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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 10장 26-33절
설교제목 : 두려움을 가능성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17년 마지막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여러 일들이 스쳐갑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비롯한 촛불집회는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권력과 언론이 얼마나 대중들의 눈을 가리워 시민을 우민으로 만들었고, 시민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폭민으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돈과 권력이 진실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성실과 정직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함을 우리 마음 속에 새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3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바다 속에 은폐되었던 세월호가 인양되어 실종된 시신을 수색하였고, 여전히 유골을 찾지 못한 채 아쉽게 그들을 떠나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원칙이 무시되고 실리에 급한 모습이 남아있고, 인간이 돈벌이의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한 비인간화된 현상은 여전히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화해야할 과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대형교회의 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여전히 편법을 써가며 교회를 사유화하고, 종교권력을 유지하려는 사태 앞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외쳤지만 이미 교회 스스로 자정능력을 잃어 버린지 오래되었음을 확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의 심겨진 교회들이 세상의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내년 한해 정부는 3만불 시대를 내다보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의 양극화된 이 사회구조에서 더 필요한 것은 양적인 팽창과 축적이 아닙니다. 개개인이 삶을 곡진하게 살아내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는 것인 듯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한해의 삶을 돌아보면 그동안 오랜 시간 공부했던 것을 마무리하느라 후련했지만 이런 배움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해야하는 여러 과제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해의 시작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어릴 때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기다려지고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 들면서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듯 합니다. 무언가 삶의 안정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부재하고, 예전만 못한 몸의 상태가 이따금씩 밀려오는 불안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두려움은 무엇인가요? 예전에 저의 아이가 어렸을 때 물어봤는데 지진이 나서 쓰나미가 밀려와서 도망가는 꿈이라고 얘기한 적 있습니다. 지각이 변동하는 꿈은 의식을 재조정하려는 시도합니다. 무의식의 움직임을 통하여 의식발달을 촉진시키려는 것을 반증하는 꿈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두려움 자체가 삶이고, 아직 살지 않은 내일, 미래의 불확실함은 언제나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줍니다.
두려움에 말을 걸다
오늘 본문은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을 다루고 있습니다. 봉독한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주해야할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두려움과 대면해야할 핍박과 고통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그들’ 입니다(26),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에서 그들은 제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요? 10장 5절 말씀부터 읽어보면 기쁜 소식을 전할 때 거절하고 환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을 공회에 넘기고 채찍질 하는 사람들, 총독들과 임금들입니다. 자신들을 대적하여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형제와 부모, 때로는 자녀들입니다. 이런 두려움의 대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은 제자들만의 두려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불현 듯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의 정체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분류해보면 나를 거절하고 환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인간은 관계에 있어서 거절당하고 거부당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새롭게 만날 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어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할 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어서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실패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되면 뒷걸음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의 평가와 시선을 신경쓰면서 어떤 일과 관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달란트 비유(마 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돈을 잃을까봐, 손해볼까봐,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의 무대에서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험을 하지 않는 인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며 어쩌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빗나간 삶의 전형입니다. 빗나간 삶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으로 우리를 보냈지만 아름다운 날들을 허비하고 제대로 된 삶을 그저 낭비한 것입니다. 모험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한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새로운 삶의 시간 앞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 한결같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내 삶을 주저하게 하고, 자신감없게 만들고, 잘 안될 것 같고, 거절당할 것 같고,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 두려움에 말을 거셨으면 합니다.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 번째 부류는 힘을 가진 핍박자들입니다. 권력자들이 자신을 가두고 모든 것을 빼앗고, 몸에 채찍질하여 고통하며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박해의 시대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병에 대한 두려움, 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화두가 건강입니다.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챙겨먹고, 오래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60세를 살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평균 85세를 살아야하는 시대에 건강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더욱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합니다. 오죽하면 건강염려증이라는 병을 앓기까지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가족이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족들이 적이 되어 자신을 죽게 만드는 초대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안전한 울타리와 보호가 되는 가족을 떠나서 살아야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모든 것과 단절해야하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독방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노후에 준비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조사한 결과가 있었습니다. 노후자금, 건강, 혼자서 하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노인의 가장 큰 문제는 고독의 문제라고 합니다. 혼자서 당당히 식당가서 밥 먹고 놀 수 있는 있을 때 노후에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고독사가 많아진 이유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삶을 위축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생은 궁극적으로 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과 죽음과 외로움이라는 인생의 두려움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처방전
주님은 두려움에 대한 세가지 처방을 내립니다.
첫째는 나에게는 약속된 내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말씀합니다. “... 덮어둔 것이라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가요? 때가 되면 다 드러나고 알려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 모든 것은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때에 예수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 보증된 내일의 약속입니다. 핍박의 시대에 믿음의 선배들은 이 믿음 하나로 온갖 두려움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약속된 내일을 보증 삼았기에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드러날 때를 먼 미래로 투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실패와 거절, 외로움,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지만 불안정하고 불편한 오늘 속에 여전히 희망과 가능성을 첨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두려움을 넘어서 오늘과 다가올 내일을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처방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28절) 몸과 영혼을 멸하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의미입니다. 제 아무리 권력자들이 몸을 해치고, 죽인다 할지라도 영혼은 죽일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영혼을 손상시킬 수 없으니 두려워말아야 합니다. 몸과 영혼을 멸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나보다 크게 나의 정신을 조정하는 분을 우리는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이후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을 것임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유로 가는 길에서 죽음은 최고의 축제다”
나는 비록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은 자유를 향한 최고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히틀러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유혹의 시대 한복판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돈에 매혹 당해 두려움을 모르게 팽창되어 살아갑니다. 없는 것으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잘못 전도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병입니다. 무엇 때문에 두렵고,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으신가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주님 뿐임을 늘 명심했으면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고백하며 주신 삶의 길을 힘있게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주님의 처방은 아버지는 나를 아시고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29-3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게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 얼마나 감동이 되는 구절입니까! 당시 참새는 시장에서 팔리는 살아있는 양식 중에서 가장 값 싼 종류였습니다. 한 냥, 예전 성경은 앗사리온은 가장 작은 동전단위로 한 앗사리온으로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참새조차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작은 것조차도 살피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귀히 여기지 않겠느냐!, 너희는 귀한 존재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는 것은 너를 잘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아시고 귀히 여기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때 삶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배후에 이 세계를 움직여가는 주님이 계심을 우리가 알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얼음 세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얼음세포는 떨켜와 함께 나무들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늦가을이 되면 나무는 잎으로 가는 수분과 양분을 차단하기 위해 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점점 잎은 시들고, 바람이 불면 땅으로 떨어집니다. 내려놓게 하는 장치입니다. 일종의 나무의 구조조정입니다. 스스로 생명과 자람을 위하여 내려놓고 버리기하는 것입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그것 뿐 아니라 나무는 세포와 세포 사이의 간극에 다른 세포보다 수 천배 큰 얼음 주머니를 만듭니다. 그곳에 얼음을 품어서 겨울에 다른 세포들이 얼어 죽지 않게 단열과 보온 역할을 합니다. 봄이 오면 얼음세포의 얼음을 녹여서 가지로 잎으로 뿌리로 수분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순을 틔웁니다. 이 얼음세포는 혹독한 추위, 아무 것도 기댈 수 없는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자연의 처방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안에 인생을 견디게 하고, 살 수 있게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얼음세포가 우리 안에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인간 안에 내재된 가능성입니다. 이 얼음세포와 같은 삶의 에너지를 주목할 때 삶의 내일을 값지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내일이 되면 2018년이 됩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얼음세포가 있음을 알고 삶의 두려움이 아닌 기대함으로 우리의 내일을 열어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