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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구사론 제2권 분별계품(分別界品) 16.
각 주 약해(略解)
1) 본론 권제2에서는 18계법을 유견·무견, 선·불선 등의 스무 가지 갈래[門]로 분별하고 있다. 즉 온·처·계의 제법분별(諸法分別)은 바로 18계에 갖추어진 근 (根)·경(境)·식(識)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법분별이란 18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만법(萬法)을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의 내포(內包) 외연(外延)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논의 방식을 말한다.
2) 장애유대( vara a-pratigh ta)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니는 색법의 상호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3) 경계유대(vi aya-pratigh ta)란 인식기능과 그 대상 사이의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4) 제1구는 물 속에서는 볼 수 있어도 육지에는 볼 수 없는 눈, 제2구는 육지에서는 볼 수 있어도 물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눈, 제3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눈, 제4구는 물과 육지 모두에서 볼 수 없는 눈.
5) 소연유대( lambana-pratigh ta)란 말하자면 심·심소와 대상간의 필연적 제약관계로서, 자신의 소연이 부재하면 장애되어 생기하지 않는다.
6) 5근과 심·심소는 경계에 의해 그 생기가 제약되지만(경계유대), 경계는 또한 심·심소에 대해 소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유대의 외연이 소연유대보다 넓다.
7) 여기서 비상응법은 열네 가지 불상응행법(본론 권제4 참조), 세 가지 무위법, 그리고 무표색을 말한다.
8) 구마라다(Kum ral ta).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童受)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제바(提婆)·용맹(龍孟) 즉 용수와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 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9) 즉 경부(經部) 조사(祖師) 구마라다는 앞의 3종의 유대를 유부에서처럼 각각 실재적 관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예컨대 청색에 대향(對向)하여 시의식이 생겨나려고 할 때, 이를테면 소리 따위가 이를 장애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이를 유대라 하고, 장애함이 없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무대라고 하였다. 이는 색과 무표색, 심과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당연한 이론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주 세친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바로 인정할 만한 것이다[此是所許]'라고 말한 것이다.
10) 무기(avy k ta)란 선·불선 어느 것으로도 언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는 다시 유부무기(有覆無記, niv tavy k ta)와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 tavyak ta)가 있다. 유부무기란 그 자체로서는 무기이지만 번뇌와 상응구기하는 무기이며, 무부무기란 번뇌와 상응하지 않으며, 성도(聖道)를 장애하지 않는 무기로서, 이숙생(異熟生)·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통과심(通果心) 따위를 말한다. 이를 오로지 무기라고 한 색·성을 제외한 8계로 분별해 보면, 이숙무기는 전세의 업이 초래한 심신의 과보로서 5근과 향·미·촉을 말하며, 위의무기는 행(行)·주(住)·좌(坐)·와(臥)와 같은 위의의 상태에서의 향·미·촉을 말하며, 공교무기는 여러 가지 기술을 행하는 상태에서의 향·미·촉을 말하며, 통과(혹은 변화)무기는 신통력에 의해 변화를 나타낼 때의 향·미·촉을 말한다.(『구사론기』 대정장41, p. 35-36)
11) 법계에는 무표색과 마흔여섯 가지 심소, 열네 가지 불상응법, 세 가지 무위 등 총 예순네 가지의 법이 포섭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의 경우, 그 자체가 선인 자성선(自性善,곧 無貪·無瞋·無癡·慚·愧)과, 자성선과 상응하는 제 심소의 선[相應善]과, 자성선과 함께 일어나는 불상응행의 선[等起善]과, 그리고 궁극의 선인 무위택멸의 승의선[勝義善]이 있다.(본론 권제13, p.624 참조.)
12) 여기서 계(繫,sa yukta)란 계속(繫屬)의 뜻으로, 욕계계라고 하면 그것은 욕계의 번뇌에 계박되어 욕계에 소속되어 머무르게 되는 법을 말한다.
13) 단식(段食,혹은 搏食)은 4식(食)의 하나. '단'은 분단(分段)의 뜻. 즉 분활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로서, 향·미·촉을 본질로 함. 따라서 이것은 욕계에만 존재하는데, 초정려 근분(近分)의 미지정(未至定)에 의해 욕계의 번뇌를 단진(斷盡)할 때 이를 떠나게 된다.(본론 권제10, p.487 참조.)
14) 선정 중에서 상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어 소의신에 경쾌 안적한 느낌[輕安觸]이 생겨났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이 세 가지는 그대로 따라 쫓아오지만[隨逐], 향·미는 선정 중에 부재하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15) 여기서 '의처'는 부진근(扶塵根)으로, 색·향·미·촉으로 이루어진 육단(肉團), 즉 눈에 보이는 코와 혀를 말하며, '근'은 공능 그 자체를 뜻하는 승의근(勝義根)을 말한다.
16) 부진근(즉 依處)은 승의근을 돕는[扶]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근이 없다면 그것을 돕는 부진근도 역시 없어야 한다는 뜻.
17)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 탯집에서 죽어야 할 아이는 비록 근이 소용없을지라도 6근이 생겨난다.
18) 여기서 수승한 업이란 5근 등을 획득할려고 하는 사업(思業)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반드시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
19) 음장(陰藏, ko agatavasti, 혹은 陰馬藏)은 여래의 남근으로, 말의 그것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32상의 하나. 즉 여래의 음장인 남근은 소의신을 누추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색계에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힐난.
20) 이상 논주 세친의 해석과 난문으로, 유부 비바사사가 말하듯이 근에 대한 애착이 있어 수승한 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마땅히 포태(胞胎) 속에서 죽을 자에게도 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근도 역시 그러해야 하겠지만, 색계에는 성애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남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비근과 설근 또한 마땅히 향과 미에 대한 애착을 떠났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1) 『중아함경』 권제39 제154경 『바라바장경(婆羅婆掌經)』(대정장1, p. 674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2, p. 409).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기를, 바사타여, 어느 때인가 이 세상은 다 무너진다. 이 세상이 무너질 때 만약 중생이 있으면 그는 황욱천(晃昱天,색계 제2선의 極光淨天)에 태어나는데, 그는 거기서 묘한 빛깔[色]과 생각[意]을 가지고서 일체의 지절(支節)과 온갖 근을 구족하고서."
22) 계경의 내용은 황욱천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근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뜻.
23) 여시설(如是說, eva tu var ayanti Vaibh ik )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 ika)의 여론(輿論)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24) 비바사사는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애탐(자발적 능동적 애탐)과 외적 경계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애탐(수동적 애탐)을 구별하여, 6근의 애탐은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생기의 원인으로 외적 경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근의 애탐은 외적 경계에 의해 유발된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외경이 없는 색계에는 남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25) 여기서 심(尋, vitarka)과 사(伺, vic ra)라고 하는 것은, 마음 즉 전5식과 제6식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대상을 추구[尋求·伺察]하게 하는 보다 거칠고[麤性] 세밀한[細性] 의식작용으로(본론 권제4, p.185 참조), 욕계와 색계 초정려에는 심·사의 작용이 있지만 중간정에서는 사만이, 색계 제2정려 이상부터는 심·사가 없다.
26) 법계 비상응법이란 열네 가지 불상응행과 3무위 및 무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에는 물론 심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심무사이며, 중간정에 있는 사(伺)는 심을 동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사'이므로 다른 사를 동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역시 무심무사이다.
27) 전5식을 보통 무분별(無分別, avikalpika,)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이 유심유사로서 심·사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유분별(有分別)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5식상응의 '심'은 바로 분별(사유작용)이기 때문에 5식을 무분별(불확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난문.
28) 여기서 5식은 심(尋)·사(伺)를 본질로 하는 자성분별(즉 감성적 지각)일 뿐이고, 그것은 혜(慧)를 본질로 하는 계탁분별(즉 추리 판단의 오성적 지각)과 제6식 상응의 염(念)을 본질로 하는 수념분별(즉 기억이나 재인식)에 의해 확실한 사유[有分別, savikalpa]가 된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경량부설에 따라 심·사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본론 권제4, p.185 참조.)
29) 의지(意地, mano-bh mi). 여기서 '지'는 소의(所依)의 뜻이므로 '의지'란 의(意)로서 소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뜻은 '제6의근을 소의로 삼아 상응하는'의 뜻.
30) 선정 중에서는 능히 대상을 재고 헤아릴[計度] 수가 없기 때문이다.
31) 유집수(up tta)란 집수(감각)의 의식작용을 갖는 대종(大種)과 조색(造色)을 말한다. 즉 전5근은 심·심소의 직접적인 의처(依處,심·심소의 근거 즉 소의처)가 되고, 성경(聲境)을 제외한 색 등의 4경은 근의 대상으로서 간접적인 의처가 되어 심·심소와 더불어 손해와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다('성'을 제외한 이유는 소리는 유집수나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 권제1, p.17 참조). 이를테면 심·심소가 우고(憂苦)를 일으켜 감손(減損)될 때 의처도 역시 감손되며, 심·심소가 희락(喜樂)을 일으켜 이익될 때 의처도 역시 이익된다. 반대로 의처가 만약 좋은 음식 등을 획득하여 이익될 때 심 등도 역시 이익되는 것이며, 나쁜 음식 등을 획득하여 감손되면 심 등도 역시 감손된다.
32) 즉 촉(觸)에는 견(堅)·습(濕)·난(煖)·동(動)을 자상(自相)으로 하는 4대종과, 매끄러운 성질[滑性]·거친 성질[澁性]·무거운 성질[重性]·가벼운 성질[輕性]·차가움[冷]·허기짐[飢]·목마름[渴] 등 일곱 가지 조색이 있다.(본론 권제1, p.18 참조.)
33) 각천(Buddhadeva, 佛陀提婆로 음역됨)은 설일체유부의 유명한 논사. 바사(婆娑)의 4대 평가(評家) 중의 일인. 그에 의하면 열 가지 색계는 4대종의 안포차별(安布差別)로서, 4대종을 떠나 별도의 실체(소조색)가 존재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권제127,대정장27, p. 661하)
34) 『중아함경』 권제7 『상적유경(象跡喩經)』(대정장1, p. 464하). 이 경에서는 10색계를 대종이라고 설하지 않고 오로지 견·습·난·동의 4상과 4대종만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대종은 오로지 이 네 가지에 국한된다는 뜻.
35) 『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대정장2, p. 91하). "眼是內入處, 四大所造淨色不可見有對……."(본론 권제1, p.14 참조.)
36) 『잡아함경』권제11 제273경(대정장1, p. 72하). 이는 각천(覺天)의 반증으로, 안근은 '견고성[堅, 즉 地]' 등의 4대종이 결합한 것으로서 안근의 살덩이를 분석하면 그것은 또한 '견고성' 등의 4대종일 따름이라는 뜻.
37) 즉 '견고성(堅性)' 따위는 안근(승의근) 중에는 없고 다만 안의 육단(부진근 즉 눈에 보이는 눈)에 있다는 뜻. 즉 이러한 부진근의 육단은 색·향·미·촉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안의 육단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38) 『대비바사론』 권제2(대정장27. p.8하)에서 각천(覺天)은 '온갖 심소의 본질은 바로 심이다'고 하여 심·심소 일체설을 주장하고 있다.
39) 『잡아함경』 권제21 제568경(대정장2, p. 150상중).
40) 유탐심(sa-r g di-citT>이란 말 그대로 '탐'을 지닌 마음이란 뜻으로, 이는 바로 '탐'과 '심'이 개별적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뜻. 이는 유부의 심·심소의 상응설은 기본 이론으로, 본론 권제4(p.190)에서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41) 여기서 '능(能)'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를 말하고, '소(所)'는 그렇게 되는 대상을 말 함.
42) 즉 안 등의 색근은 비록 4대 소조색이지만 구슬의 빛처럼 특수한 감관으로서의 기능이 있어 근(根)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쪼개지는 등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뜻.
43) 성계(聲界) 즉 소리는 다른 아홉 가지 유색계처럼 상속하고 속생(續生)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쪼게거나 쪼게어지거나 하는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44) 여기서 이숙생은 전생의 선악업이 초래하는 무기의 과보로서, 5색근과 색·향·미·촉의 4경, 7심계와 법계가 이숙생이다. 이숙생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소장양은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5색근과 5경이 그것이다.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는데, 7심계와 법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실사(有實事, dravyavaT>란 견실(堅實)을 본질로 하는 무위를 의미하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법계뿐이다. 그리고 한찰나의 마음만으로 낳아지는 것, 즉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일찰나인데, 의계·의식계와 법계가 이에 해당된다.
45) 안·이·비·설·신의 5근은 동류인·등류과로서 전후 상속하지만 전찰나의 동류인도, 후찰나의 등류과도 필경 이숙(선천적)·장양(후천적)으로 생기 증장하는 5근의 전후상속으로, 이 두 가지를 떠나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임.
46) 마치 소가 끄는 수레[牛所駕車]를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이숙인소생(異熟因所生)에서 '인소(因所)'를 생략하여 이숙생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47) 6촉처란 6근의 결과로서, 이것을 소조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결과조작[所造]의 원인이 되는 업에 따라 일시 그렇게 칭명한 것이다. 즉 5근은 그것의 원인인 이숙인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이숙생이다.
48) 즉 음식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진 상속신(소장양의 상속)은 이숙으로서 선천적으로 획득되어진 상속신을 마치 외성이 내성을 방호하듯이 지킨다는 뜻. 이를테면 소장양의 안근은 승의근과 부진근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있으면서 내적이고도 본질적인 이숙생의 승의근을 방호하게 된다.
49) 소리가 이숙생이라고 한다면 현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겠지만 발성자의 욕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멈추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님.
50) 이는 음성을 이숙과라고 주장하는 독자부(犢子部)와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주장(『대비바사론』 권제118, 한글대장경122, p. 411)이다. 즉 부처님은 과거 수행시대 추악어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러한 선업력에 의해 범음성을 획득하였다는 뜻. 여기서 범음성은 32상 중의 하나.
51) 과거의 선악업이 제1전, 그러한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이 제2전, 대종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제3전. 즉 소리는 직접적으로는 과거 선악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재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라는 뜻.
52) 여기서 그 밖의 고법지인과 구기하는 법이란, 무루 율의(律儀)의 색, 수·상·사 등의 상응법, 그러한 법을 획득하게 하는 득(得), 그리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상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p.161 참조.)
53) 이 게송은 득(得, pr pti)과 성취(成就, samanv gama)에 관한 6근· 6경· 6식의 관계를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득'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제법을 유정의 상속상에 획득하게 하는 원리이다. 아울러 성취란 이미 획득한 것을 상실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본론 권제4, p.119 이하에서 상론.)
54) 이러한 3생의 유정은 처음으로 입태할 때[羯邏藍]에는 안근이 없으며, 그 후 6처위(處位)에 이르면서 점차적으로 획득하는데, 그 때에는 이미 안식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4생 가운데 화생은 온갖 근을 단박에 획득[頓得]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55) 중유(中有)로서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색계의 안근을 획득하는데, 거기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56) 이는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본유(本有)의 경우로서, 이 때 안근은 처음부터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은 없으며, 또한 이러한 상태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초정려의 식을 빌려 일으키기 때문에(이를 借起識이라고 함) 이같이 분별한 것이다.
57) 위의 세 정려에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이미 안근이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지만, 안식은 그 때 비로소 획득된다.
58) 무색계에는 안근도, 안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의 범세에 태어날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59) 엄밀히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획득[獲]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였다면, 이 경우는 다만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성취(成就)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득(得,pr pti)에는 획득(獲,pr tilambha)과 성취(samanv gama)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본론 권제4, p.192 참조.)
60) 제1구는 안근을 획득하더라도 안식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2구는 안식을 획득하더라도 안근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3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는 경우, 제4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지 않는 경우.
61) 6식은 아집(aha k ra)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아(我)'로 가설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러한 '아'의 소의가 되는 것(親近)을 '내적인 것'이라 하고, 소연이 되는 것[疎遠]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
62) 즉 앞(본론 권제1, 주62)에서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을 의계라 하고 이것만이 마음의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63) 여기서 '자종(自宗)'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설일체유부의 종의를 말한다.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은 『대비바사론』 권제71(대정장27, p. 367중:한글대장경120, p. 484)에 '삼세각유십팔계상(三世各有十八界相)'에 근거한 것이다.
64) 즉 법계가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동분이 되면 일체법 즉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한다. 예컨대 어떤 성자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관하였을 경우, 그것은 삼세 일체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것과 구기(俱起)하는 다양한 심소와, 생(生) 등의 불상응행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의식자체를 포함한 그것들은 그 순간 동분이 되지 않지만, 다음 순간(제2찰나) 반성력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마침내 일체의 대상은 법동분이 되는 것이다.
65) 유식속불생법(구역 與識相應不生法, vij~ nasam yukta-)이란 식과 근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연이 결여되어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하며, 무식속불생법(구역 與識不相應不生法, avij~ nasam yukta-)이란 근만이 있고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함.
66) 의계 즉 마음은 이미 생겨난 이상 어떤 대상(소연)에 대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동분이며, 따라서 필경(畢竟) 불생법만이 피동분이 된다.
67) 향·미·촉은 감관과 직접 접촉하여야 알려지는 것[合中知]이므로 그 당사자만 알 뿐이지만, 색과 성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離中知]. 이처럼 향·미·촉은 공동의 대상이 아니지만 세간에서는 가설적인 개념에 의지하여,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향을 냄새맡고, 다 같이 이러한 미를 맛보며, 다 같이 이러한 촉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현종론』 권제3, 한글대장경200, p. 78)
68) 근·경·식 세 가지의 교섭이 원만하여 이른바 '동분'의 뜻을 각각 갖게 될 때 촉(觸)이 낳아지므로(三事和合觸), 그러한 촉을 '분'이라 이름한다는 뜻.
69) 그러한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함은, 말하자면 피동분과 동분은 동일하게 보는 것[同見]이며, 동등한 상[等相]이며, 동일한 처이며, 동일한 계이며, 서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相屬]이기 때문에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현종론』 권제3, 앞의 책)
70) 견소단과 수소단은 견도(見道 : 무루혜에 의한 4諦 관찰)와 수도(修道 : 선정을 통한 반복된 관찰)로 끊어지는 법이며, 비소단은 무위택멸처럼 끊어지지 않는 법을 말한다.(본론 권제19, p.862 ; 권제23, p.1055 이하에서 상론)
71) 88수면은 4제 각 행상(行相)에 미혹하여 생겨난 이지적 번뇌 즉 미리혹(迷理惑, 혹은 見惑)으로, 본론 권제19에서 상론된다. 구유법은 이러한 수면과 상응하는 심·심소와 구생하는 생(生) 등의 4상(相)을 말하며, 수행법이란 이러한 제법을 심상속 상에 획득하게 하는 득(得)을 말한다.
72) 여기서 이생성은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자. 즉 이러한 이생성과 결정코 악취(지옥·아귀·축생)의 생을 초래할 만한 신·어업은 성도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처럼 견소단이 되어야 한다는 난(難). 이는 바사(婆沙)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의 난이지만, 『구사론기』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
73) 즉 유루선이나 무부무기(無覆無記)와 같은 불염오법과 제6 의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 등 전5근으로부터 생겨난 전5식과,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유루의 색법 따위는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기 때문에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이생성이나 신·어업 또한 견소단이 아니라는 뜻. 뒤에서 상론하고 있다.
74) 신·어업은 형색(形色, 신체적 형태)과 어언(語言, 언어적 형태)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색법에 포섭된다.(본론 권제13 주13 참조.)
75) 이생성은 불염오성이기 때문에,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신·어업은 무소연성(無所緣性)이기 때문에 4제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견소단이 아니라 수소단이다.
76) 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소의신을 실유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 斷·常 두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권제19(p.867)이하에서 상론한다.
77) 즉 다섯 가지 염오견은 유루이면서 번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번뇌)이 낀 한밤(유루)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세간의 정견은 유루이지만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밤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유학의 정견은 무루지를 획득하였으나 번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구름이 낀 한 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무학의 정견은 더 이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78) 자성분별만을 본질로 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선혜(善慧)를 어떻게 세간의 정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뜻의 물음. 여기서 '결탁(決度, sa t ira a)'은 확인 판단의 뜻이다.
79) 유신견 등의 5견 이외 탐 등과 상응하는 혜나 의식상응의 혜를 제외한 그 밖의 혜, 안근을 제외한 이근(耳根) 등의 모든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의 혜,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혜 이외 그 밖의 법계소섭법(法界所攝法)은 심려 결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는 뜻.(『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3 참조)
80) 이하 앞에서 논의한 견(見)의 주체를 감관 즉 안근으로 볼 것인가, 의식 즉 안식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으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了別)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전자를 근견설(根見說), 후자를 식견설(識見說)이라고 하며, 유부에서는 근견설의 입장을 취한다.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 p. 61하)에서는 '견'의 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설(異說)을 전하고 있다. 안식이 색을 본다는 식견설 : 존자 법구(法救, Dharmatr ta)의 주장. 안식과 상응하는 의식작용으로서 이해·간택력인 혜(慧)가 본다는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 : 존자 묘음(妙音, Gho a)의 주장.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화합견설(和合見說) : 비유자(譬喩者)의 주장.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본다는 일안견설(一眼見說) : 독자부(犢子部)의 주장.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본다고 주장한다.(후술)
81) 여기서 관조( locana)란 근이 거울과 마찬가지로 외계대상을 비추어 받아드리는 작용을 말함.
82) 만약 '눈이 본다'고 한다면 그밖의 의식, 예컨대 이식(耳識) 등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동시에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뜻. 즉 유부에서는 두 가지의 의식이 동시에 생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보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의 식(識)이 의식의 영역을 차지하게 될 때에도 '본다'고 하는 작용은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근견설은 자설(自說)을 위배하게 된다. 즉 보는 주체가 눈이라면 그것은 의식활동에 관계없이 동시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항상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83) 예컨대 모든 톱이 항상 자르는 작용을 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목수와 결합하여 자기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톱만이 자르는 작용을 행하듯이, 모든 눈은 항상 보는 것이 아니며, 안식과 공동하여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는 눈[同分眼]만이 보는 작용을 행한다는 뜻.
84) 눈은 반드시 대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이중지(離中知) 즉 비지경(非至境)의 감관이기 때문에 합중지(合中知)의 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으며,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든[有對] 지니지 않든[無對] 관계없다. 따라서 눈이 벽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유대성으로 인한 불접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 수정이나 유리 운모 물 등에 의해 방해받아도 그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근이 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대상을 볼 수 없다고 한 근견가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 이는 식견가의 재난(再難)이다.
85) 『잡아함경』 권제9(대정장2, p. 64상). "眼是門, 以見色故. 耳鼻舌身意是門, 耳識法故." 여기서 계경의 의미는 눈은 '본다'고 하는 사실의 구체적 근거[見所依]가 되기 때문에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見者]는 눈을 근거로 하고 있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86) 소리를 내게 하는 주체[能依]는 사람이지만 그 매개[所依]가 평상이기 때문에 '평상의 소리'라고 하듯이, 또는 나무를 자르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그 근거가 도끼이기 때문에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고 하듯이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는 경문은 '인식[了別]'이라는 사실의 근거[所依]가 되는 의근에 대해 인식주체인 의식의 주체적 작용[能依業]을 설정한 것이라는 뜻.
87) 참으로 애호하고 즐길만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 판단(즉 요별)된 것으로, 그것은 마땅히 식의 작용이라는 경증.
88) 앞의 『잡아함경』에서 눈은 바로 문(門)이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다만 '견'의 방편[門, dvara]일 뿐이라는 뜻. 즉 색은 눈(안근)이 본 것이 아니라 안식이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본 것으로, 방편 자체가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89) 유부와 같은 범주론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法]는 오직 한 가지 본질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보는 것 즉 견자(見者)가 식이라면 요별자를 반드시 따로이 설정해야만 한다. 즉 '견'이 마음의 감성적 작용이고 요별이 오성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의 주체 또한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부의 경우 안근의 본질은 관조이고, 안식의 본질은 요별로서, 각기 개별적 존재인 것이다.
90) 유학의 정견(正見) 따위는 미지의 사실을 추구(推求) 추탁(推度)함이 있기에 '견'이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4제법을 간택하는 공능을 갖기도 한다. 여기서 '일부'라고 한 것은, 무학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다만 혜일 뿐 '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91) 보광(普光)에 의하는 한 이 같은 물음은 근견가로부터 지적된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본질적 작용을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에 대한 식견이사(識見異師)의 반증으로(그러나 法寶에 의하면 이는 독자부의 난이다), 그들에 의하면 안근은 보는 것[見者]이며, 안식은 보는 작용[見用]이다. 즉 보는 것은 눈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는 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안식이며, 그것은 바로 요별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편의상 작자와 작용을 차별하였지만, 초기불교이래 작자의 실재성은 부정되므로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바로 안식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절의 취지이다.(『구사론기』 권제2 대정장41, p. 50상)
92) 『대비바사론』 권제73(대정장27, p. 380상 : 한글대장경120, p. 539). "謂世共說 , 眼所受境名爲可見 ."
93) 즉 '본다'고 하는 구체적 사실은 식견가처럼 관조하고 요별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분석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보는 것[見者]'은 어디까지나 안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근은 본다고만 할 뿐 인식(즉 요별)한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이란 오로지 식이 현전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식의 현전은 감관[根]과 대상[境]에 의한 부대적 상황일 뿐이므로 '인식[요별]' 역시 '본다[見 즉 관조]'는 사실의 부대적 작용일 뿐이다. 마치 태양이 뜨면 저절로 낮이 되는 것처럼 감관과 대상 사이에 '본다'고 하는 사실이 성립하면 인식 즉 요별은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뜻. 이는 근견가의 절충적 해석으로 이해된다.
94) 이상의 근견가(根見家)와 식견가(識見家)의 논의에 대해 경부 즉 경량부(Sautrantika)는 양자 파기의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경량부에 의하면 대상[色境]이 생기하는 순간과 눈[眼根]이 작용하는 순간, 의식[眼識]이 일어나는 순간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고 있어 동시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세 가지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작용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작용을 놓고서 인식성립의 본질적 요소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마치 실재하지 않아 잡히지도 않는 허공을 쥐고 맞붙어 싸우는 것[虛空]과 같다. 즉 인식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된 감관의 찰나, 외계대상의 찰나는 이미 과거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으며,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대상이 보여지고 있다고 하는 결과로서의 인식 그 자체[法] 뿐이다. 따라서 경량부에서는 인식을 유부에서처럼 동일 순간에 공존하는 감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즉 의식에 부과된 형상이 원인이 되고, 다음 순간 상속의 결과로서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결과로서 드러나는 인식이라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관적 계기나 객관적 계기로 분석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의 습관적 설정일 뿐이며, 인식 그 자체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 근견과 식견, 그리고 이에 대한 경량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권오민,『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서울 경서원,1994) 제2부 제5장 「아비달마 인식론의 중도적 지양」을 참조할 것.
95) 이하 앞의 '견론(見論)'에 부수된 방론(傍論)으로, 본 단의 주제인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의 문제를 비롯하여, 근과 경의 접촉[至] 불접촉 및 양적인 관계, 극미의 문제, 6식과 그 소의의 시간적 관계, 근이 소의가 되는 이유와 그에 따른 6식의 명칭, 그리고 근·경·식의 3계(界) 9지(地) 상에서의 관계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96) 왜 이 같은 논의가 필요한 것인가? 두 눈 가운데 한 눈을 막거나, 혹은 하나의 눈이 손상되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한 눈의 '견'의 공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눈으로도 역시 능히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두 눈이 손상되지 않아 함께 뜨게 되면, 두 개의 안근이 동시에 색을 보게 되는데, '하나의 눈이 색을 본다'고 하는 뜻은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하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별 해석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5)
97) 『발지론』 권제1(한글대장경176, p. 10), "한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부정식(不淨識 : 명료하지 않은 인식)이 일어나며 두 눈을 뜨고 볼 때 정식(淨識 : 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 개의 눈이 색을 본다." 이에 따라 『대비바사론』 (권제13초)을 비롯한 모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제(諸) 대논사가 모두 말하고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98) 양쪽 눈을 뜨고 한쪽의 눈등에 손가락을 갖다대어 반쯤 뜨게되면 하나의 달이 둘로 보이기도 하지만, 만약 한쪽을 막고 그렇게 할 경우 두 개의 달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
99) 즉 안식의 소의가 두 가지라면, 능의인 안식도 반분되어 역시 두 가지가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동일찰나에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생겨나야 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식은 색처럼 방처(方處, 부피)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비바사론』 권제13(대정장27, p. 61하)에 의하면 두 개의 눈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고, 작용 역시 서로 다르지만 그 작용이 빠르게 전이하기 때문에 보는 근거는 달라도 하나의 인식을 일으키는 것으로, 마치 몸의 두 팔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어떤 사물과 접촉할 때 동시에 감촉하여 하나의 신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100) 이는 승론(勝論, Vai e ika)학파의 지경설(至境說)을 논파한 것이다. 즉 승론에서는 안근은 화(火)를 본질로 하여 멀리 빛을 펼쳐 대상에 이르고, 이근의 경우 소리가 공중을 날아와 귀에 들어온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럴 경우 수정자(修定者)가 천안·천이를 수생(修生)하더라도 천계의 그러한 경계는 너무나 멀고 피차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뜻.
101) 이는 논주 세친의 답이다. 즉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을 끌어당기지만 모든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처럼 안근 등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102) 무간(無間, 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으로, 그것이 바로 '직접 접촉한다[至]'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러한 유색근을 조성하는 원자, 즉 극미 상호간의 접촉 불접촉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인데, 이하 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03) 결론적으로 말해 정통유부인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극미의 직접적인 상호접촉을 부정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극미가 결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부분적 결합 아니면 전체적 결합이다. 하나의 극미는 통상 사방상하 6개의 극미에 둘러쌓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하는데, 그럴 경우 극미는 6부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극미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것[無方分]이기 때문에, 그 같은 부분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여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하여 7개의 극미가 동일공간에서 전체적[遍體]으로 접촉한다면 결국 구체적인 물질도 하나의 극미 크기 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각 극미의 본질 자체가 뒤섞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하고, 그 실재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104)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어떠한 간격도 없게 될 때 소리가 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제 극미가 혼연의 일체가 되어버려[遍體觸] 그 사이에 간격이 없다면 도리어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뜻.
105) 여기서는 제 극미간의 견인력을 풍계에서 구하고 있다. 그런데 앞(권제1)에서 풍계는 운동의 성질[動相]과 물체를 동요하게 하는 작용[長用]을 갖고있다고 하였고, 물체를 인섭(引攝)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작용[攝用] 내지 물체를 능히 보지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用]은 각각 수대(水大)와 지대(地大)의 것이었다.
106) 겁이 허물어질 때는 이 세계가 파괴되는 괴겁(壞劫)의 시기를 말하고, 겁이 이루어지는 때는 이 세계가 성립하는 성겁(成劫)의 시기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분별세품」 권제12(p.553 이하)에서 상론한다.
107) 이는 유부 이사(異師)의 주장이다. 여기서 화합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의 색. 즉 제 극미 상호간에는 접촉하지 않지만 그러한 극미의 집적에 의해 조성된 분할할 수 있는 현상의 구체적인 색은 상호 접촉한다는 설. 이 같은 견해는 바사(婆沙)에는 보이지 않으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정장31, p. 76상)에서는 유부정설로 설하고 있다. "迦濕彌羅國毘婆沙師言 ; 非諸極微有相合義, 無方分故 ……但諸聚色有相合理, 有方分故."
108) 『대비바사론』 권제132 (대정장27, p. 184상, 한글대장경123, p. 145).
109) 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 극미]'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 화합물]'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110) 이하 상기 물음에 대해 4구분별로 답하고 있는 바사(婆沙)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제1구로서, 화합물(이러한 접촉된 것)이 흩어져 극미(접촉되지 않은 것)로 환원될 때가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이 생겨나는 경우이다.
111) 향유진(또는 隙遊塵)은 1극미의 7의 7승으로, 이를테면 문틈[隙]으로 들어온 광선에 비쳐 겨우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티끌을 말하는데(본론 권제12, p.550 주5 참조), 이러한 미세한 색취[細聚]는 다시 그러한 미세한 티끌을 낳기도 하고, 혹은 더욱더 미세한 것을 낳기도 하여 전후 차별은 있을지라도 다 같이 미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을 것을 낳는 것으로 분별한 것이다.
112) 세우(Vasumitra), 화수밀(和須蜜) 또는 바소밀다라(婆蘇蜜多羅)로도 음사됨. 십 수명의 세우가 전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집대성한 바사(婆沙)의 4대평자 중 일인. 여기서의 그의 주장은, 모든 극미는 순간적으로 출현하여 소멸(찰나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미가 출현하여 접촉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두 찰나에 걸친 것으로, 극미의 접촉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뜻.
113) 대덕(Bhadanta). 이는 위대한 덕행이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특정의 개인에 대한 존칭의 보통명사인지 또는 고유명사인지는 불명. 『대비바사론』에는 대덕의 설이 지금 여기서의 설(권제132, 한글대장경123, p. 145)을 포함하여 116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데, 목촌태현(木村泰賢)은 그를 각천(覺天, Buddhadeva)으로, 궁본정존(宮本正尊)은 법구(法救, Dharmatr ta)로 보고 있다. 지금 여기서의 설은 접촉이란 다만 그 중간에 일 극미도 들어갈 여지도 없는 절대적 근접[無間]을 개념적으로 가설(假說)한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114) 이는 논주 세친의 평석이다. 즉 그는 '접촉'이란 다만 개념상의 설정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덕의 설을 적극 수용하여 실재론에 근거한 앞의 제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는 한 제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화합색의 상호접촉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그것을 조성한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후술) 그리고 만약 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사이에는 마땅히 간격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극미들 사이에 간격이 있어 가운데가 비었다면 5근·5경의 유색근은 공간을 점유하여 타(他)를 장애하며, 따라서 불가침투성(sapratigh tva, 礙性 혹은 有對)라고 하는 유부종의에 위배되고 만다. 나아가 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無間]으로, 그것들 사이에 다른 어떤 하나의 극미도 들어갈 수 없는 극점(極點)이라 하여 불가침투성을 고수한다면 극미보다 작은 극점을 설정함으로 해서 극미는 더 이상 극미가 아닌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바로 유부의 '촉'의 실재성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115) 화합색이 변애로 정의된다면 그 조성원자인 극미도 변애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하듯이, 화합색의 상촉(相觸)이 인정된다면 그것을 조성한 극미 또한 상촉하여야 한다는 난(難).
116) 이는 이상의 접촉 불접촉에 관한 논주 세친의 총평이다. 유부의 경우 극미 무방분(無方分)설을 취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유방분설을 취한다.(『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p. 160-168 참조) 그럴 경우 유방분이라면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극소의 색인 극미에도 방분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일 방분이 서로 접촉하면 다른 방분은 접촉하지 않으므로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고 하든 하지 않는다고 하든 문제될 것이 없다. 즉 이미 유방분이라고 하였으므로 접촉함으로써 극미가 분석될 수 있다는 논란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극미가 무방분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문제되지 않으니, 원래 방분이 없다고 하는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즉 無間觸)고 설해도 거기에 방분을 갖는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주 세친의 뜻은 근·경 화합이라는 인식의 문제에 있어 접촉 불접촉의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17) 본 단의 주제는 인식[見]의 과정상에서 근과 경의 양적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예컨대 눈이 큰 산을 볼 경우, 눈의 극미와 같은 크기[等量]의 대상을 각각으로 취하여 빠르게 전이함으로서 전체로서의 큰 산을 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자재하는 작용이 있어 대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취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118) 구름이 일으키는 큰 소리란 천둥소리를 말함. 범문에는 '구름의 소리(megha abda)'로 되어 있다.
119) '전설'은 곧 논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 의하면 이는 서방의 고덕(高德)이 전하는 의가(醫家)의 설로서, 혀 가운데 설근극미가 없는 지극히 작은 한 지점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사혈(死穴,즉 末摩, marman)이라는 것이다.
120) 즉 유부에 의하면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동시작용[同分]하지만, 신근의 경우 신근과 그 대상이 되는 각각의 극미에 간극(間隙)이 있어 동시에 신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동시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눈의 극미는 하나만 작용하여도 전체의 극미가 동시에 작용하지만, 신체의 경우 손끝에 느낌이 있다해서 발끝에도 동일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신체 어느 한 극미가 손상되어도 전체의 극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는 신근의 극미 역시 동시에 작용한다고 하였다[身根遍發識說]. 그래서 논주 세친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열지옥에서 신근 전체가 동분의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고, 결국 신체는 전체로서의 통일을 유지하지 못하여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는 비바사사의 논파를 빌려 논설하였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이라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앞에서 설한 극미배열[安布差別]에 관한 문제로서, '처(處)'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로서는 제극미가 실제적으로 접촉 배열되든, 떨어져 배열되든 무방한 일인 것이다.
121) 즉 1극미는 5식의 소의·연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다수의 극미가 취집하여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可見]이 된다. 다만 1극미는 혜안(慧眼)에 의해 알려질 뿐이다.
122) 6식신이 무간에 멸한 것이 의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의 6식이 의근이기 때문에 의식은 오로지 과거 의근을 소의로 삼을 뿐이다.
123) 여기서는 4구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제1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 구생의 안근은 안식의 소의성이지만 그 자체 심심소가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제2구는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면서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 즉 과거로 멸해버린 심소는 다음 찰나의 그것에 등무간연이 되지만 소의성은 되지 않는다. 제3구는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동시에 등무간연도 되는 것. 과거인 의근은 안식의 소의성이 되면서 다음 찰나의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제4구는 안식의 소의성도 되지 않으면서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 것. 무위나 색 등의 5경, 불상응행법은 소의성이 아니며(다만 소연성일 뿐), 또한 심법도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다.
124) 북소리는 손과 북이 합하여 생겨나지만 북은 소리의 뛰어난 소의이고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손소리'가 아닌 북소리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보리의 싹은 보리씨앗과 땅 수분 온도 등의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만 그 주요원인에 따라 보리싹이라고 이름한다는 뜻.
125) 이 단에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3계(界)·9지(地) 상에서의 소의신·근·경·식 네 가지의 관계를 분별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면 욕계에는 18계 전부가 있지만, 색계 초선에 이르면 향·미와 비식·설식이 없으며, 제2선 이상 제4선에서는 앞의 네 가지 이외 안·이·신 식이 없으며, 다시 무색계에 이르면 앞의 15계가 부재하고 오로지 의·법·의식의 3계 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하지(下地)에 있더라도 선정지(智)나 천안·천이통에 의해 상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상지에서도 하지의 인식이 가능하다. 그럴 때 바로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126)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눈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7) 욕계의 눈으로써 색계의 천안을 얻어 색계의 색을 보는 경우.
128) 색과 안식이 안근과 등지라는 것은,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하지라는 것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선의 색을 보는 경우이다. 이 때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고,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129) 하지의 안근은 거친 색[麤色]을 보는데 익숙하여 상지의 미세한 색[細色]에 대해서는 '견(見)'의 공능이 없으며, 또한 하지의 안근은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상지는 자신의 수승한 안근을 갖으며, 하지에 대해 자신의 안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식에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97)
130) 등지는 욕계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상지는 제2정려의 천안을 획득하고 초정려의 안식을 빌려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이 때 색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기 때문에 색은 식의 상지임)이며, 하지는 초정려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요별하는 경우이다.
131) 왜냐 하면 대개 '분(分 :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향·미에 대한 두 가지의 식(즉 비식과 설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비근과 설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4,한글대장경200, p. 98)
132) 제2정려 이상에서 태어나 초정려의 식신을 빌려 상지의 촉경을 느낄 경우, 식신은 신근과 촉경보다 하지임.
133) 소의신이 초선에 태어나 초정려에 들어 초선의 법경을 관할 때는 네 가지는 모두 동일한 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소의신이 욕계에 있으면서 초선에 들어 욕계의 법경을 관할 때, 제1념(念)은 소의신도 의근도 법경도 욕계에 존재하지만 의식만은 초선에 존재하며, 제2념 이후에는 소의신과 법경은 욕계에, 의근과 의식은 초선에 존재한다.
134)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가 설한 것이란 『발지론』(권제14,한글대장경176, p. 324)과 『대비바사론』(권제142, 한글대장경123, p. 374)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전통적으로 22근을 설정함에 있어 무소연의 색법을 먼저 설하고, 그 후에 의근이나 낙(樂)·희(喜) 등 유소연의 심·심소법을 설하고 있다.
135) 뒤의 세 가지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지근(已知根)·구지근(具知根)의 3무루근으로서, 무루지의 본질이다. 즉 첫 번째는 견도위의 무루지이고, 두 번째는 수도위의 무루지, 세 번째는 소작이판(所作已辦) 즉 무학위의 무루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무루근은 의(意)·희(喜)·낙(樂)·사(捨)·신(信) 등의 5근을 본질로 하여, 이 중 의근은 법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라고 한 것이며, 나아가 뒤에서 그 일부가 의식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를 다른 여러 근과 함께 22근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p.111 이하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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