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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 (6)
-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파리의 로댕미술관으로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2013년 6월 11일(화)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은 영국을 방문할 때마다 들렸는데, 항상 느끼는 것은 그 전시 규모가 방대하여 관심분야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술관순례가 목적인 이번 방문에서는,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Mitsubishi Corporation)가 후원하고 있는 일본관에 들러, 일본 미술이 유럽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였다. 특히 다음 여정이 프랑스의 로댕미술관인데, 거기에는 일본 미술을 동경하였던 고흐의 <탕기 영감의 초상(Le Père Tanguy, Oil on Canvas, 92X75m, 1887-88, Musee-Rodin)>이 걸려 있어 로댕작품 만큼이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런던의 마지막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버킹엄궁전으로 갔다. 11시 15분부터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난번 방문 때에는 궁전 울타리에서 가까이 관람했지만, 이번에는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가 있는 계단에 앉아 우산을 받치고 멀찍이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도 없이, 근위병들의 화려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겠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버킹엄 궁전은 1705년에 건립된 여왕의 공식거주지이자 집무실이다.
교대식을 마치고 기마병들이 사라지자, 우리 내외는 그린파크(Green Park)를 가로질러 지하철역으로 갔다. 그린파크는 16세기 초 왕실의 사냥터였던 곳으로 17세기 중엽부터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였다. 잔디밭에 방문객들을 위해 마련된, 천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짧은 휴식을 즐기고는 지하철을 타고 럿셀스퀘어로 향하였다.
지하철에 내려 대영박물관 가는 길에 럿셀호텔에 들려, 당대 예술가들의 모임인 불룸스버리 그룹 멤버들이 자주 회동했던 버지니아울프 카페를 방문하였다. 몇년전 방문했을 때 카페를 세미나실로 리모델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공되어 기념 세미나실로 사용되고 있다. 방 앞에는 ‘불룸스버리 그룹’(The Bloomsbury Group)을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 사진과 곁들여 만든 판넬이 걸려 있다.
<블룸스버리 그룹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던 버지니아울프 카페 입구>
대영박물관에서는 한국관과 일본관은 물론, 서양미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관과 이집트관을 둘러보고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reet)에 있는 ‘아리랑’ 음식점에 들러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다. 가격은 좀 비싼 편으로 30파운드(육개장 2 + 밥 2 + 모듬김치 1)를 지불하였다.
단체여행을 하게 되면 가이드가 있어 자주 한식집에 들리지만 둘 만의 자유여행이어서 특별히 애를 써서 찾지 않으면 한식을 먹기가 어렵다. ‘아리랑’은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추천 받은 음식점이었는데, 맛이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오랫동안 한식에 굶주렸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헤롯백화점(Harrods)에 들렀다. 헤롯백화점은 과거 영국황실의 용품을 납품했던 곳으로, 세계의 각국 부호들도 일부러 여기까지 쇼핑하러 온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 비와 함께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도디 알 파예드’(헤롯 소유주의 아들)로 뉴스거리가 되었던 곳이다.
1. 자포니즘(Japonisme)
'자포니즘'이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던 현상을 말한다. 19세기말 유럽 화가들 가운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모네는 자신의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였으며, 만년을 보낸 지베르니에서는 일본풍의 정원과 다리를 만들어 연못을 조성하고, 수련을 심어 이를 즐겨 그렸다.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많은 일본 판화를 수집하였으며, 특히 고흐는 일본에 대한 동경이 커서 1888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 것도 일본으로 가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흐가 일본을 동경하게 된 것은 일본의 채색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둥둥떠다니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중적인 목판화이다. 특히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 1760-1849)의 <후지산 36경(Thirty-Six Views of Mount Fuji)>이 유명하며, ‘단순하면서도 장식적이고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우키요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기법과는 판이하게 달라, 오랜 관습을 떨쳐내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갈구하던 파리의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
<Katsushika Hokusai, Mt Fuji from Goten-yama, 1830-33, woodblock(paper), 25.6X37.1Cm, The British Museum>
이 목판화는 오늘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후지산 36경>의 하나이다. 특히 호쿠사이의 대표작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The Great Wave>은 다른 전시회에 대여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림에서 보면, 에도에 있는 고테야마(Gotenyama) 언덕에서 벚꽃나무 사이로 사가미 만(Sagami Bay) 건너편에 후지산이 보인다. 무사들과 마을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벚꽃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며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있고, 해변을 따라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2013년 6월 12일(수)
런던(St. Pancras 역 10:25 출발)에서 파리(Nord 역 13:47 도착)까지 유로스타를 2시간 20분 동안 타고 갔다. 현지시간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면서 한시간이 더해져 파리도착시간이 13:47분이 된 것이다. 로밍해간 핸드폰에서 현지시간을 자동으로 조정하여 알려 준다.
우리 세대에 일어난 전자혁명은 가히 놀랄 만하다. 회고해 보면, 대학 때 술 사주며 강의노트를 빌려 일일이 손으로 베끼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복사기로 대량 복사하여 나눠 갖기도 하고 또 핸드폰으로 찍기만 해도 된다. PC도 계산을 주로 하던 8비트 퍼스널컴퓨터가 나타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세계를 안방처럼 들여다 볼 수 있음은 물론 컴퓨터로 가히 할 수 없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을 지배해 버렸다. 앞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이 기술혁명은 얼마만큼 우리 삶을 좌지우지 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기술발달의 산물인 유로스타는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의 깊은 바다 밑을 관통하는 터널을 통해 런던과 파리까지 직통하는 열차이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8시에 호텔을 나섰다. 짐을 가지고 지하철로 호텔 옆 햄머스미스역에서 판크라스역까지 가야하는 데다,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기차도 체크해야만 했다.
런던 지하철역에서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거의 찾기가 어려워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다행히 젊은이들이 출근시간으로 바쁜데도, 선뜻 우리 짐을 계단을 오르내릴 때 대신 들어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아내는, 비록 지하철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불편하고 깨끗하지 못했지만 역시 선진국이라 국민성이 우리보다 좋다고 하루 내내 칭찬을 입에 달고 다녔다.
2. 로뎅미술관
파리에 도착하여 호텔에 체크인한 후 바로 지하철로 로댕미술관(Musée Rodin)으로 향하였다. 로댕미술관에서 로댕의 조각 작품은 물론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조각정원에는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등 로댕의 주요 작품과 가지각색의 장미가 어우러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입장료도 미술관 관람료 7유로에다 별도로 정원을 관람할 사람들은 1유로를 더 내야 한다. 특히 정원 안에 있는 장미를 각별히 사랑하던 로댕에게 헌정된 자줏빛 ‘로댕장미’가 서너그루 신비롭게 피어 있었다. 정원에 매료되어 어두움이 서서히 찾아와서야 비로소 조각들과 장미의 환송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로댕미술관에서 군사박물관 앵발리드(Invalides)를 지나 알렉상드르3세 다리(Le pont Alexandre III)를 거쳐 에펠탑(Tour Eiffel)까지 걸어갔다. 좀 무리한 것 같았으나 건강을 위해 걷기를 오지게 하는 셈이라고 서로 위로했다. 에펠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귀가하였다.
3.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
로댕미술관에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은 고흐의 <탕기 영감의 초상>이었다. 이 작품은 고흐의 일본에 대한 동경이 집약된 그림으로, 일본 판화가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고흐는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접함으로써 렘브란트와 밀레풍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다.
탕기는 파리의 한 화방을 경영하던 노인으로 고흐에게 물감과 캔버스 같은 미술용품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로댕이 탕기 영감의 딸로부터 구입했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탕기는 일본 불상처럼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지긋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며 똑바로 앉아 있다. 탕기의 뒤에는 우타마로(Utamaro, 1753-1806)와 후쿠사이(Hokusai, 1760-1849) 같은 화가들의 우키요에 다섯 점이 걸려 있다. 탕기는 화방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일본 그림이 프랑스 그림 애호가들 사이에서 매매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배경 그림에서 보면 후지산은 마치 후광처럼 탕기의 머리위로 솟아 있는 것이 이채롭다.
<Vincent Van Gogh, Le Père Tanguy, 1887. Oil on Canvas, 92X75 cm, Musee-Rodin>
로댕미술관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과 로댕이 수집한 미술품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190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로댕이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살았던 비론 저택(Hotel Biron)이다. 1911년 프랑스 정부가 비론 저택을 매입하였고, 로댕이 자신의 작품과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미술관으로 남겨달라고 제안했다. 로댕 사후 1919년에 개관하였고, 2005년에 개수되었다.
4. 로댕의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Auguste Rodin, La Porte de l'Enfer, 1880-1900, Bronze, H.635cm X L.400cm X P.85cm>
로댕은 188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새로 지을 장식미술관의 정문 조각을 주문받았다. 1884년 중반에 청동 주물을 준비할 정도로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나 1885년에 미술관 건립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렇지만 로댕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작품을 수정하여 1900년에는 석고 버전을 최초로 공개했다. 로댕 사후에 로댕미술관의 학예관이 180개 장면 전체를 종합하여 1926년에야 최초의 청동상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에 있는 작품들 중 일부가 개별 조각 작품으로 확대되어 만들어 졌으며 대표적인 것이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이다.
청동문의 주제는 로댕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었다. 문 바로 위의 가로대에 걸터앉은 인물의 조각은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으로 인간의 처절한 최후를 내려다보는 단테라고 한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 이후로도 똑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인간의 끊을 수 없는 운명이 곧 <지옥의 문>의 주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로댕갤러리 플라토(Plateau)에 가면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을 만날 수 있다. 청동조각은 녹인 청동을 석고 틀에 부어 찍어낸다. 이론적으로는 틀 하나로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로댕의 청동 조각은 대부분이 로댕의 사후에, 로댕 작품의 제작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프랑스 정부기관의 주관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무분별한 주조를 막기 위해 12개만 제작한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있다고 하며 <지옥의 문>은 현재 7개, <칼레의 시민>은 12개가 주조되었다.
<로댕미술관, 장미정원에 있는 동상 ‘생각하는 사람’앞에서>
5. 로댕과 릴케
27세의 젊은 시절 릴케는 프라하에서 전시 중이던 로댕(당시 62세)의 제안으로 1905년 9월15일부터 1906년 5월12일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다. 이때 릴케는 로댕의 위대한 작품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로댕을 만난 것을 일생의 큰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 위대한 조각가를 만났던 일이 어떤 문학작품보다 자신의 시(詩)에 훨씬 더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로댕전기>에서 회상하고 있다.
릴케는 로댕이 영감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작업 중’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릴케는 영감에 의해서 무언가가 떠올라야 글을 쓸 수 있었지만, 로댕은 작업 자체를 영감으로 삼았던 것이다. 로댕이 릴케에게 가르친 것이 ‘항상 일하라’였다는 것이다. 릴케는 예술이 영감이나 천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고 닦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로댕을 통해 깨달았다. 릴케가 수 백 가지 주제를 선정한 후에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서 시를 쓴 것도 로댕의 영향이었다.
6.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는 동료이자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꼽히던 로댕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천부적 재능을 알아본 43세의 로댕은 19세의 그녀를 모델 겸 조수로 채용한다. 당시 로댕은 <지옥의 문>을 제작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각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로댕 곁에는 이미 30년이 넘게 사귀어온 로즈 뵈레가 있었다.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던 로댕은 까미유가 아닌 로즈를 선택했다. 로댕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했지만 이별을 맞이하게 된 까미유는 충격과 슬픔을 창작의 열정으로 승화시켜 <왈츠(The Waltz, 1893)>, <중년(The Age of Maturity, 1894)>, <애원(The Implorer, 1899)>, <플루트 연주자(The Flute Player, 1904)> 등 훌륭한 작품을 내놓는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제약 그리고 로댕의 방해로 인해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까미유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작업실에 은둔하였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에 의해 1913년 정신병원에 보내어졌다. 정신병자라기보다 가족들에 의한 강제 격리였다고 한다. 그 후 30여년간 격리되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여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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