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과 8일은 내고향 미당(美堂)의 5일 장날로 연중 제일 큰 장은 설과 추석 전에 서는 대목장이었다. 동리는 면소재지도 아니건만, 60년대 우시장(쇠전)은 군에서 제일 크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미당에 소시장이 형성되기 전에는 새벽에 소를 끌고 부여 등지로 나가 팔았다고 하니 그 고생 알만 했을 것 같다. 장날 가장 먼저 서는이 우시장으로, 먼동이 트기 전에 시작해 10시면 끝이 나고, 본 장은 공주장차가 도착되고부터 시작되며, 소를 팔고 나오는 촌로들은 시세를 잘 받았다고 한 잔, 섭섭하다고 한 잔 하는데, 우시장 입구 국밥집엔 사돈팔촌 안부 묻고 이웃동네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이었으며, 이때도 쓰리꾼(날치기)들이 있어 어른들은 큰돈을 보자기에 말아서 허리에 차고 다니며 여간 조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린시절 5일 장날이 돌아오면 각 가정에서는 사고 팔 것도 없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이날을 기다리는 눈치였으며, 현찰은 가정에 거의 없던 때라 곡물이나 볏짚에 엮은 달걀 한 줄 들고 갔고, 칠갑산 자락 도림사람들은 땔나무를 준비했다. 한 짐 지고 가 팔아서 국밥에 막걸리 한잔하고 거나하게 취해 하루해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 뒷집 머슴 영화아저씨는 주머니 돈도 없이 가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공술 얻어먹고 장돌뱅이 행세를 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술과 담배 인심은 좋았던 것 같다. 또 한낮이 되면 싸전과 어물전에선 시끌벅적 흥정소리 요란하고, 길바닥 한 쪽 동동구루무 좌판 화장품 장사엔 어머니와 누님들 모여들며 장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인기코너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도 수업이 끝나면 혹시나 하고 장에 달려가 어머니를 찾다보면 재수좋은 날은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별 볼일 없는 날은 팽나무 밑에서 튀겨대는 튀밥(뻥튀기)만 한 주먹 주어먹고 집으로 돌아서노라면 어른들의 봇짐에는 누구 할 것도 없이 곽성냥, 등잔용 석유병, 가루치약 같은 생필품이 들어있고 어느 집엔 생명태나 고등어 한 손이 들려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고 추웠던 지난겨울, 올봄에는 추억의 장날은 없어졌지만, 오랜만에 사람냄새와 정이 묻어나는 재래시장에 들러 장구경도 하고 옛 추억을 느껴봄이 좋을 듯하다. |
첫댓글 1원주고 눈깔 사탕 2개사서 입에넣고 우물대면 미당에서 북실 까지오리길,<3킬로>도 멀지 안았쓰련만---

장날 사람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어머니 잊어버리면 그날은 국물도 없었써야---아이스께끼 하나도 못얻어먹고 집에 올려면 왜 그리 힘들던지--- 10원주면 애기머리통만한 참외를 5개씩 주었는데---
만한 찐빵을 설탕가루 찍어 먹으면 되게 맛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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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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