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군사전략가, 충민공 임경업

조선의 군사전략가, 충민공 임경업
전쟁기념관은 2011년 12월의 호국인물로 조선의 명장 임경업 장군(1594∼1646)을 선정했다. 그 선정 배경으로 장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됐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북도 의주군 백마산성을 지켜 청나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조선의 항복 이후에도 압록강에서 철수하는 청나라군을 급습해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 120여 명과 말 60여 필을 빼앗았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 중에는 유명한 장군이 많다.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계백, 김유신 등등 많은 장군들이 존경을 받고 있고 그들에 관한 위인전 역시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다. 그들 중에서 내가 유독 임경업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가 비운의 장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경업은 <임경업전>이 출간될 만큼 장수로서 인정받고 있는 위인이지만 사실 전쟁다운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을 만큼 실제 그의 삶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래서 피상적으로 그의 이름만 알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이번 참에 그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는 것도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그의 삶에 대한 예의이자 명예회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임경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594년(선조 27) 평안도 개천 땅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아버지 고향은 충주 달래마을(달천)인데 한때 무인의 벼슬을 했던 그의 아버지가 임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로 왕을 쫓아갔기 때문에 타향에서 그를 낳은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란이 끝나자 그의 가족은 다시 고향인 충주의 달래마을로 돌아왔다. 4형제 중 둘째인 그가 바로 아랫동생인 사업과 함께 무과에 합격한 것은 그의 나이 25세때인 1618년(광해군 10)이다. 첫 부임지는 함경도 갑산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벼슬을 주기 전에 의무적으로 국경지방에 가서 얼마동안 근무해야 했기에 그는 갑산으로 발령이 났다.
임경업은 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을 통해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인조 5년에 발생한 정묘호란 당시에는 낙안군수로 재직하여 전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진하여 전장에 나갔으나 조선과 후금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져 장수로써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병자호란 이전 주로 서북지역에서 근무한 임경업은 탁월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한다. 그 예로 인조 13년에 후금의 사신이 조선에 오게 되었는데 명나라의 심세괴가 이들을 잡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임경업은 후금 사신들을 탈출시킨 후 심세괴에게는 이들이 먼저 눈치를 채어 달아난 것이라고 속이는 전략을 섰다. 이것이야말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약자인 조선의 장수가 ‘중립외교’를 펼친 것이라 평가할수 있다. 또한 병자호란 직전에는 청나라에 첩자들을 파견하여 이들의 침략 기도를 간파하게 하였으며, 이에 대한 대비로 2만 명의 군사 증강을 조정에 정식으로 요청하였지만 무신에 의한 군사반란을 두려워한 조정의 반대로 무산된 일도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 백마산성을 지키던 임경업은 군관을 시켜 청군의 침략사실을 신속하게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역신이자 간신으로 평가받는 김자점의 방해로 조정에 알려지는 것이 늦춰지게 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휘하의 병력이 남녀노소 합이 8백명에 불과하자 허수아비를 세우는 계략을 세워 청군을 속이는데 성공했으며, 상관인 유림에게 청군 주력이 조선내지에 깊숙이 투입된 틈을 타서 조선군 5천명을 이끌고 심양을 급습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조선인 포로를 구출하는 전과도 세웠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인조 15년 4월에 후위를 위협하던 島 공격을 위해 조선군을 동원요청한다. 이때 조선군을 이끌고 가도공격에 참전한 임경업은 조선군을 화살받이로 이용하려던 청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선봉을 청군이 맡도록 유도하였으며 조선의 안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청군에 협조하여 가도를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조 18년에 청나라는 또 다시 명나라 금주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조선에 군사병력을 요청한다. 청의 요청에 따라 조선은 임경업을 주장으로 삼아 조선군 6천명을 파병시켜 금주전투에 참전시킨다. 이때 임경업은 최명길과 상의하여 승려인 獨步를 미리 명나라에 파견하여 조선이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것임을 이해시키고 청군과 함께 금주를 공격하게 된 임경업은 명군과 사전에 조율한대로 화살의 촉을 빼는 조치를 취해 명군과의 전투로 인한 병력 피해를 최소화 시켰으며 또한 명황제의 밀서를 받아와 조선과 명의 외교관계를 회복을 시켰다. 이와 같이 임경업은 청이 주도한 금주전투를 오히려 조선의 국제적 고립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였다. 요컨대 임경업의 금주전투의 행적이 물론 그간의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이것은 분명 ‘실리외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칼은 추련도(秋蓮刀)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데 본래 호신용이다. 임경업 장군의 실전용 칼은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칼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추련도의 칼날은 철,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코등이는 얇은 철판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그 위에 주석·납으로 합금하여 도금하였다. 이 추련도 양날에는 아래와 같은 한시(漢詩) 28자가 새겨져 있다.
시호시래부재래(時呼時來否再來)
때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일생일사도재연(一生一死都在筵)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도다.
평생장부보국심(平生丈夫報國心)
장부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삼척추련마십년(三尺秋蓮磨十年)
석 자 추련도를 십 년 동안 갈고 갈았도다.
칼의 이름인 추련도(秋蓮刀)는 위 추련(秋蓮)에서 따온 것이다. 추련 즉 가을 연꽃은 다른 연꽃이 피지 않을 때 의연하게 핀 꽃, 즉 지조가 있는 대장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편 청나라가 명의 금주를 공격했을 때 명의 장군인 홍승주가 항복하자 그의 부하들이 임경업이 명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분노한 청은 조선을 압력하여 형조판서인 원두표로 하여금 임경업을 붙잡아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임경업은 이 사실을 알고 도망칠 때 쓰기 위해 은700냥과 승복 및 칼을 얻어 미리 숨겨 놓았고, 급기야는 붙잡혀가다가 11월 6일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심기원의 도움으로 밤을 틈타 도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숨겨 놓았던 승복을 찾아 갈아 입고 승려로 위장하여 명나라로 탈출할 기회를 노리면서 초막을 짓고 숨어 살았는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청나라로 압송했다. 모진 고문과 능욕을 당한 그의 아내 이씨는 그 이듬해 심양옥에서 자결을 하고 만다.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평소 그를 도와준 김자점의 종이었던 장사꾼 무금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배 한척을 얻어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부하 두 사람과 전부터 사귀어 온 두 승려와 함께 상선을 가장하고 마포를 출발하여 황해로 빠져 중국 해풍도에 도착, 명나라의 도독인 황종예의 총병 마등고의 아래로 들어가 장군이 되어 4만명의 군사를 받고 청을 정벌하러 나갔다. 그러나 청이 이미 연경을 점령하여 명의 도독 황종예가 남경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임경업도 마등고와 함께 석성으로 가 기회를 엿보았지만 마침내는 도독과 마등고마저 항복하고 말아 전쟁 한 번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그를 돌봐주던 심기원이 역적모의를 했다하여 갇히게 되었는데 여기에 임경업이 관련이 되어 있다고 소문이 나자 그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 그는 부하 한사립의 밀고로 1645년 1월 청에 항복한 명나라의 장수인 마홍주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는데 그때 마침 청의 집권자인 예친왕이 임경업의 장군 됨됨이를 아껴 지난날을 묻지 않기로 했으나 조선의 역관인 정명수, 이형장 그리고 김자점 등이 짜고 그를 본국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심기원의 반역모의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임경업은 심기원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 및 칼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으나 역모에 가담은 하지 않았다고 극력 부인하였지만 원두표와 김자점은 거짓말을 한다하여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두표는 임경업을 청나라로 압송해갈 때 그가 도망치는 바람에 파직되었던 사람이므로 의당 앙심이 있었겠지만,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그를 돌봐주고 임경업도 그를 잘 따랐으며, 그가 파직을 당함에 이르자 그를 극구 두둔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인 사람으로 임경업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해 주었던 무금이 바로 자기 첩, 매환의 오라비였기에 임경업이 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 사실을 알리라고 하였으니 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될 경우 무금의 처도 문초를 받게 되고 이때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 본인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는고로 그렇게 되면 자기도 심기원과 같은 패로 몰려 역모죄로 죽게 될 터이기 때문에 김자점은 임경업을 죽일 것을 거듭 종용하였다.
결국 임경업은 그해 1646년 6월 20일 ‘심기원 역모사건 관련 및 조국을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이를 시인하라고 다그치는 모진 매를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53세....,
결국 믿었던 지인들에게 배신을 당해 숨을 거둘 때 임경업은,
"나라가 오랑캐의 발 아래 있고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많은데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는 말을 처절히 남겼다고 한다.
그는 전쟁다운 전쟁 한 번 치러보지 못한 채 한 때 청나라도 아닌 자신의 조국 조선의 친했던 인물들에게 배신을 당해 고향인 충주에 묻히게 되었다. 비록 장수다운 전쟁을 치룬 적이 없던 그였지만, 그는 당시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는 ‘이상’과 청의 외교 군사적 압박이라는 ‘현실’을 고민하면서도, 결국 조선의 ‘실리 외교’를 선택하였다. 또한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탁월한 ‘군사전략’을 제시한 실천적 인물이었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이해 관계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의 외교 현실에서 과거 임경업 장군이 보여준 ‘실리외교’를 다시금 검토해 봐야할 때인 것 같다.
임경업은 사후 50년이 지난 1697년(숙종 23)에 복관되고 충주의 충렬사, 선천의 충민사, 백마산성의 현충사, 겸천의 충렬사 등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