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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書寫 재료와 용구
청운 추천 0 조회 47 09.08.03 15: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書寫 재료와 용구

1. 종이

종이는 화약, 지남철, 목판 인쇄와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 중의 하나로서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문화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현재까지 문자가 기록되어 전하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살펴볼 때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龜甲과 獸骨, 청동, 석재, 木版, 竹片, 비단 등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문자가 기록되어 전하는 자료는 없으나 짐승의 가죽이나 나뭇잎 등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문자를 기록하는 재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甲骨, 청동, 석재, 簡牘 등의 書寫 재료는 기록하거나 휴대하고 보관하기가 불편한 단점이 있다. 따라서 부피가 적고 가벼워 보관하거나 휴대하기에 쉬울 뿐만 아니라 글씨를 쓰기에도 매우 적합한 재료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비단과 같은 견직물의 사용으로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비단은 글씨를 쓰고 휴대하기에 간편하지만 값이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하여 사용할 수 없었다. 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성숙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은 나날이 증가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욕망과 과학 정신은 쓰기 쉽고 보관하거나 휴대하기도 편리할 뿐 아니라 경제적인 서사 재료인 종이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전통적인 설에 의하면 종이는 東漢시대의 蔡倫이 발명하였다고 전한다.『後漢書․蔡倫傳』,『東觀漢記』,『輿服志』 등의 문헌에는 蔡倫이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문헌의 내용은 모두 비슷하여 東漢의 元興 원년(서기 105) 蔡倫이 종이를 만드는 비법을 和帝에게 상소하여 종이를 만들게 됨에 따라 종이가 세상에 처음으로 전하여 졌으며 이 때를 종이가 발명된 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유물과 고대의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실제로 종이가 사용된 것은 秦나라 시대 이전부터로 밝혀지고 있다. 고대 문헌 가운데 蔡倫 이전에 종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기록은『三輔故事』로 西漢의 武帝시대인 太始 4년(서기전 93)의 일을 “衛太子大鼻, 武帝病, 太子入省, 江充曰 ‘上惡大鼻 當持紙蔽其鼻而入.’”(衛나라의 태자는 코가 매우 컸다. 武帝가 병을 얻자 태자가 문병하러 입성하니 江充이 ‘武帝는 큰 코를 싫어하니 종이로 코를 가리고 입성하시오’라 하였다.)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문장 가운데에 ‘紙’자가 처음 나타나며 당시에 이미 종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이가 蔡倫의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여 蔡倫의 업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蔡倫이 비록 최초의 종이 발명자는 아니지만 제지 기술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後漢書』 ‘蔡倫傳’에는 蔡倫의 업적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蔡倫의 제지법을 기초로 하여 東漢말년에 左伯이라는 제지 기술자가 매우 정교하고 얇은 종이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左伯紙’ 라 불렀다고 전하며 그후에도 孔丹이라는 사람이 宣紙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문헌에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張懷瓘의『書斷』, 弔旗의『三輔決錄』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와 같은 기록을 살펴보면 蔡倫의 업적은 재료의 개발과 제지 방법을 혁신시킴으로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漢나라 시대의 후기에 종이는 簡牘과 함께 서사 재료로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품질도 비교적 좋았다. 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제지 기술과 종이의 품질은 많이 향상되었으며 晉나라 시대 이후에는 簡牘을 대신하여 전문적인 書寫 재료가 되었고 각종 서적들이 대량으로 筆寫되기에 이른다.『晋書』의 기록에 의하면 晋나라 시대에는 藤나무를 원료로 만든 藤紙와 누에고치를 원료로 만든 蠶繭紙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종이에 쓴 晋나라 시대의 묵적은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이 殘紙本으로 작가를 알 수 없다. 王羲之의 작품인『蘭亭序』는 鼠鬚筆로서 蠶繭紙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물이 전하지 않아 유감이다. 東漢시대에는 남방과 북방이 製紙法이 서로 달랐으며 북방에서는 橫帘法을 사용하여 종이의 결과 무늬가 橫線이며 남방에서는 竪帘法을 사용하였다고 결과 무늬가 竪線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여 대량 생산되고 품질이 향상되자 東晋의 安帝는 元興 원년(서기 402)에 국가의 문서를 기록하는 용도로 종이를 전문적으로 사용하고 簡牘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하였다. 이후 簡牘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서사 재료로서 종이의 시대가 열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唐宋시대에는 제지 기술이 매우 발전하였으며 종이를 만드는 원료도 대마초, 대나무, 뽕나무, 닥나무, 보리, 벼 등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그 중에서 닥나무 껍질(楮皮)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唐나라 시대의 대 문장가인 韓愈는 닥나무 껍질이 종이로 탄생하는 것을 찬양하며 종이를 의인화하여 ‘楮先生’이라고 까지 하였다. 이후부터 ‘楮’자는 종이의 애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宋나라 시대의 蘇易簡은『紙寶』를 저술하여 종이의 종류와 생산 지역 그리고 각종 원료에 관하여 기록하였으며 또『文房四寶』를 지어 종이, 붓, 먹, 벼루를 문인이 가장 아끼는 네 가지 보물로 분류하고 종이가 文房四寶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평가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3-4세기에 주변 국가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3세기에 越南으로 전해졌으며 4세기에 韓國으로 전해지고 또 일본으로까지 전하였다. 韓國은 4세기 이전에 한자로 쓰여진 중국 서적을 받아들였고 제지 기술도 상당히 높았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일본『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05년 百濟의 王仁이『論語』와『千字文』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하면서 일본 왕실에도 한자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610년 高句麗의 승려 曇徵이 제지법과 製墨法을 전한 후 일본에서도 비로소 종이 제작이 가능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대의 종이를 살펴보면 宋나라 시대까지 사용된 종이는 두껍고 결이 굵으며 發墨이 적게 되는 특징이 있다. 지금과 같이 단향목을 원료로 하는 畵宣紙는 元나라 시대 이후에 만들어졌으며 明淸시대에 이르러 畵宣紙의 제조 기술은 최고의 수준에 달한다. 현대에는 安徽省에서 가장 많은 畵宣紙가 생산되고 있으며 그 기술의 기본적 토대는 明淸시대의 기술을 근거로 畵宣紙의 품질도 그때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다.

현대에는 기계로 만드는 수많은 종류의 종이가 있으나 서예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직도 전통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宣紙, 皮紙, 毛邊紙, 元書紙 등이다. 皮紙는 대마 종류의 원료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宣紙보다 색이 진하고 지질이 굵으며 좀더 질긴 특징이 있다. 毛邊紙는 대나무 잎이나 껍질을 원료로 사용하여 황색을 띄고 있으며 감촉이 부드럽고 먹을 잘 번지게 하지만 질기지 못하다. 元書紙는 볏짚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종이로 색깔은 황색을 띄고 있으며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강하며 매우 연한 것이 특징이다.

宣紙는 색깔 이외에는 다른 서화지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宣紙의 재료로는 단향목과 볏짚이 사용되는데 安徽省 涇縣 지방의 특산인 단향목을 사용하고 볏짚도 일반 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모래밭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용하여야 좋은 품질의 화선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현재 宣紙의 종류는 60여종을 넘고 있으며 모두 단향목과 볏짚의 원료를 혼합하여 만든다. 우리가 畵宣紙라고 부르는 서화지는 宣紙에서 나온 이름으로 宣紙를 포함한 모든 서화지를 畵宣紙라고 부르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安徽省의 涇縣에서 생산되는 단향목으로 만든 서화지가 화선지이다. 宣紙는 가공 방법에 따라 生宣과 熟宣 그리고 半熟宣으로 나눈다. 生宣은 발묵성이 강하고 먹색을 윤기 있게 보존하는 특징이 있다. 熟紙는 生紙를 만든 후 명반을 첨가한 것으로 질감이 조금 딱딱하고 흡수성이 떨어지는 특징이 있으나 筆劃의 원래 모양을 잘 나타내므로 작은 글씨나 草書 등의 書體에 적합하다.

2. 붓

蔡邕은 書論인『九勢』에서 “唯筆軟則奇怪生焉.” (붓은 부드러운 성질이 있기 때문에 신기한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다.)이라 하여 붓은 털의 부드러운 특징이 있으므로 강함과 부드러움, 단단함과 유연함 등 변화무쌍한 형태와 미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蔡倫이 종이를 만들었고 蒙恬이 붓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오래된 이야기지만 이들이 붓과 종이를 창조했다는 것은 신빙성과 설득력이 부족하다. 蔡倫의 종이를 창조하였다는 설은 많은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나 蒙恬이 붓을 만들었다는 설을 기록한 사료는 많지 않다. 晋나라 시대 張華의『博物志』에 “蒙恬이 秦의 붓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宋나라 시대의『太平御覽』에 晉나라 시대의 崔豹가 한 말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는 정도이다. 학자들은 蒙恬의 직책인 內史가 書史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가 붓을 개량하는데 공헌을 하였기 붓을 창조하였다고 전하게 된 것이라 추측한다.

붓으로 문자를 기록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殷商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甲骨文이 대다수 刻寫된 문자이지만 그 중에는 붓으로 쓰여진 朱書와 墨書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甲骨文의 내용 가운데에도 붓(筆)의 초기 글자가 ‘?? ’(聿)로 쓰이고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 ’자 중에서 ‘?? ’획은 手(손)을 나타내며 ‘?? ’자는 筆毫 즉 대나무를 가늘게 나누어 붓 털의 형태를 만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聿’자는 손으로 筆管을 잡은 형태이며 더 나아가 생각하면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甲骨文을 근거로 할 때 붓은 이미 殷商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許愼은『說文解字』에서 “聿, 所以書也. 楚謂之聿, 吳謂之不聿, 燕謂之費, 秦謂之筆”(聿은 문자를 쓰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楚나라에서는 聿이라 하였고 吳나라에서는 不聿이라 하였으며 燕나라에서는 費라 불렀고 秦나라에서는 이것을 筆이라 하였다.)이라 하여 春秋 戰國시대에는 각국에서 사용하는 붓의 이름이 ‘聿’, ‘不聿’, ‘費’, ‘筆’ 등 여러 가지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붓을 ‘筆’자로 사용하는 것은 秦나라가 문자와 度量衡 등을 통일한 후 붓에 대한 명칭도 秦나라에서 본래부터 사용하던 ‘筆’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爾雅․石器』에 “不聿謂之筆”(不聿을 붓을 말하는 것이다.)이라 기록되어 있으며『禮記․曲禮』와『戰國策․齊策』 등에도 붓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모두 蒙恬 이전에 붓이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며 蒙恬이 붓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기록이다.

蔡邕은『筆賦』에서 “削文竹以爲管, 加漆絲之纏束”(대나무를 잘라서 筆管을 만들고 칠을 먹인 실로서 감아 묶었다.)라고 하여 漢나라 시대에는 이미 대나무로서 筆管을 만들고 짐승의 털을 끈으로 묶어 사용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晉나라의 王隱은『筆名』에서 “豈其作筆, 必免之毫? 調利難禿, 亦有鹿毛” (붓을 만들 때 무엇 때문에 반드시 토끼털로서 筆毫를 삼는가? 부드럽고 예리하여 잘 빠지지 않는 것으로 또한 사슴의 털이 있다.)라 하여 토끼털과 사슴의 털 등 여러 종류의 털이 붓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論衡․效力篇』에는 “知能滿胸之人, 宜在王闕, 須三寸之舌, 一尺之筆”(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마땅히 왕궁에서 모름지기 세 寸의 혀와 한 尺의 붓으로 일을 한다.)이라 하여 붓의 길이가 한 尺으로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이후의 한 尺은 오늘날의 약 23cm에 해당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漢나라 시대의 붓의 크기는『論衡』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붓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戰國시대의 것이다. 1954년 湖南省 長沙의 戰國시대 楚나라 墓에서 완전한 형태의 붓이 한 자루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이다. 전체의 길이는 약 21cm이며 나무 筆管과 토끼털을 사용하였으며 筆管을 가운데 두고 가장자리에 털을 데고 실로 묶었으며 그 위에 옷을 칠하여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붓 뚜껑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나 휴대할 때 붓 뚜껑에 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1957년 河南省 信陽의 楚나라 墓와 1975년 湖北省의 睡虎地의 秦墓에서도 몇 자루의 붓이 발견되었다. 길이는 약 21㎝에서 24cm정도로 長沙에서 발견된 붓과 비슷하나 대나무로 筆管을 만들었으며 대나무 구멍에 털을 꽂아서 아교로 붙여 만든 형식으로 현대의 붓과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秦나라 이전에 사용되었던 붓은 많은 수가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며 나무를 筆管으로 하여 털을 그 가장자리에 붙여 실로 묶어 만든 형태가 대부분이다. 秦나라 이후의 붓은 현재의 붓과 같이 대나무를 筆管으로 사용해 털을 그 속에 넣어 붙여서 사용하거나 筆毫를 필요에 따라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차이점이다.『太平御覽』에는 秦나라 시대의 붓을 “鹿毛爲柱, 羊毫爲被”(사슴의 털을 중심에 넣고 양털로서 가장자리를 둘렀다.)라 한 晋나라 시대 崔豹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학자들은 秦나라 시대의 蒙恬이 나무막대기 대신 대나무로 筆管을 삼아서 붓을 만드는 방법을 개량하였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1932년 居延의 漢墓에서 1972년 甘肅의 武威에서 漢나라 붓이 발견되었는데 秦나라 시대의 붓과 같은 형식이다. 이와 같은 것을 근거로 할 때 현대의 붓과 같은 형식과 명칭은 秦나라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漢나라 시대에는 簡牘과 종이가 서사 재료로 사용되어 붓의 사용이 더욱 광범위하였으며 학문이 발전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이 많아져 붓의 품질은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서예가 예술적 지위로 격상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서예 이론이 탄생하고 또 文房四寶를 찬양하는 글이 나오게 되었다. 붓을 만드는 방법과 붓의 종류와 품질에 대하여 서술하고 붓의 오묘함을 찬양한 최초의 기록은 蔡邕의『筆賦』이다. 蔡邕은 붓을 만드는 재료를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좋은 붓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위는 탄력 있고 아래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筆賦』를 蔡邕의 저서가 아니라 후대의 위작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짐승의 털로 만든 붓은 매우 진보된 書寫도구이다. 甲骨文의 ‘聿’자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원시시대의 書寫도구는 나무막대기에서 출발하여 殷商시대에는 대나무 등의 재료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사용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春秋 戰國시대에 簡帛이 대량으로 사용될 때 자연스럽게 붓의 사용도 많아졌으며 그 품질도 향상되었을 것이다. 秦나라 시대를 전후하여 붓을 만드는 기술과 품질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며 사용하는 재료도 다양해졌다. 양털을 위주로 하는 붓은 부드럽고 족제비 털을 위주로 하는 붓은 탄력성이 뛰어나다. 이 밖에도 노루, 쥐, 소, 개, 닭 등 모든 짐승의 털이 붓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붓과 종이 그리고 먹의 상태는 작품의 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가의 경험과 취향에 따라 잘 선택할 필요가 있다. 王羲之는『書論』에서 “若書虛紙 用剛筆; 若書剛紙 用弱筆”(부드러운 종이에는 강한 붓을 사용하고 딱딱한 종이에는 부드러운 붓을 사용한다)이라 하여 붓과 종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였다.

3. 먹

孫過庭은『書譜』에서“紙墨相發, 四合也”(종이와 먹이 서로 호응하는 것이 마음과 뜻이 통하는 4번째 조건이다.)라 하여 좋은 먹과 종이가 서로 잘 융화하여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하였다. 먹은 작품의 외형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해 줄 뿐 아니라 그 오묘한 색의 변화로 筆劃의 내면에 함축되어 있는 작가의 정신을 나타낸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漢나라 시대의 서예가인 韋誕이 먹을 발명했다고 하나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고대의 먹과 또 먹으로 쓰여진 서예 작품을 근거로 그것이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陸友의『墨史』에 南齊의 蕭子良이 韋誕의 먹을 “仲將之墨, 一點如漆”(韋誕의 먹은 한 점의 칠과 같다.)이라 칭찬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韋誕은 먹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먹의 사용이 전해지는 문헌은 매우 많고 또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莊子』에 “宋元君將畵圖, 衆史皆至, 受揖而立, 舐筆和墨”(宋나라 元君이 그림을 그리려 하자 많은 화가들이 모두 모여 예를 표하고 일어나 붓을 풀고 먹을 갈았다.)이라는 기록이 있으며『孟子』에 “大匠不爲拙工改繩墨”(훌륭한 장인은 하찮은 솜씨들로 인해 먹줄을 바꾸지 않는다.)이라 하여 春秋 戰國시대에 이미 먹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西周시대 이전에 먹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문헌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먹으로 쓰여진 글씨가 전하고 있다. 商나라 시대의 것으로 ‘祀’자가 쓰여진 陶文이 있으며 西安의 半坡 신석기 유적에서도 紅, 黑, 灰 白색의 그림이 있고 甲骨文에서도 검은 색과 붉은 색의 먹으로 쓴 글씨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귀납해 보면 殷商시대 이전에 먹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가장 최초의 먹은 戰國시대의 楚나라 먹이다. 1954년 湖南省 長沙의 戰國시대 楚墓에서 검은 색의 점토 한 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글씨를 쓰기 위하여 만든 먹이라고 고증하였다. 이 덩어리가 비록 나무나 기름을 태워서 생성된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먹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후 1975년 湖北省 雲夢 睡虎地의 秦墓에서도 검은 색 먹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먹은 그을음으로 만들었으나 형틀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둥글게 뭉쳐서 만들어 낸 것이다. 河南省 陝縣의 東漢墓에서도 세 덩어리의 먹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역시 손으로 빚어서 만든 먹이다. 1958년 南京의 老虎山에서 晉나라 시대의 유적지에서 먹이 한 개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6cm 폭이 2.5cm 정도이며 그 성분이나 만드는 방법이 현대의 먹과 비슷하다.

漢나라 시대 이전에 먹은 손으로 빚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형태가 둥글며 단단하지 못하여 잘 부스러지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먹은 물을 벼루에 먼저 붓고 갈면 쉽게 부서지고 걸쭉해지므로 물을 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을 부수는 硯墨石으로 먹을 가늘게 부수거나 아니면 먹을 硯墨石에 문질러 가루를 낸 후 물을 부어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출토되고 있는 秦漢시대의 벼루가 硯墨石이 함께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해 준다.

先秦시대의 먹 가운데에서도 그을음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 있으나 언제부터 그을음이 먹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가장 빠른 기록으로는 三國시대 曹植의 文章으로 그는 長歌行에서 “墨爲靑松之煙”(먹은 푸른 솔의 연기로 만든다.)이라 하여 소나무 그을음으로 먹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어 사용하기 이전에는 칠과 石墨이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칠이 먹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많이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漆書는 얼마 되지 않는다. 칠은 먹보다 농도가 진하고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특수한 용도에 주로 사용되고 보편적 서사 행위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石墨은 검은 색의 광물을 뜻하며 연필을 만드는 흑연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石墨이 생산되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은 오늘날의 흑연 산지와 같은 지역이다.

먹의 종류로는 松烟墨, 油烟墨, 油松烟墨 등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松烟墨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을 주원료로 사용하여 아교와 향료를 배합하여 만들고 있다. 油烟墨은 오동나무 기름이나 짐승의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사용하며 油松烟墨은 松烟과 油烟을 합하여 만든 먹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재에는 전통적 방법인 그을음으로 만드는 먹은 매우 적고 광물질의 배합으로 만든 먹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4. 벼루

벼루는 硯瓦, 硯田, 硯池, 墨海 등의 이름과 潤色先生, 天池 등의 雅號로 불려진다. 許愼은『說文解字』에서 “硯, 石滑也. 從石見聲.”(벼루는 돌이 미끄러지는 것이다. 뜻은 돌이고 소리는 見이다.)이라 하여 벼루의 용도와 재질을 설명해 주고 있다. 벼루의 재질은 硯瓦라 불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石材와 陶瓦 등이 있으며 그 역사는 先秦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皇帝시대에 이미 벼루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나 그것을 고증할 만한 근 거는 찾을 수 없다.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기록으로는 宋나라 시대의 蘇易簡이 쓴『文房四寶』이다. 그는 漢나라 시대에 孔子의 옛집을 허물 때 春秋시대의 벼루가 출토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唐나라 시대의 王嵩崿도『孔子石硯賦』에서도 漢나라 시대에 출토된 孔子의 벼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벼루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75년 湖北省 雲夢 睡虎地의 秦나라 묘에서 硯墨石과 나란히 출토된 돌 벼루이다. 石硯과 硯墨石은 모두 鵝卵石이라 불리는 돌로서 약간의 가공을 한 상태이며 먹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先秦시대의 벼루는 많이 전하지 않고 있으나 漢나라 시대 이후의 벼루는 비교적 많이 있다. 1980년 陝西省의 扶風縣에서 西漢 武帝시대의 돌 벼루가 한 점 출토되었다. 두께가 4.7cm 길이가 약 23cm로 먹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硯墨石이 벼루 위에 가지런히 얹혀 있었다. 1978년 山東省 臨沂의 金雀山에서도 東漢시대의 벼루가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武帝시대의 벼루와 비슷하나 가장자리에 섬세한 조각을 한 것이 특색이다. 1957년 四川省의 廣州에서 漢나라 시대의 陶器 벼루가 출토되었는데 3개의 다리가 있는 둥근 벼루로 뚜껑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도기 벼루는 다리와 뚜껑이 있는 것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기록에서도 이런 현상을 전하고 있다. 繁欽은『硯頌』에서 “鈞三趾於夏鼎” (夏나라 鼎이 세 다리인 모양을 본떴다.)라고 하여 漢나라 도기 벼루는 先秦시대 鼎의 모양을 본떠 하여 만들었음을 설명하였다. 1934년 북한에서도 서기 2, 3세기의 漢나라 시대의 벼루가 발견되었다. 그 형태는 직사각형의 석판형이며 보관함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湖北省의 張家山, 江蘇省의 銅山縣 등에서도 漢나라 시대의 벼루가 발견되었다.

漢나라 시대 이전의 벼루가 출토된 곳에서는 硯墨石이 함께 출토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硯墨石은 먹을 부수는 도구이다. 漢나라 시대 이전에는 손으로 빚어서 먹을 만들었으므로 물이 먹 속으로 잘 스며드는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 벼루에 먼저 물을 붓고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상태에서 갈거나 먼저 硯墨石으로 먹을 가루로 만든 후 물을 부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벼루와 硯墨石이 함께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벼루를 만든 재료로는 돌, 벽돌, 기와, 陶器 등 일반적인 소재 이외에도 철, 금, 은, 옥, 수정, 짐승의 뼈, 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소재가 사용되었다. 漢나라 시대의 劉歆이 쓰고 晋나라 시대의 葛洪이 편집한『西京雜記』에 “以玉爲硯, 亦取其不永”(옥으로 벼루를 만들었는데 얼지 않는 것을 취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벼루가 반드시 먹을 가는 것은 아니라 먹물을 담아 사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벼루의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석재이다. 벼루 석은 출토된 지역별로 매우 다른 특색이 있으며 색상과 석질에 따라 먹물의 색깔과 농담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벼루는 생산되는 지역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있으나 예전부터 서예가에게 사랑 받는 벼루는 端硯, 歙硯, 魯硯, 洮硯 등으로 이 네 가지를 4대 名硯이라 한다.

端硯은 廣東省의 端溪에서 생산되는 벼루로 端溪硯이라 하며 눈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端硯은 唐나라 시대에 이미 그 명성을 얻어서 시인 李賀는『楊生靑花紫石硯歌』에서 “端州硯工巧如神, 踏天磨刀割紫雲” (端硯의 정교함은 신기하여 하늘을 밟고 칼을 갈아 붉은 구름을 떼어 온 것 같다.)이라 노래 부르기도 하였다. 端硯의 품질은 산의 가장 아래 부분에서 채취한 돌로 만든 것이 가장 좋으며 색깔도 아름답다. 端硯의 그 색에 따라 靑花, 蕉葉白, 天靑, 翡翠, 金星點, 金銀線, 石眼,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중에서 靑花를 제일로 한다. 端硯을 평가할 때 석질뿐 아니라 눈의 색과 맑고 흐림 그리고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端硯의 눈은 광물질의 퇴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할 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端硯의 눈은 벼루를 더욱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실용적으로 먹색을 윤택하게 하고 발묵이 잘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벼루를 만들 때 硯眼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벼루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에 벼루의 조각은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구한다. 硯眼의 품질은 살아 있는 느낌이 나는 것이 제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 다음이고 가장 좋지 못한 눈은 死眼이다. 지금 생산되는 端硯은 벼루의 눈을 배치할 때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장식성만을 고려하여 벼루의 테두리나 혹은 먹으로 갈리지 않는 부분에 안배하여 그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歙硯은 安徽省의 歙縣일대에서 생산되는 벼루로 예전부터 端硯과 쌍벽을 이루는 벼루로 평가받고 있다. 歙硯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龍尾石, 眉子石, 羅紋石, 水弦石 등이 있으며 龍尾石을 가장 귀중히 여긴다. 宋나라 시대에는 端硯과 서로 우세를 겨루었다고 전하며 明淸이후로 端硯에게 앞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歙硯의 특징은 겨울에도 硯池의 물이 얼지 않으며 발묵이 예리하여 筆鋒이 살아 있는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魯硯은 山東省 益都, 臨沂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벼루로 붉은 색의 선이 들어 있는 紅絲硯을 초고로 친다. 宋나라 시대의 李之彦은『硯譜』에서 米芾은『硯史』에서 魯硯을 좋은 벼루로 평가하였다. 魯硯은 색채가 풍부하고 먹의 입자가 가늘게 갈리고 발묵이 풍부한 특징이 있다. 洮硯은 甘肅省의 卓尼縣에서 생산되는 벼루로 鴨頭絲, 鸚哥綠, 亦紫石 등이 있다. 洮硯은 산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호수 깊숙한 곳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채취가 힘들어 明나라 이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현대에 조금씩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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