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내내, 아티스트 웨이 일곱 번째 날.
'힘을 회복한다'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분노라는 힘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줄리아 카메론은 책에서 분노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외침이며 호소이고 요구이다. 분노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고? 분노는 우리의 한계를 절실히 드러내주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만이 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
분노는 우리가 무엇을 좇아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에 휩싸여 행동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분노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연료로 이 분노를 이용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분노가 보내는 메시지를 해석할 수 있다. (...)
분노는 과거의 삶이 죽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폭발물이다. 분노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연료이고,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이다. 분노를 묻어두기보다는 끌어내야 한다. 잘만 이용하면 분노는 아주 유용하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만나기 전에, 모닝 페이지는 분노의 도가니였습니다. 분노로 휘갈겨 쓰는 페이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넘치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전전긍긍했습니다. 분노가 가리키는 것, 분노 속에 있는 나의 want와 need를 알아차리기보다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른바 '한 방 잘 먹일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의 표현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성공하기 어려웠습니다. 분노를 무엇으로도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이용하여 쓰기보다는 분노에 휘둘려 나를 망가뜨릴 때가 많았지요. 이를테면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이 잦았습니다. 결국 한 방 먹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내가 주저앉더라고요. 분노를 풀기 위한 주로 쓴 방법은 과식이었습니다. 꽉찬 포만감 상태에 이르면 분노가 풀릴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어요. 이것은 오히려 감정의 마비 상태를 추구하려는 것, 이렇게 살아남으려는 자기 방어였다는 것을 말이지요.
너무나 느리게 분노의 속마음, 분노의 욕구가 말하는 것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조금씩 천천히 분노는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불쏘시개이고 분노는 내 주인이 아니라 나의 도구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저절로는 결코 아니고,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모닝 페이지를 하면서 말이지요.
줄리아 카메론의 문장을 함께 읽고, 참가자들과 분노에 담긴 메시지, 분노가 가리키는 것을 잘 보기 위해 문장으로 분노의 지도를 그려보는 작업을 아주 조금 해 보았습니다. 창조적 긍정의 힘으로 말이지요. 나는 이 분노를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이 분노가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작업할 때는 정말 창조적인 힘이 올라옵니다. 이게 바로 글쓰기의 매력, 글쓰기의 힘인 것 같습니다.
분노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 나를 돌보는 일상을 더 잘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분노를 지혜롭게 잘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서로의 분노를 모아 모아서 세상이 망가지지 않게, 나아지게 바꾸는 힘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줄리아 카메론이 말하는 대로 '사소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자신을 배려하는' 일상을, 나에게 다정한 일상, 나를 돌보는 일상을 모두가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아침에는 '빙그레 조식'으로 시작합니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방법입니다. 저한테는 말이지요. 잘 먹으면서, '잘 쓰자, 글도 마음도 몸도 잘 쓰자. 그리고 잘 싸우자' 이렇게 말합니다.
한강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의 마지막 구절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리고 내일도 잘 먹고, 잘 알자, 잘 만들자, 쓰자, 싸우자 다짐합니다.
저와 많은 분들이 엄청난 분노가 올라오는 시국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정성스럽게 돌보며, 분노는 모아, 모아서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쓰자' 다시 또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