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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31
요한계시록 8:3-5
성도들의 기도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요청과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 땅에서 고통 없이 편하게 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들의 종교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살해하였다. 그래서 죄인들의 소원이나 요청은 언제나 하나님 뜻을 대적하는 것이다.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빌 3:18).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만 나오면 하나님의 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인은 자기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 이름이 삭제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하나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면 어떻게 남과 비교하고 상대를 눌러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나올 수 있겠는가? 기도는 나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의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한다.
1절에서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라고 하였는데 그 침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밝혀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3-4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등장한다. 마치 제사장이 향을 피우듯이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들고 향을 받아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린다. 이 모습은 이미 앞에서 보여주셨던 계시를 좀 더 심화하여 말씀한 내용이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 6:9-10)
그런데 왜 천사가 향을 담아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바로 드린다고 표현하지 않고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한다고 말씀하나? 우선 구약의 성막에서 제사장이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 것에 대한 기록을 보자.
12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레 16:12-14)
요한이 본 제단과 금향로는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성막의 분향단과 관련이 있다. 하늘 성전을 출애굽 때 성막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제단이란 구약에서 희생 제물을 잡아 제사하는 곳이다. 제단의 불을 향로에 채워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린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희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놋 제단이 아닌 금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희생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한다. 성도의 기도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속죄제를 드린 어린 양의 피가 분향단에 발라질 때(출 30:10, 레 4:7)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 “많은 향을 받았으니”(헬, ‘에도데’ - 원형 : ‘디도미’)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어졌으니’라고 과거형 수동태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기도는 성도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성도들의 기도로 표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되돌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잘 보여주셨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6-37)라고 말씀한다. 겟세마네는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가신 곳이었고(눅 22:30), 가룟 유다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요 18:1-2).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룟 유다가 알고 있는 장소로 가셨다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왜 고뇌하고 슬픈 표현을 하시며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더 가까이 데리고 가셨다(막 14:33).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고 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마 20:22, 26:35),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영광스럽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동행한 제자들이다(마 17:1). 변화 산 위의 사건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신 장면을 연상시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그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이라면 여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도 역시 단순히 예수님의 기도라는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을 성취하시는 일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원하셨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 고민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는 차원에서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언약을 대하는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참고 시 42:5-6). 예수님은 지금 죄인의 모습으로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대하는 죄인들의 상태를 폭로하신 것이다. 살아 있다 하나 죽은 자임을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자고 있는 것으로 보여주셨다(마 26:40-41).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다. 죄인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죄악된 심성을 겟세마네에서 철저히 폭로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는 죽음에 제자들이 동참 되는 것만이 구원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함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적 시험에 빠져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는 영으로 이루시는 것이지 육신의 약한 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심, 뜻은 이스라엘을 세워놓고 진짜 언약의 상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고 그것이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상대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시아였고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렇게 보자면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은 너무 고민되고 슬퍼서 같은 기도를 반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분명히 성취될 것에 대한 선언이요 확증이다. 인간이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었다면, 예수님의 세 번 기도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져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함께 죽는 언약 백성들을 동참시키실 것에 대한 확증이다(참고 요 21:15-17, 고후 12:9). 그래서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씀한다.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0-31)
가룟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라고 하였다. 곧 죄인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그 상태가 바로 어둠의 상태이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이미 영광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하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생각했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의 침묵을 성도들의 기도로 표현하고 그 기도가 보좌에 올려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으로 모든 악의 세력들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늘의 고요함은 성도들의 기도에 집중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낸다. 결국 성도들의 기도는 어린 양 안에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된다. 이런 점에서 “많은 향”은 복수이나 “향연”(향의 연기)은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9-10)
그리고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5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도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단어이다. “땅에 쏟으매”(헬, ‘발로’)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땅에 던졌다’라는 말이다. 왜 아무 불이나 담지 않고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 던졌나? 제단 위의 불은 단 위의 제물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떨어진 불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즉 성도들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심판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였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2)
“아들에게 입맞추라”라는 말씀은 십자가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굴복이고 심판의 정당성에 대한 찬송이다. 결국 성도들의 기도는 우리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늘의 침묵이다. 하늘의 고요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곧 십자가만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202304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