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71EEZQ7bAI
오늘 일요일 예배가 끝난 뒤에도 목사님의 말은 오래 귓가에 남아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보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예배당 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한 가지 물음 앞에 오래 머물렀다.
성경은 왜 그토록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이천 년이 흐르고, 만 년이 흐르고,
그보다 더 먼 세월이 지나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은 채 전해질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랑뿐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달라지고 언어는 닳아 없어지며,
한때 절대적이었던 가치들도 빛을 잃는다.
그러나 사랑만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
누군가의 마음을 살리고,
한 사람의 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의 온기를 기억하게 한다.
문득 세종대왕과 한글이 떠올랐다.
백성을 가엾게 여긴 마음은 마음속의 뜻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임금의 연민은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글자가 되었다.
오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는 그 글자로 생각을 적고,
사랑을 고백하며, 먼 사람에게 마음을 건넨다.
사랑은 마음 안에만 있을 때에는 하나의 뜻일 뿐이지만,
상대가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뀔 때 비로소 유산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 끝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어려운 시대를 지나오신 분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자녀들을 위해 당신의 몫을 아끼지 않으셨고,
말없이 책임을 감당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수고를 안다.
아니, 이제는 조금 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보인다.
새벽마다 묵묵히 일터로 향하던 걸음,
가족의 앞날을 위해 삼킨 한숨,
자식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던 근심들.
나는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따뜻한 말로 기억하려 하면,
마음 한쪽에 넓고 조용한 여백이 나타난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을 어린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건네는 일이,
그 시대의 아버지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웠을 것이다.
밥을 먹였고,
학교에 보냈고,
비바람을 막아주었으니
그것으로 사랑은 충분히 전해졌다고 믿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때때로 다른 언어를 기다린다.
“잘했다.”
“힘들었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사랑한다.”
그 짧은 말 몇 마디를.
아버지의 사랑이 남겨 둔 여백을 바라보다가,
나는 어느 순간 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 역시 아들과 딸을 사랑했다.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려 애썼고,
부족하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속에
‘나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았다’
는 확신을 심어주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도 나는,
나의 아버지가 사랑을 표현하던 방식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오래전의 오크리지가 떠올랐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딸은 세 살이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 테네시주의 오크리지에서 여섯 달을 함께 보냈다.
낯선 땅이었다.
한국인도 많지 않았고,
당장 우리를 재촉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여섯 달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여섯 달은 삶이 잠시 우리에게 건네준 넓은 쉼표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마다 길을 나섰다.
오크리지 근처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보았고,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까지 차를 몰고 갔다.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햇빛처럼 쏟아졌고,
노스캐롤라이나의 대저택에서는
오래전 사람들의 시간이
나무 바닥과 벽난로 곁에 조용히 남아 있는 듯했다.
매주말 떠나는 여행은 우리 가족만의 작은 의식이 되었다.
어디로 가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간다는 사실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장성한 아들이 뜻밖의 고백을 들려주었다.
오크리지에서 살았던 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왔다.
함께 있는 동안에도 더 다정한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더 자주 안아주고 더 많이 말해주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나던 날들을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낯선 풍경이 지나가고,
어디선가 간단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여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간들.
내게는 지나간 일상의 한 장면들이었지만,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가장 행복했던
계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세 살이었던 딸은 오크리지에서 살았던 사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곳의 거리도,
집 앞의 나무도,
함께 떠났던 여행도 희미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남아 있다.
사진 속에는 기억보다 먼저 몸과 마음에 스며든 시간이 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부모의 품에 안겨 웃었던 감각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가족이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바라보았던 하늘의 빛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딸이 그 여섯 달을 말로 떠올리지 못한다 해도,
그 시간 속에 있던 행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훗날 아들은 중학교를 마친 뒤,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친 뒤 미국으로 떠났다.
가족이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사랑은 마음속에 쌓였고,
표현은 자꾸만 뒤로 미뤄졌다.
바쁘다는 말이 핑계가 되고,
다음에 만나면 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약속처럼 남았다.
그래서 방학이 올 때마다
나는 미국으로 갔다.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가능한 한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다.
아들이 의대에 다니던 텍사스 엘파소에서는
함께 화이트샌즈 공원의 눈부신 모래 위를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흰 모래밭은 마치
눈이 내린 들판 같았고,
햇빛은 너무 밝아서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만큼 찬란했다.
아들이 인턴으로 일하던 캘리포니아
로마린다에서는 집 가까이에 있는 언덕길을 함께 오르내렸다.
특별할 것 없는 길이었다.
이름난 관광지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풍경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걷는 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딸의 스물세 번째 생일에는
케이크 앞에 모여 촛불을 바라보며 축하 노래를 불렀다.
만남은 늘 짧았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은,
흘러가는 시간이 우리 곁에 조금
더 머물러주는 듯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오늘 꺼내 놓은 사진은
우리 가족의 여행 전부가 아니다.
수많은 만남과 길 가운데 지금
내 손에 잡히는 몇 조각일 뿐이다.
사진 밖에는 아직 소개하지 못한 식탁이 있고,
별것 아닌 말에 함께 터뜨렸던 웃음이 있고,
공항에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삼켰던 눈물이 있다.
기다림도 있었고,
다시 만날 날을 세며 건넜던
긴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만날 수 있을 때마다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 사진이 있다.
로마린다의 언덕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려 할 무렵,
내 앞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내와 딸, 아들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때에는 그 장면이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
우리 네 식구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의
한 장면이 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후 딸이 먼저 결혼했고,
일 년 뒤 아들도 결혼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것은 부모가 기뻐하고 축복해야 할 성장이다.
오래 품었던 아이들이 마침내
자기 삶의 집을 짓고,
자기만의 사랑을 시작하는 일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네 사람이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던 시간은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가족의 한 시절은 꼭 이별을 예고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평소처럼 웃고,
평소처럼 걷고,
평소처럼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평범했던 사진 한 장이
마지막 장면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마지막은 대개 큰 소리로 오지 않는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지나간 하루의 빛 속에,
아무도 모르게 완성된다.
이제 그 사진을 바라보면 사라진 시간에 대한 아쉬움보다
함께할 수 있었던 날들에 대한 감사가 먼저 밀려온다.
언덕을 내려가던 세 사람의 뒷모습은
멀어지는 가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자녀들이
각자의 삶을 향해 걸어갈 준비를 하던 모습이었다.
내가 사진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은
여행지가 아니었다.
한때 우리에게 허락되었던 가족의 시간,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그 계절의 숨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크리지의 여섯 달과
방학마다 이어진 짧은 만남들은
내게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사랑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함께 보낸 시간으로도 전해지고,
나란히 걸었던 길로도 전해지고,
놓치고 싶지 않아 사진 속에 남겨 둔 마음으로도 전해진다고.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사랑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도,
표정으로도,
경청으로도,
행동으로도 전할 수 있다.
작은 선물로도,
오래 기다려주는 인내로도,
멀리서 보내는 축복으로도
사랑은 모습을 드러낸다.
먹빛 난초 한 줄기 곁에
넓은 여백을 남겨 두는 동양화처럼,
침묵에도 깊이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 있다.
그러나 가족이 평생 사랑의 존재를
짐작만 하도록,
그 여백을 너무 오래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사랑의 여백에
무지개를 그리고 싶다.
지난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후회로만
쌓아두지도 않으려 한다.
다만 오늘 건넬 수 있는
사랑의 색 하나를 고르려 한다.
아들에게,
딸에게,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수고했다”는 따뜻한 눈빛 하나.
“네가 있어서 고맙다”는
조용한 고백 하나.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감동을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저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게 전하고 싶다.
먼 훗날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아이들이 나를 두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그 한 문장.
그것이 내가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가장 소중한 유산이며,
가장 따뜻한 무지개일 것이다.
https://suno.com/s/JYI3mrD75Dgm1uy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