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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천은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1961년에 졸업하여 현재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C식품회사의 실험실장으로 있는 당년 서른 세
살의 청년이다. 그는 내 친구다.
나는 오늘 오전 내 사무실 - 주로 중고등 학생들의
참고서를 만들고 있는 P출판사 - 의 편집실에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로 오늘이 바로
자기 귀 빠진 날이라는 것, 귀 빠진 날이기 때문에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 그럼 어떡하느냐? 한 잔
빨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오늘 퇴근하면 곧장
영등포 자기 공장으로 왕림해주십사는 것 따위를
전화로 수선스레 일러왔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의 공장이 있는 영등포에 와 있다.
나는 버스를 내리자 영등포 거리를 약 5분쯤 걸어
그의 공장에 도착했다. 그의 공장에는 이 공장이
분실기업이 아니라는 것을 시위하듯 엄청나게
크고 튼튼한 철문이 정문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철문 옆에 붙은 작은 쪽문으로 들어가 수위
실로 다가갔다. 수위실에는 세 명의 사나이들이
있었는데 두 명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한 명은
바둑 훈수를 두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수위
실 창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바둑 훈수를
두던 사나이가 의자를 떠나 내게로 다가왔다. 그
는 창문을 열고 내가 혹시 '외판 책장사'나 아닌가
하는 불쾌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오?"
"사람 좀 찾아왔오."
"누굴 찾아왔오."
"김병천이 찾아왔오."
"벌써 퇴근했을껄?"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 아직 퇴근 안 했을껄?"
사나이가 내게 시선을 준 채 문득 수위실의 전
화기를 끌어당겼다.
"아, 여기 정문인데 실험실 좀 대줘요. 실험
실이오? 아, 실장님이십니까? 나 정문에 박이
올시다. 여기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네?
네네, 알겠습니다."
사나이는 수화기를 놓고 여전히 퉁명스레 내게
말했다.
"들어가 보슈."
"어디로?"
"저기 저 건물이오."
나는 사나이가 턱으로 저기라고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수위실을 떠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구매 매점으로 들어섰는지, 김병천은 나
와는 반대편 문으로 흰 가운을 입은 여직원
두 명과 잡담을 하며 매점으로 들어섰다. 그
는 나를 맞아 나와 악수를 한 뒤 나를 끌고
홀의 안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김병천이
먼저 말했다.
"코주부가 온다고 했는데."
"코주부가?"
"너한테 전화를 한 뒤 다시 국세청으로 전화
를 했어. 짜식 처음엔 떨떠름해 하더니 네가
온다니까 자기도 오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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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주부란 박재민의 별명이다.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을 1961년에 졸업한 뒤 군대를 다녀오고
좋은 직장을 다 놓치고 지금은 공무원이 되어
국세청에 근무하는, 나와 병천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뭘 먹을래?"
"커피."
병천이 가스 라이터로 탁자를 딱딱 두들겼다.
소녀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기 커피 둘."
소녀가 돌아갔다.
"토요일인데 오후에도 공장이 돌고 있군."
"우리 공장엔 토요일이 없어. 하루 3교대로
24시간 돌고 있네."
"직공이 꽤 많겠군."
"팔백 여명 되지."
"코주부는 언제 올 건가?"
"4시까지 온다구 했으니까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야."
커피가 왔다. 우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매점을 나왔다.
김병천은 나를 자기 실험실로 안내했다.
나는 요란스런 실험 기구들을 둘러보며
그에게 많은 질문을 했고, 그는 내 질문에
퍽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설명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
었다. 나는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
즉 1956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어려운
화학지식을 갖고 있었다고는 믿지 않았
다.
나는 그가,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에 질투 비슷한 배반감을 느꼈
다. 그는 분명 나보다는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지식은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퍽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나도
과연 그에 못지 않은 구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가?
내 지식은 아무 데서도 어떤 기회가 주
어지더라도 표가 나지 않는 지식이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척 했지만
실은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가지고 있
는 그런 모호한 지식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훨씬 더 환영받는
시대다. 우리는 곧 실험실을 나왔다.
다음으로 김병천이 나를 안내한 곳은
이 공장의 제일 작업장이었다. 나는
처음 이 작업장에 사람이 한 명도 없
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사람을 발견
했다.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엄청나게 큰 바퀴를 가진 모터 뒤쪽에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좀 어두
운 곳이었다. 만일 그가 머리를 긁지
않았다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면 나는 그를 기계의 한 부속품
이라고 생각할 뻔 했었다. 나는 그 외
에도 여러 사람들을 이곳저곳에서 발
견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에게서 이상한 혐오감을 느꼈다.
특히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작업
장 밖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비치고
한가롭게 뭉게구름이 멀리 떠가고
울긋불긋한 빨래들이 널린 공장 사택
들, 날씬한 다리를 가진 회사 여사무원
들, 차돌이 박힌 화단과 네트가 쳐진
배구 코트 따위를 바라볼 때 더욱 심했
다. 그 곳 사람들은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 조용하면서도 활발하게 시끄러우
면서도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업장은 그렇지 못했다. 이곳에는
공기 대신 쇳가루가, 햇빛 대신 소음이,
사람 대신 기계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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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작업장과 제삼 작업장도 어둡고
복잡하고 시끄럽기는 제일 작업장과
마찬가지였다. 나와 김병천은 세 개의
작업장을 다 둘러 본 뒤 아직 시간이
20분쯤 남았기에 마지막으로 상품을
포장하는 포장실을 구경하기로 했다.
포장실은 창문이 많이 달려 있어서
대단히 밝고 명랑해 보였다. 그곳에
약 이 백여 명의 젊은 여직공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노끈으로 능숙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포장 솜씨를 김병천의 안내로 어슬렁
어슬렁 뒷전에서 구경했다. 김병천은
이 방에 도착한 이래 웬일인지 즐거움
을 감추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포장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미스 박의 엉덩이를, 미스 최의 목덜
미를, 미스 강의 볼 따위를 손으로 쿡
찌르거나 딱 때리며 마치 자기 동생들
처럼 거침없이 장난질을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녀들이 즐거워서 이런
작업을 한다고 믿어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히 감성적이고 터무니없는 오해였음
알았다. 나는 그녀들의 재빠른 손만 보았
지 그녀들의 얼굴은 보지 않았던 것이
었다. 리얼리티는 그녀들의 손에 있지
않고 피로와 권태로 누렇게 응고된 그녀
들의 계란색 얼굴에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녀들의
얼굴은 대단히 젊은, 그래서 연애나 데이
트를 하기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은
그런 얼굴들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이
단조롭고 반복적인 포장 작업으로 소액
의 생활비를 버는 일종의 노동하는 동물
에 불과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이 나를 어이없이 슬프게 했다.
김병천이 어느새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나갈까?"
우리는 포장실을 나와 공장 구내를 걸었다.
매점 앞 배구코트에는 세 명 여직공과 네
명의 남자 직공들이 큰 소리로 건강하게
웃으며, 배구를 하고 있었다. 김병천이
문득 배구 코트 쪽을 바라본 뒤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어떤가 저 친구들의 표정이?"
"누구?"
"배구하는 저들의 표정을 보게. 저 친구
들이 즐거워하는 꼴을 보면 공연히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어."
"화가 치밀어?"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자넨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자네, 우리 공장 분위기 어땠는지
알겠군."
"좋던데, 시설도 좋고 환경도 좋고."
"그게 바로 낚싯밥이라는 걸세."
"낚싯밥?"
"나는 이런 공장에서 십 여년 동안
굴러먹은 덕으로 공장의 운영방침,
직공들의 취업태도, 경영주의 생리
등을 바삭하게 알고 있네. 그런데
그런 걸 바삭하게 알면 알수록 나는
이런 공장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어. 왠줄 아나?"
"몰라."
"여긴 한 마디로 수용소 같은
곳이야. 정문에 식품 공장이라는
간판이 붙었기에 망정이지, 여기
서 하는 매일매일의 일과는 수용
소 일과와 조금도 다를 게 없지."
"엄살이 심한데."
"엄살이 아니야."
병천은 화가 난 듯 큰 소리로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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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라구, 우린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곧장 자기 작업장으
로 가지. 헌데 우리 작업장은 어제도 내가
앉았던 의자고 오늘도 내가 앉을 의자고
내일도 내가 와서 앉을 의사일세. 그리고
그곳에서 하는 일도 매일 똑같은 일이야.
자네도 방금 작업장을 둘러봤으니 그 안
에서 직공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봐뒀
겠군. 그 친구들 늘 한 자리에 서서 기계
를 감시하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란
말일세. 그런데 이런 따분한 직장에 경영
주라는 작자는 보란 듯이 저 알량한 배구
코트와 꽃밭을 꾸며 놨네. 왠줄 아나?
꽃밭이나 구경하고, 배구공이나 치면서
수용소 같은 공장을 낙원으로 생각하라
는 수작이야." 나는 이 친구 이야기가
갑자기 어렵게 발전되는 것을 깨달았다.
"생산 공장이란 게 깨놓고 말해 이윤이라
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무자비한 집단에 불과하네.
여기에선 이윤이 모든 것에 앞서며, 총명
한 노동자보다는 불평 없는 노동자를,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재능
있는 직원보다는 요령 좋은 직원을,
정직보다는 침묵을, 고집보다는 타협을
그리고 건설적인 간섭보다는 우둔한
무관심 따위를 더 환영하고 있네. 난
처음 이 공장에 취직한 뒤 두 달 동안
은 완전히 등신 취급을 받았었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고,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너무
많은 사람에게 간섭을 했기 때문일
세.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처사는 이
공장에만 있는 일이 아니야. 어느
회사, 어느 관공서, 어느 직장에서나
여기와 똑같은 못된 풍조들이 유행
하고 있더군. 말하자면 세상이 이제
총명한 사람 대신 범속한 사람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단 말일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친구를
전혀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쳐다보았
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요즘
경영의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모든
고용주들이 자기 고용인들을 기묘하
게 얽어매는 것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렇다. 고용주들은 임금 인상이라는
미끼로, 보너스라는 사탕과자로,
감원(感員)이라는 채찍으로 고용인
들을 꼼짝 못하게 얽어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얽어 매인 상태의 고용인
들은 해방 이후 가장 안정된 봉급
생활을 가장 흡족하게 영위하고 있
었다.
국세청의 코주부는 오기로 된 약속
시간에서 약 30분 늦게 공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공장을 나왔다.
뜨거운 해를 등에 지고 기다란 공장
담장을 따라 영등포 중심가로 느릿
느릿 걸어갔다. 이곳 저곳 공장에서
공장 직공인 듯 싶은 많은 여자들이
재잘재잘 울긋불긋 우리 앞뒤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히
건강한 음성으로 커다랗게 서로의
이름을, 웃음을, 그리고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김병천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서까래가
굵고 처마가 야트막한 어느 한식집이었
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 김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어서 옵쇼. 헤헤헤."
검정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머리
에 포마드 기름을 바른 보이가 대청에
서 구를 듯이 달려 내려와 우리를 맞
았다. 우리는 보이의 안내로 어느 한
적한 구석방에 안내되었다. 그 방에는
네모 반듯한 방석들과 나뭇곁 무늬의
호마이카 술상과 재떨이와 성냥갑,
그리고 춘자, 미숙, 두옥이라는 이름
의 여자 세 명을 주문했다. 보이가
방을 나가고 잠시 후에 여자들이
도착했다. 여자들은 모두 치렁치렁한
한복들을 입고 있었다.
우리들은 술을 마셨다. 나와 짝이 된
여자는 미숙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녀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고, 예쁘
지도 밉지도 않은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모든 여자들은 모든 남자들
에게 내 것이 아니면 모두 예뻐 보이
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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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술잔치는 밤 11시쯤에 끝났
다. 그러나 술집 밖에서 어물어물 하는
사이에 나는 재수 좋게 털이 많은 미숙
이라는 내 여자와 단둘이 남았다. 나는
그녀에게 얼마면 하룻밤 살 수 있는가
를 물었다. 그녀는, 잘 아실 거라면서
자기는 요즘 매월 6,000원 짜리 계를
물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계돈
반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우리가 12시 5분전에 찾아든 여관방은
'여기는 여관방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여관방 다운 여관방이었다. 우리는 곧
옷을 벗었다. 나는 전구를 켜두자고 했
고 여자는 불을 끄자고 했다. 우리는
'불을 켜두자와 불을 끄자.' 라는 의견
다툼으로 약 5분 동안 실랑이를 했다.
결국 나는 왜 불을 켜두고 싶어하는가의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했다. 나는 불을
켰을 경우 잘하면 그녀가 물고 있는 계돈
의 삼분의 이를 책임질지도 모른다고
그녀에게 암시를 주었다. 드디어 그녀는
자기 고집을 꺾었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순간에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보는 여자, 전에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여자,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그리고 오늘밤만 지나면 두 번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녀와 살을 맞대
려 한다. 아마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녀는 아마 오늘밤만 지나면
내일은 서울 시내를 산뜻한 양장으로
새침하게 걷고 있는 어느 젊은 여자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그녀가
백화점 여점원으로 보일 것이고, 어느
미장원의 미용사로도 보일 것이고, 갓
시집간 어느 가정의 행복한 유부녀로도
보일 것이다. 나는 그때쯤에는 그녀의
다리는커녕 손도 한 번 못 만져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전부
가 내 앞에 있다. 나는 갑자기 욕망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욕망은 그녀의 몸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녀가 내일이
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되리라는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녀는 내가 예상한대로 그곳에 대단히
풍성한 털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또
그 행위를 내가 책임지기로 한 계돈 이
상으로 열심히 즐기는 듯 했다. 그녀가
그 행위를 열심히 하자 나는 약간 어리
둥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나는
책을 통해 성적 쾌락에 관한 많은
지식이 있었는데 그런 책을 통해 성회
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나 자신의
빈약한 성 지식에 대해 부끄러움과 열
등의식을 느꼈다. 내가 책에서 보아 온
성교들은 깜짝 놀랄 만큼 기술화된 것
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기술들을
삼분의 일도 터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내 마누라 이외의 다른 여자를
상대할 때 심한 두려움과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혹시 나와 상대하는
그 여자가 나 이전에 대단히 기교
좋은 어느 사내로부터 놀랄 만한
기술을 배우고 있지 않나 몹시
두려웠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그런 기술을 터득하고 있다면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기교를
그녀가 얼마나 경멸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웠다.
그런데 바로 '미숙'이라는 이
여자가 나를 드디어 여지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나를 노예처럼 명령했다. 나는
그녀의 명령에 노예처럼 복종
했다. 그런데 그녀의 명령과
내 복종은 두어 발짝쯤 이가
맞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여지없이 부끄러워졌고 그
부끄러운 감정이 내게서
어느덧 욕망을 싹 빼앗아
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계돈까지 물어
가며 부끄럽기 위해 여관방
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곧 옷을 입고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개 같은 계집이었다. 재수
없는 하루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