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지역의 축제와 민속놀이
안동지역의 축제와 민속놀이의 성격
전통사회의 축제는 마을․고을․나라의 세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안동지역에는 읍치(邑治)인 안동읍을 중심으로 하는 고을축제와 각 단위 마을에서 행해지던 마을축제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마을축제는 인접한 지연공동체 구성원들의 참여 여부에 따라서 ‘열린마을형’의 축제와 ‘닫힌마을형’의 축제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참여의 자격이 해당 공동체구성원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인근 지연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까지 열려 있는 축제이다. 이에 비해서 후자의 경우는 그 참여자격이 해당 지연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제한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타지역공동체 구성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폐쇄성을 지닌 축제이다. ‘열린마을형’의 축제는 대개 행정, 교통, 군사․경제의 중심지에서 많이 행해졌다. 이에 비해서 ‘닫힌마을형’의 축제는 일반적인 마을에서 행해지는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축제였다.
축제의 조직은 크게 제사를 담당하는 조직과 대동놀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사를 담당하는 조직은 제관과 여타의 집사, 그리고 전체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제관과 집사는 구성원들의 총의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며, 이들의 영도 하에 제사를 수행하였다. 대동놀이의 조직은 대개 거주지역을 기준으로 공동체의 공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각 편의 책임자를 뽑아서 그들을 영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고을축제에서는 대장과 도감을 뽑고 각 읍면 책임자를 뽑는 등 보다 체계적인 조직이 드러난다. 지신밟기의 경우에는 상쇠를 우두머리로 하여 조직된 풍물패들이 연행을 책임졌다. 한편 고을축제의 제사는 부사(府使), 혹은 향리들이 담당하였으며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축제에 소용되는 경비는 공유재산에서 얻어지는 소출과 걸립 및 갹출에 의존하였다. 특히 걸립의 경우에는 하회별신굿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회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부담이 두드러졌으며 여타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기부하였다.
축제의 이념적 기반은 보다 풍요로운 삶의 추구에 있었고, 모두가 크게 하나되는 대동을 통하여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동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나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그들을 보살펴온 신에게 풍요다산과 안과태평을 바라는 그들의 뜻을 기원의 형태로 전하고, 신은 그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가 되며, 인간 상호간에는 신명을 바탕으로 나와 너라는 차별이 없는 ‘우리’가 되어 크게 하나 되는 경지에 대한 추구가 있었다. 이를 통해서 축제의 주술종교적, 사회문화적 기능은 실천되었던 것이다.
안동지역의 전통축제는 음력 정월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일부에서는 정월 축제와 함께 단오축제를 행하기도 하였지만 그 기반은 정월 축제였다. 정월 중에도 특히 대보름을 전후한 기간은 축제의 중심 시기였다. 한편 축제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각 거리를 포함하는 공동체의 전공간이었다. 축제가 시작되면서 공동체의 공간은 일상과는 구별되는 비일상적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마침내 제사와 대동놀이에 이르러서는 비일상성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공간 가운데서도 중심공간은 제사와 대동놀이의 공간이었다. 제사의 공간은 신이 거처하는 곳, 혹은 하강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동제당 등이었으며 대동놀이가 행해지는 중심공간은 거주공간에 인접한 넓은 공간이면 어느 곳이나 무방하였다. 축제는 주기적이고 정례적으로 행해졌으며 축제의 중심공간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동되지 않았다.
축제의 중심적 연행은 제사와 대동놀이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길놀이였다. 고을축제의 경우에 제사는 부신제(府神祭)와 성황제였으며 이들 제사는 특히 지방관과 아전들에 의해서 치루어졌다. 주재집단의 성격상 제사의 형태는 독축고사형(讀祝告祀型)이었다. 한편 마을축제의 제사는 대부분 정월 보름 자시(子時)에 행해졌으며 축제의 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놀이는 강렬한 편싸움과 그에 수반되는 길놀이[지신밟기 포함], 그리고 다양한 소집단적 놀이들로 이루어졌다. 전통사회에서 우리 안동은 특히 팔매싸움[石戰], 동채싸움[車戰], 줄당기기 등의 대형 편싸움이 성행하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들 대동놀이는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어 어른들에 의해서 마감되는 일련의 전개과정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싸움에서 어른들의 팔매싸움으로, 골목줄에서 큰줄로, 째기동채에서 본동채로의 확산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른들이 주도하는 대동놀이가 행해지기 이전까지의 과정은 소규모의 싸움과 길놀이의 연속이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구성원들은 점차 고조되는 축제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안동지역 축제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들의 대동놀이인 놋다리밟기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놀이에는 남성 못지않게 격렬한 편싸움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놋다리밟기라는 대표 명칭 아래 포함된 다양한 놀이 가운데 하나인 꼬깨싸움은 임하면 금소리, 풍천면 구담리 등의 사례로 보아서 대단히 격렬한 편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지역 전통축제의 특징은 아이에서 어른, 남성에서 여성에 이르는 전체 구성원들이 따로, 혹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축제의 중심적 연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모는 대단히 특징적인 것이며 안동지역 민속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안동지역에서는 고을과 마을의 축제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동채싸움, 줄당기기․석전․놋다리밟기 이외에도 특징적인 놀이 활동이 전승되었다. 하회별신굿의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잡고 있던 탈놀이는 소위 서낭굿계열의 탈놀이로서 탈춤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늦어도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탈놀이는, 하회라는 마을의 역사적 전개, 그리고 마을문화의 성격 변화에 조응하면서 그 의미망을 변환하여 왔다. 풍산 류씨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승속의 갈등, 반상의 갈등, 남녀의 갈등 등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하여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축제적 해방을 촉진하는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여 왔다.
역시 하회에서 전승되었던 선유(船遊)는 또 다른 맥락에서 주목되는 놀이이다. 매년 7월 기망(旣望)에 정례적으로 행해졌던 이 놀이는 품격과 운치가 곁들여진 양반놀이문화의 정수이다. 불꽃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선상의 시회(詩會)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선유는 당시 안동 양반들의 놀이세계를 음미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안동지역 전통놀이문화의 특징적 국면은 다음과 같다.
1. 편싸움 형식의 다양한 대동놀이가 축제의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가운데 동채싸움은 역동적인 남성놀이로서 안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놀이이다.
2. 여성들의 축제놀이인 놋다리밝기가 강한 전승력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편싸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꼬깨싸움은 다른 지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3.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낭굿계열의 농촌형 탈춤으로서 탈춤의 고형(古型)을 잘 갖추고 있다.
4. 선유는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세시놀이로서 그 다채로움과 품격이 두드러진다.
아래에서는 안동지역의 다양한 놀이활동 가운데, 축제의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동채싸움과 놋다리밟기 그리고 선유를 중심으로 성인놀이를 살펴보고 아동놀이를 개관한 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안동민속축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성 인 놀 이
안동의 동채싸움과 놋다리밟기는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 대동놀이지만 팔매싸움과 줄당기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두 놀이도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놀이들이었다. 먼저 팔매싸움을 살펴보자. ꡔ영가지(永嘉誌)ꡕ에 의하면 안동의 팔매싸움은 김해의 팔매싸움과 함께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매년 정월 16일에 부(府)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가운데로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나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하고, 돌을 던져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하는데 한해의 풍년을 점친다. 경오년에 적을 토벌할 때에 모집하여 선봉을 삼았더니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그 이후의 문헌에도 계속 나타나서 팔매싸움이 안동지역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편의 구성이 읍치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동서부로 나뉘어졌음을 알 수 있고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책에 동채싸움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고 그 놀이방식이 팔매싸움과 같다고 한 것을 보면 동채싸움과 팔매싸움이 짝을 이뤄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줄당기기는 남녀노소가 함께 참여하는 최대 규모의 대동놀이로서 20세기의 초엽까지 안동에서 전승되었다. 안동의 줄당기기는 쌍줄당기기였으며 편구성은 역시 동부와 서부로 이루어졌다. 동부는 숫줄을 만들고 서부는 암줄을 만드는데 줄의 규모는 한줄의 길이가 100m가 넘었으며 줄머리의 크기는 어른 키에 이를 정도로 컸다. 동부에는 진보․영덕 사람들까지, 서부에는 풍산․예천 사람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줄당기기로서 참여 인원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싸움이 얼마나 격렬하였던지 동부가 이겼을 때는 줄을 ‘선어대’까지 끌고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당긴 줄을 끊어서 단오에 그네로 사용하면 사고를 예방하고, 태워서 닳여 먹으면 아들을 낳으며, 지붕에 올려놓으면 벽사진경한다는 속신도 있었다.
이들 놀이들은 이미 전승이 중단된 지 오래이고 그 자세한 내용도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남성들의 동채싸움과 여성들의 놋다리밟기, 그리고 양반들의 선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남성놀이
1) 동채싸움
안동의 동채싸움은 읍내뿐만 아니라 읍외 지역인 임하면 금소리와 북후면 옹천리 등에서도 전승되었다. 아래에서는 이들 세 지역의 동채싸움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안동 읍내의 동채싸움
동채싸움은 정월 대보름 명절 기간에 행해졌다. 대개 대보름 당일 행해졌으나 사정에 따라서는 뒤로 미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동채싸움이 해마다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줄당기기가 행해지는 해는 동채싸움을 하지 않고 동채싸움을 하는 해는 줄당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이의 준비과정이 줄당기기가 훨씬 더 복잡하고 경비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줄당기기에 비해서 동채싸움이 보다 자주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양상은 금소나 옹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채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는 낙동강변에서 이어지는 백사장과 논밭이었다. 지금의 기차역에서 서악사(西岳寺)에 이르는 넓고 긴 공간이 본동채싸움의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폭이 700여 미터, 길이가 2.5 킬로미터에 달했다. 이처럼 놀이공간이 넓고 긴 것은 머리꾼 싸움이 격렬하게 전개되면 수백 미터씩 밀려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금소나 옹천의 경우에는 마을의 넓은 논밭에서 행해졌다.
동채싸움의 편은 동부와 서부로 구성된다. 편을 가르는 기준은 읍내를 가로지는 안막곡(安莫谷)이었으며 그 동쪽 지역에 속하는 각 마을들이 동부, 서쪽 지역에 속하는 마을들이 서부가 되었다. 이와 같은 편구성은 비단 동채싸움뿐만 아니라 석전․줄당기기․놋다리밟기 등의 대동놀이에도 적용되었다. 안막곡을 기준으로 정해진 이와 같은 구분은 뒤에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대구~예안 간을 통하는 도로를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읍내의 동부편은 용상․운흥․옥율․신세동 등이고, 서부편은 안막․삼산․천리․당북․북문․천리동 등이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읍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읍외의 지역까지 확장되어 적용되었다. 면부의 동부편은 낙동강 본류를 경계로 하여 동남쪽인 남선․남후․길안․일직․임동․임하․월곡이고, 서부편은 예안․도산․녹전․북후․와룡․서후․풍산․풍천 등이었다. 면부에 속하는 이들 각 지역에서도 적극적으로 동채싸움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지역별 편구성의 원칙 하에서 출신지별로 자기 편을 정하는 독특한 관행이 유지되었다. 어떤 사람이 동부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 서부에서 태어났거나 살던 사람이라면 서부편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부자(父子)나 부부 간에도 편이 갈려서 승부의 결과를 두고 다툼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발의에서 싸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발의
추수가 끝나면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서 동채싸움의 거행 여부를 의논한다. 거행하기로 결정하면 곧 상대편에 통고한다. 통고를 받으면 대부분의 경우 즉시 회답하고 각기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도감(都監)과 대장을 뽑는데, 이들은 대개 동채싸움 경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추대된다. 연말과 정초가 되면 각 편에 속하는 면과 동에서 대표자들이 도감댁(都監宅)을 찾아가서 동채싸움의 준비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기 위해 성의껏 모아온 금품을 내놓는다. 이어서 동채싸움 당일의 집합장소와 인원동원 및 작전 등을 숙의한 뒤 돌아간다. 이후에도 수시로 연락을 취하여 준비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한다.
② 체목(体木)의 선정과 운반
동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다. 체목으로 쓸 곧고 굵기가 고른 참나무를 구하려고 청송․봉화, 때로는 강원도까지 사람을 파견하여 적재를 물색케 한다. 적재가 발견되면 소임을 보내 감정하고, 적당한 것으로 판정되면 나무에 금색을 쳐서 부정과 잡귀를 막는 한편 그 고을 현감에게 보고하여 보호를 청한다. 이듬해 봄 정월 초순에 목공(木工)은 목욕재계한 뒤 도포를 차려입고 필요한 만큼의 인부를 대동하여 현지로 가서 먼저 산신과 나무에 고사를 지내고 벌채한 뒤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운반 도중의 보호와 협조를 도중의 각 고을 현감에게 의뢰하고, 잡인이 행렬의 앞을 가로지르지 못하게 한다. 또한 운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체의 불손한 언행을 삼가하며 조용히 근엄한 마음으로 운반한다. 이 행렬이 안동고을 내에 진입하면 연도의 마을마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한다. 읍 근교 약 2km 지점에 이르면 각 편의 원로와 관계자들이 도포차림으로 영접을 나간다. 이때 각 편의 청장년들도 상봉장소까지 나가 크게 이들을 환영하고 “동부야 워-” 하는 환호성을 지르며 보관할 장소까지 인도한다.
보관장소는 내외를 정결히 하고, 집 주위에 금색을 하여 부정을 막고 외인의 출입을 금한다. 특히 부녀자의 접근을 엄금한다. 이 날로부터 동채싸움 당일까지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교대로 밤낮을 지킨다. 동채싸움을 하기 전날 밤에는 엄숙히 고사를 올리고 필승을 기원한다.
③ 동채의 제작 및 구조
정월 12일이 되면 동채를 만들기 시작한다. 목공과 소임을 맡은 주민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이 일에 참여하며, 특히 목공은 동채싸움이 끝날 때까지 외출을 금하여 기밀 누설과 부정을 막았다. 목공은 항상 의관을 쓰고 작업하며 삼․칡․모발을 합하여 세 가닥으로 줄을 꼬고 올림대 나무를 알맞게 불에 굽는다. 방석을 만들 때나 동채를 만들 때는 힘센 장정 3~4명이 물을 뿜어가며 힘차게 당기고 떡메로 다져가며 견고하게 만든다.
동채의 크기는 동서부가 각기 비밀리에 제작하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동채를 중후하고 견고하게 만들면 민첩하게 움직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상대편이 동채를 부수기 힘들고, 동채가 길고 폭이 좁으면 동채꾼이 많이 참여할 수는 있으나 움직임이 둔한 점을 고려하여 알맞은 크기로 만든다.
동채에는 체목․가르새․방석․고삐․고삐대․올림대 등의 부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 부품을 만들고 나중에 조립, 고정시키기 위해서 참나무․등칡․삼․사람의 모발 등의 재료가 필요하다. 이들이 갖추어지고 부품이 완성되면 조립과 결박을 시작한다. 먼저 체목에 가르쇠와 올림대를 끼우고 나머지 부분을 다 조립한 뒤에 준비된 끈으로 가르쇠와 올림대를 견고하게 묶는다.
한편 청소년들의 동채싸움에서 사용되던 째기동채의 제작과정은 본 동채에 비해서 훨씬 간단하고 그 규격도 자유롭다. 알맞은 서까래나 목재 두 개만 있으면 그 머리를 교차하며 묶고 두 나무 사이에 가르쇠를 넣어서 새끼줄로 고정한 뒤 고삐줄을 달면 째기동채가 된다.
④ 놀이꾼의 편성과 역할
동채싸움의 인적 구성은 대장․머리꾼․동채꾼․놀이꾼, 그리고 동채의 좌우와 뒤를 따르는 각 편의 주민들로 이루어진다. 대장은 총지휘자로서 출전 경험이 많고 대담하며 통솔력 있는 사람을 추대한다. 다음으로 머리꾼은 동채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최정예이다. “동채싸움은 머리꾼 싸움이다”라는 관습적 표현은 동채싸움의 승패가 머리꾼 싸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아주 용맹하고 거친 사람을 “동채 머리꾼 같다”라고 하는 관습적 표현은 머리꾼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용맹하고 완력이 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머리꾼들은 맨앞에 1인, 그 뒤에 2인, 그 뒤에 3인 등의 순으로 마치 피라미드와 같이 동채 앞에 배치된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팔짱을 끼고 어깨로 미는 ‘밀백이’로 적을 분산 격퇴시켜야 하며 그 이외의 행동은 못하게 되어 있다. 머리꾼 싸움의 격렬함은 “밀백이 할 때 밀어붙이는 힘이 워낙 세기 때문에 발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보름 아침에 먹은 찰밥이 목구멍을 넘어온다”라는 관습적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그만큼 양편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동채꾼은 직접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로서 앞채꾼과 뒤채꾼으로 구성된다. 앞채꾼은 힘센 사람들로 한다. 앞채꾼은 동채를 이탈하지 않고 동채와 생사를 같이 한다. 앞채꾼들은 적의 동채에 접근하였을 때 동채를 부수거나 동채 위에 올라가서 밑으로 누를 수 있다. 뒤채꾼은 비교적 둔한 사람이라도 키가 크고 힘있는 사람으로 한다. 이들은 앞채꾼의 움직임에 따라서 움직이며 동채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각 편의 동채를 따르는 주민들은 자기 편의 동채를 보호하는 한편 열렬하게 응원하면서 신명을 돋운다. 이들을 놀이꾼이라고도 한다. 앞놀이꾼은 때로 머리꾼 행세도 하고, 뒤놀이꾼은 뒤채꾼을 보호하다가 사정에 따라서는 뒤채꾼 역할도 한다.
⑤ 우군(友軍)맞이
정월이 되면 청소년들의 째기동채싸움이 시작됨에 따라서 읍내에 서서히 동채싸움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한다. 정월 14일에서 15일 오전까지 각 편에서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시내를 누빈다. “동[서]부야! 워! 이이 히히!” 하고 환성을 지르며 행진하다가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밀면서 머리꾼 훈련을 하며 이 과정이 거듭된다. 이때 소형의 동채에 사람을 태우고 놀기도 한다. 우군이 각 면에서 도착한다는 연락이 오면 그쪽에 가까이 있는 패가 마중을 간다. 마중하는 쪽과 우군은 약 10m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서 일제히 “동[서]부야! 워!” 하고 두 세 차례 환성을 지르며 또 “이이 히히”하고 그 자리에서 동동거리며 손을 높이 올려 춤을 추다가 쌍방이 돌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월사 덜사"하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 후 다시 두 편으로 나누어 마치 머리꾼 싸움을 하는 것처럼 힘차게 밀백이를 연습한다. 약 2~3분 간 연습을 하고 전체가 행진하는 방향을 향하여 서서 “동[서]부야! 이이 히히!” 하고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고 뛰어간다. 이때 반 정도는 속력을 빨리하여 약 30m를 뛰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속도를 늦추어 뛰어서 20m쯤 행진하니, 약 10m의 거리가 생기면 모두가 정지하여 마주보고 서서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머리꾼 싸움을 연습한다.
⑥ 싸움
싸움 당일이 되면 놀이 장소에 수천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찾아드니 정오가 되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각 편에서는 면 지역에서 오는 우군을 모았다가 정오가 넘으면 앞놀이를 할 때 사용하던 작은 동채에 사람을 올려 태운 채로 속속 모여들어 같은 편끼리 머리꾼 싸움을 연습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이때 각편에 속하는 주민들도 “동[서]부야! 밀어라!”를 연호하여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다.
이런 중에 오후가 되어 양편의 동채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수천의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동채싸움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도 앞놀이를 중단하고 함성을 지르며 자기 편 동채를 향하여 달려가서 진용을 갖춘다. 이윽고 싸움이 시작되면 먼저 머리꾼들의 밀백이가 격렬하게 전개된다. 양편은 수 백 미터씩 밀고 밀리는 접전을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한다. 밀백이가 워낙 격렬하여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동채 위에 올라탄 대장은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약속된 수신호(手信號)를 이용하여 지휘한다. 이때 동채꾼들은 대장의 지휘를 잘 볼 수 없으므로 앞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인다. 양편은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보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후, 좌우로 움직이며 주위의 사람들은 열렬하게 자기 편을 응원한다. 머리꾼 싸움이 일방적으로 전개되어 상대방의 동채가 노출되면 머리꾼들은 그대로 상대방의 동채로 돌격하여 동채를 잡아채서 땅에 떨어뜨린 뒤에 갈갈이 해체해버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머리꾼 싸움이 팽팽하게 전개되면 양편의 대장들은 머리꾼 싸움의 동향을 보아가며 기회를 노리다가 약점이 보이면 비호같이 앞으로 이동하여 상대방의 동채를 밑에 깔고 누른다. 상대방은 빠져나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앞채꾼과 머리꾼들은 동채의 앞에 달라붙어서 상대방 동채를 내리누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접전 끝에 아군이 우세하여 적의 동채를 점령하면 삽시간에 동채의 방석과 결박줄을 제거하고 동채를 산산히 뜯어버린다. 이긴 편은 함성과 함께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이 까맣게 던져 올리며 승리를 자축하는 한편, 뜯어낸 동채의 부품을 여러 패가 나뉘어 을러메고 “월사! 덜사!”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밤 늦도록 읍내의 거리거리를 누빈다.
(2) 임하면 금소리의 동채싸움
이 마을의 동채싸움은 1940년대까지 행해졌다. 동채싸움은 아이들의 소규모 싸움에서 막이 오른다. 정월 틈틈이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소형 동채를 메고 고샅을 돌아다니며 동․서부로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인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나중에 정식 동채꾼이 되었을 때 발휘해야 할 투지와 기술을 배운다. 또한 어른들은 아이들의 싸움을 보면서 자신들이 벌일 동채싸움을 연상하게 된다.
동채싸움은 대보름 명절기간 중에 행해지지만 그 준비는 동채를 만드는데 쓸 ‘노린[노란] 참나무’를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양편의 합의에 의해서 싸움날이 정해지면 미리 점찍어둔 나무를 베러간다. 베어온 나무는 동채를 만들기로 약속된 ‘깨끗한 집’에 보관한다. 이때 부정한 사람이나 여성은 절대로 그 나무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이것은 동채싸움이 끝날 때까지 지켜진다.
적당한 날[보통 싸움 전날]을 잡아 마당이 넓은 집이나 빈 논에서 동채를 만든다. 일단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물기를 머금은 나무가 단단해지도록 ‘짚불’에 사룬다. 나무가 다 사뤄지면 동채를 만든다. 동채의 크기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그들이 구사할 전술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기동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굵지 않고 몸체가 지나치게 크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쉽게 부서지지 않기 위해서는 재목이 굵고 몸체도 커야 한다. 그러나 기동성과 튼튼함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대개 양편의 동채 크기는 비슷해지게 마련이다.
주목되는 것은 금소동채의 형태가 안동읍내의 본동채는 물론 째기동채와도 구별된다는 점이다. 구별점은 소위 ‘물부리’의 형태에 있다. 읍내의 본동채는 앞부분이 터져 있고 째기동채는 동채의 앞부분이 교차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서로 걸고 공중전을 펼치는 것이 용이한데 비해서, 금소동채는 좌측 체목의 끝부분에 물부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측면에 우측 체목이 박혀 있다. 특히 물부리 부분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날카롭게 깍여 있어서 전투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상대편 머리꾼이 쉽사리 동채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한다.
동채가 다 만들어지면 동채를 메고 매미시골 당으로 향한다. 당에 먼저 가서 고하면 싸움에 이긴다고 하여 서두르기도 한다. 고할 때는 간단하게 주포를 차리며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십사하고 동신(洞神)에게 기원한다. 당고사가 끝나면 동채에 적당한 사람을 태우고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위용을 과시한다.
싸움 당일이 되면 아침부터 동채를 메고 고샅을 돌면서 “동부야[서부야]”하고 마을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러 놀이꾼을 모은다. 이때 각 마을의 풍물패가 뒤따른다. 일단 놀이꾼이 모이면 임의로 편을 갈라 몇 번이고 머리꾼 싸움을 연습하면서 전술을 짠다. 이때 몇몇 사람은 상대편과 만나서 몇 시쯤 ‘어울[싸울]’것인지를 의논한다. 대개 해가 남아 있는 오후 4~5시쯤 싸우는 것으로 합의가 되지만 해가 지고나서 싸울 수도 있다. 싸움 시간을 정할 때, 해가 있을 때 싸우자고 하는 것은 싸움을 점잖게 하자는 뜻이고, 해가 지면 싸우자는 것은 ‘얼굴 가리지 말고 억세게’ 싸우자는 뜻이다.
싸움은 ‘텃논’에서 한다. 텃논은 마을의 배꼽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이곳의 지신을 눌러야 농사가 잘되고 마을에 탈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하는 것이다. 싸움 시각이 가까워오면 각 편의 동채꾼들이 텃논으로 모여들며 금소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동리에서 온 구경꾼들도 주위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 동채꾼들의 복장은 평상복이며 거추장스런 옷들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혹은 ‘어벅다리[거친 짚신]’에 감발을 한 뒤 싸움에 나선다.
머리꾼은 동채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강기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대개 20대 초반~30대 중반의 연령층에서 자원하며 숫자는 30~40명 정도이나 제한은 없다. 이런 외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누구나 머리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사람은 머리꾼이 될 수 없었다. 한편 머리꾼이라도 ‘아랫마[아래마을]’의 경우 예천 임씨, ‘웃마[위마을]’의 경우 울진 임씨나 예천 임씨가 아니면 최선봉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마을이 임씨가 지배적인 동성마을이므로 임씨 이외의 타성이 앞으로 나섰을 경우, 상대편 머리꾼들이 사정보지 않고 닥달하여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동채가 일단 텃논에 들어가면 대장을 태운 동채를 뒤로하고 먼저 머리꾼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동채싸움은 머리꾼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머리꾼들의 싸움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싸움에서 패해 어느 한쪽의 앞머리가 일방적으로 터지면 상대편 머리꾼에게 금방 물부리를 점령당해서 동채끼리 어울리기도 전에 패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편은 모든 역량을 머리꾼 싸움에 집중시킬 수 밖에 없다. 머리꾼 싸움의 격렬성은 “밀백이할 때 서로 미는 힘이 너무 강해서 갈비뼈가 부러졌다”거나, “보름날 먹은 찰밥이 다시 목구멍으로 기어올라 왔다” 혹은 “발이 공중을 둥둥 떠다닌다”라는 관습적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숙질(叔姪)간에도 가리지 않고’ 전개되는 머리꾼 싸움은 보통 한 시간여 계속되며 길면 두 시간이 넘게 끈 적도 있었다.
이 싸움에서 양편의 전력이 엇비슷해서 앞머리가 거의 동시에 터지면 싸움은 동채간의 공중전으로 양상이 바뀐다. 양편의 대장은 서로 상대방의 물부리를 자기편 물부리 밑에 넣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상대편의 물부리가 밑에 깔리면 동채꾼들이 물부리에 달라붙어 누르기 때문에 좀체로 빠져나올 수가 없으며 마침내 동채가 땅에 떨어져서 패하게 된다. 싸움의 과정에 구경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싸움이 절정에 이르면 놀이꾼과 구경꾼 사이에 구별이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어져 텃논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싸움에 몰입한다.
머리꾼 싸움에서 놀이꾼들이 지킬 것은 주먹을 쥔 양팔을 서로 교차시켜 가슴에 붙이고 상대편을 밀어붙이기만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제로 손을 쓰지 말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음에도 상투를 뜯기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강하게 준수된 것은 싸움의 흐름과 관계없이 동채 위의 상대편 대장을 떨어뜨리거나 동채를 훼손하는 행위의 금지이다. 이를 어기면 상황에 따라 싸움을 다시 시작하거나 취소한다.
동채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대장이다. 그는 동채 위에 올라타고 각 부분의 동채꾼은 물론 자기편의 구경꾼까지를 총괄하여 지휘하면서 각 구성부분이 앞머리를 축으로 효과적으로 움직여 상대편을 제압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대장의 진가는 동채끼리의 공중전에서 드러난다 경험이 풍부한 대장은 수신호와 음성신호를 통해 민첩하게 동채를 움직여 승리를 실현한다. 당시 서부의 안기어른[조원선] 솔안어른[조목규]은 금소에 들어오기 전에 읍내동채에서 활약한 적이 있는 명장들이었고 동부에는 이에 맞서 학산어른[임병구]과 기포어른[임형일]이 이름을 떨쳤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진 편의 동채를 빼앗아 부숴버린다. 동채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텃논에 울려퍼질 때쯤이면 얼음이 깔려 있던 텃논은 진창으로 변해 있으며 감발까지 했던 어벅다리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맨발이 되어 있다.
(5) 북후면 옹천리의 동채싸움
옹천리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해마다 동채싸움이 줄당기기와 번갈아가면서 연행되었다. 동채싸움은 정월 대보름 당일에 행해졌다. 전통적으로 옹천 1리와 2리는 동부가 되고, 옹천 3리는 서부가 되어 편을 구성하였다. 양편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동채싸움을 하기로 결정하면 각 편에서는 동채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를 구해서 보름 전날까지 동채를 만들고 싸움을 할 때 머리꾼으로 나설 사람을 정하는 등의 작전을 짰다.
옹천 동채의 형태는 일반적인 째기동채의 모습과 같지만 그 크기에 있어서 차이를 보여준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채를 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동채를 아주 크게 만들었다.
보름날이 되면 양편은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한다. 동채싸움의 인적 구성은 대장․머리꾼․동채꾼으로 이루어진다. 대장은 용력이 세고 날쌘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머리꾼 역시 대담하고 힘이 센 사람들 가운데 20~30명을 선정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에 수건을 동여맸다. 동채를 메는 동채꾼들은 기골이 건장한 30~40대의 사람들로 구성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동채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기 편을 응원하였다. 이때 마을의 풍물패들이 함께 하면서 신명을 북돋았다.
싸움 준비가 끝난 양편은 놀이 장소인 마을 한가운데의 논으로 이동하여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곳곳에서 치켜든 횃불과 밝은 보름달이 주위를 밝혀주었다. 먼저 팔짱을 낀 머리꾼들의 격렬한 충돌로 싸움이 시작된다. 머리꾼들의 싸움이 어느 정도 전개되어 각 편의 동채가 노출되면 이어서 동채들끼리 접전이 시작된다. 서로 동채를 부딪혀서 상대편의 동채를 밑에 깔고 내리누르기 위하여 양편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이윽고 상대편의 동채가 땅에 떨어지면 승부가 결정된다. 승부가 결정되면 각 마을로 돌아가 잔치를 벌여 밤이 이슥하도록 즐겼다.
2) 선유
선유는 풍천면 하회리의 부용대와 만송정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꽃내(花川)를 배경으로 행해지던 뱃놀이이다. 이 놀이는 선유․줄불․낙화(落火)․달걀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놀이는 이 마을 출신 서애 류성룡 선생이 관직을 물러나 낙향한 뒤에 그의 형 겸암 류운룡 선생과 더불어 뱃놀이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안동군 도산면 도산서원 앞 낙동강에도 뱃놀이와 불꽃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선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력 7월 기망(旣望)의 밤에 둥근 달이 동천에 떠오르면 6~7명의 선비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물 위로 나아간다. 선비들은 하회에 사는 지체 높은 학자와 원근에서 초청된 시인묵객들이다. 배에는 네 기둥을 세워 차일을 치고, 주위가 밝게 초롱을 단다. 서로 술잔을 권해서 흥이 돋으면 적벽부를 외면서 시창(詩唱)을 시작으로 놀이가 전개된다. 시회와 함께 가을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기노라면 하늘에서는 ‘줄불’로부터 불꽃이 강물 위로 끊임없이 떨어진다. 이 줄불은 가장 이채롭고 화려한 것으로서 만드는 데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소요된다.
줄불은 다음과 같이 만든다. 먼저 뽕나무 숯가루에 소나무 겉껍질 가루를 섞어서 소금을 조금 넣고, 창호지로 만든 45cm 정도의 봉지에 채워 넣는다. 이 봉지는 지름이 2~3cm로서, 길이 5~6cm 정도 되는 곳마다 굵은 실로 허리를 조아 맨다. 그리하여 초저녁에 미리 긴 새끼줄을 마련하여 4~5m 간격마다 한 봉지씩 단다. 새끼줄은 부용대 언덕 위의 소나무에 걸고, 아래로는 만송정의 굵은 소나무에 매어다는데 만송정 쪽에서 봉지 끝에 불을 붙이면 부용대 쪽에서 서서히 당겨올린다. 불은 천천히 타오르고 화려한 불꽃이 강 위로 떨어진다. 이 줄불은 서너 군데에 마련한다. 봉지가 다 타는데는 두세 시간이 걸린다.
뽕나무숯 봉지는 안동 일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던 것으로 보름날 밤 밝은 달빛을 이용하여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잡귀를 쫓기 위해 대문밖에 긴 장대를 세워 이 숯가루 봉지를 매달고, 불을 붙여 축귀(逐鬼)하던 ‘귀신줄불’ 달기 때에 흔히 만들어지던 것이다.
달걀불은 원래 달걀 빈 껍질에 종이나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꽂고, 기름을 부어 불을 켜던 것인데 요즘은 백여 개의 바가지 쪽을 마련하여 기름을 먹인 솜뭉치를 놓고 불을 붙인다. 부용대 위쪽 형제암(兄弟岩) 부근에서 한 번에 200~300개씩 띄워 보내면 많은 불꽃들이 서서히 옥연정 앞 소(沼)를 향하여 떠내려가서 맴돌아 선유에 한층 흥취를 더한다.
이 무렵에 이따금 낙화가 행하여진다. 미리 부용대 절벽 위에 서너 명이 올라가 있다가 강물 위의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는 발표가 나면 강가에 모여 있던 관중들이 ‘낙화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부용대 위에서 솔가지를 묶은 단에 불을 붙여 강 위를 향하여 힘껏 내던진다. 이 낙화는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다가 절벽 밑 바위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니 불꽃이 장관이다.
네 가지의 놀이 가운데 선유가 주이고 줄불․달걀불․낙화는 선유의 흥취를 돋우기 위한 부대행사이다. 이 놀이는 1933년경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어 행해지고 있다.
2. 여성놀이
안동지역의 특징적인 여성놀이인 놋다리밟기를 살펴본다. 놋다리밟기는 달리 ‘지애밟기’․‘기와밟기’․‘논따리밟기’ 등으로 부른다. 놋다리밟기라는 대표 명칭 속에는 다양한 놀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꼬깨싸움은 아주 격렬한 편싸움이었다. 아래에서는 안동읍내의 성밖놋다리와 성안놋다리를 살펴본 뒤 임하면 금소리의 놋다리밟기 가운데 꼬깨싸움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성밖 웅굴놋다리
안동 성밖의 놋다리는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행해진 놀이였다. 음력 정월 15일 저녁에 동부의 부녀자는 현 옥정동에 소재했던 ‘초당집’ 마당에 모여 들고[간혹 안막동 배나무골에 집결한 적도 있었다], 서부는 현 법상동에 소재하는 ‘잿집’ 마당에 집결하여 이른바 공주를 선발한다. 공주는 7~8세쯤 된 여아로서 가문이 좋고 미모이며 총명한 소녀이어야 하고,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히고 휘양을 썼으며 털토수를 꼈다. 초당집 마당과 잿집 마당에 어느 정도의 부녀자들이 모이면 놀이를 시작한다.
처음에 둥둥데미를 한다. 일행이 각기 손을 잡고 원형을 이루어 앉으면 둥둥데미 노래를 합창하면서 선두의 부녀자부터 서로서로 잡고 있는 손을 타넘어서 원형으로 돈다. 이 때 일행은 잡은 손을 놓는 일이 없다. 노래는 짤막하나 이 한 마당이 끝날 때까지 합창하며 계속 반복한다. 둥둥데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어화유리 둥둥데미
둥둥데미 어화유리
저달봤나 난도봤다
저빌봤나 난도봤다
저길봤나 난도봤다
둥둥데미가 일단 끝나면 만들어진 원은 또아리 모양으로 겹겹이 감겨 있다. 보통 100여 명이 참가했던 만큼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둥둥데미가 끝나면 이어서 곧 실감기 노래에 맞추어 또아리를 푸는데, 가장 가운데에 있는 선두가 그대로 손을 잡은 채 길을 찾아서 풀어 나온다. 이때도 역시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둥둥데미는 공민왕이 포로가 된 형태이고, 실감기는 공민왕이 포로에서 풀려 나오는 형태라고 한다. 실감기 노래는 또아리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반복해서 합창하며 둥둥데미 노래보다 템포가 빠르기 때문에 뛰어서 돌게 된다. 실감기 노래는 다음과 같다.
집실로 감아라
당대실로 풀어라
또아리를 완전히 풀어 돌아 나오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큰 원이 된다. 이어서 일행은 모두가 원 안쪽을 향하고 허리를 구부리고 치마를 어깨 위까지 걷어올려 뒤집어써서 저고리가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 구부리는 사람들은 주로 하인이나 종들이다. 나머지 사람들, 즉 처녀․새댁들․중년층․노인층은 원형을 둘러싸서 놋다리 노래를 부른다. 한쪽에서 ‘어느윤에 놋다리로’하고 문창하면 다른 쪽에서 ‘청계산에 놋다릴세’하며 답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허리를 구부린 부녀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구부린 등 뒤로 공주가 떨어지지 않게 좌우에서 부축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나간다. 이렇게 둥글게 구성하여 즐기는놋다리가웅굴(우물)놋다리이다.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 바퀴 돌자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놋다리 노래는 다음과 같다.
어느윤에 놋다리로
청계산에 놋다릴세
이터전이 뉘터이로
나라임의 옥터일세
이기와가 뉘기와로
나라임의 옥기왈세
기어데서 손이왔노
경상도로 손이왔네
무슨꼭깨 싸여왔노
어깨꼭깨 싸여왔네
멫대칸을 밟아왔노
쉰대칸을 밟아왔네
무슨옷을 입고왔노
백마사주 입고왔네
무슨바지 입고왔노
지죽바지 입고왔네 |
무슨띠를 띠고왔노
광목띠를 띠고왔네
무슨보선 신고왔노
타래보선 신고왔네
무슨행전 치고왔노
자치행전 치고왔네
산호동곳 꼭고왔네
무슨갓끈 달고왔네
구슬갓끈 달고왔네
무슨도포 입고왔노
남창의를 입고왔네
손이시러 어이왔노
양모토시 끼고왔네
귀가시러 어이왔노
수피애암 쓰고왔네
입이시러 어이왔노 |
모개쪽을 물고왔네
물이깊어 어이왔노
인다리를 밟아왔네
무슨말을 타고왔노
백대말을 타고왔네
무슨안장 실고왔노
순금안장 실고왔네
무슨반에 채려주도
재죽반에 채려주데
무슨수저 노았드노
은수저가 노았드네
멫접시를 채렸드노
무슨신을 신고왔노
봉만희를 신고왔네
무슨갓을 쓰고왔노
통양갓을 쓰고왔네
무슨망근 쓰고왔노 |
외을망근 쓰고왔네
무슨풍잠 달고왔노
옥각풍잠 달고왔네
무슨관자 달고왔노
옥관자를 달고왔네
무슨동곳 꼭고왔노
칠첩으로 노았드네
어데다가 밥담았도
식기굽에 담아주데
어데다가 반찬주도
접시굽에 담아주데
어데다가 김치주도
중발굽에 담아주데
어데다가 숭융주도
삼칭쟁반 굽쟁반에
뚜에엎어 갔다주데
놋다리야 놋다리야 |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두 바퀴 돌고 나면, 놋다리의 선두는 원형에서 벗어나서 대로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줄놋다리가 되는 것이다. 초당집에서 출발한 동부는 대로를 경유하여 ‘서문둑 다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잿집에서 출발한 서부 역시 줄놋다리를 지어서 대로를 경유하여 서문둑 다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이 행렬의 선두에 노래 잘하는 선창자 노인 두 사람이 서고, 구부리는 여성들은 역시 어깨가 맞닿게 옆으로 서서 허리를 구부린다. 후창자들은 처녀․새댁들․중년층․노인층의 순서로 공주 뒤쪽에서 시작하여 대열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기도 하고, 대열의 뒤에 서서 따라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 때도 역시 공주와 부축하는 여자, 그리고 구부린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줄놋다리의 생김새는 그림과 같다.
동서부의 놋다리는 행진 끝에 마침내 서문둑 다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때에는 서로 비켜 가기도 하고 사이 좋게 합세하여 공주를 하나만 세워 놋다리를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동서부의 놀이패가 마주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꼬깨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특히 성안의 놀이패와 마주치면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를 해야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권장하여 처녀들과 새댁들이 모두 다 참가했다. 놋다리밟기는 대체로 1910년 이후에는 중단되고, 그 후에는 가정에서 소규모로 하는 애기놋다리가 성행하여 192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2) 성안 줄놋다리
(1) 삼웃들패
‘삼웃들’은 현재의 조흥은행 부근이며 읍성(邑城)내에 속한다. 보름날 저녁을 먹은 후에 노래를 잘하는 노인층들이 먼저 나와서 골목골목에서 놋다리 노래를 부르면 부녀자들이 삼웃들로 모여든다. 삼웃들은 성내에서는 가장 넓은 광장으로 이곳에서 놋다리를 구성하여 길이 넓고 걷기 편한 곳에서 놋다리밟기를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기별이 없어도 저녁을 일찍 먹고 놋다리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데, 아이가 없는 새댁네와 머리를 틀어 올린 노인층이 중심이 되었다. 놀이는 이른바 줄놋다리뿐이었다. 공주라는 명칭은 없었고, 올라가서 밟는 소녀는 7~8세 정도로 삼회장 까치저고리에 털토수를 끼고 휘양을 썼었다. 젊은 새댁들이 허리를 구부려서 놋다리를 구성했는데, 앞사람의 허리에 매인 명주 수건(온 폭 명주에 노란색 물을 들인 것)을 잡고 머리를 앞사람의 옆구리에 대었다. 이 노란색 수건은 구부리는 사람들이 다 매고 있는 것이다. 대열 좌우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50내지 60세 정도의 부녀들이 3명 내지 5명씩 대열과 직각으로 늘어서서 놋다리 노래를 불렀다.
소녀가 구부린 부인의 등 위를 밟아 지나가면 뒷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서 놋다리가 계속 이어지게 하였으며 대열 좌우의 창자(唱者)들이 노래를 주고받았다. 대개 우측에서 선창하면 좌측에서 후창을 하나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다른 놋다리패와 마주치면 싸움이 벌어지는데, 싸우지 않고 피해 가는 수도 있었다. 대체로 밤 11시경까지 즐기다가 해산했으며, 1910년경 이후에는 중단된 듯하다.
놋다리에 청계산에 놋다리에 귀가실어 워얘완노
원은윤에 놋다리에 명주풀심 싸고완내
기워되서 손이완노 입이실어 워얘완노
경상도서 손이완내 문어전복 물고완내
기머하로 손이완노 놋다리에 청계산에 놋다리에
얘게꼬께 싸와완내 무슨옷을 입고완노
놋다리에 청계산에 놋다리에 광대철육 입고완내
무슨말을 타고완노 무슨버선 신고완노
백대말을 타고완내 타래보선 신고완내
놋다리에 (후렴) 무슨신을 신고완노
무슨갓을 쓰고완노 육날미틀 신고완내
용단가슬 쓰고완내
(2) 관아앞패
대보름 날 일몰 후 성내의 부인들이 관아 앞 광장에 놋다리밟기를 하러 모여든다. 별다른 앞놀이는 없고 일렬로 행렬을 구성한다.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안고 고개를 좌로 돌린다. 선두에 '창립'한 50대 이상의 노인들이 서고 그 뒤에 처녀, 새댁들이 허리를 구부려서 놋다리를 지었다. 창립은 아전풍속인데 나이가 50여 세쯤 되고 친손․외손을 볼 나이가 되면, 비녀를 꽂은 머리를 풀어서 앞으로 돌려 여자상투를 만드는 것이다.
놀이는, 소녀가 허리를 구부린 사람들의 등 위로 두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등을 밟힌 사람은 다시 앞으로 가서 구부려서 점차 앞으로 진행해 가는 것뿐이다. 창립한 50대 노인들이 대열의 선두에서 선창을 하면 40대 정도의 부녀들은 대열 좌우에 따라가면서 후창을 한다.
행진로의 길이는 기껏해야 100미터 정도 되었다. 동쪽으로는 피문루(북을 쳐서 관청의 집무시간을 알리는 樓) 앞까지 갔었고, 서쪽으로는 ‘기다리목’이나 삼웃들까지 행진했다.
원래 남자들은 접근은커녕 구경조차 못하도록 했었는데, 나중에는 문란해져서 대열 뒤에 따라가는 부인들이 남자들을 쫓기도 하였다. 행진해 나가다가 다른 패와 마주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웠다.
3) 임하면 금소리 놋다리밟기의 꼬깨싸움
금소의 놋다리밟기는 각기 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놀이들로 이루어진다. 이들 각 놀이들은 개별적으로 다른 시․공간에서 행해질 수 있다. 이들 놀이 가운데 보름명절의 특정한 밤이라는 시간적 한정성과 ‘텃논’과 ‘구무(구멍)다리’라는 공간적 한정성을 지닌 채 행해지는 놀이는 ‘꼬깨싸움’과 그에 연이은 ‘구무다리뺏기’이다. 대단히 격렬하게 행해지는 이들 놀이만 동채싸움이 행해진 뒷날 밤에 행해지고 나머지 지애밟기․콩심기․제달배기 등의 놀이는 명절기간 중의 어느 때나 마당이 넓은 집에서 행해진다.
금소의 꼬깨 싸움은, 대보름날 밤에 각 마을의 부녀자들이 따로 모여 둘씩 짝을 이뤄 어깨를 걸고 동네를 크게 한바퀴 돌면서 “어-허-ㄹ-루-야, 놋다-래-야-”를 합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동선은 봇도랑 옆으로 난 길에서 마을 앞의 도로로 이어지는 타원형의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동부 부녀자들은 서부쪽으로, 서부 부녀자들은 동부쪽으로 도는데 이 과정에서 양편이 서로 만나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며 더러는 서로 길을 뺏으려고 밀어붙여서 격렬한 몸싸움이 전개되기도 했다.
꼬깨싸움을 하는 당일이 되면 나이든 부녀자들은 놀이꾼들을 모으러 다닌다. 밤이 이슥해지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네의 거의 모든 부녀자들이 텃논으로 모여든다. 이때 특별한 이유없이 놀이를 회피하면 부녀자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꼬깨싸움의 놀이꾼 편성은 동채싸움과 흡사하다. 덩치가 크고 억센 여자들이 머리꾼 역할을 하며 그 가운데 특히 강한 여성이 재빠르고 총명한 14~15세의 여자아이를 어깨 위에 태우는 꼬깨꾼이 된다. 꼬깨의 좌우와 후방에는 꼬깨를 보호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인원이 겹겹이 배치되어 ‘바람들어갈 틈도 없는’ 사람의 장막을 형성한다.
꼬깨싸움의 방식도 동채싸움과 흡사하다. 먼저 앞머리의 여성들이 강력하게 대치하여 밀백이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한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면 물밀듯이 밀어붙이는데 이 과정에서 앞머리가 뚫리면 승부가 이내 결정된다. 승부는 꼬깨 위에 탄 아이들이 서로 싸워서 먼저 떨어뜨리는 쪽의 승리로 결정된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꼬깨 위에 탄 아이들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되며 이를 감시하고 변장해서 들어온 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몇 명의 감시자를 특별히 배치했다.
꼬깨싸움에서 일차로 승부가 결정되면 양편은 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구무다리로 돌진한다. 구무다리는 봇도랑에 걸쳐진 작은 돌다리이다. 구무다리뺏기는 꼬깨싸움에서의 승리를 확인 내지는 추인받는 과정이다. 이 싸움에서 패하면 비록 꼬깨싸움에 이겼어도 진정한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구무다리뺏기의 승부는 구무다리를 먼저 많이 건너간 쪽의 승리로 결정된다. 따라서 양편의 부녀자들은 좁은 구무다리를 먼저 넘어가기 위해 격렬한 몸싸움을 전개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봇도랑에 빠졌고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더러 서까래만한 나무를 가져와 도랑에 걸쳐놓고 넘어가려고도 했는데 상대편에서 나무를 덜렁 들어버려 도랑에 빠지기도 하였다.
승부가 결정되면 싸움에서 이긴 편은 환호작약하며 보름 명절 동안 그들이 줄곧 놀아온 ‘너른 마당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서 승리의 기쁨을 나눈다. 이때 또 다시 콩심기․제달배기․지애밟기 등의 놀이가 행해지기도 한다.
아 동 놀 이
안동지역의 아동놀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특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부를 소개한다.
1. 남자아이들의 놀이
1) 보리 두드리기[보리타작]
정월 보름에 주로 하던 놀이이다. 수수깡을 가지고 각종 곡식 모양을 만들어 두엄 위에 꽂아 두고 이것을 부수며 노는 놀이이다. 설을 세고 나면 어린이들은 수수깡을 이용하여 보리․쌀․조․수수 등 농가에서 주로 재배하는 곡식의 모양을 정성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에 꽂아 두고서 다른 집의 두엄 위에 있는 곡식을 두드리러 다닌다. 공격하는 편과 방어하는 편이 있어 상대편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물을 퍼붇기도 하고, 심지어는 오줌장군에 있는 오줌을 퍼붇기도 했다. 다 두드리고 나면 부서진 곡식을 태우고 도토리로 만든 되를 가지고 타고남은 재를 한 되, 두 되 잰다. 재의 양에 따라 농사가 흉년이 들것인가, 풍년이 들것인가 미리 점을 쳤다.
2) 연날리기
설을 세고 난 이후부터 정월 보름까지 연을 날린다. 연의 종류는 크게 꽁지연과 참연으로 나눈다. 꽁지연을 가오리연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문어연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참연은 방패연을 이르는 말이다. 연의 제작은 어른들이 하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면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었다.
사기가루를 간 것을 풀과 함께 섞어서 연실에 먹여 연싸움을 한다. 연싸움에서 떨어진 연은 다시 주워 오지 않는다. 연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연을 날리는 기술이다. 접전이 벌어지면 연줄을 풀었다 당겼다 하면서 연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아야 한다. 정월 보름날이 되면 연을 날려 버리는데 1년의 액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이다. 연줄을 끊을 때 줄불을 놓아서 끊기도 한다. 곱게 간 뽕나무 재를 모아 봉투로 만들고 이를 연실에 여러 개 매단다. 연을 날릴 때, 여기에 불을 붙이면 재가 타 들어가 불꽃놀이의 효과를 내며 연을 날려 버리게 된다.
3) 제기차기
가운데 동전이나 엽전을 넣고 한지로 여러겹 싸서 한지를 갈기갈기 찢으면 훌륭한 제기가 된다. 제기차기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방법은 편을 갈라서 많이 찬 편이 공격을 하고 진 편이 수비를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동네 제기차기 방식이다.
첫 번째 방법은 편을 갈라 제기를 많이 차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차는 방법은 한발로 차기․발들고 차기․양발로 차기가 있다. 세 종류의 방법을 번갈아 가면서 찬 후 많이 찬 쪽이 공격을 하고 적은 쪽은 수비를 한다. 이것을 ‘대준다’라고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기차기가 시작된다.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제기를 던지면 이긴 쪽은 이것을 발로 차서 같은 편에 전달하고 제기를 받은 어린이는 술래가 따라오지 못하게 도망가서 그곳에서 다시 제기를 찬다. 세 번을 차면 세 번을 더 대주어야 하고 다섯 번을 차면 다섯 번을 더 대주어야 한다. 수비하는 편은 공격하는 편이 못 차게 쫓아다니면서 방해를 한다.
동네제기는 개인경기의 성격이 강하다. 제기차기를 하고 싶은 어린이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동네제기”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한 사람이 한 번씩 제기를 찬다. 땅에 떨어뜨리는 사람이 술래가 된다. 공격과 수비의 방법은 위와 같다.
4) 비석차기[비석까기․비석치기․돌깨기]
비석차기는 1:1로도 가능하나 주로 편 놀이의 형태로 놀아진다. 7~8m 정도의 거리에 금을 그어 놓고 가위․바위․보로 공격과 수비를 정한다. 진 편은 맞은 편 줄에 비석을 세워놓고 이긴 편은 이것을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비석을 만드는 재료는 강가의 납작한 돌이 주로 이용되나, 여의치 않을 경우 기와 조각 등을 갈아서 만들기도 한다. 비석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10cm정도이다. 경기의 방식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체를 통틀어 한 판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그 자리에서 돌을 던져 상대방의 비석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완전히 쓰러지지 않거나 공격자의 돌과 수비자의 돌이 붙으면 ‘반비석’이라 하며 비석돌을 모로 세우게 된다. 반비석은 경기 내내 유효하다. 반비석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다음 판으로 넘어 갈 수가 없다. 두 번째는 돌을 적당한 거리에 던져두고 한 발, 두 발, 세 발 뛰어서 돌을 밟은 후 상대편의 비석을 쓰러뜨리는 방법이다. 세 번째는 공격자의 비석을 상대방 비석 가까이에 던져두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는 방법이다. 네 번째는 신체의 각 부분을 이용하여 비석을 이동한 후 상대방의 비석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발등․양발 사이․무릎 사이․사타구니 사이․배 위․가슴 위․어깨 위․목․머리 등에 차례대로 비석을 끼우거나 얹어 다가간 후 상대방의 비석을 쓰러뜨리는 방식이다.
5) 망우리 돌리기
망우리 돌리기는 불놀이의 한 방법으로 정월 달에 많이 즐기는 놀이이다. 깡통에 불을 담아서 높이 던져 올렸다가 떨어질 때, 쏟아지는 불을 보며 즐기는 놀이이다. 깡통에 구멍을 내어 불이 잘 붙게 하는데, 그 구멍의 크기를 적당하게 잘 뚫는 것이 기술이다. 불을 지피는 나무로는 주로 관솔을 많이 이용했다. 깡통이 보급되기 전에는 뽕나무의 뿌리에 불을 붙여서 던졌다. 던지고 나서 불을 구경하고 또 다시 주워서 던지기를 반복하며 놀았다. 망우리는 보름달이 떠오를 무렵 많이 돌렸다.
6) 풀(꼴)따먹기, 나무 따먹기
봄이나 여름이 되어 들과 산에 풀이 돋으면 어린이들은 소가 먹을 풀을 베러 간다. 이때 많이 하던 놀이인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낫치기
풀을 베어 놓고 한줌씩 내서 모아 놓은 다음, 낫을 던져서 그 꼴 가까이에 낫이 바로 꽂히는 사람이 풀을 따가는 놀이이다. 져서 풀을 모두 빼앗긴 사람은 다시 풀을 베러 가야하고, 이긴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다.
(2) 가락지 치기
가락지 치기는 이른 봄 풀이 많이 나지 않을 때 주로 하던 놀이이다. 풀을 한줌씩 모아 놓고 쑥뿌리 등으로 반지모양을 만들어 이것을 풀 속에 숨겨 놓는다. 풀을 모은 어린이들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가락지가 있을만한 부분을 찌른다. 가락지를 제대로 찌른 어린이가 그 풀 모두를 가져간다.
(3) 돌 던져 맞추기
가을에 솔잎을 모아서 화목으로 쓰는데 이 솔잎을 ‘갈비’라 한다. 갈비를 한줌씩 모아 놓고 5~6m의 거리에서 돌을 던져 맞추면 그 갈비를 모두 가져간다.
7) 돈치기
돈치기는 겨울이나 봄철에 주로 한다. 한쪽에 구멍을 파놓은 뒤 구멍을 향해서 동전을 던져 구멍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의 동전을 모두 가져간다. 들어가지 않으면 돌을 던져서 동전을 맞추어 맞춘 동전을 가져간다. 또 다른 방법은, 구멍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구멍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는 동전의 임자가 이 동전으로부터 한뼘내의 거리에 있는 동전을 가져가는 것이다.
8) 다황치기[성냥치기]
어린이들은 나무를 해서 장에 가져가 팔고 그 대가로 성냥을 받아 온다. 이 성냥을 가지고 하는 놀이가 다황치기이다. 한 손에 성냥을 끼고 다른 손으로 상대편이 알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성냥을 뽑아든다. 상대방은 짐작으로 이 성냥의 개수를 이야기하면서 몇 개의 성냥을 건다. 맞춘 사람에게 건만큼 성냥을 준다.
9) 자치기
(1) 숫자치기
단단하고 곧은 나무로 ‘새끼자(부랄)’와 ‘어미자’를 만든다. 새끼자는 길이 10cm정도로 하여 양쪽을 비스듬하게 깍는다. 어미자는 60~70cm의 길이로 만든다.
마당이나 논 등에 원을 그어 놓은 뒤 공격편과 수비편을 정하고 목표를 정하면 자치기를 시작한다. 주로 ‘몇 자 내기’ 등으로 목표를 정한다. 공격편은 어미자로 새끼자를 멀리 쳐낸다. 이때 수비편이 새끼자를 받아 내거나 발로 차서 원안에 넣으면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받아 내지 못하더라도 떨어진 지점에서 새끼자를 던져 원안에 넣으면 역시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수비편이 던진 새끼자를 원안에 넣지 못하면 공격편은 어미자로 새끼자를 세 번 튕겨서 멀리 보낸다. 새끼자가 땅에 떨어지면 공격편이 원에서부터의 거리를 어림잡아 몇 자라고 부른다. 이때 수비편은 그것이 적당하다고 판단되면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지만, 공격편이 부른 것 보다 적다고 생각하면 직접 자로 잰다. 이때 자수가 모자라면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새끼자를 쳐 보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번 튕겨서 쳐내면 두배가 되고 두 번 튕겨서 쳐내면 열배, 세 번 튕겨서 쳐내면 백배가 된다.
(2) 구무자치기[암자치기]
수 자치기와 경기 방식은 비슷하나, 처음 공격하는 방식에 차이가 난다. 땅에 폭 5cm, 깊이 10cm, 길이 20cm의 구멍을 파고 이곳에 새끼자를 걸어 놓은 후 어미자를 이용하여 힘껏 걷어올린다. 어미자를 가로로 홈 위에 걸쳐놓으면 수비편은 새끼자로 어미자를 맞추거나 홈안으로 던져 넣는다. 새끼자가 홈 안에 들어가거나 어미자를 맞추면 공격과 수비가 바뀌고, 그렇지 않으면 공격이 계속된다. 이후의 경기방식은 숫자치기와 같다.
10) 고기잡이
낙동강을 끼고 있는 안동은 물놀이의 방법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고기잡이의 방식에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1) 사발무지
사발에 된장을 넣고 천으로 덮은 다음 물밑 땅속에 묻어 둔다. 이때 입구는 손가락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뚫어 놓는다. 사발의 윗면이 튀어나오지 않게 땅의 표면과 높이를 맞춘다. 묻어 놓고 하룻밤 지낸 후 사발 속의 고기를 얻을 수 있다.
(2) 돌무지
돌무지는 고기집을 지어서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평평한 돌을 바닥에 깔고 굵은 돌을 이용하여 한평 정도의 고기집을 짓는다. 큰물이 진 후 물이 맑아지면 지은 집을 하나씩 뜯어낸다. 큰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모여든 고기를 잡을 수 있다.
(3) 물막기
상류의 물을 막고 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큰 개울에서는 하기 힘들고 작은 개울에서 많이 이용하던 방법이다. 물이 빠지면 돌을 들쳐 가며 고기를 잡는다.
11) 팽이치기[핑딍돌리기]
겨울철에 소년들 사이에 팽이치기를 한다. 단단하고 둥근 나무를 잘라 끝이 뾰족하게 만들고 팽이채 감은 끈을 돌린 다음 팽이채로 치면 팽이가 핑핑 돈다. 땅이 단단한 곳이나 얼음 위에서는 더욱 잘 돈다. 팽이는 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 부딪쳐 어느 것이 힘이 센가를 겨루는 수도 있다. 팽이 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서 돌 때 아름다운 색상을 내기도 한다. 팽이는 납짝한 것도 있고 키가 큰 것도 있는 등 어린이의 취향에 맞춰서 모양이 다양하다.
12) 꼰[고누]
꼰은 아이들이 나무 그늘 밑이나, 마당, 또는 길바닥에 앉아서 하는 놀이이다. 꼰의 종류와 놀이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참 꼰
4각형 3개로 만들고 직선으로 연결지었는데 선이 교차되는 지점에 직선으로 어느 방향이건 말을 3개 놓으면 상대편 말을 하나씩 잡을 수 있으니 말을 많이 잡을수록 좋다. 일단 말을 다 놓은 뒤 자기 말을 움직여 3개를 직선으로 놓으면 상대편 말을 하나씩 잡게 된다. 이때에 말이 움직이는 대로 직선이 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을 ‘난달’이라 해서 난달이 많을수록 유리해진다. 말을 많이 딴 사람이 이긴다.
(2) 샘 꼰
원안에 십자를 긋고 세 칸 중에서 한 칸만 원의 부분을 지워 만드니 샘꼰이다. 샘, 즉 우물은 깊이 파져 있으니 한쪽이 터져 있는 것이 마치 샘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다섯 혈(穴)중에서 각 두 혈씩 네 혈에 말을 놓고 한 혈만 비워 둔다. 시합에 들어가면 빨리빨리 두어서 상대방의 말이 움직일 수 없게 가두면 승리한다.
(3) 사발꼰
서로 말을 한 번씩 전진시켜 상대편을 봉쇄하고 상대편의 말이 섰던 자리에 이쪽의 말을 먼저 가져다 놓는 사람이 이긴다.
(4) 네백이
말을 전진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말이건 상대편의 말이건 하나씩을 뛰어 건너야 한다. 건너 뛴 그 자리에 상대편의 말이 있으면 잡는다.
(5) 여섯박이
말이 전진할 때에는 하나씩 건너서 뛰는데 상대편의 말을 사이에 가두면 먹는다.
(6) 자전거 꼰
말을 눈금 하나씩 전진한다. 그러나 말을 잡을 때에는 반드시 원을 빙 돌아서 잡아야 한다. 빙 도는 원이 마치 자전거 바퀴같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다.
2. 여자아이들의 놀이
1) 빵구재비[살림살이․소꿉놀이]
빵구재비는 살림살이, 소꿉놀이라고도 한다. 대개 5~7세 이상부터 하는 여아들의 놀이이다. 접시 깨진 것, 사발 깨진 것 등을 가지고 가서 밥도 하고 신랑각시를 만들어서 혼례도 지낸다. 감잎파리를 뜯어다가 나물로 삼고, 밥도 지어 한 살림을 살면 그렇게 재미가 좋았다고 한다. 서로 방문하여 밥먹는 시늉 등을 하면서 온 종일을 보낸다.
빵구재비는 주로 논둑 밑이나 밭둑 밑 그리고 처마 밑이나 담 밑에서 놀았다.
2) 동애따기[송아지따기․송애따기․꼬리따기]
8~9세 되는 아이들이 모여서 술래를 정한다. 술래는 맨 마지막에 있는 꼬리를 따내어야 한다. 가장 앞의 아이는 술래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술래를 막으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술래를 피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줄이 끊어지거나 꼬리가 잡히면 술래가 바뀐다. 줄이 끊어지면 끊어진 쪽의 아이가 술래가 되고 술래는 끊어진 아이가 있던 자리에 간다.
3) 콩숨기[콩심기]
콩숨기는 10~15세 사이의 어린이들이 주로 하는 실내놀이이다. 10~20여 명의 아이들이 방안에 둘러앉으면 놀이를 시작한다. 정해진 아이가 돌아다니며 “콩 받아라, 콩 받아라” 하면서 아무 아이에게나 콩을 숨긴다. 콩을 숨기고 나면 술래가 들어와서 숨긴 곳을 찾는다. 콩을 찾을 때 술래는 손바닥을 치면서 찾는데 콩을 숨긴 곳에서는 손이 아프다고 한다. 숨긴 콩을 찾으면 술래는 콩을 감추고 지목된 사람은 다시 술래가 된다. 콩을 숨길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4) 시풀각시 만들기[물각시 만들기]
봄철에 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이 나무나 풀 등을 이용하여 인형을 만들고 이것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논둑이나 방천에 돋아난 풀을 이용하여 머리를 따서 쪽을 지우고, 그 위에 노랑저고리와 빨강치마 등을 입혀 각시 모양을 흉내낸다. 나뭇잎이나 돌을 이용하여 요․베개․병풍 등을 만들어 혼례식 등을 흉내내면서 논다. 지역에 따라서 물각이라는 풀을 캐다 삶아서 각시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물각각시라고도 한다.
5) 짜개받기[자새쫏기․공기놀이]
짜개받기는 공깃돌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다. 현재는 다섯 개를 가지고 놀지만 예전에는 주로 네 개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짜개받기는 보통 1:1의 경기였다. 선을 정하는 방법은 네 개의 공깃돌을 던져서 손등에 가장 많이 얹은 사람이 선이 되는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백 살, 오십 살을 정하여 나이 먹기를 한다. 방식은 차례대로 한 알 집기, 두 알 집기, 세 알 집기, 고추장 찍기로 하여 끝나면 계속 반복한다. 돌을 집을 때 다른 돌을 움직이거나 던져 올린 돌을 못 받았으면 공격이 바뀐다. 전 과정을 한번 통과하면 다섯 살이 되며 이것을 반복하여 먼저 정해둔 목표에 도달하면 이긴다.
6) 땅따먹기[땅재기․땅빼앗기]
초여름에 주로 나무 그늘 밑에서 많이 하는 놀이이다. 평평한 땅바닥에 둥글게 원을 그어 놓고, 동글납작한 돌을 이용하여 서로의 땅을 빼앗는 놀이이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한 뼘 크기의 자기 땅을 만든다. 말을 튕겨서 세 번만에 돌아오면 돌이 간 자리가 자기 땅이 되고, 덤으로 뼘을 재어서 자기 땅을 만든다. 자기 땅에 들어오면 계속하고 돌아오지 못하거나 선에 닿으면 공격이 바뀐다. 더 이상 빼앗을 땅이 없으면 다음 판으로 넘어가 서로가 빼앗은 땅을 다시 빼앗게 되는데, 이때 공격하는 방법은 자기 돌로 상대편 돌을 튕겨서 맞추면 한 뼘씩 상대방 땅을 빼앗는 것이다. 돌을 너무 많이 튕겨서 한 뼘으로 다 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공격권이 넘어간다. 중간에 섬이 생기면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땅따먹기는 1:1로 할 수도 있고, 편을 갈라서 할 수도 있는데 편을 갈라서 할 경우 같은 편끼리 서로 대각선 방향에 자리잡는다.
7) 돌차기[옥대차기]
돌차기는 옥대차기라고도 한다. 땅에 줄을 긋고 칸을 지른 뒤 한 바퀴 다 돌아 나오면 이기는 놀이이다. 한번에 한 칸씩 돌을 던지고 깨금발로 돌을 차면서 진행한다. 실수하지 않고 전체를 돌아 나오면 또 다음 칸에 돌을 던지고 같은 방법으로 돌아 나온다. 자기 땅이 된 곳에서는 쉴 수가 있다. 여덟 칸의 전체 땅을 다 따면 이긴다. 돌이 금에 걸리거나 칸을 넘어가면 상대편으로 공격이 넘어간다. 유사한 놀이로 사방치기, 잠자리 등이 있다
출처 : 안동시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