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성을 가지고 기성교회에 도전하는 대구교회]
현대종교 1995년 7월호
조찬구 차장
대구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워치만니와 윗트니스리 그리고
지방교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대구교회는 지금까지 나타난 교회들과 비교해서
분명히 특이한 점을 띠고 있으며 또한 전혀
새로운 형태이다. 이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워치만니와 윗트니스리 지방교회의 관계를 이야기한다.(편집자주)
지방교회(회복교회)는 중국에서 워치만니 (Watchaman Nee,1903.11.4~1972.6.1)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중국인 윗트니스리(Witness Lee.이상수. 1905)가 1950년에 독자적인 교회를 개척함으로 시작했다.
워치만니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푸조우에서 ‘니웽슈’의 9명의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중국어 이름으로 ‘니토쉥’(징 치는 자라는 뜻)인
그는 18세 때 복음을 접하고 열정적으로 가두
전도를 나가며 ‘작은무리운동’등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워치만니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죠지밀러와 허드슨테일러에 관한 서적들이다. 워치만니는 20세기 중국이 낳은
훌륭한 영적지도자이며 어떠한 기준으로 보아도
이단 지도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워치만니의 [성화의 신학]을 연구한 바 있는
미국의 한 목사는 “워치만니는 20세기 교회사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나의 중국인 전도자이고, 교회개척자, 설교자, 신학자,
저술가로서 중국 복음주의 운동의 짧은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워치만니는 1923년부터 시작하여 16년 만에
7만 명이 넘는 회심자를 낳았으며 7백 개가
넘는 지역모임(local congregation)을 구성한
복음 운동의 주역이다.
-윗트니스 리(Witness Lee)
워치만니의 동역자인 윗트니스리는 196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최초의 미국 지방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의 설립은 [주님의 새로운 움직임]이라고 불리워졌다. 윗트니스리(이상수)는 중국 체후지방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외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난 그는 1925년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 신앙 고백을 했다.
1927년부터 리는 워치만니 그룹이 발간하는
잡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다. 워치만니가 투옥된
이후 윗트니스리와 [작은무리운동]의 다른 지도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마침내 리는 1950년대
초에 대만과 필리핀의 교인들 중 다수를 데리고 독자적인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리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은 각 도시에 있는 신자들의 하나의 모임(gathering)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사상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의 교리라고 지칭한다.
-한국의 지방교회
한국의 지방교회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의
워치만니의 직계 제자라고 자칭하던 왕중생
(한국본명 권익선)씨의 지도하에 1966년에 시작됐다. 현재는 서울대 사대출신인 이희득씨가 전국의 지방교회를 이끌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본부교회에 해당하는 ‘서울교회’ 집회소가 있으며 전국적으로 대전, 부산, 울산, 수원 등지에 60개 정도의 집회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교회(회복교회)는 개신교회에 대해 훨씬 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천주교는 마귀적이고 개신교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는 것이 윗트니스리의 믿음이라고 이들 지방교회 추종자들은 말한다.
지방교회는 우주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인간사회에서 나타날 때는
한 지방, 한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각 개 교회는 지방 이름을 붙여 단순히 ㅇㅇ교회이어야지 어떤 교과별 명칭을
갖는 것은 죄라고 여긴다.
이들은 신인합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어떤 형태의 체계적인 신학교육도 부정한다.
지방교회의 교단 기구 조직은 타교단과 같은 조직교회가 아니고 각 지방별 독립교회로 되어있으며 교인들은 모두 형제자매들로 통하고 있으며 직제는 장로, 감독, 평신도(형제자매)만 있을 뿐이다.
기성교회를 교파교회라고 해서 배격하고 있는
이들의 예배는 격렬한 통성기도로 시작하여 힘차고 씩씩한 군가와 같은 찬송가를 부르며 오른손을 높이 들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부르기도 한다.
주로 찬송, 성경읽기, 간증을 하며 예배는 주일 낮 11시 주일 밤, 토요일 밤에 모여 드리고
서로 교제를 가진다. 특별집회는 년 2회 실시한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은 [말씀을 먹는다], [주 예수를 먹고 마신다], [삼위일 하나님] 등이다.
지방교회는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치고 있으며
영, 혼, 육 삼분설을 취하면서 인간의 타락은 육체적으로만 이해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어 전인적인 타락이 부정된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 자신인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고 [사단인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열매]를 먹음으로 사단을 몸속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성교회의 목사와 예배 제도를 부정하고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며
성령 충만을 위해 [오 주 예수여!]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예배 모형은 설교자를
중심으로 ㄷ형이나 원형으로 착석한다는 것이다.
지방교회가 매우 외곡된 상태로 운영되고 있는
가운데 기성교회에 큰 도전을 던져준
교회가 하나 있다. 그 교회가 바로 대구교회다.
대구교회는 워치만니의 사상을 비교적 건전하게 수용한 복음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가 장로교나 기타 우리와 익숙한 각 교단의
교회 형태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조금은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이질감이 드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처음 대구교회에 대한 본지가 접수한 제보에
의하면 그 내용이 이목사를 주님으로 표현한다.
–신도들이 모든 월급을 목사에게 바치고
용돈을 타서 쓴다.
–구원파 교회 같다. –비디오나 카셋트로
비밀리에 교리를 가르친다.
–워치만니의 사상을 가르친다
등 마치 새로운 사이비종교가 나타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영생교나 전도관 같은
신흥 사교집단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은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본지가 인터뷰를 위해 이현래 목사 사택을 방문했을 때는 별다른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너무 평범해서 거짓 제보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분위기는 조용하고 평범했다.
대구교회는 현재 대구시 남구 대명10동에 위치해 있으며 이현래 목사가 이 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건물에는 간판도 십자가도 없고 단지 ‘양문성서연구회’라는 이름만 유리창에 썬팅 되어져 있는데 그 교회 내부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전과는 달리 의자와 강대상이 마치 강의실과
같은 분위기로 놓여져 있었다.
주위로부터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이단 운운하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 원인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 때문인 것 같다. 이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오순절계통의 개교회 중심교단)’소속의
신학교 출신으로 졸업 후 목회와 함께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약 8년간의 목회와 교수직 사역을 통해서
이 목사는 교회의 정치적 분열과 다툼의 상황 등 기독교의 교단과 교회의 분열상 등에 크게 회의를 느끼고 목회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CCC에 투신하여 충주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다는데, 이때 이 목사를 따르던 30여명의 학생들이 지금의 대구교회 초기 멤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목사가 CCC로부터 탈퇴하고 대구지역에 자리를 잡으려 할 즈음 20~30여명의 학생들이 탈퇴 후에도 이 목사를 찾아와 서로 교제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 대구교회의 시작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이 목사는 워치만니의 사상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인식하여 자신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8년간의 목회경력이나 CCC에서의 사역, 워치만니의 사상 등은 이 목사를 마치 은둔자처럼 집에서만 지내도록 했는데, 이때 찾아오는 학생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결국 모임을 갖고 교제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 2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자 굳이 편의상 대구교회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약 200~300여 명이 모이고 있으며
모두가 깊은 신뢰와 유대로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고
한편 도전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특이한 모임은 앞에 열거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들을 나타내 주위로부터 이단시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워치만니의
영향을 받은 지방교회처럼 폐쇄적이거나 배타적 성격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지방교회와 같이 자신들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진리에 맞는다는 주장을 하지도 않았고,
다른 교파나 교단을 모두 옳지 않다고 말 하지도 않았다. 한때 이 목사는 워치만니의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지방교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배타적, 폐쇄적 교리에 반대해
3번 출석 후 발길을 끊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일로 그 지역의 지방교회 신도들이 몰려와
간판을 부서뜨리는 등의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워치만니는 중국의 영적
지도자로 그 평가가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이고
그의 생애에 있어 복음적이고 순교자적인 삶과
사상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 그의 사상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의 그늘 속에 가려져 일부 왜곡되게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워치만니의 사상을 건전한 형태로 수용한 교단이 아직은 없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구교회는 워치만니의 순수한 복음주의와 현대 기독교의 일부 부패상에 대한
자구노력 속에서 태어난 공동체 중심의 새로운
형태로 보인다. 현재 이 목사 사택에는 가족 외에 몇 명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취재팀은 이들이 목사의 자녀들인 줄 알았다.
그만큼 그들은 가족처럼 다정해 보였다.
그리고 이 목사 사택 주위에는 대구교회 신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퇴근 후 저녁이 되면 자연스럽게 사택으로 놀러온다고 한다.
마치 추억속의 마실간다는 말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모임은 누가 강요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족모임’이다.
약 40여 명이나 모이다 보니까 주위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취재팀이 만나본 대구교회 신도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순수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이목사와 한집에 살고 있는 우순택(44)씨는 나이가 40이 넘은 중년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년 같은 순진(?)한
인상을 주었다.
이권이 개입된 분쟁으로, 당과 싸움과 이기주의로
교회와 신도가 점점 병들어가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대구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떡을 떼는’ 크리스천 공동체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이 목사는 사도신경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 목사의 이야기 속에 그 어떤 이단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없었다. 또 목사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말 역시 이들의 독특한 호칭방법으로 형제자매를 주님 섬기듯 순종하고 사랑하자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으로 아무도 이 목사를 교주(?)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질문에 신도들은 순박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취재팀이 확인한 바 본지에 접수된 내용이 허위는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대구교회의 규칙이나 교리는 아니었다. 10년 이상 함께 살다시피 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가족이다. 그러나 외부의 시각은 목사와 신도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들 역시 이들은 복음과 하나님 안에서 지혜롭게 해결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형태가 다르면 우리는 이단이라고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대구교회는 이목사와 그 가족(신도들)의 순수성이 오히려 기성교회들의 신앙형태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형태만으로 뭐라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공동체적인 삶이
너무 우리 기성교인들에게 도전적인 나머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