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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더더욱 확실히 깨닫는 것 하나는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 짧지만 또렷한 자기 의견을 들려준 이는
질투날만큼 지성적 문체를 발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의 한 작가였다.
우리들의 인생은
단순히 밝은가.. 어두운가 하는 것으로 쉽게 구분될 수 있는
단순한 성질의 것은 아니야.
어둠과 밝음 사이에는 그늘이라는 중간지대가 있잖아.
그 그늘의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건전한 지성이야.
그리고 건전한 지성을 획득하려면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무라카미 하루키 - 어둠의 저편 中에서.... .
그렇다.
세상은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고
또 아는 만큼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나름의 노력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거기엔 계급이나 급수가 존재한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여서
단순히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기위한 휴식의 목적이 아닌
인문지리.. 사회지리.. 역사지리를 기반으로한 관광이나 답사에 뜻을 둔다면
저마다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감흥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은 12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
내게.. 눈물나는 감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준
고맙고도.. 말 없는.. 스승을 소개하고자 한다.
부디....
우리에게 남겨진 유물과 역사를 바라보는 개개인의 시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__*)
1. 달인의 경지
우선.. 초보 여행자는 발걸음부터 표시가 난다.
촌각을 다투듯 발걸음도 바쁘고 정신이 없다.
게다가 어디든 절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눈동자를 바삐 굴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안내문 또한 정성으로 읽는다.
죙일 봐바야 알아 먹지도 못하게 써놓은 쓰잘때기 없는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초보를 벗어나면
여행에 제법 여유가 묻어난다.
모든 관람객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물이나 예술물에서
어느덧 자연스레 시선이 분산되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스스로 과거의 역사까지 되돌아 보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비단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경험하고 체험했던 비슷한 역사와 유물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했던 선조들의 삶을 떠올리고 비교까지 해보는 것이다.
당연히 공통점과 차이까지 유추하게 된다.
객관적으로 비교하자면
초보자는 여행지의 개별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고
초보를 벗어나면 그것들의 상대적 가치를 비교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 또한 그토록 도달하고자 갈망하는
여행의 진정한 최고수.. 그러니까 달인의 경지에 달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건.. 마치 건너 마을에서 놀러오신 푸근한 어르신 같은 인상이었다.
자칫 겉만보면....
여행에 아무 신경도 정성도 없어 보이는 무심함.
게다가 둘러보고 살피기 보다는 한 곳에 눌러 앉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많이 보기 보다는 오래 보기를 좋아한다.
지나는 여행객과 시덥잖은 농도 하고 근처 마을도 기웃거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하게 된다.
유구한 세월.. 그 터에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과의 자연스런 커뮤니케이션.
그보다 더 정확히 그 고장과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만큼 달인의 경지에 이르면
유물과 유적의 개별적 혹은 상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뛰어넘어
그것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총체적 인식의 사념까지 즐기게 되는 것이다.
<2011년 10월 오르셰 미술관>
2. 초급.. 중급.. 달인
어릴적....
아버님과 사학을 전공한 누님덕에 절집을 빈번히 드나들면서
이땅 구석구석 꽤나 많은 절을 찾다보니
나름 스스로 급수를 정하게 되었는데
순전히 개인적 의견으론 이렇다.
스스로 초급자라 생각된다면
경주 불국사.. 양양 낙산사.. 합천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 승주 송광사.. 구례 화엄사 등이 있다.
물론.. 초급자 코스라 하여 저 유물과 유적들이 초급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대부분 국보에 보물로 지정된 엄청난 유물들이 넘쳐날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자료들이 많기에
스스로의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누군가의 도움없이 쉬 깨닫는 곳이란 뜻이다.
<두 여인의 삶을 생각케 했던 수덕사 대웅전>
가야산 수덕사.. 강진 무위사.. 남원 실상사.. 안동 봉정사
부안 내소사.. 만덕산 백련사.. 고창 선운사.. 청도 운문사 그리고 영주 부석사 등등
적당한 지명도와 규모 그리고 접근성등을 따질때
내겐 중급 코스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루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물같은 상급자의 코스를 지나
달인의 경지인 최상급자 코스는 어디일까?
그건....
집도 절도 그리고 사람도 없는
폐사지 터다.
그리고 그 고즈넉한 정취와 세월의 연륜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장담컨데 답사 혹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는 찾기 힘든 길....
구구절절 심심산골에 파묻혀 사계절 흙먼지를 뒤집어 써야만 간신히 찾을 수 있던 길
고생고생 찾아간 그곳엔
황량한 바람뿐 절집은 오간데 없고 한때 너른 마당이었을 곳에
긴 쑥대 사이로 뭉그름한 주춧돌들이 군데군데 나돈다.
저 먼 곳에 덩그러히 석탑도 하나 보인다.
<합천 대동사지>
월성 무장사터.. 보령 성주사터.. 명주 굴산사터
지리산 연고사터.. 산청 단속사터.. 설악 진전사터와 선림원터 등등
우리나라에는 알려진 것만 무려 3000곳의 폐사지 터가 있다.
그중..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선사한 곳은
오래전.. 진전사 터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감동을 주던 폐사지 터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같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진전사 터만 하더라도
중창불사라는 미명아래 몇 해전 이미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점차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옛정취는 오간데 없어졌을 것이다.
몰락한 중세 귀족같은 허무미와 비장함을 느껴보려 다시 찾는다면
이제 무성하던 잡목 대신 깔끔하게 정돈된 또 다른 현대의 '빈터'를 마주할 뿐
오래전.. 나를 울먹이게 만들던 그 시절의 정취는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3. 진전사 터
진전사 터는 강원도 양양의 강현면에 위치해 있다.
설악의 지천인 작은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둔전리 마을이 나오는데
오래전.. 진전사(陳田寺)가 있었기에 진전리 였던 것이
국문의 구개음화 현상을 겪으며 둔전리(屯田里)로 변화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어디선가 줏어들은 이야기라 확신은 없다. -_-;;
지난 2002년.. 광풍이 휩쓸던 월드컵이 끝나고
친구놈과 진전사 터를 다시 찾았었다.
출발부터 드럽게 꿈지럭거리는 바람에
늦은 오후 도착하게 되었고
간단한 먹거리와 침낭 그리고 작은 텐트를 챙겨 진전사 터로 향했다.
<2008년 1월.. 그 정겹던 오솔길이 포장 되었다.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곳에 거하는 분들이 불편하겠지.... >
마을을 뒤로하고 10여 분 산길을 오르면
비스듬한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밭이 보이고
그 밭 중간.. 거무스름한 3층 석탑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 길 한 켵으로 까무잡잡한 탑이 보인다 >
늘씬한 준봉들이 늘어선 설악의 산세
때문에 석탑이 기댄 등의 두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야물었다.
그즈음....
석탑 앞에 기대어 흐르는 땀을 닦고 오른 길을 굽어보면
한 곁 계곡은 아래로 아래로 가파르게 흐르고
긴 산자락이 마무리되는 저 먼 곳엔
맑고 깊은 동해 바다가 우뚝 치솟아
수평선을 그으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변치 않는 자연의 품에 안겨 고스란히 천 년을 늙어온 풍경들
그 감흥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을 신봉하는 세대라면
세상 모든 수평선은 보는 사람의 시선보다 윗쪽에 있으며
스스로 빛을 반사한다는 정도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홀로 남겨진 그 아담한 석탑은
1000년이 넘는 고단한 세월을 거기 그렇게 우뚝 서서
줄곳 동해 바다를 비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 진전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를 밝힐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도의 선사가 서라벌을 떠나 진전사의 장로가 되었던 시기를
그 창건 연대로 추측하자면
대략 서기 820년 전후로 짐작되는 바
족히 1200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4. 국보 3층 석탑
이미 국보(122호)로 지정된 이 아담한 3층 석탑은
9세기초 전형적인 신라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대단히 아담하면서도 여러 느낌을 동시에 던져준다.
< 2002년 진전사지 3층석탑.. 안타깝지만 세월의 풍화와 함께 상부구조는 파손 되었다 >
단지 귀엽거나 예쁘다고 하기엔 얌전한 면이 강하고
단단하고 야무지다고 생각하기엔 대단히 부드럽고 또 섬세하다.
게다가 이 석탑엔 전 시대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가 있었는데
기단 아래 위.. 화불(花佛)과 팔부중상 그리고 사방불(四方佛)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조각은 사진에도 잘 나타나듯
대단히 정교하고 또 엄정한 기품이 느껴지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예술혼을 여기서도 쉬 맛볼 수 있다.
이처럼 진전사 탑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은
바로 한국 탑 예술의 결정체인 불국사 석가탑과의 비교를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비교를 통해서
이 아담하고 예쁜 탑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허술하게 보이는 이 아담한 탑이 왜 국보로 지정되었는가라는 의문 역시
어렵잖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탑과 진전사탑....
이것은 8세기 이른바 중대 신라 문화와
9세기 하대 신라 문화의 차이이자
당시.. 중앙 귀족 문화와 지방 호족 문화의 차이로 보면 된다.
사실.. 진전사탑은
석가탑이 확고히 다져 놓은 3층 석탑의 전통과 기초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기단이 상하 2단 구조로 되어 있어 튼실한 안정감을 주고
각각 분리된 3층의 몸체는 비약적인 상승감을 자아낸다.
비율을 따지자면 1층이 조금 높고 2층과 3층은 같은 높이로 낮게 설계되었다.
게다가 지붕돌과 서까래의 구조.. 몸돌과 지붕돌을 한 장으로 이은 점 등등
그 구조.. 모티브.. 상징성등에서 석가탑의 확실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탑의 상징 불국사 석가탑>
하지만 석가탑의 높이가 8m가 넘는데 반해
진전사탑은 5m 정도로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석가탑의 묵직하고 장엄한 기운이
진전사탑에 이르러서는 아담하고 소박한 멋으로
적절히 치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석가탑의 기와골은 엄정한 질서를 느끼도록
직선으로 마무리한 반면
진전사탑은 끝을 살짝 들어올린 멋이 있는데
보는이로 하여금 한결 부드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진전사탑의 멋진 장식무늬가
석가탑에는 배제되어 있다.
통일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 그에 자리잡은 불국사
알다시피..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함께하는 쌍탑이다.
변방의 오지에 자리잡은 진전사는 단탑 가람.
결론부터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불국사가 중대 신라 중앙귀족의 권위와 질서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하대 신라 지방호족의 새로운 도약과 문화적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중앙귀족이 권위와 복종을 필요로 했다면
지방호족은 독자적인 새로운 능력과 우호적인 접근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연히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을 담아낼 수밖에.... .
따지고 보면 8세기 신라에서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의 논리가 매우 강했었기에
지방 호족들이 지배층인 중앙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도의 선사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자심즉불(自心卽佛) 그러니까 스스로의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사상이 확대되면서
체제와 질서보다는 깨우침과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상이
본격적으로 싹 트기 시작했고
이는 지방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기회의 인식으로 비약하게 된다.
결국.. 지방호족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세력이 미치는 곳에 선종 사찰을 세우게 된다.
문경 봉암사..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 등등
선종의 오랜 역사를 지닌 대사찰이
죄다 심산 오지게 남겨지게된 이유인 것이다.
곧 도래할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이념과 상징은
결국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함께 호족중 한 사람인 왕건에게까지 이어지고
그의 승리와 함께 불교의 이데올로기 또한 교종에서 선종으로 옮겨진다.
1200여 년 전....
한 시대를 접고 또 한 시대를 맞을 새로운 전통과 체제가
바로 이 곳.. 진전사와 진전사탑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 2002년 가을 진전사터 한구석 >
이렇듯 진전사 폐사지를 마주하면
파란만장한 변혁과 개혁의 틈바구니에서
온 몸으로 장렬히 살아간 선조들의 모습을 본다.
또한 그들의 외로움과 절박함도 느껴진다.
아직도 내가....
진전사 터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5. 부도를 아세요?
그리 넓지 않은 진전사 터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조금 오르면
보물로 지정된 진전사지 부도(浮屠)가 있다.
도의 선사의 부도로 알려져 있으며
사학계에서도 이미 공인된 학설이다.
부도..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도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시험을 위해 단순히 외우고 베끼는 교과서적 역사를 창출해낸 탓이다.
본래의 중요한 내용은 쏙 빼고 겉만 가르치는 점수를 위한 역사 말이다.
나 또한 그런 획일적 교육에 지배당한 피해자중 하나이다.
<진전사지 부도.. 초기 형태로 도의선사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부도란.. 고승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 납골을 모신 건조물을 뜻한다.
이런 부도의 탄생이야말로
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위대한 탄생이라 불러도 좋다.
이제....
교과서에 없는 부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부도는 선종의 유포와 대단히 관련이 깊다.
당연히 부도의 유행은
하대 신라 사회 변혁의 한 상징물인 것이다.
탄생의 기원은 도의선사 때로 보고 있는데
설혹 그 이전의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문화사적 또는 이념적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신라시대의 유명한 고승들....
그중.. 의상.. 원효.. 진표.. 자장.. 등등
어느 스님도 부도가 남아 있지를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분들이 화엄이라는 논리를 따랐기 때문이다.
화엄의 거대한 진리에서는 고승의 죽음이란
단지 하나의 죽음일 뿐이었다.
부처의 깨달음을 따르다 부처에게 돌아갔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선종의 유포와 함께
이제 고승의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게 된다.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것을 깨달은 고승은 곧 부처와 동격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실제 당시에는 일문을 이끌어온 대선사의 죽음을
석가모니의 죽음과 비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시신을 다비한 사리
그 사리를 모시는 곳이 바로 탑이다.
때문에 중요 사찰의 탑 안쪽에는 거의 틀림없이 사리함이나 불경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당연히 성불했다고 믿어지는 대선사의 사리 또한
그만한 예우로 봉인할 곳이 필요했다.
바로 부도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시 그 절의 권위와 전통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구산선문의 제일관문인 도의선사의 부도가
진전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결국..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이
진전사에서 처음 시도되고 보전되었던 것이다.
6. 새로운 이념의 증거 '부도'
새로운 창조물의 형태....
그것은 보통 어딘가에서 모방하거나
혹은 이념과 논리에 따라 창출되거나 또는 두 가지가 복합된다.
도의 선사이후.. 모든 부도는 이 두 가지를 적당히 취하였다.
우선.. 당나라의 8각 사리탑에서 상부 모양을 따랐고
성불한 자의 대좌로 표현되는 연꽃무늬를 받침대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위대한 탄생인
부도의 조형미에 대해서는
그다지 앎의 지식이 깊지도 않고
또 제대로 공부해 해설하자면
능히 책 한 권 분량을 쏟아내야 하는 바.... .
언젠가의 기회로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하자. ^^;;
다만.. 혹시라도 경복궁 중앙박물관을 찾게되면
뜰에 처연히 서 있는 부도 하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844년.. 그러니까 9세기 중반 염거화상의 부도인데
거기엔 아픈 과거가 묻어 있다.
일제 강점시대.. 일본인들이 이 부도를 원주 흥법사터에서 찾아내
몰래 반출하려다 실패하고 임시로 파고다 공원에 모셔두었다가
해방후 다시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염거화상 부도>
후에 사학자들로 구성된 복원팀이
원위치를 찾으려 샅샅이 조사했으나
끝내 원위치를 찾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유물로서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염거화상의 부도는 결국
경복궁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스님이 시신이 궁궐에 있다니.... . -_-;;
9세기 하대 신라....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매너리즘이 등장하는데
경주.. 중앙 귀족들의 탑이 바로 그렇다.
석가탑으로 정점을 찍은 후
더 이상 탑의 양식에서 변화도 특징도 무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문화인 부도의 양식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온 정성을 쏟기 시작하는데
남원 실상사의 증각국사 부도와 수철화상 부도
화순 쌍봉사의 철감국사 부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
곡성 태안사의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등등....
수 많은 새로운 형태와 의미의 부도들이 그를 증거하고 있다.
< 고달사지 부도 > < 연곡사 동부도 > < 진전사지 도의선사 부도 >
7. 도의선사?
도의선사는 784년 당나라로 건너가
헌덕왕 13년이 되던 821년 귀국했으니
무려 35년간의 기나긴 유학생활을 마친 선각자였다.
도의가 당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으로 그중에도 남종(南宗)선의 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바로 그 선종인 것이다.
서라벌로 돌아온 도의선사는
스스로 익힌 불법을 부르짓고 다녔는데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그의 불법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개혁이었는데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에 대한 고양을 찾는 진보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당시는 통일신라....
왕권에 의해 이끌어지던 불교의 사상은 '왕즉불'이었다.
화엄의 엄격한 체제를 바탕으로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었던 것.
이는 흔들림 없는 진리였으며 논리였다.
부처님의 논리가 신분의 위계질서와 영합했던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로서.... .
그러던 어느 날....
도의가 서라벌에 찾아와
모든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한다.
당연히.. 지배 계층인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가르침을 '마귀의 소리'라며 외면했다.
아니 철저히 배척했다.
그렇게 도의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끼며
서라벌을 떠나 먼곳으로 은신을 떠난다.
그리고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멀고 먼 오지
바로.. 설악의 진전사였다.
도의 스스로도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춘 빛'이라던 그의 사상은
손자쯤 되는 제자의 시기에 비로서 빛을 발하는데
그 빛을 받아들인 건 당연히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군사적 부를 쌓은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는 구세 사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즉불이 존재하는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던 엄격한 지배계층
그러나 도의는 물려받은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침과 능력이 중요하며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하니
이러한 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비약한다.
이에 열광한 호족들은 앞다퉈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는 왕건을 만나게 되고 그의 승리는 곧 선종의 승리였던 것이며
새로운 이념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도의선사가 있었다.
8. 여귀소
신라 천년 제국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던 9세기....
그 파란 많고 어지럽던 시대에는
새로운 이념의 증거인 부도가 있었으며
그를 위시한 호족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념적으로는 선종의 집권기였던 것.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멀리 동해 바다를 비켜보고 있는
오똑한 탑 하나와 부도.... .
비록.. 세월의 풍화에 씻겨 옛영화는 오간데 없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이처럼 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한 때는 당신들처럼 세상을 살았다오'
이렇게 말이다.
진전사의 3층 석탑과 부도는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자 증언이다.
그것도 무려 1000년토록 이어온 신라의 몰락
찬란한 천년 제국의 화려한 추락.. 그 출발점인 것이다.
하지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진전사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과 맞물려 폐사되었을 가능성만 제기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진전사 위쪽 큰 연못가 깊은 곳을 여귀소(女鬼沼)라고 부르는데
절이 폐사될 당시 스님들이 그곳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안타까운 전설만 들려올 뿐이다.
<진전사 주변 단풍> <양양 휴휴암>
기억하기론.. 진전사에서 양양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었다.
시선을 저 멀리하면 동해 바다의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계곡의 물소리 또한 맑고 청아했으니까.
그런 자연의 혜택을 언제쯤 또 마주할 수 있을지.... .
2008년과 2009년.. 마지막으로 진전사 터를 찾았을 때....
나는 몹시 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절터 아래.. 임의로 풀을 깎아 만든 곳.
마을 청년회라는 사람들이 따로 주차비를 받고 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외지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지며 쓰레기가 늘고
그래서 비용과 수고가 발생한다는 것.
결국.. 이렇게 주차비를 받아 그를 충당한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 같지도 않은 이유였다.
그렇다면 마을 근방에서부터 주차를 하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또 하나는....
이제 진전사지 터를 폐사지 터라 부르기 힘들어졌는데
새로이 절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 5년 전이니.. 지금은 단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
부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중창불사하겠다는데
그것까지 내가 뭐라할 이유야 없지만
절 아래.. 진입로며 페사지 터까지 치렁치렁 설치했던 각종 등들
부처님 오신 날이 한참이나 지났던 그때
꼭 개개인의 소원이 적혀 있을것만 같은 그 등들이 거기 걸려 있어야 했을까?
아니.. 걸어두고 싶었을까?
< 화사한 꽃나무면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서 시작.. 결국 절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한다 >
새로이 지은 절이야 스님들의 몫이지만
어쩌다 뜨내기처럼 찾더라도
폐사지의 영욕과 비장함을 맛보려는 답사객들에겐
아직 그 빈터나마 느낄 수 있게 양보해주었으면 한다.
그 빈터마져 차지하겠다면 지나친 욕심이지 않은가.
그져 무신론자인 내겐
교회에서 온 동네에 부흥회 따위의 프랭카드를 잔뜩 걸어두는 일만큼
꼴불견으로 보였다.
이제.. 사라진것 마져....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세상인 걸까?
그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적인 힘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모든 음악들은 영혼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음이 그의 영적인 순수성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화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님.. 말고..... . -_-
< Forever You - Hi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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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면.. 거진읍 근처에 그 건봉사요?
흠.. 사진으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구....
아!! 거긴 폐사지가 아니구나 ㅋㅋ ^^;;
호~~!!
거 근처에 저수지 큰 거 있자나여.
낚시하러 가끔 갔음. ㅎㅎ
원래 군시절 근처라 진입금지 구역이었는데 풀리며 손맛보려고 쏘다녔었음. ㅋㅋ
건봉사.. 낚시하다 들려오는 경읽는 소리 참 좋았는데. ^^
덕분에 옛기억이 새롭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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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진, 꼬리 좋은데요..자운님은 제가 알기로 고급 여행자세요.
전 게으른 탓에, 또 잔재간 탓에..쓱~지나치며 다 봤다, 좀 알았다..하는 편이죠.
스치듯 많이 볼려고 하는데요..박이부정의 전형이죠.
변명이라면 제가 전공이 지리인데 전엔 박물학이라했어요.
모르는 거 없고, 또한 제대로 아는 게 없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많이 안다 할거고
아는 사람 앞에선 꼬랑지 내릴 수밖에요. 제 성정도 실은 그렇고요. 어리석으나 몸에 벳지요.
여튼, 자운님은 세상 속 은둔자, 구도자,달인입죠..최곰더~!!
무엇보다 본인이 존거 다 챙기니 쫌 얄미입쥐만......
이제로 좀 나누며 삽시다. 저 보세요..없는 것도 나누자너요..ㅋㅋㅋ
2002 진전사터 한구석이란... 사진이
마음에 쏙~~` 드네요... 어쩜 색도 저리 이쁜
가을색을........
전 역사에 대해서도 모르고 더군다나
여행이란건.... 하고 싶지만 언듯 생각하면
피곤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거든요...
그런데... 어딜 가게 되면... 그 곳의 역사나
의미 보다는 그늘에 피어 있는 꽃이나... 잡초들
흙을 봅니다...
그런 면을 보면... 여행의 고수라고 여겨지지요......ㅎㅎ
여행지를 가도 그곳에 무어가 있느냐 보단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까....?? 가 더
궁금하드라구요...
말근님 참한 학생이고 습득도 습자지 물베듯..
이런 학생들 뫄 놓고 가르치면 맛이 나지요. 최곰더.ㅋㅋ
여행의 자세도 이미 최고구요.
모글님 댓글이 점점 구체적이고 길어지고 이씀. ^^
시간 빼앗는 것 같아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문장력 표현력은 쭉쭉 늘고 계심. ^^
거마워여 모글님. (__*)
수업을 할 때 교사가 학생들에게 개념을 심어주려고 애쓰는 걸 본다.
개념이란 원개념, 즉 개념 그자체에 대한 것인 바 보통 그것만 가르치고 마는데
더 중요한 건 그 개념과 관계되는 관련 개념,나아가 원개념이 어째서 나왔는지 그 연원까지
다뤄야 개념을 가르쳤다 한다.그런 의미에서 해묘님의 이글은 수업으로 치자면 최고의 교수다.
귀에 쏙쏙 들어온다.한마디로 개념이 생겼다는 말이다.여행,탑과 부도,불교사,이윽고 진전사.
안가르쳐도 이미 아는 이가 있고, 가르쳐도 모르는 이가 있다고 할 때
설핏 드는 생각이 금 가르칠 필요가 없구먼..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르쳐줬기 때문에 비로소 아는 이가 있기에 가르치는 일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안다고 하더라도 안목을 달리하여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관련개념을 챙기고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캐 같은 카페에서 쓱~한번 눈팅으로 지나쳐도 생판 모르는 것을
면케되니 어찌 이런 가르침을 아니 귀하다 하리. 다시 한번 경탄을 금치 못하며 귀한 글에 경하...
해묘님은 전공이 건축학이죠.
한번 생각해보자구요..건축전공자가 제대로 일을 못하면?? 으아~~!!!!무너져 내리는구나~~!!!
그의 글은 마치 좋은 건축물 짓듯이죠.허술한 데가 없어요.설계,시공,마무리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예술적 기질이 바탕 됨은 물론이구요 건축은 종합예술이자나요..
더구나 전문가 버금가는 사진에,음악에,,,,인문학적 소양에,,,직관과 통찰이 뛰어나며
무엇보다 자연과 사물과 사람을 두고 보내는 따듯한 시선....
정빈님 말씀대로 최고내요. 전 우리들의 복이라 생각함더..본인이사 뭐 저 좋아서 하는걸테죠 .ㅎㅎㅎㅎ
근래 본적이 없는 허망한 과찬입니다. -_-;;
왜 이러삼.. 안 그러셔도 오래 눌러 앉아 이러저런 잡글 쓸거임.
그러니 작업글 고만여. ㅎㅎ ^^;; (__*)
지금 아드님이 저보다 훨 많이 알고 있을 거에여.
요즘 젋은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여.
차분히 기다려보삼. ^^ (__*)
지묘님이 가르치는건 (주장허는거)
역사만의 야그가 아닌듯허다.
역사란 단어에 얽힌 그리움
옛 흔적
숨결따라 읽혀지는듯헌 사심없을
고결허고도 투명헐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은거 가따.
가을은 외로운 계절 아니던가?
흐르는 멜로디 또한 그렇치 않는가?................어느 공돌이의 감상후 느낌
(씁웰...공돌이가 왜 이리 다른기양??)
올만에 체증이 가라앉은듯...
정말 멋진글에 머무는 이순간...^^
내가 여자라면 당신을 사랑하고 말리롸~!!
거절함. -_-;;
단칼이네욤..........ㅎㅎ
왜 나는 자꾸 작아만 지는지..ㅡ.ㅡ
개한수~!
비채,하소 운영자랑..지기까지 가보새끼로 작아지니....풓ㅎㅎ
젠 특이얌~!! 이라코 지운뎃글 밨잖우~!
정작..
나가 염려하는거 한가지...있는뎅
씨저님~!
거..굴근좀 올려주시서요.ㅋㅋㅋ
자운님..굴근제모 외엔 빠지라네요. ㅋㅋㅋ
굴근 뭐?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이들면 작아지는 건 당연!
근데..굴근이 먼데 막 웃나요?..ㅜㅜ
사학.. 한때라도 열심히 공부했던 그게 어디 가겠어여.
결정적일 때 다 나옵니다.
그리구 지금의 지성은 다 그 발로임. ^^ (__*)
달인님 마리서사지 터도 있답니다
47년의 예술혼을 쉬느낄수가 있을겁니다..ㅋ
에고..와따시는 어째 이런지..
예술혼이 좀 싫어질려 하는 밤--;;
안녕...달인
왜 이러나 칭구.
고작 47년 가꾸 멀..... .
우리 80이 되어서도 벽에 X칠하며 노라봄세 므헐헐헐!! -_-/
"가을동화...
네 죄를 사하노라.."ㅋ
분명 80이라 했삼..아니기만 해봐..
님을 빨리 만났어야 하는데..!
올여름 성수기를 피해 모처럼의 가족여행에서
휴휴암에서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데
진전사를 꼭 들러야 한다는 남편과 다툼 ..
이글을 먼저 접하였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것을 ~
아무런 생각없이 다녀옴이 부끄럽습니다..
좋은음악도 감사드리며~~!
바깥분이 사진 뿐아니라 사학에도 조예가 있으신가 봅니다.
멋진 낭군이신데여. ^^
부끄러울 건 없구요.
알고난 후 행하지 않는 무관심만 저어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진.. 잘 보고 있어여.
존 하루.. 행복한 하루~~!!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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쯥..
그대에게 올린 연서에
훈수 댓글 단 者에게..
먼생이람^^
http://durl.me/qr78s
마즈막 남기는 말..
난..쪽지파 였어요
PLAY
묘지님,
장문의 글 잘 보았습니다.
세상이 박이부정을 원하니 어찌 깊어질 수 있을까요.
성정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힘씀이겠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자운님요? ^^;;
쓸데없이 긴글.. 바쁘심 이해합니다. ^^
댓글만 클릭해주셨어도 감사!! (__*)
잔잔한 음악과 함께 탑들을 서로 비교 분석할수 있게
설명을 하니 하나하나 알아 간다는 재미가 쏠쏠 드네요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 인지 아님 설명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염거화상 부도의 모습이 자꾸
한번씩 다시 찾아보게 되네요
유난히 짱딸막하다고 해야하나요?
뭔가 탑에 더 있을것 같은데 사라진것 같은
아쉬움이 남네요
얼마전 가을 상사화때문에 불암산의 상사화와
상사화로 유명한 절의 입장료때문에
마음을 상해하시던 분의 글이 얼핏 뇌리를 스치네요
자연그대로 있는그대로 풍겨나오는 종교의 향취가
좋다는 일인 또 추가합니다
언제나 좋은글 사진 그리고 음악 매니아될듯하네요
새벽에야 댓글을 봅니다.
묘한 느낌인걸여. ㅎㅎ ^^;;
넘 이른 시간.. 존 꿈 꾸시고 푸욱 주무세여 써니님. ^^/
@해변의묘지 제가 위 답글을 달면서 왜 자운님이라 했는지
비몽사몽이었나, 죄송해요 수정완료. 히~~~ 너그러이^**^
@아다지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
그냥 모른척 할껄.. 괜히 수고스럽게 만들었네여.
잠시.. 웃고 싶어서 그랬을 겁니다.
두루두루 양해를..... ^^;; (__*)
마치, 전생과 이생을 함께 공유하고 사시는 분의 글 같으다..
전생은 신선이었다.... 고 점쟁이들이 부르짖고
이생은.. 걍 이따우로 살고있음. ^^;;
@해변의묘지 하이고. 맙소사~! 같은 점쟁이였는갑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