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도계리와 영양향교,수월헌,사의정사참판공종택
도계리道溪里
영양군청 소재지에서 6키로미터 지점 국도31번 주위에 마을이 있다.
마을의 좌우에는 장군천과 반변천이 흐르며 일월산 남쪽 기슭에 둔덕을 이루고
냇물을 따라서 길이 나 있다.
서쪽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영양읍과 청기면, 그리고 수비면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이 마을 가운데로 나 있다.
본래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뒷두들 혹은 도부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당중동과 무등곡을 합하고 도계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한다.
영양향교(鄕校)와 일월면 사무소와 영양경찰서일월파출소, 그리고 초등학교ㆍ우체국
영양농협일월분소 등이 있다.
도계(道溪)를 풀이하면 냇물을 따라서 난 길이란 말이니 냇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뒷두들 또는 도부리(道阜里)라고 불렀으며 1600년 무렵 이씨(李氏)라는 농부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마을 둔덕 위에 농토를 일구어 살면서부터 뒷두들이라 불렀으며
1678년 덕봉면 장중이라고 개칭하였다가 1682년 일월면 도부리라 불러 오던 중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좌우에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하천을 따라 도로가
개설된 마을이라 하여 도계동이 되었으며 1964년 행정 분동으로 도계1리가 되었다.
도계리의 옛지명 도부리(道阜里)의 ‘도(道)’ 는 뒤를 이르고, 북쪽을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도부-뒷두들의 걸림이 이루어지는데, 도부는 뒷두들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경우라고 할 것이다.
영양향교英陽鄕校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영양 향교(英陽鄕校)를 들 수 있다.
군청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6킬로 떨어진 일월면 도계리에 향교가 있다.
후학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서 봄과 가을로 향사를 올린다.
조선조 숙종 5년(1679) 을미(乙未) 년에 정식으로 향교를 설치했는데,
향교의 자리는 본래 영해 부사를 지낸 김천보(金天寶)의 옛집으로서 향중(鄕中)의
왼편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
현재의 영양향교건물은 조선 숙종 9년(1683년) 건립되었다.
『영양군지』를 통해보면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전루, 육영루, 교사를
재사와 주고를 건축하였다고 하였다.
『경북향교지』에서는 1683년(숙종9)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1925년 육영루가 철거되었고 2009년 현위치에 복원하였다.
현재 영양향교는 대성전과 내삼문, 두 개의 협문과 명륜당, 육영루, 전사청, 관리사 및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大聖殿)에는 스물일곱 성현 위패를 모셔 놓았다.
대성전 현판 걸개의 글씨는 옛날 주자(朱子)의 글씨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75호(1985년)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육영루(育英樓)
육영루 뒤 명륜당 그리고 대성전
수월헌水月軒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충효로서 널리 알려진 수월(水月) 조검(趙儉)선생의 정자다.
선생은 선조 3년(1570)에 원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소학을 배울 때 고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들으면
심중에 즐겨하고 모방코자 노력하였으며 차차 장성하여
인륜을 두렵게 지키며 언행이 공손하였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오랫동안 부모를 받들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겼는데, 조모가 겨울에 병상에서
강어(江魚)를 원하였다. 그러나 얼음이 강을 덮어 구하기가 어려워
울며 강 아래 위를 수차 내왕하면서
"부친이 평시에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셨으니
영검이 계신다면 고기를 구하도록 하여달라"고 애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오르고 또 그것을
까마귀가 물어 선생에게 날라주어 그 잉어를 가져와 조모에게
공궤(供饋,받들어서 먹게하는 것) 한즉 병이 나았다.
이에 모두 효성이 신명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선생의 충효를 추앙하기 위하여 후일에 자손들이 지은 정자이며
세 칸 겹집으로 左右書室(좌우서실)이며 중간은 마루로서 좁고 난간을 둘렸다.
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하였다.
사의정사思義精舍 및 참판공종택參判公宗宅
사의정사(思義精舍)는 한양 조씨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趙源)의 종택으로
350년 전에 건립되었으나, 2002년에 기존의 종택을 철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중건하였다.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은 기묘사화(1519)를 만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한양조씨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감공 조종(趙琮)은 영주로
그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은 1535년 경북 영양에 입향하면서
한양조씨의 영양세거가 시작되었다.
한양조씨 11세 손으로 영양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 선생은
안동 풍산 땅에서 영양으로 들어와 함양 오(吳)씨를 맞아
光仁(광인), 光義(광의) 두 형제를 두었다.
한양조씨 12세 손인 광인(1537~1582)에게는 검(儉)과 임(任)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자 검은 조실부모 후 병든 조모를 구완하기 위해 빙판 위를 오르내리며
잉어를 구한 이야기로 마을 이름이 비릿골(飛鯉里)로 불리울 만큼 유명하였으며,
효행으로 향내(鄕內)에 널리 알려져 향인들의 추앙하는 바 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생 임과 함께 홍의장군 곽망우당
(郭忘憂堂) 휘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조검의 아우인사월공(沙月公) 조임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 조검과 함께 의령출신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웠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27년 정묘호란때는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바쳤으며
1636년 병자호란때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했다.
參判公 宗宅(참판공 종택)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도계리.<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5호>
[참판공 종택 입구]
참판공종택이란 글을 새긴 돌과
'한양조씨영양입향시조추모비'가 종택입구 옆에 세워져 있었다.
[漢陽趙氏英陽世居紀蹟碑(한양조씨영양세거기념비)]
건물 앞에 선 漢陽趙氏英陽世居紀蹟碑(한양조씨영양세거기념비)에는
한양 조씨 영양 입향 내력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대략 한양 조씨는 참판공 조원의 뒤를 이은
水月(수월), 沙月(사월), 壺隱(호은)을 거쳐 지훈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날린 명문세가라는 내용인것 같다.
[종택 솟을대문]
한양조씨 영양 입향조 參判公(참판공) 趙源(조원)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은 己卯士禍(기묘사화, 1519)를 만나
靜庵 趙光祖(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한양조씨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감공 琮(종)이 영주로
그의 손자인 참판공 源(원)이 1535년 경북 英陽(영양)에 입향하면서
영양세거가 시작됐다한다.
한양조씨세거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