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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미타불과 함께하는 마음의 고향 무주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미타행자
214. 금강심론 특별대법회(5)
금타선사(金陀禪師)님을 우리가 위대한 분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히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분이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 없이는 누구든 믿을 수가 없겠지요. 자기 스승이라든가 자기 문중 어른들을 정도이상으로 우상시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허나 금타선사님은 천안통(天眼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숙명통(宿命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누진통(漏盡通)을 분명히 하신 분입니다. 우선 숙명통 하신 것은 직접 제가 듣지는 않았지만 그 어른의 여러 가지 기록으로 해서 알 수가 있고, 또 천안통을 하신 것은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의해서는 분명히 다 증명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안통을 안했으면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아주 정밀하게 수치(數値)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태양(太陽)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금성(金星)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또 우리 지구(地球)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그런 것을 모두 다 수치로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물질이란 것이 순수 생명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그런 것도 모두 다 수치로 표시를 하고, 불교 우주관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인데,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수치화해서 증명했습니다.
현대물리학이 미처 증명을 못하는 그런 분야까지도 다 했어요. 전자(電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는 원자핵(原子核)과 양자(陽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원자의 구성되는 이유도 다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이른바 모든 장(場,field)에너지 아까 제가 소립자(素粒子,elementary particle)로 구성된 우주에는 말하자면 근본에 가서는 아주 순수한 물질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 모든 장에너지를 이 통일시키는, 아인슈타인같은 위대한 분들이 이른바 통일장(統一場)이라. 통일장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가 없어요.
즉 그런 단계는 인간의 시간 공간 안에 있는 그런 견해로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우주관의 술어로 해서 금진(金塵), 금륜(金輪)이란 술어가 있어요. 금진 금륜 이것은 일반물리학에는 없습니다. 불경(佛經)에는 있어요. 특히, 금타선사님께서는 그와 같은 금진 금륜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모든 에너지의 장을 통괄하는 이른바 통일장(統一場)이라고 저는 생각을 헙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금진이나 금륜 이것은 물질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모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미세한 근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금진이 어떻게 선회(旋回)하는가, 어떻게 도는가에 따라서 이른바 전기(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고 합니다.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보면 좌선금진(左旋金塵)이 수진(水塵)이요, 우선금진(右旋金塵)이 화진(火塵) 이라, 그런데 수진(水塵)이란 이것은 원자 핵 체를 말하는 것이고 화진(火塵)이란 것은 전자(電子)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우주관이 삼천대천세계인데, 삼천대천세계는 현대적인 체계로 풀이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팔십억 우주에요.
팔십억 우주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태양계 같은 우주의 팔십억 배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 태양계만 생각해도 상당히 놀랄 만큼의 크기가 아닙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라든가 인제 각 달이라든가 각 위성이 이렇게 돌고 있는데, 이런 태양계 같은 즉 말하자면 하나의 작은 우주가 팔십억 개가 있는데, 팔십억 우주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팔십억 우주가 무량무변(無量無邊)입니다. 천지 우주란 것은 그와 같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 체계를 금타선사님께서 다 세우셔서 앞으로 두고두고 물리학적으로 연구를 하실 분들도 어렵다고 말으시고, 여기에 있는 수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이른바 태장계(胎藏界)수치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수치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런 형이하학적인 그런 물리학적인 그런 수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공부를 하시면 좀 난해한 것이 풀이가 됩니다.
또 수묘게(數妙偈)라, 가사 수묘게란 것은 일부터 십까지의 그런 수치에 대해서 나온 하나의 원리를 풀이한 것입니다. 가장 우리한테 우리 공부인들한테 중요한 것은 그런 수치적인 문제나 그런 것은 학자 분들이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계신 분들이나... 현대가 이른바 산업사회시대이고 또 모든 물질과학이 발달되어 있어놔서 또 그런 분야를 생각할 때는 우주론적인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얼핏 윤곽만 얘기했습니다마는.....
역시 우리 공부인 들한테 있어서는 수행론(修行論)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 스스로가 지금 현재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는 성불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인가?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수행론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10년 전 쯤, 제가 태안사에서 얘기할 때는 금타선사님의 그런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이 육조단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미처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뒤에 여러 가지 경험이라든가 또는 나름대로 명상도 하고 해서 나중에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이 육조스님의 수행법을 그대로 말씀한 수행법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가신 지가 1300년의 세월이 경과가 됐는데 육조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역시 금타선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 육조단경을 다시 보시고서 육조단경 가운데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이라는 대목과 금강심론(金剛心論)의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 대목을 대조해 보시면 과연 그렇구나,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금타선사님이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때는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이란 것은 자유인 것이니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분명히 천안통을 했다고 생각이 되고, 분명히 누진통을 했다고 생각이 되고, 또 맨 처음에 깨달을 때 나오는 숙명통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도인이지요.
도인의 증거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말씀 했지만 우선 삼명통은 꼭 해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삼명통은 아까도 말씀한바와 같이 숙명통은 과거 전생을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까지도 포함해서, 다만 몇 생뿐만 아니라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수만생동안의 과거를 다 아는 지혜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냥 투시해서 다 아는 것입니다. 미래를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안통입니다.
누진통은 우리 번뇌를 없애는 수행방법을 모두 다 통달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누진통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깨달았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와 같이 숙명통이 나오고 또는 천안통이 나오고, 누진통이 나와야 이른바 참다운 이른바 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도인은 어떻게 될 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까, 따라서 이런 것을 마음에 두고서 우리 스스로도 틀림없이,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스님이나 육조 혜능스님이나 또는 금타선사님이나 모두 다 우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착해서 미처 공부를 안 해서 깨닫지 못할 뿐이지 깨닫지 못한 단계에도 마음의 역량은, 성품은 똑같습니다. 결국 상(相)에 있어서만 우리가 미처 못 닦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금 닦아나가는 과정, 이른바 위차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있는 십육해탈지(十六解脫地)입니다. 십육단계로 위차를 밟아서 가는 것인데, 십육해탈지 이것은 어느 한 가지 경론(經論)만 참고로 한 것이 아니라, 유심론 또는 화엄경, 대승, 소승, 밀교, 현교 모든 경론(經論)을 다 망라해서 십육단계로 우리 수행차서(修行次序)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유심론을 보나 무엇을 보나 그런 경론(經論)에는 경론대로 해서 수행하는 단계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을 다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인용하고 체계를 세워놨기 때문에 십육해탈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다른 경론(經論)에 있는 수행론까지도 충분히 다 참고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일반 불교학자분들이 대체로 체계를 세워 놓은 것을 보면 존경스럽고 그 작업도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참선이라는 것은 실지로 닦아야 되는 것인데 마치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 물에 가서 배워야지 육지에서 수영을 배우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듯이 참선이라는 것은 스스로 참선을 많이 하고 또 하는 사람이 결국은 그야말로 그걸로 해서 자기가 느끼고 닦고 그래야 납득이 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명상 가운데 최상의 명상이 참선 아닙니까. 참선에 들어가려고 하면 쉽지가 않아요.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을 다른 말로 하면 사가행(四加行)그래요. 사선근은 사선정(四禪定)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인제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부가 사선정에 그냥 비약적으로 막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점점 닦아가다가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사선정 들어갑니다.
사실은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이 아홉 단계의 선이라 그래서 이것을 기본선 또는 근본선 그러는 것인데, 거 당장 여러분들이 그런 선을 닦아나가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여튼 우리가 성불의 길이니까 여러분들이 신심이 사무치면 비약적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에머슨(Ralph W Emarson 1803-1882)의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비약할 수가 있어요. 우리 신심이 사무치면,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비약할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Bible)을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대들이 조금도 빈틈없는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죽은 사람들한테 ‘그대, 꼭 살아나라’ 그러면 살아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실 자기가 증명을 다 했어요. 「라자로」라고 「마리아」의 동생이 죽었는데, 죽어서 파묻어서 사흘이나 됐는데 예수님이 어디 갔다 오니까 마리아가 아주 간청을 해요. 주여, 제 동생이 죽었으니 꼭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입니까마는 예수님은 그 무덤 앞에 가서 한참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자기의 마음이 조금도 빈틈없게 밀착하는 그런 순수한 기도가 되었겠지요.
그렇게 모셔가지고 장엄한 음성으로 라자로야, 일어나라 그렇게 몇 번 하니까 라자로가 정말로 몸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묶은 끈도 다 끊어져 걸어갔다는 것이 기록에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런 것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奇蹟)으로 과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참말로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빈틈없이 자기가 온전히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기적을 충분히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행하신 신통묘지(神通妙智)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그냥 우리한테 방편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렇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사실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렁저렁한 것이 지금 아닙니다. 명문학교도 안나오고, 또 비록 깊은 명상을 안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잠재해 있는 내재해 있는 능력은 결국은 석가모니나 예수나 똑같습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는 비약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앙굴리마라는 구백 구십 구인이나 죽인 잔인무도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죽여도 그것이 무시무시한 업장인데, 구백구십구명이나 죽였어도 석가모니 부처님 만나가지고서 마음 돌이키니까 아라한(阿羅漢)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도인(道人)입니다. 우리 불교라는 것은 그와 같이 어느 순간 비약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딱 마음을 바로 먹고서 스스로 지금 내 마음이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다 똑같은 마음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청정 무비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이렇게 온전히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이든 다하는 것입니다. 신통도 부리고, 또는 모르는 것도 없고 말입니다.
현대는 원자력시대 아닙니까. 원자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나 뭐나 참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부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밑에 가서는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에요. 천지 우주는 진여불성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진여불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바른 견해, 가장 행복스런 견해, 옳은 견해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것도 모두가 다 부처로 봐야 된단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봐도 아내이기 이전에 다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잠시간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아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도 똑같이 결국은 조금도 어김없는 부처란 말입니다. 그렇게 봐져야 참다운 정견(正見)입니다. 그렇게 보지를 못하는 것은 다 사견(邪見)이에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몽환포영 때문에 슬퍼하고 울고불고 인제 우리가 그때그때 자기 스스로 신세한탄하곤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는 안심법문(安心法問)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조금도 우리를 그늘지게 하는 법문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원만한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한 법문입니다.

첫댓글 香象 09:19 불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의지가 약할 때 생긴다.행운의 비밀은 우리 손에 있다.스스로를 돕는 사람은신에게나 인간에게나 영원히 환영받는다.그에게는 모든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