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영등포교회 개척(도시산업)선교 회고 : 가난한 노동자들③
도시산업 선교회
안영윤(마태) 신부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노동조합 교육은, 일을 하다보니 다른 교단에서도 열심히들 하고 있기에 때로 일이 중복될 때도 있고, 경쟁을 할 때도 있어 영등포지역의 모든 산업선교 실무자들과 만나 협의끝에 도시산업선교회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이 단체는 오래전 부터 이름만 있었고 활동이 없었기에 내가 자원해서 이 단체를 활성화 하는데 앞장서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 시간과 정력을 쏟을 바에는 전국적인 단체로 튼튼히 만들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하기로 했다.
그래서 첫 모임을 주선했고 자원해서 총무를 맡기로 했다.
그 당시 이 단체의 회장은 고(故) 이국선 목사님(인천지역에서 활동한 기독교 장로회 소속 성직자)으로 우리 두사람은 수면을 줄여가며 자주 만났었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불편할 때였으므로 우리의 만남은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전화는 가설비가 비싼데다가 좀처럼 전화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고, 늘 인편을 통하거나 매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를 정해서 만났었다.
이 단체를 운영하는 기금은 해외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까지만 해도 그런 일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나 평신도들이 거의 없어서 국내의 교회나 교회단체로 부터 도움이 전혀 불가능 했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기금을 보내준 단체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기독교 교회협의회였는데 이 단체는 후진국가의 교회가 겪는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도시산업선교회를 돕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구의 산업사회에서는 도시산업 선교가 활발해서 그 나라의 국가발전에 큰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의 우리나라는 농경중심 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첫발을 겨우 들여놓을 때 이었고,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영향도 아주 미미할 때 이었기에 이처럼 국제적인 협의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는 없었다.
이 기관의 도시산업선교 담당관은 헤리 다니엘 신부님이었는데 이 분은 원래 인도의 성공회 신부님 이었으나 그 나라의 성공회는 다른 교단과 합쳐서 남인도교회라는 초교파 교회가 되었기에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나라의 초교파운동인 이 도시산업 선교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분에게 늘 송구스럽게 생각한 것은 이 분이 우리나라를 방문 할때면 언제나 우리나라의 해외공관에서 입국비자를 주지 않아 꼭 미국을 거쳐서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겨우 입국비자를 받아 들어온 사실이었다.
우리는 외국의 귀한 도움을 십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이 기금으로 우리 자신을 교육시키는 사업과 한국교회의 의식구조 개선을 위한 사업에 주로 활용하기로 했었다.
우리 자신을 교육하는 사업은 주로 일선에서 뛰고 있는 전국의 모든 일꾼들이 한자리에 모여 몇일씩 숙식을 같이 하며 세미나를 열어 자기 수양과 교육에 앞장섰고, 한국교회의 의식구조 개혁은 산업사회에서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게 해주는 일이었다.
지금도 더러 그러하지만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란 개인의 축복과 내세에 대한 소망만 주는 곳이지, 예수님의 교훈인 개인의 희생이나 현세의 천국건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교회를 찿아 다니며 설교를 자청하고, 교인들의 모임마다 참석해서 교인들의 의식구조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불행히도 그 당시의 한국교회는 '라이스 크리스찬(Rice Christi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만큼 외국원조에만 의존하고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생각이나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은 정신병자의 행동으로만 생각했기에 도시산업 선교회의 이념이나 가르침은 좀처럼 호응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교인들의 반발만 가져오는 현상들을 여러곳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사고구조에는 상관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하느님 나라의 지상건설을 위해서 (특히 산업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기로 했다.
이러한 외로운 투쟁은 때로는 신변의 위험도 상당히 감수해야만 했다.
가장 좋은 예가 다음에 열거하는 강화에서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