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헉헉) 나 오늘, 소매치기가 어떤 아줌마 가방 터는 것 봤는데…"
중학생 딸애는 새 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수선을 떤다. 그도 그럴 것이 딸애와 난 지난여름, 세일 물건을 사기 위해 평촌에서 광명시까지 운행하는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40대 중반의 남성이 집요하게 밀쳐대기에 무더위만큼이나 짜증스러움을 느꼈다.
아뿔싸! 하차하며 내리는 찰나에 내 가방은 예리한 칼로 찢겨져 함지박 만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머~어머! 이걸 어째" 두발만 동동 구르고 서 있는데, 그 소매치기는 구름다리 위 계단에서 우리 모녀를 힐끔 힐끔 돌아보며 걷고 있었다. 순간, 딸애는 소매치기를 향해 돌진했고, "야야! 위험해" 내 고함소리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후들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즉시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허사였다.
축 쳐진 어깨로 파출소를 나오며 '고놈의 소매치기들~ 나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들고도 아직도 그 짓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내게 딸애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이제는 잊을 듯도 했었던 소매치기와 나의 악연이 떠올랐다.
내가 첫 번째로 소매치기를 당한 것은 외국인 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봉급봉투를 개봉도 하지 않은 체 퇴근길 시내버스에 올랐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는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동생의 학비가 그리고 잡다한 생활용품들이 스쳐가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여왕이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하차하려는 순간 이리저리 밀치는 서너 명의 남자들이 신경 쓰였지만, 복잡한 대중교통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하차했다.
벼르고 벼르던 고깃국을 동생에게 먹이고 싶어 예정에 없던 쇠고기 반 근을 사고 계산하려는데, 핸드백 지퍼가 열려있고 봉급 봉투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근근히 살아가는 자취생에게 있어 봉급은 생명 줄이었기에 그 때 내가 겪은 고통은 기억하고 싶지가 않을 만큼 비참했다.
7-80년대,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그런대로 대우가 괜찮은 편이었기에 외출용으로 순모100% 정장에 유명메이커 구두, 핸드백을 장만하며 외모에 제법 신경 쓰고 있었다. 2번째 소매치기는 63빌딩 국제회의실 행사장에서 후배의 꽃꽂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가방이 예리한 칼로 찢겨지며, 주민등록증과 의료보험카드며 잡다한 서류들… 특히 전화번호 수첩이 든 장 지갑이 없어졌다. 신고 즉시, 60명이나 된다는 청원 경찰의 눈이 번득였지만 허사였다. 자꾸만 누가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아 마음까지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차비 500원을 구걸하다시피 빌려서 집으로 향하는 발길은 맷돌을 매단 듯 천만 근의 무게다. 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것만 같아 혼자 사는 아파트엔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반년 동안이나 후배의 자취방에서 빈대 붙어살아야 했을 만큼 그, 후유증은 컸다.
그후 서너 달쯤 되었나보다. 소매치기(안창 따기)의 후유증에서 벗어 난 듯 싶었을 때였다. 제2의 명동이라 부를 만큼 사람이 걸려 걷기조차 힘든 영등포 시장 앞 '신천지 약국' 앞에서 노상강도를 만났다.
20대 중반 가량의 청년이 비틀거리는 척 하며 핸드백을 낚아챘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핸드백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한 명이 머리채를 잡고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이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번갯불이 번쩍하며 정신조차 알딸딸 몽롱해 졌다. 목을 향한 예리한 금속성이 차갑도록 섬뜩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힐끔 쳐다만 볼뿐, 어느 누구도 참견조차 하지 않았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나오던 길이라 내 손엔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다. 주변에 있던 교통순시원에게 사정을 호소했지만, "나는 교통 단속 나왔지 강도 잡으러 나온 게 아니라"며 애써 외면했다.
경찰서가 주변에 있다고 하기에 신고하러 가는데 강도들은 "따라오면 죽이겠다"는 듯한 살기 어린 눈빛을 내게 보냈다. 온 몸에 왕 소름이 돋았다. 목숨이 두려워 체념할 수밖엔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가슴으로 육교를 오르려는 순간, 순찰차가 보였다. "아저씨! 저~ 지금 강도가...... 저기, 저기~ 가고 있어요" 내 얼굴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산발에 가깝게 헝클어졌고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아뿔싸! 경찰관은 "아가씨가 잡아와야지. 내가 운전 중인데…"
기가 막히고, 또 억장이 무너지도록 너무 억울했다. 국록을 먹는 자의 입에서 나올 얘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마이크 출동'이란 라디오 프로에 제보, 방송된 적이 있다.
그 후, 일년쯤 지났나보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동생의 생일이라서 버스를 타고 가락 동에서 내렸다. 퇴근이 늦어 밤 11시쯤 되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며 10대 후반쯤 되는 강도 떼의 공격을 받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서너 사람이 서 있었지만, 모두가 장님이요 청각장애자인양 묵묵부답이었다.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쌩쌩~' 차들이 질주하는 차도로 뛰어 들었다. 빵빵대는 커가란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 재치 있는 버스 운전기사가 앞문을 열어 주었다. 위기를 모면한 후 새벽 1시쯤,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온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내게 파출소에서 만난 한 경찰은 내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더니 "왜 아직까지 미혼이냐"며 기분 나쁘도록 묘한 웃음을 흘린다.
"내 경험으로 보면 아주머니 같은 사람은 강도가 잘 따르는 유형이니 귀중품은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게 방법이라"고 충언까지 한다. 그 후, 늘 허술한 청바지에 운동화. 티셔츠가 내 고정 복장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었다.
외형적 탈바꿈이 있은 후, 아무리 거금을 소유했을 지라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겉모양으로 내면까지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외형 때문에 무수히 불친절과 함께 무시도 당했었다. 하지만, 소매치기나 노상강도로부터 안전했으니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허름하게 옷을 입고 다니게 된 내 변천사를 듣던 딸애는 "엄마! 그래도 또, 당했잖아. 이젠 내가 옛 엄마의 모습을 찾아 줄게"하면서 배시시 웃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남루한 옷차림의 내게 소매치가 또 따라 붙다니…. 경제가 어렵다더니 요즘 소매치기들도 어지간히 배고픈가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