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방일 셋쨋날이다. 아침 8시 30분 호텔 로비에 모여서 우리들은 신쥬쿠(新宿)로 향했다. 신쥬쿠(新宿)는 도쿄(東京)의 제일 번화가로 새로 조성된 젊은이의 풍속거리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아침 출근시간의 거리의 표정은 우리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다. 바쁜 걸음의 직장인들, 도로를 메우고 있는 자동차들,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심지어는 도로표지판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 한자와 가나문자 대신 한글로 글자만 바꾼다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영판 그대로이다. 얼마 전 한참 고개를 들던 도로표지판의 한자 병용 표기 주장이 문득 떠오른다. 일본의 식민에서 벗어난 지 이제 겨우 54년째이던가? 섬뜩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시설과 과감한 투자로 실험성이 강한 도쿄도립 신쥬쿠 야마부키(山吹)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9시가 다되어 학교에 도착하였으나 우선 학교의 겉모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학교라고 하면 흔히 연상이 되는 운동장과 학교 울타리가 없는 겉모습만으로는 도저히 학교라고 보기엔 힘든 현대식 7층 짜리 빌딩이 학교라고 하였다. 성냥갑만한 주택들 사이로 곡예운전을 한 끝에 우리가 탄 버스가 건물 뒤편에 있는 학교 주차장(?)에 주차하자 우리 일행은 운전기사를 위해 손뼉을 쳐주었다. 길은 좁지만 너무나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어 어디를 가나 인상적이다.
자동문을 통과하자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는데 그것이 출입자의 신원파악과 출석을 체크하는 수위 아저씨라고 한다. 학생들이 소지하고 있는 학생증이 IC 카드처럼 생겼는데 학생의 모든 내용이 그 안에 입력되어 있어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컴퓨터 관리 시스템으로 학교의 모든 학사업무를 이 시스템으로 통제하며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교육활동을 체크하고 자율적으로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학생이 실수로 확인을 못하게 되면 모든 책임을 학생 스스로 진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의 학교 시스템을 흉내낸 것 이라고 한다.
또 다른 큰 특징으로 무학년제와 학점제 운영이었다. 3년 이상 재학하거나 총 80학점을 따면 졸업이 되는데, 수강신청에서 학점이수까지 모든 업무가 본인이 책임지고 자율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학생에 대한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오전, 오후, 야간, 주말반 4 파트(4 Part Time)로 교육활동이 운영되며 그 각각에 교감이 1명씩 있어 교장 1명에 교감이 4명이나 되었다. 물론 출근시간도 각각 달랐으며 교사는 150여 명이나 되었다. 한 교실에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고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각양각색이었다.
7층 가운데 2층은 학생회관으로 식당과 휴게실, 도서관이 있었다. 지하에는 실내체육관과 풀장이 있었으며, 운동장이라고는 7층에 테니스 코트가 2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시설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현재 학생수는 월~금요일반(주야 포함)에 786명, 토요일반에 360명, 일요일 평생교육반에 1300명이라고 한다. 특히 학생의 나이 분포를 보니 10대가 934명, 50대가 371명, 40대가 342명 순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교육과정은 국어, 수학, 체육, 보건, 클럽활동, 생활일반이 필수교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외 교과들이 선택교과로 되어 있었다. 4월에 학년을 시작하여 3월에 끝나며 수련활동에 해당하는 이동교실, 영화감상회, 배구대회, 특별활동, 문화제 등의 학교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69명 졸업에 94명이 대학과 전문대학에 진학을 하였다고 한다.
학교시설과 교실수업을 돌아본 뒤 우리는 학교에서 마련해준 차를 마시며 학교장과의 대화의 장을 가졌다. 굉장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학교의 시스템을 안내하는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한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떤 단체든 리더는 투철한 사명감과 교육적 철학으로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막아내야 합니다.--
정문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며 동해원이라고 하는 한국식 식당으로 향했다.
일본에 온 지 삼일만에 우리는 한국식 비빔밥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전주비빔밥이라고 내놓은 점심은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모국에서 오신 선생님들께 특별히 대접한다며 내놓으신 김치가 우리의 동포애를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따뜻한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인사말씀 또한 정말 정겹게 들렸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일한기금 측이 제공한 프로그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알차게 짜여져 있었다. 저녁식사 3 끼 분을 현금으로 주며 혼자서 해결하도록 하였으며 자유시간을 많이 주었다. 갑자기 바빠진 우리는 도쿄의 지도를 내놓고 갈 곳을 찾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XX세대 젊은이의 거리 시부야( 谷),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전자도매상의 거리 아키하바라(秋葉原), 로뎅과 피카소를 만날 수 있는 우에노(上野) 공원, 도깨비 시장으로 유명한 다케타, 일본천황이 사는 황거(皇居), 토쿄타워가 우뚝 솟아 있는 하마마츠쵸(兵松町), 도쿄 디즈니랜드가 있는 마이하마(舞兵), 그리고 신쥬쿠의 서점가 등 통역을 맡은 세가와상과 모리시타상이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여행 내내 느낀 것이지만 이분들의 프로정신은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친절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지식들도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에 사전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내일의 스케줄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단순한 관광 가이드가 아니라 때로는 역사학자만큼이나, 때로는 지리학자만큼이나 철저한 장인정신은 우리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창원에서 온 김선생과 함께 우리는 먼저 쇼핑보다는 우에노에 가서 서양미술관을 보기로 했다. 미술에 별 조예는 없지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진품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무작정 따라 나서기로 했다. JR 순환열차를 타고 잘 통하지도 않는 말을 영어와 일어, 바디랭귀지로 물어물어 우리는 겨우 우에노 공원에 도착하였다. 서양화미술관 입구에서 로뎅을 만난 우리는 놀람 그 자체였다. 한 번도 진품을 본 적이 없는 나는 특히 지옥의 문 위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 그렇구나!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이라고 하는 작품의 한 부분이었구나.’
놀람을 진정하고 가까이 가보니 더욱 놀라운 것은 조각 밑부분의 내진 설계였다. 아다시피 일본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프랑스에서 이 조각을 사 올 때 진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특별히 설계를 하였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도 이 내진 설계를 보고 비로소 작품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세계 제일 잘 사는 나라, 경제부국인 일본이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품들을 사 들여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치부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내심 놀랐다. 미술관 안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고갱 등 면이 있는 미술가들의 그림을 직접 만났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그 외에도 과학박물관과 국립박물관이 있었다. 국립박물관을 돌아 본 뒤 아키하바라로 가기 위해 우에노역으로 가던 중 공원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노숙자들의 텐트가 눈에 띄었다. 공원의 큰 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고 빨래를 늘어놓은 모습들에서 우리의 탑골공원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사실 하나는 까마귀이다. 이 까마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일본에는 도쿄의 번화가 빌딩 위, 공원의 숲, 박물관 마당에까지 커다란 까마귀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까마귀 고기가 정력에 좋다고 하여 까마귀 씨를 말린다고 하던 뉴스가 생각난다. 한 마리에 30만원을 넘는다고 하던데 한국에 돌아가서 포수들에게 알려 주어야겠다고 김선생이 농담을 한다. 우리 까마귀가 바다 건너 이곳으로 모두 피난을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키하바라 전철역 부근에서 양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그 유명한 전자상가 거리로 나갔다. 길이며 건물이며 모두가 전자제품으로 가득 찼다. 한국인을 알아 보고는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하며 종업원들이 흥정을 해온다. 진열된 제품들은 구제품에서 최신 모델까지 세계에서 없는 것이 없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꼼꼼히 따져본 뒤 나는 조그마한 카메라를 하나 샀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돈으로 한 십 만원은 싼 것 같았다. 올 때 카메라가 없어야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찍힐 수 있다고 머리 써서 카메라를 안 들고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여기에서 하나 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도깨비 시장으로 유명하다는 다케타로 갔다. 여기에서는 100엔 샾이 유행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건물 전체가 우리 돈으로 천 원 정도 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톱깎이에서부터 생활필수품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값이 싸면서도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이 가득하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가게 안의 손님 대부분이 한국 사람일 정도로 우리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김선생도 학급에 아이들에게 선물한다며 손톱깎이를 60개씩이나 산다. 우습게도 여기에서 나머지 대부분의 우리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쇼핑 문화, 한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도쿄타워에 들러 보기 위해 하마마츠쵸역에서 30분을 길을 물어 가며 걸어갔다가, 저녁 8시에 문을 닫아 올라가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름한 주점에 들러 맥주를 시켰다. 길거리에 앉아서 도쿄타워를 올려다보며 한 병에 천 엔 가까이 하는 병맥주를 억울하게 마시다 옆자리에 앉은 재일동포 연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을 얻었다. 생각보다 민족차별이 심하다는 것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조선이라고 남북한을 구별하여 말한다. 분단조국의 현실이 새삼 우리를 짓누르며 다가왔다. 통일. 독일의 통일과 현재. 호텔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통일과 우리의 나아갈 길이라고 하는 무거운 생각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