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3차 분열: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1959)
⓵세계교회협의회(WCC)
‧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변천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WCC는 1948년에 정식 창립되어 세계교회의 일치와 화해운동을 전개하는 협의기구이다.
이 기구에는 공산국가의 교회들도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후에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극도의 반공입장을 견지했고, 공산국가의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WCC운동에 대한 반감도 일각에서 대두되었다.
‧ 1961년 뉴델리 제3차 WCC총회는 ‘그리스도인 형제’와 나란히 ‘인간형제’를 공동체 개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라는 공통성으로 모든 민족과 연대성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명문화시켰다.
1968년 웁살라 제4차 WCC총회는 교회의 보편성이 교회의 일치만이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주창하고, 교회는 인류의 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1975년 나이로비 제5차 WCC총회는 타 종교인들과 타 문화인들과 이데올로기들과 ‘더 큰 공동체’를 위해 대화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 WCC가 추구하는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는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이 타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기기 때문에, 종교적인 차이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규메니칼 운동에서 말하는 연합은 ‘세속화를 위한 개념’이고, 복음과 신앙고백의 토대를 멀리 떠난 ‘비 고백적 개념’이므로, 교회의 거룩성을 회석시키고 복음전파의 필요성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선교는 사회복음의 실현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➁ 통합과 합동의 분열
‧ 장로교 총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턴 제2차 WCC총회에 대표단을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때에 장로교 총회 안에서 WCC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화되었는데, 논쟁의 핵심은 WCC가 “전 교파를 합동하는 초대형 단일 교회를 목표”로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이에 대해 총회 정치부는 WCC가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지 않으며, 교회와 교단들의 친선과 사업협동을 도모한다고 밝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1956년 장로교 제41회 총회는 ‘에큐메니컬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여 그 해결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듬해 제42회 총회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 그러나 1959년 장로교 교단이 또다시 분열되었다. 이번에는 ‘합동’(승동측)과 ‘통합’(연동측)으로 나뉘었다. 연동측은 “WCC는 용공, 신(新)신학,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위하여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표파송을 정지하기로 한다.”고 결의했다.
반면에 승동측은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기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 연동측은 승동측과 재결합하기 위해서 WCC에서 한시적으로 탈퇴하겠으나, 승동측의 요구대로 에뮤메니컬 운동을 전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일 이 운동을 전폐하게 되면, WCC에서의 탈퇴는 물론이고 국내에 있는 모든 연합사업(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방송, 한국기독교협의회, 기독학생회 등)을 중단해야 하며, 심지어 내한 장로교회 선교부 까지 거절해야 하므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폐지를 수락할 수 없다고 밝혔다.
③ 교단 분열로 고통 받는 교인들
‧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세 번째 분열되자, 경북 청도의 첩첩산골에 있는 박곡교회가 교단 싸움에 휘말려 둘로 나뉘었다. 1906년에 설립된 박곡교회는 일제 강점기도 견디고 한국 전쟁도 잘 이겨 내면서 건강하게 자랐다. 그런데 그렇게 탄탄하던 교회가 1950년에 말에 양편으로 갈라진 것이다.
‧ 에큐메니즘(ecumemism)이 무엇을 뜻하는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인들은 각자가 주워들은 얘기로만 자기주장을 펼치며 서로 대립하였다.
1962년에 한편은 ‘합동측’으로, 다른 한편은 ‘통합측’으로 갈라섰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합동측은 교회 건물을 차지하고, 통합측은 사택과 토지(논밭)를 차지하는 것으로 싸움이 일단락되었다.
‧ 둘로 쪼개진 교회는 서로 떨어져서 각각 자리를 잡았다. 통합측 교회가 새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분열된 교인들은 여전히 한 동네에 살았다.
조상 대대로 같은 마을에서 서로 의지하며 몸을 비비고 살아오던 이웃들이 교회 일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등을 돌리는 남남이 되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못 본체 고개를 돌리고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믿음이 갈수록 불편해지고 무거워졌다.
‧ 예를 들어 어떤 장로의 가족은 여러 친척들이 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고 모두 다 교인이었다. 이 집안 역시 교회싸움의 와중에서 양편으로 나뉘었다. 싸워서 갈라진 친척들이 교회에서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명절이 오면 친척끼리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명절이 되면 온 일가친척이 교회 장로인 큰댁으로 모였는데, 서로 어색한 자세로 멀똥멀똥 서먹하게 지내다가, 주일이 되면 각자 자기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다.
예전에는 그렇게 즐거웠던 명절이 이제는 재미없고 모이기 싫은 날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마다 연중행사로 반복되는 이 기막힌 사연 때문에 집안 어른들의 싸움 고생이 깊어 갔다.
‧ 이 상황에서 집안 어른이자 양쪽 교회의 장로들이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희가 한 동네 이웃으로 살면서 서로 싸우고 갈라져 있는데, 어떻게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양쪽 장로들이 혹시 남의 눈에 띌까봐 조심스럽게 한 밤중에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대화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진전된 대화를 두 교회를 다시 하나로 합치자는 합의로 발전하였다.
드디어 두 교회가 갈라선 지 약30년 만에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1990년에 이르러 박곡교회는 이제 교회분열의 멍에를 스스로 벗겨 내었고, 그 아픈 상처도 말끔히 치유되었다.
④ ‘통합촉진위원회’(1959)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통합에 관한 성명서’
‧ 1959년 장로교 교단이 세 번째 분열한 직후, 분열된 교단의 재결합을 위해 ‘통합촉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통합 방안’을 마련한 촉진위원회는 분열 당사자 양측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ㄱ.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75년간의 신앙전통을 지킨다.
ㄴ. 총회의 평화 통일을 위하여 WCC와 ICCC를 탈퇴한다.
ㄷ. 선교정책을 양측이 협의 하에 재추진한다.
‧ 장로교 교단의 제3차 분열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장로교회에도 충격적이었다. 미국 장로교 총회의 임원단이 11월에 내한하여 먼저 ‘통합촉진위원회’와 회합하고, 그 다음 ‘승동측’(합동)과 회합하고, 마지막으로 ‘연동측’(통합)과 회합했다.
연이어서 일행은 양측을 함께 초청하여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를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회,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함께 주관했다. 연동‧승동 양측 위원과 세 선교회 대표가 이듬해(1960년)1월 중순까지 여덟 차례의 회의를 통해 분열된 장로교회의 화합을 모색했다. 그러나 1월15일 양측의 노력이 완전히 결렬되었다.
‧ 1960년 2월17일 연동측, 승동측, 중립측에서 통합을 원하는 대표들과 세 선교회가 새 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통합측)가 개최되었다. 통합총회는 제44회 총회(1959)의 모든 결의를 인수하였다. 이결의대로 통합측은 합동측과의 관계회복을 위하여 곧바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탈퇴했고, 1969년에 다시 가입하였다.
‧ 한편 1960년 2월13일 승동측은 고신교단과 합하여 ‘합동측’이라는 별칭을 가졌고, 그러다가 1962년 11월 양자가 또다시 분열하였다.
‧ 감리교회도 신앙의 경건이나 출신지에 따른 구별, 신학교의 주도권이나 재산상의 이권(利權)등으로 ‘재건파’와 ‘부흥파’로 분열되어 반목하였다. 이들은 별도의 감독을 선임하고 여러 개교회의 교역자 파송도 별도로 이루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 후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강력한 통합 촉구운동에 힘입어 분열의 정점에서 재통합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시기 감독선출과 미국교회의 지원에 따른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어 다시 크게 분열하게 되었다.
‧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도 신학, 신앙경건, 인맥, 지방색, 리더십 등을 이유로 한국교회 분열사의 자취를 보이고 있다.
‧ 한국교회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교단명칭에 괄호를 치고, ‘통합’, ‘합동’, ‘고신’, ‘개혁’, ‘호헌’ 등등의 별칭을 붙여 사용하는 장로교단수가 대략 200개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 성결교, 침례교 등의 교파도 두 세개 혹은 수 십개에 이르기 까지 분열된 상태의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파의 이름도 ‘예수교장로회’(예장)가 있으면 어김없이 ‘기독교장로교’(기장)가 있고, ‘기독교감리회’(기감)가 있으면 ‘예수교감리회’(예감)도 있다.
그 밖에도 ‘기독교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성결교회’(예성),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와 ‘예수교 하나님의 성회’(예하성)가 있다. 이를 두고 국내외 일부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다 나뉘어져있다고 지적하면서 안타까워한다.
‧ 근래에 이르러 단지 교단뿐만 아니라, 교회의 연합기구들 즉 진보적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보수교단이 주측이 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역시 별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 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도 전적으로 반대되는 입장과 행동을 취하기도 하였다. 최근의 ‘북핵문제’나 ‘대미관’의 표출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