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부. 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효자동 이발사 억울한 최후...그곳 빼앗은 차지철 '섬뜩한 최후'
청와대 정문을 나와 동쪽으로 가면 삼청·팔판·소격·화·사간·송현·안국동이 나온다. 서쪽에는 청운·옥인·신교·궁정·효자·창성·통의·체부·적선·누상·통인·누하·필운·무악·사직동이 있다.
▣ 청와대 서쪽
※ 기자가 서촌에서 근무하는 시민과 인터뷰한 내용
▷ 서촌 일대는 일요일에는 비교적 한가했다. 그런데 청와대 개방후 일요일에 점심 식사하러 나왔더니 북적북적하다.
▷ 상층 양반문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북촌에 비해 서촌은 열린 공간이었다. 그래서 시인 이상·윤동주, 화가 이쾌대·이여성 형제 같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특정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조선시대 이래 해방공간까지 이곳에 살던 이들을 생각하며 걸으면 색다른 느낌일 것이다. 곳곳에 우리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 걷기 좋은 코스 하나 추천 요청에..
⇒ 옥인길~수성동계곡~인왕산 둘레길~더숲초소카페(주차 공간이 부족하다)
▷ 청와대 앞길약 500m 차 없는 거리 운영시범 운영: 5월 28일부터 6월26일까지 주말과 공휴일 12회.
▷ 인왕산로 차 없는 거리를 시범 운영: 호랑이 동상부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약 1.5㎞ 양방향. 5월 22일, 29일 8시~12시 2회.
▷ 실패하지 않을 동네 밥집들을 추천 요청했더니..
⇒ 곰탕 :한옥식당 ‘고래’
⇒ 오리로스·닭백숙·장어탕 : 토속촌 옆 (옛날 인심이 살아있는)‘순이네’
⇒ 이탈리아 음식 : ‘더솔키친’
⇒ 메밀국수 : ‘메밀꽃 필 무렵’
⇒ 튀니지 음식 : ‘꾸스꾸시’
● 궁정동(宮井洞) → 칠궁과 무궁화동산
궁정동일대 : 가운데 길로 따라 올라가면 자하문이다. 왼쪽이 무궁화동산, 오른쪽이 칠궁이다. 사진 가운데 서 있는 키큰 나무는 회화나무인데 연세 사백살이 훨씬 넘었다.
▷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봉안한) 육상궁의 ‘궁’과 (효자동과 궁정동 사이에 있으며 겨울에도 더운 김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는) 온정동(溫井洞)의 ‘정’을 더한 이름이다.
▷ 청와대 서쪽 칠궁 근처로 궁정동에는 나이 많은 나무들이 많다. 칠궁 안엔 약 310년된 주목과 250년된 느티나무가 있고, 바 깥에는 456년된 중국 굴피나무 등 보호수 세 그루가 있다.
▷ 영빈관 서쪽에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옛 중앙정보부 시절 부속 건물인 안가들을 모두 부수고 만든) 무궁화동산이 있다.
▷ 중앙정보부 안가 :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는 이발소(조그만 이층 건물)는 안판다고 버티는것을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빼앗고, 옆집인 삼표연탄집은 철강사업 허가를 주고 상납받는 등 10채 이상을 빼앗아 지은 것이다.
▷ 무궁화동산 안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척화파의 대표였던) 김상헌 집터가 있다. 인조 때, 청이 명을 치기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가 한양을 떠나며 읊은 시조는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효자동(孝子洞) → 전차역이 있던 곳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운행했던 서울 전차 노선도
▷ 청와대 들어가는 길 입구에 있는 분수대 근처에 전차역인 효자역이 있었다.
▷ 백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스카이웨이는 1.21사태 이후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길이다.
● 창성동(昌成洞) → 국민대학교, 진명여고가 있던 동네
▷ 청와대 사랑채 남쪽, 경복궁 서쪽 담장을 끼고 있는 동네다.
▷ 이 동네에 있던 국민대학교는 1971년에 정릉으로 이사 갔고, 진명여고는 1989년에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갔다.
▷ 인근에 왕궁에 어류·고기·소금·땔감을 대주는 관청인 사재감(司宰監址)이 있었다.
▷ 지금의 자하문로 일부는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흐르던 자리다. 냇물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금천(禁川 대궐 안 냇물)이 됐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에 서금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금천 서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통인동(通仁洞) → 통인시장
▷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관청을 출입하는 이들이 많이 살았다.
▷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사저가 통인동에 있었으니 여기서 태어난 세종은 서촌 출신!
▷ 동네의 중심은 (1941년 서촌 주변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공설시장에서 출발한) 통인시장으로 200m 길이의 시장 좌우에 80여개 가게가 늘어서있다.
▷ 통인시장은 선거 때나 명절 때가 되면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으러 가는 단골장소다. 2014년에는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와 성 김 주한 미국대사가 다녀갔다. 무한도전 유재석과 광희, 스타킹 강호동이 먹방을 펼치기도 했다. 기름떡볶이집은 시장 명소가 됐다.
▷ 통인시장 입구에 있는 효자아파트는 청와대 직원들과 연예인들이 살던 고급 주택이었다.
● 통의동(通義洞) → 대통령인수위의 단골 캠프, 금융감독원연수원
▷ 대림미술관 뒤에 (가장 크고 수령이 오래되어 1962년에 천연기념물 4호가 된) 백송 한 그루가 있어서 한때 백송동이란 행정동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태풍에 넘어지면서 둥치만 남긴 채 고사했고 천연기념물 자격도 해지됐다.
▷ 이 동네 있던 창의궁은 1910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사택은 광복 뒤에 귀속재산(적산)으로 접수됐고 땅을 나눠 주택들이 들어섰다.
▷ 이곳에 있는 금융감독원연수원은 삼청동에 있는 금융연수원과 함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많이 사용하는 곳이다. 청와대와 정부기관들이 주변에 몰려있고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연수원을 나서면 바로 먹자골목이다.
● 청운동(淸雲洞) → 겸재와 정철의 출생지 & 최규식 동상
겸재의 작품 인왕제색도
▷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 청풍계의 ‘청’과 백운동의 ‘운’을 더한 이름이다.
⇒ 청풍계는 인왕산 아래 청운초등학교 후문 일대 계곡을 말하는데 대부분 주택가가 됐다.
⇒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서로 맞닿은 지점으로 ‘흰 구름이 아름답다’고 붙은 이름인데 현재 행정구역상 명칭은 아니다.
▷ 조선 후기 제일 화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은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세워진 뒤 청운동으로 이전한) 경복고등학교 부근에서 태어났다. 겸재는 그 뒤 인왕산 아래 군인아파트 부근으로 이사해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 청운초등학교 터에서 송강 정철이 태어났다.
▷ 경기상업고등학교도 동숭동에 있다가 1926년에 이사 왔다.
▷ 자하문에서 청와대로 내려가는 길, 윤동주 문학관 맞은편에 (1968년 1·21일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을 때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숨진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동상이 서있다. 당시 함께 숨진 정종수 경사 기념비도 그 곁에 있다.
● 신교동(新橋洞) →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있다.
▷ 1913년, 서대문구 천연동에 맹아부 설립 → 1931년, 현재 자리로 이전 → 1959년, 서울농아학교와 서울맹학교로 분리
● 옥인동(玉仁洞) → 수성동계곡과 기린교
1751년경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인왕산과 백악산에 걸쳐 있는 장동(壯洞) 일대의 경승지 8곳을 화폭에 담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가운데 수성동(水聲洞)을 묘사한 그림에 기린교가 보인다.
▷ 옥인동 수성동 계곡에는 안평대군 집터와 그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기린교가 있다.
⇒ "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960년대 옥인시범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2007년 대통령 경호실의 역사문화유산 연구 동아리가 청와대 부근의 문화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 암반의 벽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 너비와 두께가 각각 약 35㎝, 길이는 약 3.7m인 장대석(長臺石) 2개를 붙여 만든 것으로 총 너비가 약 70㎝인 좁은 다리이다. 다리의 좌우에 난간이 박혀 있고, 흙과 풀로 덮여 있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두산백과)
▷ 진짜 기린교가 발견되며 수성동 계곡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일대 전체가 서울시 기념물이 됐다.
●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 배화여중, 배화여대
▷ 연산군 때 지은 누각의 윗동네라 해서 누상동, 아랫동네라 해서 누하동이다.
▷ 배화여중과 배화여대는 누상동, 배화여대 운동장과 대강당 주소지는 누상동이다.
▷ 누상동에는 조선시대에 각자한 청와동(靑瓦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인왕산 아래 있던 인경궁 푸른 기와가 보였다고 한다.
● 체부동(體付洞) → 서울미래유산 성결교회와 금천교시장
▷ 체부동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쪽으로 가는 길 초입 왼쪽 동네다.
▷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있는 (골목)..
⇒ 골목 속에 서울미래유산인 (1931년에 완공된) 성결교회가 있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벽돌 쌓기 방식을 볼 수 있다. 2014년 중국 자본에 넘어갈 뻔했는데 서울시가 매입해 ‘생활문화지원센터’로 용도를 바꿨다. 교회의 한옥 별채 ‘금오재’도 있다.
⇒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경복궁역 네거리에 있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진 금천교에서 이름을 따온) 금천교시장이고 아기자기한 음식점들이 늘어서있고 철물점도 있는데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 중 하나로 청춘 핫 플레이스가 됐다.
▷ "체부동 금천교 시장에도 1970년대부터 무쇠뚜껑을 놓고 (통인시장처럼) 기름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6.25가 터지기 전, 주인장 김정연 할머니는 개성에서 잠시 서울에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북에 두고 온 딸 셋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015년에 돌아가셨다. 전세금 7000만원을 비롯한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다."
● 필운동(弼雲洞) → 필운대와 인경궁터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최고 봄놀이 장소는 역시 인왕산의 '필운대(弼雲臺)'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필운대'는 인왕산 남쪽 아래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직단 우측 뒤쪽 나지막한 산자락을 이른다. 지금은 배화여자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필운대'라는 이름의 내력 - "중종 32년(1537)에 명나라 사신 일행이 경복궁에 왔다. 왕은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백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의 이름을 바꾸고 싶다면서 사신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임금의 청에 응한 사신은 백악 이름을 북쪽에 있다고 해서 '공극(拱極)'이라 지었고, 인왕을 '필운(弼雲)'이라 짓고 부연하기를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 했다."(오마이뉴스)
▷ 동네 이름은 ‘필운대’에서 따왔다.
▷ 두레엘리시안 아파트 맞은편 건물 공사 때 땅을 파보니 조선시대 배수로 시설과 건물터가 나왔다. 규모로 보아 인경궁으로 추측한다.
⇒ "임진왜란 뒤 광해군은 경기도 교하로 천도하려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인경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누르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경희궁보다 컸던 인경궁은 결국 완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정확한 규모와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경궁의 남쪽 경계가 경덕궁일 것으로 추정한다."
▷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고는 미국 선교사 캠벨이 세웠으며,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에 있다가 1916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 사직동(社稷洞)
▷ (이조시대 토지 신 사(社)와 곡식 신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인) 사직단이 있는 동네다.
▷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 사직단 주변에는 소나무 또는 잣나무처럼 늘 푸른 나무를 심어 가꾸었는데 정문 앞에 서있는 늙은 향나무는 본래 사직단 안에 있었으나 길을 내며 담 밖이 됐다.
▷ 단군성전도 있다. 본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가 헐어내 현재 위치에 다시 지었다. 성전 안에는 정부 표준 단군 영정과 단군상이 있다.
▷ 경희궁 뒤에는 이름난 활터인 황학정(黃鶴亭)이 있다.
■ 인왕산 바위들
※ 인왕산은 사대문 안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인다.
⇒ 주산인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 초에는 서봉·서산 이라고도 불렸다.
⇒ 중종때는 중국 사신이 중종의 요청으로 필운산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 인왕산 남쪽 끝 누상동에서 무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1968년 인왕산에 길을 내며 폭파해서 없앴다고 한다.
▷ 삿갓바위는 인왕산 남쪽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데 있다.
▷ 정상 못미처 동쪽에는 매부리바위가 있다. 하늘로 향해 뻗은 매의 머리모양인데, 틈에 자라는 소나무가 부리처럼 보인다.
▷ 남쪽 능선 정상 부근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아슬바위라고도 한다.
▷ 무악동에는 선바위가 있다. 우뚝 선 모양, 또는 승려가 장삼 입은 형상이라고 붙은 이름이다. 기도처로 소문났다. 조선 초 도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도성 성곽 안에 둘 지, 밖에 둘 지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무학은 성내파고 정도전은 성외파였다. “들이면 불교가 흥하고 내보내면 유교가 흥한다”는 정도전의 말을 이성계가 들어줬다고 한다.
1940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조선총독부에서 치마바위를 쪼아 새긴 글자들.(국립중앙박물관)
▷ 정상 아래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바위가 치마바위로 인왕산을 상징한다.
⇒ 치마바위 유래 :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경회루에서 인왕산 기슭에 있는 폐비 신씨 집을 바라보곤 했다. 그걸 알게 된 폐비가 이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거나 흔들며 ‘여보 나 여기 있어’라고 했단다."
⇒ 치마바위의 수모 : 1940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도성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대형 글자를 새겨 넣었다. 당시 1만 1454원을 들여서 7개월 동안 작업했다. 광복 뒤인 1950년 서울시가 82만원을 들여 이를 삭제했지만 매끈하던 바위에는 역사의 어지러운 흉터가 남았다.
東亞靑年團結 동아청년단결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朝鮮總督 南次郞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大日本靑年團大會 대일본청년단대회
▣ 청와대 동쪽
● 삼청동(三淸洞) → 총리공관과 금융연수원
삼청동 총리공관 일대. 저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 삼청동 이름은 삼청전(三淸殿)에서 왔다는 설,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인심 도 맑다(人淸)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도성 안에서 백악의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산의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남산의 청학동이 그 다음’이라는 기록도 있다.
▷ 삼청동에는 조선초부터 화약고가 있었다. 안전 문제 때문에 민가가 드문 한적한 산 속에 지었을 것이다.
▷ 대한제국 말 고종은 지금의 총리공관 일대 땅을 이윤용(이완용의 배다른 형)에게 하사했다. (그 옆 땅 주인은 친일파 송병준이었다.) → 친일파 민규식이 여기서 살았고,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도 쓰였다. → 정부 수립 뒤 잠시 국회의장 공관으로 썼다. → 1961년 5월 당시 내각수반인 송요찬이 집무하면서부터 총리 공관이 됐다.
▷ 금융연수원 안에 (고종때 지은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 공장인 기기국의 소속 건물) 번사창이 있다. → 일제강점기 때에 세균실험실 → 미군정 때는 중앙방역연구소 → 정부 수립 뒤에는 사회복지연수원→ 1970년 이후에는 한국금융연수원 소유가 됐다.
● 팔판동(八判洞) - 조선조 8명의 판서가 살았다
▷ 팔판동은 조선시대 판서 8명이 살았다는 ‘팔판서골’에서 유래했다.
● 화동(花洞) → 정독도서관
▷ 정독도서관 서쪽에 있는 동네로 조선시대 왕궁의 꽃을 기르고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 사육신 중의 하나인 성삼문의 집터이기도 하다.
▷ 정독도서관 자리 역사 : 대한제국,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서재필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가산을 몰수 → 이들의 집터 위에 한성중학교 건축 → 박제순 집터도 학교 터로 편입 → 한성중학교는 한성고등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 → 1945년 광복후 경기고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6년 강남으로 이전 → 그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들어섰다
⇒ 정독도서관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운영하며, 1976년 1월 경기고 부지를 인수하여 1년간의 공사후 1977년 개관했다.
○ 소격동(昭格洞) → 절반을 차지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도교의 제사인 초제를 주관하던 소격서가 있었다.
▷ 소격동은 화동과 함께 서울 (종로의 윗동네 중에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말하는) 북촌의 중심으로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져 사대부와 왕궁 및 관청 관계자들이 많이 살았다. 1980년에 전통가옥 보존지구로 지정됐는데 10년 뒤 해제했다.
▷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는 (왕의 4대손까지인) 종친, 외척, 왕궁 관계자들이 주로 출입했다.
▷ 건춘문 맞은편에 역대 왕실관련 각종 사무를 보던 종친부가 있다 → 일제는 종친부 건물 일부를 수도육군병원으로 썼다 → 이 자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서울대의대 제2부속병원, 제36육군병원, 수도육군병원, 국군수도통합병원, 육군보안사령부, 국군서울지구병원, 테니스장으로 썼다 → 2013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됐고, 종친부 건물도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 현재 남아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건물은 서울대 의학부 건물과 함께 이땅에서 가장 오래된 의료 건물 가운데 하나다.
▷ 종친부 옆에는 왕의 기록과 친필 등을 보관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창덕궁에 있다가 옮겨왔는데 지금은 서울대학교 안에 있다.
▷ 지금 소격동의 절반 정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 광화문의 수난 : 일제가 1918년 조선총독부(1918년 8월 25일~1929년 10월 1일 완성)를 지을 때 지금의 소격동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겼다 → 1968년, 다시 본래 자리로 옮겼다.
● 사간동(司諫洞) → 동십자각
▷ 건춘문의 길 건너편 사간원이 있던 동네다.
▷ 경복궁을 지으며 동서쪽 모퉁이에 쌍둥이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만들었다. 도로를 내며 동십자각은 섬이 되었고. 서십자각은 일제 때 전차 길을 내며 없어졌다.
● 송현동(松峴洞) → 이건희미술관 부지와 덕성여중
▷ 소나무가 많은 고개 ‘솔고개’ 또는 ‘솔재’에서 온 이름이다.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보완하려 보호하던 소나무 숲이다.
▷ 대부분은 이건희미술관(옛 미 대사관 직원 숙소)이 들어설 자리와 덕성여중이 차지하고 있어 주택은 몇 채 안 된다.
● 안국동(安國洞)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에서 북촌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 있으며, 덕성여고와 공예박물관(옛 풍문여고)이 있는 동네다.
▷ 골목 안쪽에 청국장 잘하는 별궁식당이 있는데 꼬릿한 냄새를 잡아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출처] 「청와대 백과사전」 .. 중앙일보 기획 기사 정리|작성자 One Charles 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