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족과의 상봉
1년 6개월 만에 페티션이 나와 필자와 가족의 영주권을 신청하게 되었다.
변호사가 한국의 미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라고 하여 한국으로 나갔다.
1년 6 개월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3 남매(장남 중 3. 차남 중 2. 딸 초등하교
1학년)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 하기가 어렵다.
서울 영락교회 시무할 때 너무 바빠서 가족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
1년 6 개월 떨어져 있는 동안 아내와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주권을 받고 가족 출국시 배웅 나온 영락교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박권 집사(명지대 교수.공인회계사)와 부인(홍효숙 권사)
이 부부는 필자의 성경 반에서 은혜를 받고 필자를 신앙의 아버지라 부르며 오늘까지도 연락하고 있다.
며칠이 지난 후 대사관에서 가족 모두 인터뷰하러 오라는 통지가 왔다.
대사관에 갔더니 창구에서 다시 연락할 테니 돌아가라고 했다.
마침 영락교회 교인 중에 한 여 집사님이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어서 문의했더니
미 국무성에서 영주권을 보류하라는
지시가 왔다고 했다.
미국에 연락했더니 담당 변호사가 곧 영주권이 나올 테니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4 개월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몹시 초조했다.
2.여자 스캔들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4개월쯤 한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서울 영락교회 어느 교인이 “김목사가 미국에 혼자 가 있는 동안 여자 교인과 가까이 지나게 되어 장로님이 김목사를 한국으로 내보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소문이 들려 오나 ?”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앞 줄 좌측으로부터 세 번째 가 김정수 집사(대광 1회)부부
앞 줄의 안경 낀 분이 스캔들의 주인공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 어느 가정에서 구역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던 대광(1회)선배인 김 집사님이 “자기는 바빠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니 자기 아내를 데려다 달라”고 했다. 선배의 부인을 옆 좌석에 앉히고 SF
쪽(280) Free Way를 약 30분 달려
예 배 장소로 갔다.
얼마 후 어느 여자 교인이
“목사님 얼마 전에 운전석 옆에 어떤 여자 분이 타고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가시던데 그 여자 분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아마 이 일로 이상하게 소문이 번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 이후 절대로 아내 이외의 여자를 운전석 옆에 앉히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이 소문을 듣기 전에는 영주권 문제는
“미국에 다시 돌아가도 좋고 한국에서 목회를 해도 좋사오니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는데
소문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 하루 속히 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옵소서” 하고 기도가 바뀌었다.
왜냐하면 목사에게 여자 문제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국에 못 들어가고 한국에서 목회를 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계속 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이 스캔들 보다 더 큰 스캔들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후에 하겠다.
3.영주권을 받다
필자가 교회를 비운 사이에도 새로운 교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4개월쯤 지나자 미국에서는
“목사님 들어오게 되면 교인이 반으로 줄어들 각오를 하고 들어 오세요”하고 연락이 왔다.
당시만해도 “목사가 일주일만 교회를 비워도 쿠테타가 일어난다” 는 말이 이민 사회에서 회자되던 때였다
5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마침 산호세 영락교회 교인 중에 시민권 자로 전자회사의 고위직에 있던 분이 출장을 왔다가 신라 호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목사님 왜 아직 미국에 들어오지 않고 여기 계세요 ?”하고 물었다.
그 동안에 되어 진 이야기를 했더니 “미국 법으로는 모든 민원의 처리 기간이 법적으로 한 달이며 반드시 그 결과를 한 달 이내에 본인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내일 미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오후에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영락교회 교인이었던 직원이 “대사로부터 인터뷰 지시가 내려졌다. 가능한 빨리 인터뷰 날 자를 잡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3 일 후에 인터뷰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아마 시민권자의 항의 전화를 받고 대사가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3일 후 인터뷰를 하러 갔더니 창구에서 아무 설명도 없이 가족 모두의 영주권을 내 주었다. 후에
직원을 만났더니 “아마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 해주었다.
군대 있을 때 同名異人으로 피해를 보았는데 영주권도 同名異人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이다.
미국에 영주권이 나왔다고 연락을 했더니 장로님은 이왕 나갔으니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한 달
더 있다 들어오라고
하여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4.분쟁
돌아와 보니 교회가 매우 시끄러웠다.
6개월 교회를 비운 사이에 창립 멤버들과 후에 들어온 교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김목사는 절대로 미국에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나중에 들어 온 교인들은 “김목사는 들어오지 못하니 새 목사를 모시자’.
”사택을 비워라”. “영어도 잘 못하는 목사이니 영어를 잘하는 목사를 모시자” 등등의 이유로 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여러 목사들이 교회에 이력서를 제출하기도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5.감옥 행을 면하다.
영주권을 받지 못하고
5 개월 동안 한국에 있을 때 송학대 교회 방관덕 목사님은 “미국에 못 들어 가면
청량리 중앙교회 목사가 비웠으니 그 교회에 부임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또 영락교회 오창학 목사는 용산 한 강 변에 있는 신동아 아파트 단지 안에 목사가 없는 30 여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으니 미국 들어
갈 때까지 교회를 맡아 달라”고 부탁해와서 허락하고 임시로 교회를 돌보았다.
이 교회에 미국 LA 영락교회 안수 집사 한 분이 출석했는데 미국 시민권 자로 6개월은 미국 6개월은 한국에서 지낸다고 했다.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교회의 요청으로 이분을 장로로 취임하는 일을 도와 주었다.
영주권이 나와 가족이 미국으로 오기 위해 비가 오는 날 이사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장로님이 자기 회사 직원
한 명과 차량을 보내와 도와 주었다.
장로는 무역업을 하기 때문에 우리 짐을 자기 회사의 물건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고맙게 생각하여 값나가는 물건도 없고 하여 직원에게
맡겨서 짐을 꾸려 싣고 갔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로 인해 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갈 뻔했었다.
왜냐하면 회사의 짐이 아니라 우리의 짐 속에 수십
만 불의 밀수품(루이비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회고록(19-2)에서 이야기하겠다.

1985.929. 부임 후 첫 예배를 마치고

1988년 신년 예배를 마치고

첫댓글 목사는 어려워. !
수많은 여신도가 있으니, 차한잔도 마음대로마시지 못하고... 어디 무서워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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