화환을 만들어서 파는 가난한 꽃집의 딸이 있었다. 이때 말리까의 나이가 16세였다. 말리까는 어느 날 떡이 먹고 싶어서 시장에서 떡을 샀다. 그러나 그 장소에서 먹지 않고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갔다. 이때 이런 떡을 사려면 몇 개월을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그런 귀한 떡이었다. 말리까가 집으로 가는 중에 탁발을 하시는 세존의 일행을 만났다. 그래서 말리까가 떡을 공양 올리려고 하자 시자인 아난다가 세존이 앉으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그리고 말리까는 자기가 먹으려던 떡을 세존께 공양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가난한 집의 딸이 자기가 먹으려고 산 떡을 공양을 올리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떡을 받으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붓다가 미소를 지을 때는 그냥 미소 짓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경우만 지으신다. 그래서 아난다가 세존께 왜 웃으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 여자는 앞으로 꼬살라 왕의 첫 번째 왕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날 꼬살라 왕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이웃나라의 사촌인 아자따삿뚜 왕에게 패하여 후퇴하면서 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이때 꼬살라 왕은 허름한 꽃집으로 피신을 했다. 바로 이 꽃집이 세존께 떡을 공양올린 말리까의 집이었다. 꽃집의 딸인 말리까는 꼬살라 왕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때 말리까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꼬살라 왕은 감동을 받고 말리까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말리까는 세존과 만난 인연과 왕과 만난 인연으로 그는 변함이 없는 재가 신도가 되었으며 왕에게도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다. 당시 꼬살라 왕이 제사를 지낼 때 수많은 동물의 목을 쳐서 피를 흐리게 하는 살생을 했다. 이때 말리까의 간곡한 요청으로 세존의 가르침으로 듣고 동물을 희생시키는 제사 대신에 보시를 하도록 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꼬살라 왕에게 공덕을 쌓게 하셨다. 왕비 말리까는 경전에서 자주 등장한다. 말리까는 나중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꼬살라 왕은 도과를 성취하지 못했다. 꼬살라 왕은 세존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세존처럼 훌륭한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이러한 꼬살라 왕과 말리까 왕비가 어느 날 누각에 올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다.
다음은 ‘말리까 경’의 본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와나 숲의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말리까 왕비와 함께 높은 누각으로 올라갔다. 이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말리까 왕비에게 말했다.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제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폐하께서는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자가 있습니까?”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 뒤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높은 누각에서 내려와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세존께 다가가서 절을 올린 뒤에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꼬살라 왕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말리까 왕비와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말리까 왕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물었을 때 세존이시여, 말리까 왕비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폐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세존이시여, 저는 말리까 왕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고”
이상은 꼬살라 왕과 말리까 왕비가 나눈 대화였다. 그런 뒤에 꼬살라 왕은 세존을 뵈었을 때 절을 올린다. 꼬살라 왕이 세존을 부를 때 처음에는 고따마라는 성을 불렀고 다음에는 바가와라고 해서 존자라고 불렀고, 다음에는 반테라고 해서 점점 더 존중하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이 세존에게 절을 올리는 단계가 되었다. 차츰 꼬살라 왕이 세존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법에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꼬살라 왕은 이제 틈만 나면 때를 가리지 않고 세존을 찾아뵈었다.
이때 꼬살라 왕이 말리까 왕비에게 물은 내용이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였다. 이때 ‘좋아하는’은 삐야(piya)라고 한다. 삐야(piya)는 귀여운, 즐거운, 사랑스러운 좋아하는 등의 뜻이다. 그리고 아삐야(apiya)는 귀엽지 않은, 좋아하지 않는, 사랑하지 않는 이란 뜻이다. 이때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쉽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인도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할 때 받쳐준다는 뜻으로 말한다. 이때 받쳐준다는 것은 어떤 무게가 나가는 것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소유하려는 의미보다 오히려 대상을 위해 힘이 되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현재 사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과거에는 이런 말을 쉽게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문명화되면서 이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점점 더 진해진 측면도 있다. 한국에서 사랑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이성적인 사랑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사랑도 함께 나누는 넓은 의미의 인류애가 있는 사랑도 있다. 또 너와 나만 나누는 협소한 의미의 이성적인 사랑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랑을 통 털어서 자애라고 한다. 불교에서 선정수행의 하나로 자애관을 하는데 죽은 자에 대해서는 자애관을 하지 않고, 원수에 대해서도 자애관을 하지 않고, 이성에 대해서도 자애관을 하지 않는다. 이런 대상들에게는 진정한 자애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매우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측면도 함께 있다.
말리까는 매우 지혜가 뛰어난 왕비다. 꼬살라 왕이 왕비에게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말리까 왕비가 대답하기를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당연히 ‘저는 오직 폐하만을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답이었을 것이다. 이때 왕비의 대답은 왕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한 답변이다. 더욱이 왕비가 오백 명 이상이 되는 그런 현실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것보다 오직 한 인간의 진실을 말한 것이다.
물론 이때 꼬살라 왕은 왕이 아닌 왕비 자신을 좋아한다는 대답을 듣고 놀랐을 것이다. 이런 대화에 놀랐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은 뒤에 즉시 세존께 가서 이런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일상적인 대화였으면 굳이 세존께 가서 매우 평범한 부부의 사랑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꼬살라 왕은 오백 명의 왕비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왕비에게서 오직 폐하는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답변을 듣고 세존께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리까 왕비의 대답은 다음 질문에서 지혜가 더 드러난다. 왕비가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뒤에 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폐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말리까 왕비가 단지 자기 자신만 좋아한다는 말로 그쳤으면 왕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되물어서 과연 왕은 누구를 좋아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이때 강대국의 꼬살라 왕은 부러운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서 자신이 아닌 누구를 좋아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서 말리까 왕비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왕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한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은 항상 외로운 자리며 무엇이나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위ㅏ치에 있어 자기 업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는 다른 감각적 욕망으로 풀거나 때로는 잔인해지거나 자기 비하를 할 수도 있다. 앞서서 재판을 할 때 부유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재판에 대한 회의를 느낀 것도 이와 같다. 그런 측면에서 말리까 왕비가 왕이 자기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었다면 대단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자신을 좋아할 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서서 비로소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세존의 가르침에서도 자신을 좋아하라고 하셨다. 나를 좋아하면 남도 좋아한다고 하셨다. 세존의 가르침 중에 주석서에서는 오온의 식을 왕에 비유하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은 신하에 비유한다. 이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도 왕의 위치를 가진 것과 같다. 여기서 왕이라고 여기는 아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에 따라 나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대국을 통치하는 왕의 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왕에게 자기 기쁨을 갖게 한 말리까 왕비의 지혜가 돋보인다.
여기서 꼬살라 왕과 말리까 왕비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자기라는 말인데 이때의 자기를 앗따(atta)라고 한다. 앗따(atta)는 자기, 자신, 자아, 존재라는 의미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무아를 주장하셨기 때문에 자아는 무아와 반대가 된다. 이때의 무아를 아낫따(anatta)라고 한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이 앗따(atta)인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다원이 되어야 유신견이 사라져 자아가 무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자기라고 하는 앗따(atta)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말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일부의 학자가 왕과 왕비가 말하고 있는 자기 또는 자신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의 영혼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도 자기를 표현할 때 앗따(atta)를 사용했지만 세존께서도 똑같이 앗따(atta)를 사용하셨다. 이때 세존께서 사용하신 앗따(atta)는 부르기 위한 명칭인 존재로서의 앗따(atta)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뿌투 앗따(puthu atta)라고 한다. 뿌투(puthu)는 각각의, 개별적인, 넓은, 여러 종류의, 라는 뜻이다. 그래서 뿌투 앗따(puthu atta)라고 하면 특수한 개별적인 자아로서 일상적인 자아를 말하며 개성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말한다. 이때 일상적인 자아라고 하거나 개성이 있는 자아는 오온의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의미한다. 이때의 개성이 있는 자아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복합체로서의 자아를 말한다.
그러므로 왕과 왕비가 사용하는 앗따(atta)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나만 아는 그런 독선적인 자기가 아니다. 그냥 남이 아닌 단지 자기의 몸과 마음일 뿐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도취에 빠져 자아가 있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왕비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했다면 왕과는 다른 자기라고 이해하였을 것이다. 왕과 왕비의 이러한 견해는 더구나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인도의 아트만(Atman)사상이 아니어서 더욱 놀라운 견해다. 서양에서는 이십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실존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는데 이천 육백년 전에 이런 견해가 생겼다는 것은 세존의 가르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리까 경’ 본문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으로 사방을 찾아보아도 자신보다 좋아하는 자를 찾지 못하네. 다른 사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나를 좋아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네.”
내가 나를 좋아하면 남도 나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좋아하면 남이 나를 좋아한다. 내가 남을 존중하는데 남이 나를 멸시할 수 없다. 누구나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내가 남을 해롭게 하면 남도 나를 해롭게 한다. 내가 남에게 해로움을 주고서 나의 이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남에게 해로운 행위를 했으면 그 과보를 그대로 받는다.
이때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남을 좋아하는 것이나 모두 이익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원인으로 좋아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익은 남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나를 좋아해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무슨 일이나 노력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일의 시작은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더불어 남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남이 두루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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