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물을 볼 때 만약 십팔계 안에 없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무지개를 오색 무지개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라고 이야기한다. 같은 무지개를 보고서 옛날 사람들은 다섯 가지 색이 있다고 느끼고, 요즘 사람들은 일곱 가지 색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옛날의 무지개와 요즘 무지개의 색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무지개는 빛의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긴 파장에서 보라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짧은 파장까지 무한히 많은 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파장이 연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비치는 무지개의 색은 그 수가 무한하다. 그런데 옛날 사람의 안식계에는 다섯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색으로 보았고, 요즘 사람들의 안식계에는 일곱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색으로 보는 것이다.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 가운데는 색을 '밝다' '어둡다'로만 구별하는 원주민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안식계에는 어둠과 밝음만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어둡거나 밝은 것이 있다'는 느낌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의식계 속에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책상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책상을 보아도 '책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형태의 나무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 있다'는 느낌, 즉 촉은 우리의 십팔계 안에 그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을 때 생긴다.
'무엇이 있다'는 느낌은 이렇게 우리의 십팔계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나타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생기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자아계'와 색성향미촉법계라고 하는 '대상계'와 안식 내지 의식계라고 하는 '의식계'가 함께 모일 때, 즉 삼사三事가 화합할 때이다. 안식계에 붉은 색을 알아보는 의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아계'의 보는 자아와 '대상계'의 보이는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즉 안眼과 색色이 나타나지 않으면 '붉은 색이 있다'는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은 온 곳이 없이 나타나서 간 곳이 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이러한 허망한 의식이 욕탐에 의해 십팔계 속에 모여 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즉 본다는 행위를 할 때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즉 보지 않을 때는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은 십팔계라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계 속에 붉은 색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다고 해도 본다는 행위를 통해 이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붉은 색이 있다'는 느낌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색을 알아보는 의식, 즉 안식이 없으면, 보아도 있다는 느낌이 생기지 않고, 보는 眼과 보이는 色이 없으면 안식계 속에 붉은 색을 알아보는 안식이 있어도 있다는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은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한 자리에 있을 때, 즉 삼사가 화합할 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촉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촉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삼사가 화합할 때 생기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촉은 이렇게 접촉의 의미와 함께 느낌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촉의 작용으로 인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계나 영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이것을 모르고 죽지 않는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놓고 서로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존은 유무중도를 이야기하면서 유무 이견은 모두 촉을 취하는 것이므로 촉을 취하지 않으면 허망한 생각을 꾸미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촉을 세존은 '입처(ayatana)'라 부른다. 왜 세존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인 촉을 '입처'라 불렀을까?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입처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중생들의 허망한 세계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이다. 십이입처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십팔계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허망한 의식이므로 입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촉을 어떤 계가 성립하는 바탕이 되기에 입처라고 부르는 것일까?
촉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느낌의 주체로서 자아가 사물을 접촉하는 곳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촉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물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 물, 불, 바람, 돌, 흙, 이 모든 것이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런 물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지수화풍 사대四大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사대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런 물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물질과 공간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다. 당시의 외도들이 갖가지 요소설을 주장했지만 정리해 보면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 여섯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외도들은 이들 여섯 가지 요소가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있는 것'은 모두 촉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촉은 이들 여섯 가지가 성립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은 이들 여섯 가지를 육계라고 불렀고 육계가 촉을 근거로 한다는 의미에서 촉을 입처라고 부른 것이다.
육계는 우리의 인식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지수화풍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아니다. '있는 것'은 모두 '있다는 느낌'인 촉을 인연으로 해서 나타난 것이지 요소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외부에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지수화풍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사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수화풍도 '있다는 느낌'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중아함 상적유경>과 이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사대四大인가? 지계, 수화풍계를 말하나. 여러분, 어떤 것이 지계인가? 지계에는 내지계內地界와 외지계外地界가 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내지계인가? 몸 안에 있는 개개의 단단한 것과 단단한 상태라고 취해진 것을 말한다........ 여러분 지계라고 불리는 것은 늙은 여자처럼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소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쇠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변역법變易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계가 단단하다고 느껴진 것이듯이 수계는 촉촉하다고 느껴진 것이고, 화계는 따뜻하다고 느껴진 것이며, 풍계느느 움직인다고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경은 당시 유물론자들이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한 사대에 대하여 그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사대도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상하고 변역하는 법에 지나지 않는다. 세존은 외도들이 실체로 생각한 사대를 마음에서 연기한 무상한 법을 같은 종류끼리 모아 놓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계라고 불렀다.
우리는 물질이 없으면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공간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식은 물질이나 공간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느껴진 것이다. 이러한 공간과 식을 사계와 함께 육계라고 부른다. 따라서 십팔계는 의식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분별심이고, 육계는 이 분별심(십팔계)을 인연으로 발생한 촉, 즉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통해 당시의 인도인들이 존재의 근본 요소로 생각한 것을 불교의 입장에서 해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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