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적 사유-종교인에 대한 회의적 성찰에 관한 보고서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
▲이미지적 시대 개관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고도의 경제성장 추구는 동시에 교회의 비약적 성장과 기업형 교회를 탄생 시킨다. 70년대말 한국사회는 필연적으로 교회문제를 종교와 봉사․신앙과 부의 축적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었다.작가 이문열은 이를 소설에 담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고,크리스찬 유현목은 영화화 한다.당시의 지적인 충격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은 물신주의와 상업주의로 말미암아 도덕적․윤리적 훼손과 정신적 공허감이 극에 달했던 시절에 돌연 등장한 하나님의 존재는 경제성장의 허상을 들어내는 것이어서 관객과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이 작품은 이분법적인 인물 설정,고정적인 나레이션 배치,한국영화의 전통적 매너리즘 도출,지나친 스토리 텔링등 허점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나 감독이 쳐해있던 시대상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발상으로 작품에 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지식인의 고뇌와 경제성장에 따라 무력해지는 현대인들의 우울과 반성을 도출시키면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터널을 지적으로 관통시키고 있다.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종교인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외쳐대는 주인공의 신의 무력함을 일깨우는 메시지이다.
시나리오상의 문제점은 영화연출의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유현목 감독이 영화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데 끝까지 부담으로 남는다.신과 인간의 문제는 목사와 제자․형사와 목사․주인공과 추종자등의 대비를 통해 본질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고 해석상 신은 판정패를 당한다.
어쩜 신은 주인공의 대사처럼 인간들이 만들고 위안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양심의 주체는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점을 감독은 지리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고 지나칠 정도로 성경귀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정부분은 남미의 민중신학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으며 신이 인간의 비인간화나 악에 대해 응징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하나의 밀알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주인공의 민중적 고행의 삶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꿈과 신념을 다루고 있는데,소설이 가지는 논리성이나 내면구조의 선을 넘어서서 영상을 통해서 실재하는 고뇌와 모순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떠올리며 등장인물의 현실감 있는 삶을 통해 시적 동화력을 추출하고자 한다.
영상위에 떠있는 관념시는 관객에 대한 압도적 구속력으로 이 영화의 메시지인 누구도 절대적 진리 앞에 자유스러울 수 없음을 감지케 한다.
제 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110분짜리 이 영화는 이미 고인이 된 주선태,박암과 같은 톱 연기자들과 오중근과 같은 알만한 단역배우들 영화음악담당자 한상기씨를 접할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된 최불암,이순재의 젊은 시절을 살필 수 있으며 평론가박평식과 방송국 PD가된 최길규와 같은 조감독들의 이름도 나와 재미가 있다.
▲한국영화계 마이스터 유현목
『사람의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유현목의 일생을 스케치해 볼 필요가 있다.지금 그는 한국 영화사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젊은 영화 애호가들은 그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다.
1960년작 『오발탄』은 그의 대표작으로 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수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그 성과란 마지막 까지 최종 최우수작품상 후보로 이 작품이 경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유현목의 잠재력을 모르는 심사위원들은 유럽의 영화감독에게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만들 당시 나는 유감독과 매일 얼굴을 맞이하고 있었다.큰 어른․아버지․선배․친구로서 그는 그림자와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독일문화원내 영화동아리 동서영화동우회 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나와 같이 한국 영화 발전 방향을 토론했고 영화학도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줌으로써 지금의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 했다.
78년․79년 내가 유감독 옆에서 관찰한 그는 박정권 말기의 우울을 한국의 현대사와 접목시키고 종교적 차원에서 문제점을 해결하고 한국을 비상시키고자 했으며 충무로 영화판의 노을을 이해하려고 하지않았다.『사람의 아들』은 대작이 아니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영화도 아니다. 좌절과 나약함,시대적 암울함에 침묵하는 양심을 대변한 지식인의 반성문이다. 장인감독 유현목은 1925년 7월 2일 황해도 사리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특히 모친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서 그를 목사로 키우고자 할 정도였다.
명석한 두뇌로 갇힌 사회의 매너리즘을 싫어했던 그는 자기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을 항상 찿고 있었다.음악,무용등 예술을 섭렵하던 그는 휘문중학을 졸업한 후 해방 이듬 해 불교학교인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을 하게된다.이것도 묘한 인연으로 생각된다.기독교적 성장 배경과 불교학풍의 접목은 그의 인생관과 영상철학의 폭을 넓히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대학에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어 희곡․시나리오 창작등 왕성한 활동을 한 결과 그는 45분짜리 최초의 대학영화 『해풍』(49년)을 제작,연출하게 되었다.
50년 대학을 졸업한 뒤 몇몇 조감독을 거쳐 54년 이규환의 『춘향전』조감독을 끝으로 55년 『교차로』로 정식 감독이 된다.
58년 서울대 미대 출신의 미모의 규수 박근자와 결혼 함으로써 그는 예술의 각 장르를 두루 섭렵한 셈이되고 장인감독이 될 수 있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게된다.
유현목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매력중의 하나는 영상적 저항정신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60년의 『오발탄』인데 군당국에 의해 상영정지 명령을 받아 63년 을지극장에서 재상영 되었고,최근까지 이 작품은 대학생의 영화교과서로 이용되고 있으며,96년 뉴욕 필름 라이브러리에 영구보존된 뛰어난 작품이다.65년 『춘몽』으로 외설 시비에 휘말려 불구속 그리고 기소유예등 한국영화가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선봉에서 항거하는 모습을 보였다
.
그는 소형영화작가회,대학영화동아리등 아마츄어 집단에 아직까지 꾸준한 애정을 보이고 있으며 대학교수,예술원회원으로 한국영화발전에 힘쓰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긴 대사 짧은 이야기
박정희 정권의 막바지 독재의 그늘은 아직도 무겁게 민중들을 짓누르고 있었다.지치고 숨통막히고 더 이상 여명은 희망이 아닐 것만 같다는 자조적 말들이 난무하던 때이다.
이때 등장한 『사람의 아들』은 종교 자체에 대한 회의 뿐 아니라 시대의 우울을 종교에 대비시킨 수작이다.아울러 영화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80년 서울의 봄을 알린 작품이지만 광주의 피비린내를 그 누가 알아 차렸을까?
탱크를 앞세우고 대학로와 광화문에 진주한 계엄군의 군화소리는 그들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보기 힘든 위용을 지니고 있었다.이제 보라!그들은 지금 철창에 갖혀 잉여의 몸이 되어있다.
70년대를 숨긴 『사람의 아들』의 매력을 살펴보자!
형이상학적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는 비와 천둥이 치던 어느 날 요섭이 교회 문을 열면서 설교적․교훈적․웅변적 대사는 독백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약간 음산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교회는 앙각과 부감으로 부지런히 조명되고 주인공 요섭의 발길에 따라 카메라는 부산을 떤다.프레임은 정석으로 짜여지고 조명은 한국식으로 배치되어 있다.요섭의 신에 대한 반항은 요섭의 과장 연기로 까지 이어진다.
주님은 핍박받고 굶주리고 헐벗고 고난받는 민중들에게 어떠한 구원을 베풀지 못하고 주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위선과 허위,부귀와 권세가 판을 치는 세상이 정의로운 사회로 둔갑하고 있다는 깊은 회의에 빠진 민요섭(하명중)은 다니던 신학교를 도중하차한다.
경찰서 수사과 왁자지껄한 입씨름을 뒤로하고 창을 내다보던 남경호 경사(최불암)는 수녀들의 자전거 타는 광경을 보고 미소를 띄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담당형사로 배정된다.
요섭은 대구 기도원 부근 안개낀 호수가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된다.그는 작업복 한벌과 한권의 성경책을 유품으로 남겼다.그러나 얼굴 표정은 지극히 평화롭고 천국을 본 사람처럼 비추어 진다.
요섭이란 인물을 개성화 시킨 둥근 테의 안경과 털실로 짠 겨울 모자는 테레사 수녀의 청빈을 닮아간다.요섭의 칼맞은 자리를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특효와 분장기술의 수준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된다.사건을 담당한 남경사가 죽은 요섭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사건의 실타래는 요섭의 친구 황전도사(김석훈)로 부터 나온다.
신학교 동기인 황전도사는 8년 만에 우연히 요섭을 만났고 거지 행색의 그는 황전도사에게 기도원에서 당분간 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그리고 10일 만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아인 요섭은 10세때 미국인 알렌의 양자가 되었고 대학 2년 수료후 신학대학에 편입한다.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기적을 보이라고해서 이단․사탄․악마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아하스 페르쯔의 방황의 이론에 심취 당한다.
담당 배교수(이순재)는 요섭의 학창시절을 말하면서 학교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고 그가 학교를 떠난 것이며 지식과 신앙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요섭이 주님께 너무 성급한 보상을 바랐다고 말한다.요섭은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모두 넝마주이,고아,나환자,노동자 등을 위한 실천자금으로 쓴다.
사실 요섭은 실천신학의 추종자로서의 삶을 자랑스러워 했다.넝마주이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거리의 부랑아를 집으로 데려오고,문둥병으로 밝혀진 한나를 집을 팔아 도와주고,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고 오는 요섭은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굿게 믿고 있었다.
요섭은 8년 전 응답하지 않는 신에 대한 회의와 후원금을 미끼로 유혹해온 문장로 부인(오미연)과의 간음사건으로 학교와 교회를 떠난 것으로 밝혀진다.또한 요섭이 남긴 노트에서 시몬 베드로 이상의 수제자이자 요섭을 끝까지 추종했던 인물이 조동팔(강태기)이었음이 밝혀지고 남경사는 조동팔(강태기)의 아버지(주선태)와 창녀 윤향순(오수미)을 만나 동팔이가 요섭을 신봉케 된 이유와 그들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 대신에 자기들만의 새로운 신을 가지려 했던 과거를 탐지한다.요섭 추종자 동팔은 사망한 행려병자 김동욱의 이름을 빌려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자기들 만의 신을 믿으며 범법과 창녀 김순자와 결혼한 과거가 드러난다.
요섭은 민중․해방신학에 몰두하여 실천만이 선이라고 믿으면서 빈민구제사업을 모색한다.오늘을 구제하기위해 새로운 신이 창조되어야 하며 보다 실천적인 선의 구현을 위해서 종래의 가치체계가 규정한 부도덕 따위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요섭은 부산 부두노동판 주변에서 알게된 조동팔(강태기)을 제자로 삼고 교세를 넓히며 거리의 고아,불구자,창녀,걸인들을 모아 천막교회를 세우고 그 유지비는 동팔의 절도,강도 등의 방법으로 충당하게 된다.그러나 요섭은 스스로 창조한 신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고아원에서 지극히 아꼈던 한나 소녀는 나병환자로 밝혀지고 그녀에게서 정통적 기독교 신앙의 근원을 발견하고 천막교회의 피리부는 장님에게서 실재하는 신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는 천막을 떠나 진정한 영적 구원을 얻기 위해 여호와의 전당인 산속 기도원을 찿게된다.
한편 열렬한 추앙자인 동팔이 범죄행각에서 천막으로 돌아와 보니 모두들 떠나고 썰렁한 냉기만 감돌고 있었다.요섭을 찿아 헤메던 동팔은 마침내 기도원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요섭을 발견하고 다그친다.요섭은 인간들에게서 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요섭은 우리들이 창조한 신은 허상이었으며 진정한 영적 충족감을 주는 정통적 기독교로 돌아가고자 권유한다.여호와에게 돌아간 요섭에게 배신과 분노를 느낀 동팔은 요섭을 호수가로 유인하여 당신의 신을 배반한 죄값으로 이 칼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며 그를 무참히 찔러 죽인다.요섭은 하늘을 향해 주여 이것으로 제죄를 사하여 주시렵니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쓰러진다.
마침내 엄청난 범죄의 윤곽을 파악한 최형사 일행이 동팔의 천막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농약을 마신 다음이었다.
조동팔은 자신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며 민요섭이 세운 이런 천막교회보다 더 거창한 신전을 세우겠노라고 절규하며 숨을 거둔다.
★에세이식으로 영화보기
유현목이 만들어낸 『사람의 아들』은 충분한 문제제기와 주제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설득력을 갖고있다.영화예술의 위대함을 밝혀주는 문학작품의 영화에의 수용으로 우리 주변의 철학적 명제를 단순화 시켜준 것이다.획일화되고 군사문화가 판을 치던 때,눈먼 관객들을 치유해낸 감독의 톄마는 향락을 부추기던 당시의 영화들에게 일침을 가했다.그가 관객들에게 고했던 영화는 지금 뚜껑을 열어도 시대를 대변한 작품이라는데 반대가 없을 것이다.시대의 아픔을 고하는데 섬세한 영화적 묘사는 오히려 사치라는 생각이든다.
『사람의 아들』은 거칠지만 나름대로 멋이있는 삼베 옷 같은 영화이다.그러나 보다 함축적인 대사와 다양한 볼거리와 많은 영화적 수사학이 동원되고 히치콕과 같은 영화수법을 원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현실과 성경의 대비는 스칠과 보이스 오버로 로 처리되고 시각적 공허감을 일정 메꾸어 준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영화현실을 제대로 꿰뚫는다면 매끄러운 영화를 만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TV에 관객을 빼았기고 열악한 제작환경과 부족한 장비,시나리오를 비롯한 우수인력을 방송국으로 빼았기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흥행감독이 아닌 감독의 작품에 기본장비를 비롯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최소의 자본으로 그럴사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제작자들과의 타협점이다.그 어려운 장애물을 헤치고 『사람의 아들』이 탄생되었고 대종상 작품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한것이다.관객동원과는 무관한 수상용 영화가 되어 버린 셈이다.
『사람의 아들』은 세심한 시각적 요소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편집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한상기의 음악은 당시 영화음악의 현주소이다.사실 그는 당시 잘 나가는 현을 주조로한 영화음악 담당자였다.하명중의 풀잎 연기는 어떠한가?
스타일리스트로서 그의 고유 브랜드를 확보하고 있는 유현목의 작품을 하나 하나씩 접하면서 동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던 이들은 영화 이면사를 꿰둟어 볼 수 있어야 한다.
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예술의 영원성을 생각하고 있으며,휴머니스트로 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고,빠른 통일과 항구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그는 아직 어디인가에 영원히 때묻지 않는 평화의 마을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별을 보고 우주를 꿈꾸며 차가운 안경너머 잔잔한 미소로 별이 된 어머니를 생각하며 상실해야했던 아버지와 그의 아내와 같이 살아갈 따스한 별들의 고향을 그리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별이 될 그의 여정에 비친 인간군상중의 하나이다.그는 이 작품으로 신앙고백을 한 셈이다.크리스찬으로 실천하지 못한 사랑은 영화화로 대속받은 것이다.
★클로징을 위한 덧붙임
『사람의 아들』은 1979년 계간 「세계의 문학」(봄호)에 실린 작품으로써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예수의 탄생은 많은 어린이의 죽음을 불러왔다.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것이다.'라는 식의 성경을 뒤집어 해석한 이 소설은 성경의 계율과 인간적 욕망을 대비시키며 현대인의 사유의 핵심에 접근한다.
종교와 진리 문제를 간략하게 흥미롭게 접근해 나아가는 가장 적합한 매체는 영화이다.
기독교도가 되면 반드시 고민해야할 하나가 신의 존재 여부와 교회개혁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요섭의 도입부 독백은 가히 절망적이다.
'이젠 정말로 지쳤습니다.당신의 말씀를 더 이상 따를 길이 없습니다.당신이 일러주신 가르침은 실천되지 않은 채 위선과 허위를 낳았으며,당신이 약속하신 천국은 오늘날 지상의 부귀와 권세보다도 허망하여 졌나이다.'
유현목의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 미학은 종래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산업화와 자본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군상들의 방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돌파구로서의 신의 문제를 핵심테마로 삼으면서 어쩜 몽매한 대중들을 영화와 멀어지게하는 영화의 대표였다.
70년대는 산업화에 따라 기독교도 팽창하여 갔고 기업형 교회가 회사 경영이상으로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가난한자들의 주머니까지도 넘겨보는 상황이 전개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은 그 엄청난 자본축적에도 불구하고 '신이 이쁘게 여기는 자들=가난하고 불쌍하고 장애를 입은 자들'에 대한 봉사활동이 극히 적었던 시절의 작가와 감독이 따스한 마음으로 차갑게 응시한 70년대 보고서이다.
어떤 형태로건 예수를 닮으려했던 요섭은 긴 방황을 끝내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는 주님의 품에 안긴다.그의 조그만 모습과 함께 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주님 말고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음을 앎으로써 그는 죽은것이다.죽음으로써 그는 살 수 있는 것이다.
97년 이 황량한 벌판에서 아직도 요섭은 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장 석 용(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