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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틀니단_시나리오2_언론정보학부0811812이은정.docx
1. 고급 아파트 단지, 밖, 낮.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3월의 한 낮, 파란 하늘에는 오리털 뭉치같은 조각구름이 흩어져날린다. 쨍한 햇빛 줄기는 흘러가는 구름을 요령좋게 피해가며 삐죽이 삐져나온다. 칠용은 매끈하게 선팅된 창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문에 달린 버튼을 왼손으로 더듬어 차의 창문을 내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뽕짝거리는 음악이 열린 창을 통해 도로 위로 흘러나간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다. 주름진 피부의 굴곡마다 와닿는 찬 바람을 칠용은 눈을 감고 잠시 느껴본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메마른 폐가 이른 봄의 냄새로 부풀어 오른다.
냉이. 진달래. 민들레. 질경이. 봄동. 달래. 쑥...칠용이 눈을 감고 좋아하는 봄나물들을 하나하나 꼽아보는 사이, 그가 탄 검은색 세단은 얼음 위에 미끄러지듯 천천히 속력을 줄인다. 칠용은 왼손으로는 창문을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오른쪽 다리를 주무르며, 지척에 버티고 선 고층아파트들을 이마에 주름 잡히게 올려다본다.
아파트 주변은 한산하다. 멀리 보이는 한강변에 사람 몇만이 어른거릴 뿐, 근처에 개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다. 칠용은 안주머니에서 오래된 금테 보잉 선글라스를 꺼내 쓰곤, 옷매무새를 매만진다. 칠용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순례는 칠용이 머플러를 정리하는 것을 거든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순례 오른편의 영순은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다, 고갤 돌려 어떤 신호를 알아채려는 듯이 분주히 매무새를 고치는 순례와 칠용을 빤히 바라본다. 앞자리 조수석에서 내리며 종진은 따가운 햇빛으로부터 숨으려는지 검은 중절모를 얼굴 쪽으로 당겨 쓴다. 내릴 채비를 마친 네 사람이 차례로 내린다.
자동차의 문을 열자 절정에 다다른 노래의 가삿말이 귀에 와 꽂힌다. '뜬~구름 쫒~아가다 돌아봤더니~ 어느 새 흘러간 청~춘~'. 가죽내가 날 것 같은 오래된 갈색 옥스퍼드가 문 밖으로 제일 먼저 튀어나온다. 정직하게 맞는 코끼리색의 얇은 체크 무늬가 새겨진 정장을 입고 캐러멀색의 머플러와 가죽장갑 차림의, 회색 빛깔 깔끔한 머리와 보잉 선글라스가 얼굴형과 잘 어울리는 인물은 칠용이다. 그는 시간을 들여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내린다.
그 뒤로 햇살에 비춰 경쾌하게 반짝거리는 하얀테의 선글라스와 색을 맞춘 듯한 짧고 하얗게 바랜 머리칼. 그 위에 어슷하게 얹힌 초록색 앙골라 베레모를 쓴 머리를 빼쭉이 내밀며 순례가 내린다. 초록색 모자가 그녀 버건디색 입술과 대조를 이룬다. 그녀의 목에는 짧게 목 둘레를 두른 진주목걸이가 걸려있고 어깨에는 두꺼운 감으로 옷깃을 길게 늘어뜨린 디자인의 캐멀코트가 걸쳐져있다. 짧동한 코트에서 튀어나온,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은 우아한 표정으로 포개져 작은 클러치백을 앙 물고있다. 포개어 가려진 손가락으로 순례는 백 표면에 볼록 나온 립스틱을 만지작거린다.
차의 반대쪽에서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를 쪽진 영순이, 달궈진 차 천장 위 아지랑이 너머로 겹쳐져 일렁인다. 낮은 굽 검은 구두는 흰 스타킹을 신은 발을 얌전히 감싸고 있다. 종아리 중간까지 닿는 아이보리 코트의 허리띠를 단단히 둘러매는 영순의 손이 보인다. 그녀는 짧은 챙을 두른 캐러멜색 모자의 앞을 살짝 올려 써 머리카락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문을 닫는 이를 바라본다.
작은 키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진 종진이다. 검은 중절모, 검은 정장에 회색 머플러가 잘 어울린다. 같은 색의 회색 코트를 팔을 걸친 손에 검은 서류가방을 단단하게 잡고, 주변을 빠르게 한 번 훑어본다. 셋은 차례로 칠용의 옆에 와 늘어선다. 그들은 고급 아파트단지의 정문 입구를 쳐다보다, 병렬로 늘어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 뒷모습이 마치 아홉 개의 발이 달린 커다란 동물 같다. 지나가던 네발자전거를 탄 꼬마가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훑는다. 햇살이 쨍하다.
2. 펜트하우스_거실, 안, 낮.
넓은 거실. 노인 넷이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있다. 노인들은 호로록 소리를 내며 잔에 든 차를 연신 마신다. 그 모습은 그들처럼 오래된 집 안 가구들과 한 데 어울려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칠용은 눈을 감고 안락의자에 기대 앉아 만족스러운 듯 낮은 헛기침을 두어번 한다.
눈을 가늘게 뜨며 칠용, 굳은 듯 닫혀있던 입을 연다.
칠용 그래…목들 축이셨으면 그만 일어나자구.
칠용의 말이 떨어지자 탁자 끄트머리에 바싹 붙어 앉아있던 영순, 들고 있던 찻잔을 비우더니 작은 손가방 속으로 쑤셔 넣는다. 칠용은 안락의자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자, 소파에 앉아있던 종진은 서류가방을 탁자에 올려놓는다. 영순의 옆에 앉아있던 순례의 손은 영순이 손가방에 찻잔 받침까지 넣는 것을 돕는다. 종진이 서류가방을 열자 네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주위의 물건들을 선별해 담는다. 넷은, 각자 다른 방으로 사라지더니 한 움큼씩 물건을 가져와 담는다. 서류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나머지 물건들은 영순과 순례가 들고 온 클러치백에 눌러 담고 그마저도 자리가 여의치 않자 뒤로 휙 던지고 집을 빠져나간다.
넷은 들어왔던 것처럼 천천히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간다. 보잉 선글라스를 쓴 칠용의 얼굴이 씩 웃는다.
힘있게 걷는 칠용의 얼굴 위로, 무표정한 칠용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다음 신 시작한다.
3. 순례, 칠용 부부의 아파트, 안, 밤.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처진 얼굴로 굳어있는 칠용. 그 파리한 얼굴 위로 파란 TV불빛이 비친다. TV에서는 왁자하게 떠드는 중인데, 그는 무표정으로 앞만 바라본다. 칠용은 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다. 칠용의 아내, 순례는 소파 발치에 기대어 앉아 드라마와 이야기 중이다.
순례 저 할머닌 저길 또 왜 들어간대, 아이고. 또 무슨 사단 나겠네.
어쩌냐, 저걸 어째. 응? 저건 꼭 저기 닮아서 하는 짓도 똑같네. 아유, 얄미워.
칠용은 고갤 돌려 불이 켜진 한강의 다리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예의 굳게 닫힌 입술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순례는 그것도 모르고 드라마에 빠져 혼잣말을 하기 바쁘다. 보던 드라마가 끝나자 순례는 바로 채널을 돌린다. 다른 채널에서는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 오프닝을 내보내고 있다.
순례 은정 할아버지, 이거 어제 어쨌지? 미스터김이랑 저기랑 어쨌더라…
칠용은 고갤 돌린 채로,
칠용 둘이 헤어지기로 했지.
순례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응, 맞어. 그랬지.
칠용, 다시 고개를 바로 해 드라마에 열중해 있는 순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뗀다.
칠용 여보… 우리 시골에서 살아볼까요?
순례, 칠용을 돌아본다.
4. 순례, 칠용 부부의 아파트, 안, 낮.
이사 준비로 분주한 부부의 아파트. 이삿짐센터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바쁘게 들락거리는 가운데, 칠용은 옮길 가구들을 가르쳐주고 있고, 순례는 다시 한 번 더 가져갈 물건이 없는지 생각하며 안방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중이다.
땅딸막한, 목걸이며 반지며 보석을 걸 만한 곳은 다 치장한 할머니가 이삿짐이며 박스들을 헤치고 들어오더니 안방의 순례에게 말을 건다.
부녀회장 아이고, 뭐 이걸 다 가져 가려구 해? 집도 그냥 비운다면서,
필요한 것만 가져가지.
순례 경아 엄마 왔어? 그래두.. 자주 못 올 테니까 영감님이 다 챙기라 하시네.
부녀회장 (순례가 들고 있는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에이… 애들 사진도 가져가?
괜히 사진 들여다보고 애들 생각해서 뭐해요? 마음만 아프지.
순례 (상자를 덮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으응.. 아, 오늘 교회 얼른 가셔야지?
부녀회장 응, 새벽기도. 우리 사촌 조카 워커 호텔에서 결혼하잖아, 오늘.
날 보군 자기한테 엄마 같은 분이니 꼭 예쁘게 하고 오라잖아?
이따 미용실 가야 해. (반지 낀 손으로 꼬불대는 머리를 연신 뒤집는다)
순례 좋겠어, 사촌 조카도 회장님한테 잘하니.
순례는 문턱에 기대고 서있던 부녀회장을 지나쳐서 마지막이 될 박스를 테이프로 동여맨다. 부녀회장은 순례를 따라다니며 사촌 조카네 예물, 혼수 등에 대해 끊임없이 떠든다.
칠용 은정 할멈, 움직였더니 벌써 출출한데 인부들도 먹일 겸 배달 시킵시다.
자장면 네 개랑…당신은 출출하지 않소?
순례 나는 됐어요, 어차피 이빨이 다 쉬언찮아서 못 먹어, 못 먹어.
칠용 그럼 자장면 넷, 짬뽕 하나,
부녀회장 저는 굴탕면. 그리고 시키는 김에 탕수육도 대짜로 하나 시켜요, 영감님.
칠용과 순례가 쳐다보자 부녀회장, 얄밉게 눈웃음을 짓는다.
5. 순례, 칠용 부부의 아파트_거실, 안, 낮.
이삿짐으로 아직 어수선한 집의 현관, 자장면 배달부가 음식을 내려놓고 있다.
자장면 배달부 (짜증내며) 할무니, 다음부턴 우리 집에서 배달 시키지 마요.
배달 시켜도 나 안 와요, 경비 완전 짱나네.
순례 짱..짱 뭐?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어요. (돈을 주며) 남은 돈은 가져요.
자장면 배달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린다) 어? (고개를 꾸벅) 감사함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며) 그릇은 할매 가져요.
순례 (걱정스럽게 내다보며) 조심히 가요~
순례, 문을 닫고 집안을 보며, 칠용을 부른다.
순례 할아버지, 짜장면 왔어요.
칠용 응?
순례 짜장면!
칠용 어, (인부들에게) 여, 식사 들고 합시다.
순례 (자장면 등을 식탁에 놓으며) 아니, 근데 요즘은 배달부가 참 어리네.
손자 같은 게 일도 열심히 하네. 안쓰럽게.
인부1 안쓰럽긴요, 할머니. 저런 게 면허도 없이 오토바이 몰다 사고 내는 거에요.
부녀회장 맞어, 접때 왜 우리 아들 뺑소니 당했잖어,
그것두 저런 거였어, 보나마나 무면허지 뭐.
차도 벤츠라 우리 돈만 왕창 깨졌잖아? 저런 거 다 싹 잡아들어야 돼.
인부2 어휴, 한두푼 아니었겠네요.
부녀회장 예~그게 또 우리나라에서 수리가 안된다구 독일까지 보내고 그랬었지~
아주 고놈을 잡았어야 되는데, 수리비 왕창 물렸어야지 정신차리지.
뭐, 월급이 백이나 되려나, 어차피 지 월급으론 갚지도 못할 테지.
인부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하고 말없이 자장면을 먹는다. 부녀회장은 눈치 없이 계속 벤츠가 얼마이네, 지금 낀 반지가 아들이 사준 건데 소나타 한 대 값이네 하며 호들갑스럽게 떠든다.
6. 고속도로_이삿짐 2.5톤 트럭 안, 낮.
칠용, 순례, 인부1 순으로 트럭 좌석에 앉아있다. 인부1이 운전을 하고 있다.
인부1 귀농 하시나 봐요, 서울서 시골로 가시는 거 보니.
칠용 응, 서울에 한평생 사니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순례 밭도 조금 일구고, 개도 하나 마당에 키우고… 그러려구 하지요.
인부1 하긴 밭이나 작게 일구시면 건강에도 좋죠,
근데 그래도 병원이나 다른데 다니시기엔 서울이 편하실 텐데요.
칠용 공기 깨끗하고 물 깨끗하면 병원 다닐 필요 없지, 뭐.
인부1 네, 우리 아부지도 평생 시골서 사셔서 그런지 그 연세에 잔병 하나 없으시네요.
칠용 그러신가? (만족스런 웃음)
칠용의 웃음이 화면을 꽉 채우고, 다시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무표정한 칠용의 얼굴 오버랩.
7. 순례, 칠용의 시골집, 안, 밤.
칠용의 표정이 아파트에서 TV를 시청하던 예의 그 처진 얼굴이다. 집만 바뀌었을 뿐, 시골에서도 순례와 칠용은 여전히 TV를 보고 있다.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중인데, 반찬이 부실하다.
칠용 여보, 내일은 장 좀 봐옵시다.
순례 예, 한번에 많이 사와요. 찬거리가 없다는 걸 깜빡 했네.
서울선 생각났을 때 금방 사오면 되는데…
칠용 응… 아, 아까 들어오는 길 쪽에 곰취 나물 뜯어왔잖어,
그거나 밥에 싸먹읍시다. 가져와봐요.
순례 아, 참 그게 있었네. (냉장고에서 꺼내 식탁에 놓는다.)
칠용 (한 입 크게 쌈을 물고 끄떡이며) 허어. 이런 게 진짜 시골밥상이지.
칠용과 순례, 맛있게 먹는다.
8. 병원 응급실, 안, 아침.
두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순례와 칠용. 둘 다 진정은 되었지만 아직 혼이 빠진 얼굴이다. 젊은남자 의사 한 명과 여자 간호사 한 명이 다가온다. 칠용, 멍하게 의사를 바라본다.
의사 (심드렁하게) 할머니, 할아버지. 요즘엔 나물 막 뜯어 드시면 안돼요.
다 농약 치고 그런다고요. 게다가 두 분이 드신 건 곰취랑 비슷한 독초예요.
응급처치 해드렸으니까 좀 있다가 퇴원하셔도 됩니다.
칠용 예. 근데 우리 마누라가 아직 안 좋은 것 같은데 하루쯤 입원해도 됩니까?
의사 내일이 일요일이라 퇴원 수속이 안돼요. 오늘 오전에 미리 수속 밟고
오늘 저녁에 퇴원하시거나 아니면 월요일에 퇴원하셔야 돼요.
칠용 크게 말해야 돼, 귀가 잘 안 들려서.
의사 많이 안 좋으시면 월요일에 퇴원하세요! 월요일.
칠용 (빙글 웃으며) 응~ 하나뿐이 없는 마누란데 잘못되면 안되지.
의사 그러세요, 그럼. 여기 간호사가 입원 도와드릴 거에요.
칠용 예에. 고마워요.
9. 병원 복도, 안, 낮.
순례의 검사를 기다리며 칠용이 병원 복도 한 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다. 맞은편 벽 게시판에는 이런저런 병원 안내문이 붙어있다. 많은 안내문 중 하나가 칠용의 시선을 끈다.
‘치매 자가 진단
– 조기 검진으로 노후를 건강하게!
1)오늘은 몇 일입니까?, 2)오늘은 무슨 요일일까요?, 3)여기는 어디일까요?,
… 10)20에서 3을 빼고, 그 결과에서 3을 빼고, 그렇게 계속 3씩 빼보세요.
각 문항을 1점으로 만약 총점이 7점 이하라면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보세요.’
칠용, 가만히 안내문을 들여다본다.
순례가 검사를 마치고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다. 칠용은 순례와 함께 손을 잡고 병실로 가며 순례에게 말을 건다.
칠용 여보,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순례 (곰곰이 생각한다) 글쎄요… 어제 무슨 드라마 봤더라?
칠용 …
화면 점점 어두워진다.
10. 병원 안뜰, 밖, 낮.
점심식사 후 병원 안뜰을 산책하고 있는 순례와 칠용.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다. 개나리가 노랗게 만개하여 피어있고, 안뜰의 중앙에는 큰 벚꽃나무가 서있어 바람이 불 때 마다 하얀 꽃잎을 날리고 있다. 벚꽃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는 곱게 화장한 할머니가 홀로 앉아있다. 이쪽으로 다가온 할아버지 한 명이 두 손에 들고 있던 자판기 커피를 할머니에게 한 잔 건넨다. 벤치에 앉은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멀찍이 떨어진 칠용과 순례에게 드문드문 들린다.
할아버지1 뜨시니까 천천히 마시구려, 김여사.
할머니1 (볼 밝히며 수줍게) 예. 고마워요.
할아버지1 운동시간을 빼먹으니 이렇게 좋은 걸,
게다가 벚꽃 아래에 김여사랑 이렇게 있으니 더 바랄게 없어요.
나는…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소.
할머니1 그런 소리 마셔요. 그런데… 선생님들이 찾지 않을까요?
할아버지1 걱정마오. 여긴 병원 쪽이라 여기 있는 줄은 죽어도 모를 걸? 허허
그런데 김여사, 손금 한 번 봅시다.
할머니1 예? 손금이요? 갑자기… (우물쭈물한다)
할아버지1 (손을 잡아채며) 봐 줄게요. 아이고, 김여사는 손도 곱구려.
할머니1 (다른 손으로 볼을 감싸며 부끄러워 한다) 아이..참…
멀찍이서 그들을 보며 칠용, 순례 대화가 이어진다.
순례 아유… 다 늙어서 저게 무슨 추태래요.
칠용 왜요, 보기 좋구만. (장난스럽게) 오랜만에 순례씨 손금 한 번 볼까요?
순례 (깔깔 웃으며) 아이, 징그러워. 하지 말아요.
순례와 칠용이 깔깔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들에게 말을 건다.
영순 어머, 사돈 내외분 아니세요?
칠용, 순례는 놀라 뒤를 돌아본다.
11. 실버타운 내 휴게실, 안, 낮.
정수기 앞에 선 영순은 종이컵 세 개에 뜨거운 물을 각각 반쯤 붓고는 믹스커피의 포장지를 막대처럼 접어 휘휘 젓는다. 커피 두 개를 양손에 쥐고 영순의 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칠용과 순례에게 먼저 건네고 자신의 커피도 가져와 테이블에 앉는다.
영순 (한 모금을 마시고) 그런데 병원엔 웬 일이세요?
순례 예.. (우물쭈물하다) 이이나 나나 늙으니 성한 데가 있어야 말 이예요.
칠용 그런데 사돈께선 그 동안 여기 계셨습니까?
영순 네에. 벌써 햇수로 오 년 차 되네요.
칠용 여기서 살면 노인들끼리 재미있지요? 병원도 가깝고, 공기도 맑고.
영순 재미는요, 저 쪽 노인들 보세요.
영순이 가리킨 쪽에 노인 세네 명이 휠체어에 앉은 뒷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통유리에 휠체어를
바싹 대어놓고,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밖의 나무에는 파릇한 새싹이 올라오고, 멀리 보이는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영순 다들 뭣을 기다리는지… 그냥 어서 죽기만을 바라는 거예요…
자식이나 찾아오면 모를까. 이놈에 팔자는 왜이리 박한지,
젊을 적에는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 욕 들으며 살고 말년에 좀 행복할까 했더니
딸년은 지 남편이랑 딸이랑 데리고 어미 혼자 살으라고 가버리고…
(눈물이 맺히려고 한다) 명줄은 긴지 죽으려고 해도 또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순례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종이컵만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릴 뿐이고, 칠용은 굳은 입술로 멀리 창 밖을 바라본다. 잠시의 침묵이 무겁다.
순례 (담담하게) 저도 그래요.
그 날 그렇게 애들 보내고 그냥 여기서 모든 게 끝나 버렸으면…했어요.
일 년쯤 되어선가… 어느 날은 정신 차려보니까,
(웃으며) 내가 천장에 줄을 매달고 있는 거에요?
순례의 회상씬이 시작한다.
12. 순례, 칠용의 아파트, 안, 저녁.
천장에 매달린 동그란 매듭의 줄이 선명히 보인다. 그 뒤로 순례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순례는 매듭 안으로 머리를 넣을 듯 하는데, ‘뻐꾹-‘하는 소리가 집 안 적막을 깬다. 소리에 화들짝 놀란 순례는 고갤 돌려 뻐꾸기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음에 더 화들짝 놀란다.
순례 어유, 내 정신 좀 봐, 저녁 찬거리가 없는데.
순례는 허둥지둥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선다. 천장에 매달린 줄은 대롱대롱 흔들린다.
13.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 안, 저녁.
(순례 NA: 그리고 장을 다 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오른손엔 지갑과 영수증을, 왼손엔 저녁거리가 든 봉지를 들고 백화점을 빠져 나오려는 순례. 양 쪽에 늘어선 화장품들을 외면하며 잰 걸음으로 걷는데, 유독 빨간 립스틱이 순례의 눈길을 잡아 끈다.
(순례 NA: 갑자기 눈 앞에 보인 빨간 립스틱이 너무나 갖고 싶었어요.)
우뚝 서서 빨간 립스틱을 노려보는 순례.
(순례 NA: 그렇게 빨간 건 잘 바르지도 않고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살짝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곤, 점원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사이 립스틱을 집어 찬거리가 든 봉지에 집어넣는다. 떨리는 손을 가리기 위해 순례는 더 빠른 걸음으로 백화점을 빠져나간다.
(순례 NA: 순간 가슴이 정말 오랜만에 뛰었어요.
그리고 ‘아, 나 살아있구나.’ 싶었어요.)
희열을 가까스로 참으며 길을 걷는 순례.
회상 끝.
14. 실버타운 내 휴게실, 안, 낮.
순례 (Off) 그 뒤로 죽고 싶을 때마다 조그만 것들 하나씩 훔쳐 왔나 봐요…
칠용은 튀어나올 듯 눈을 동그랗게 떠 순례를 쳐다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 열었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닫는다. 칠용은 눈을 떨군다.
순례는 칠용의 눈치를 본다.
영순 (나지막이) …그렇게라도 살 맘이 생기면…
또 다시 침묵.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영순이 짐짓 밝게 얘기를 꺼낸다.
영순 우리도 까짓 거, 인생 별로 남지도 않았는데 크게 한 탕 할까요?
순례와 칠용은
잠깐 놀랐다가, 농담이라고 받아들이곤 깔깔 웃는다. 분위기가
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