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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 예식 원문보기 글쓴이: lytljg
사도바울의 삶을 통한 율법과 복음
강의: 이 연태 목사
(사도행전9:1-9)
복음의 핍박자 사울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행전 9장 3~5
5:And he said, Who art thou, Lord? And the Lord said, 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KJV)
오늘날은 말씀의 홍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면 인터넷 검색만 해도 교회마다. 말씀이 흘러나오고 영상으로 기독교방송 각 언론 신학자들의 강의 한마디로 입맛에 맞추어 누워서도 설교를 듣고 앉아서도 먹고 마시면서도 듣는 이 시대는 참으로 복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번역은 얼마나 많은지 여기저기 잘나고 잘 배운 학자들이 많아서 여기가 참 성경이다. 저기가 온전한 번역이다. 교권 이권 상권 이익추구 상술들이 이제 성경까지 침투하여 새 찬송 새 성경 도대체 몇 가지인지 알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여기저기 신학교에서는 교수들이 값을 해야 하니 본질적(本質的)인 성경말씀을 연관시키는 것 보다. 성령(聖靈)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들이 학설만 난무하여 성경을 앞뒤 전후(前後) 문맥을 무시하고 시대적 배경(背景)도 무시하고 율법전인지, 율법이 주어졌을 때 하신말씀 인지, 율법과 복음의 공존(共存)기간인지, 성령이 오시기전과, 성령이 오시고 난 후인지, 유대인에게인지, 이방인(異邦人)에게인지, 전 인류에게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구분(區分)하지 못하고 일부학자들이 주석과 역사서 등 을 참조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基本)의 중심인 영적인 말씀의 흐름을 방해하는 보편적(普遍的)지식적 사고가 목회단상에서 흐르는 은혜(恩惠)의 말씀을 교모하게 주석과 학설과 역사라는 미명하에 많은 성경의 흐름을 방해하는 일 들이 신학(神學)이라는 미명하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역시 말씀의 급변(急變)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 전 서울재활신학교&연구원에서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이라는 말씀을 강의 했는데 강의 내용의 자료는 로마서 중심이었으나 그 날은 사도행전 9장 중심으로“바울의 삶 ” 란 말씀을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는데 .그 날이 수요일이고 수요일은 예배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강의 보다는 예배 중심으로 회심 전 사울과 회심 후 바울에 대한 말씀을 전했는데 사울은 율법으로 교만하고 율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크다” 란 의미만 부여하고 신학적보다도 전체 흐름의 배경을 설명했는데 조금은 부족한 부분이 있어 다시 정리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어 지는 것은 여러 곳에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일을 많이 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이나,(창17:5) 야곱-이스라엘(창32:29)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6-17)
사울이 바울로(행13:9) 그 이름을 바뀐 것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복음사역을 위해 그의 이름을 바꾸고,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봅니다.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
사울의 뜻 율법아래에서는 분명히 넓은 의미에서 교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구하다,” “요청하다”(to ask, to demand, to beg for)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샤알”에서 온 것으로 “구하여진,” “간청된”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문맥해석을 해야지 한 성경에서 기록된 말씀을 등한시 하고 주석과 단어에만
치중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놀음이 복음적 성경해석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말씀 밖에는 넘어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인하여 내 자신과 아볼로를 본보기로 들어 이 일들을 적용하였으니,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배워, 너희 중에 아무도 서로 대적하여 교만하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이라..(고전4:6)
오늘날 학자들이 사울의 이름이 어떻고 바울이 어떠하다. 등 지식의 견해는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정확해야 합니다. 율법의 영으로 사울이라는 교만은 반드시 무너지게 하시고 바울이라는 복음적 메시지가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이 히브리식 이름이건 헬라식 이름이건 그 어떤 이름이건 간에, 그것에 이스라엘이나 로마라는 문화 안에 있다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과 뜻이 부분이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일부 신학자들이 무엇인가 큰 신학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듯이 말하는 주석적 지식적 사울이라는 의미를 강단에서 크다“ 라고 하는 것이 잘못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볼 때에 얼마나 성경을 문자적 해석과 교리와 역사서에 매여 있는 것을 보면 신학적 혼탁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성경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 크다” 의미는 분명히 율법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율법사 니고데모를 보면 (요3:4)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사람의 뱃속에 들어갑니까? 질문합니다. 아니 어리면 들어갔다 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위로부터 거듭나라고 합니다.(요3:31)
오늘 이 시대도 학문적으로 신학의 단절입니다. 자신의 관념(觀念)을 깨뜨리지 못하는 니고데모 율법학자들이 많이 있어 강단의 문맥의 흐름보다는 지식적 사고(思考)와 사상(思想)에서 성경을 오해 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울과 바울이 이름이 본질보다는 가지에 중심을 두고 학설과 뜻을 연구하고 성경의 증거와 맞지 않고 무슨 큰 이름이 학설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주장을 하면서 .지금까지 강단에서나 전해지는 말씀은 학설이 부족 한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극적인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9장에는 사울이라는 이름만 등장할 뿐 바울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회심 직후뿐 아니라 회심한지 3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사울입니다.(행 9:26). 성경 어디에서도 사울이 회심 체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행 13장 9절)입니다.
9 그때에 사울(바울이라고도 불리는)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그를 주목합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름이 바꾸는 것은 그 본질이 중요합니다.
회심전의 바울
바울의 회심을 대략 AD32년경 학자들이 추측하는 것이지 확실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볼 때 기록된 말씀을 확실히 믿고 기록하고 행하고 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 로마식 이름인 바울 이외에 베냐민 지파 중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이스라엘의 초대임금의 이름인 사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또 그는 다소에서 출생하였고 로마 령 길리기아의 수도였고 다소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위치하였으며, 통신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헬라인들과 동양 사람들, 그리고 헬라 문화와 동양 문화가 서로 만났고 혼합되었다. 바울이 출생할 무렵 이곳은 철학, 수사학, 그리고 일반교육에 전력하는 학문의 중심지였다. 바울의 이런 배경들 때문에 바울은 율법의 석학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열성적인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잡아다 감옥에 넣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과 8장 1절을 보면 각각 스데반을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치고 .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성경은 그런 그를 살기를 띠고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아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받아 지금은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에 있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마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비추었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엎어지게 됐습니다. 그 후로 3일 동안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변하게 된 바울은 성경을 다시보기 시작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을 체류하면서 율법과 복음을 다시 보면서 예수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이방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 하였습니다.갈(1:16-24) 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라고 확신 있게 증언합니다. 하늘로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詛呪-accursed.)를 받는다고 말합니다.(갈1:8)
사도행전 13장 9절에 와서 사울이라는 말 대신 비로소 처음으로 바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란 ‘작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울의 로마식 이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 히브리사람들은 자기의 본래 이름과 함께 로마식 이름 혹은 헬라식 이름을 가졌는데, 사울도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바로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하러 가면서,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사울이 바울로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까? 그것은 .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히브리인의 이름인 ‘사울’ 대신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택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울은 복음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지극히 적다”는 뜻입니다. 즉 사울의 이름 희망을 구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뜻이 있어도 교만의 “크다” 란 포괄적 영적(靈的)인 의미가 더욱 분명합니다. 크고 작은 것이지 작고 희망적(希望的)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사울이었을 때 율법적인 행위의 모습은 적은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종교가 장자 교단이고 “ 크다 “ 라는 그 뜻은 복음적 해석으로 우리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일부 교단이나 복음을 가진 자들이 자기 것이 진리이며 길이다. 라고 주장하며 일부 장로교는 자기 신학적 정체성도 부족하고 성경의 진리 기본도 부족한 사람들이 겨우 일반대학4년으로 세상공부하고 신학공부대학원3년 과정을 거치고 목사가 되고 자유주의 신학을 지식으로 무장하여 복음을 막는 짐짓 죄들을 짓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고 또 한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복음교회는 복음으로 말씀을 상고해서 사랑의 교제를 해서 주님의 뜻을 찾아 믿음으로 함께 갈 수 있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교회. 종교교회 등 마치 다메섹의 사울처럼 교만과 지식으로 사울의 모습으로 닥아 오는 율법적 신앙들이 많다는 사실인데 이는 사울의 이름처럼 희망이 있는 모습으로 구하는 것 인가요,
우리는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혹시 회심 전의 바울처럼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복음의 교회들을 비난하며 살고 있진 않은가요?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믿는 유대교의 교리와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며 살았습니다.
혹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靈的)복음(福音) 보다는 철학자(哲學者)들이 주장하는 주석과 성경위에 교리들을 성경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는지 말씀을 묵상하고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에 속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겼습니다.(고후3:3)
헬라 이름은 Paulus, 히브리 이름은 Saul, Saul'los"(사울로스) Saouvl(사울)=(샤울)이다. 그 기원이 라틴어의 ‘작은(little/적은)’이라는 형용사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이름에는 ‘큰 자’라는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사울 왕과 바울은 모두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희망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참 다른 인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울의 최후는 결국 교만함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고, 기독교들의 박해에 직접 가담한 바울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이 된 바울은 이름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게 됩니다.
희망이었던 사울은 '작은 자' 로 바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는 그 시대적 배경과 문맥과 흐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레마(깨닫게 하는 말씀)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 가지 헬라어가 있는데 '로고스' 와 '레마'이고 보통은 로고스를 사용하나(롬10:17) 말씀은 '레마'로 되어있습니다 말씀은 성경의 권한입니다. 학자의 견해가 아니고 철학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 아닌 육적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의 이름의 뜻은 율법적 뜻으로 “교만과 큰 자입니다.
사울은 교만하여 (역대상10:13) 사울이 자기 죄로 죽었습니다, 다메섹의 사울은 종교인입니다.(행26:5) 이는 그도 주님을 거역하여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 크다 ,높다. 가졌다. 희망적이다. 는 것은 사울의 영적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