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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조선의 연산, 광해조 간신으로 유자광, 임사홍과 이이첨을 꼽는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썩 유쾌하지 않은 ‘달인’호칭을 하나씩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유자광이 ‘고변의 달인’이라면 이이첨은 ‘아부의 달인’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의 주인공 임사홍은 ‘무모한 아집의 달인’이라 부를 수 있겠다.
-> 경기 여주읍 능현리 산25- 5, 향토유적12호. (풍천임씨 선영 내) 명성왕후 생가터 인근이다.
♠임사홍(1445~ 1506, 62세): 본관 풍천, 부친은 세종~ 세조 때에 내의원 출신으로 어의로는 최초로
좌찬성을 제수받은 임원준이다.
임사홍은 당대의 명필이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여진어까지 능통한 외국어통으로 사신으로 중국을
다녔었고, 또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던 박학다재한 재목이었다.
아비 덕에 배필을 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의 따님을 맞이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전주이씨 부인과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들도 역시 왕실과 혼인하여 장남 임광재는 예종의
현숙공주와 혼인하였고, 3남 임숭재는 성종의 휘숙옹주와 혼인하였다.
이렇게 멀쩡한 신분의 양반님네 자제가 어울렁 더울렁 짧은 한 세상 충분히 잘 사시다가 가실 수도
있을 위치이었는데, 우째? 역사에 ‘모리배’로 낙인찍혔는지 그 과정을 살펴봄직하다.
▶1465(세조 11년), 알성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로 공직에 나서면서부터 공신들과 왕의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한명회, 신숙주 등을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강하게 비판
하기도 하였던 처음에는 아주 소신이 뚜렷한 올곧은 선비이었다.
▶1468년, 유자광의 고변으로 일어난 ‘남이의 옥사’에서 임사홍만은 주관이 강한 만큼 남이장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사림의 강한 비판을 받게되었고, 이후 조정대신들로부터 줄곧 ‘소인배’라며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사림들과 어울리기보다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면서 경연에도 나갔고, 세조,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강론, 경연관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472년, 승정원 승지로 박탈되면서 매우 강직하게 처신하며 부패행위 등을 탄핵할 때에는 대소신려
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며 성종 초반 왕의 총애 속에 이조판서까지 승승장구한다.
▶1477(성종 8년), 연산의 생모 폐비윤씨의 사건이 터진다.
대간, 사헌부, 의금부 등 삼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왕비를 탄핵할 때 당시 우승지 임사홍은 이 나라의
왕이 되실 세자의 생모를 탄핵한다는 일은 안되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 일로 다시 간사한 인물이라며 사림들로부터 다시 인신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 해에 그런 상황에서 승정원승지로 있으면서 사림의 공적이 된 유자광과 결탁하여 힘을 모은다.
곧 도승지 현석규의 탄핵을 뒤에서 사주하였고, 과부재혼사건으로 승지들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자
성종은 유자광과 임사홍이 파당행위를 저질렀다하며 유자광을 동래로 유배 보낸다.
▶1478(성종 9년) 4월, 흙비가 내리는 변괴에 삼사와 대간들은 합동으로 하늘의 경고라면서 왕에게 근신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 때 임사홍은 다시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 것에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를 하자 본격적으로 삼사의 맹렬한 성토를 받으면서 파직되고
처조카 이심원과의 다툼까지 얽히면서 동년 5월 의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임사홍이 자기 주관에 따라 생각하고 던진 한 마디로 마침내 사림과 불구대천지원수를 만들었다.)
(※1478(성종 9년) 5월, 처조카 주계부정 이심원의 고모부 임사홍 비판사건의 전모?
-> 이심원(1454~ 1504,51세: 본관 전주)이 세조의 공신집단을 쓰지 말라는 상소를 올리자, 당시 도승지 임사홍은
모름지기 군왕은 옛 신하를 써야한다며 반박하였다.
그런데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자이고, 임사홍은 이심원의 할아버지 보성군(효령대군 4남)의 사위였으니 임사홍의 처조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심원이 성종에게 친계(왕과의 직접면담)를 요구하여 그 자리에서 “고모부는 참으로 소인입니다.”라며 임사홍을 내리깍고 사림의 편을 들었다.
성종은 왕가 친척사이의 다툼에 크게 화를 내시며 임사홍 부자는 파직 후 먼저 의주로 유배 보내졌다.
이심원은 행실이 옳고, 경학에 밝은 종친이었으나 이 일을 시작으로 이후 ‘소릉 복위상소’ 및 ‘성녕대군 후사 문제’까지 얽히면서 1480년 할아비 보성군에게 불효죄로 고발당해 제사권과 장자권을 아우 이혼원에게 빼앗기고 동년 9월 경기 장단에 부처되었다가, 12월에는 강원 이천현으로 이배되었다.
주계군 이심원은 갑자사화 때 두 아들과 함께 임사홍에 의해 화를 당하여 죽음을 당하였고, 중종반정 후 조광조에
의해 1509년 복권되었다.)
-> 충남 계룡시 금암1길 10 (문화재자료 338호), 주계군 이심원 충신정려현판.
그 때 임사홍의 유배 길에는 아무도 나서서 구제하지 못하였다. 사림들의 10여년에 걸친 지나친 견제로 완전 왕따신세로 전락되면서 이후 관직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임사홍은 절치부심, 마음의 앙금이 더하면서 사림과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져갔다.
이후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림이 잠잠해지자 성종의 배려로 다시 등장한다.
▶1488(성종 19년), 절충장군 부호군에 제수된 후, 한학과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이듬해 관압사로 연경에 다녀왔고, 다시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를 갔다온 후 사역원
에서 역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
▶1491(성종 22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 언관들의 탄핵이 다시 시작되어 한 해
내내 계속 그를 탄핵한다. 그래도 그 해에 성종의 분에 넘치는 배려로 4남 임숭재와 성종의 서차녀
휘숙옹주가 혼례를 올리면서 임사홍이 왕실과 겹사돈이 되자 시비도 차츰 줄어들었다.
▶1495(연산 즉위년), 연산이 즉위하면서 가선대부에 이어 가선대부상호군이 되었고, 아들 임숭재가
왕의 처남으로 총애를 얻으면서 그 덕에 높은 품계에 오른다.
그러나 그 해 4월, 현숙공주의 남편인 장남 풍천위 임광재를 병으로 잃어 버렸다.
▶1498년, 무오사화에서 차남 임희재가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사화에 연루되어 장(杖) 100대에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가 곧 풀려났지만, 6년 후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에는 사림의 일원으로써 연산을 비판하다
결국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1504년 4월, 연산이 생모 폐비윤씨의 추숭사업을 시도할 때 사림관료들은 모두 반대에 나섰다.
이 때 임사홍은 연산의 장인 신수근과 함께 연산의 외할미 고령군부인 신씨를 왕에게 주선하면서
이를 기화로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임사홍의 사림파에 대한 쌓이고 쌓인 피의 보복이었다.
이 사화에서 임사홍은 자신의 둘째 아들 임희재와 외사촌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으나 아무도 구제
하려하지 않았다. 다만 사건을 추국하는 형관(刑官)이 되는 것만은 거부하면서 둘째 아들 희재의 죽음
조차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일로 인해 연산의 신임을 더 얻게 되었다고 한다.
▶1504년 8월, 자신은 병조판서, 아들 임숭재는 풍원위가 되었다.
그러나 임사홍의 주임무는 글쓰기와 채홍사 일이었다고 한다. 임사홍은 채홍사 노릇은 아들 임숭재와 달리 내키지 않았었는지 마지못해 성의없이 임하여 연산으로부터 엄한 힐책을 받았던 기록이
‘연산군일기 1505년 9/18일’ 기사로 보인다. “ 은혜를 모르고 .... ”
▶1505년, 명나라 사신의 원접사가 되었고, 숭록대부에 가자되었다.
그 해 4남 임숭재까지 병으로 잃고 말았다. 이로써 임사홍의 아들 셋이 모두 애비보다 먼저 저 세상
으로 가버렸다.
-> 임숭재와 휘숙옹주 합장묘 ( 여주읍 능현2길 103- 22, 뒤편 기슭.)
▶1506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우참찬 승진 후 이어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1506년 9/02일, 중종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격살되었다. (향년 62세).
▶1506(중종 원년) 9/26, 의금부가 임사홍의 죄를 논하여 부관참시와 적몰가산을 상소한다.
=> 부관참시와 적몰가산은 면제하고 사급했던 집만 속공시키도록 하라. 또 묘소의 석물도 철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교하시다. (며느리 휘숙옹주가 아직 살아있는 관계로 관대히 처리하였다.)
조선에서 간신이라 함은 사림파의 반대세력이다. 특히 14대 선조 이후는 완전히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반대파는 무조건 ‘간신’이다. 고거이가 승리자의 맛난 특권이기도 하지만.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사림파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극이었다?
임사홍이 폐비윤씨의 일로 연산을 부추겨서 일으킨 사화란 것이 통설이지만 실제로 희생당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임사홍에게 호의적이었던 이극균, 어세겸, 홍귀달 등도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 원한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면 자신의 처조카인 이심원과 그 아들 이유녕 정도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 즉 왕의 세력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훈구세력과 깐깐한 사림세력을 싸잡아 치도곤을
내면서 그 빌미를 생모 폐비윤씨에게서 얻어낸 사건이었던 것이다.
결국 임사홍은 연산의 복수극(?)에 조연을 맡았으면서 매는 주연으로 맞았다는 야그인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아비까지 연좌되어 3대 모두가 관직 및 공신자격이 삭탈된 것은 물론이요
공신록에서 조차 모두 삭제되었다. 아울러 이 일이 원인이 되어 향후 내의원 어의(대통령 주치의)는
당상관이 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덕분에 선조 때 ‘동의보감’의 의성 허 준선생도 역시 생전에는 당상관이 될 수가 없었다.
어째서? 평범하게 일생을 잘 나갈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사림이란
거대 세력에 단지 자신의 뚜렷한 소신과 주관만으로 맞부딪치면서 앙금을 빚어내고,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인가??
일찍이 한 발 물러서서 흘러가는 대세와 적당한 타협만 했었어도 비록 이름은 크게 남기지 못할지언정 평범하지만 안락한 삶은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대나무가 삐뚤어짐 없는 꼿꼿한 자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눈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큰 지진에도 서로간의 얽힘으로 견딜 수 있는 뿌리의 촘촘함에 있었음을 몰랐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준비없이 소신만으로 세파에 휘둘리면서 타협 또한 몰랐으니 추구하던 세상도, 바라던 삶도 모두 이루지 못한 채 결국은 역사에서만 버림받은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인물의 자식농사 역시 총명한 둘째 아들 아비와는 다른 길을 걸으면서 사림이란 이유로 직접 죽음
으로 내몰았다. 부자의 혈연보다고 더 징그럽게 강한 것이 조선의 학통이었나 보다.
국왕의 딸들과 각각 혼인한 두 아들도 모두 아비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자식을 둔 아비, 어미의 천형이 바로 자식을 가슴에 먼저 묻는 것인데 말이다.
-> 임사홍 묘소 (동편 80m 지점에 부친 임원준의 묘소가 있다.)
-> 임원준 묘소 및 신도비 (여주읍 능현리 산25- 5), 조부 이조판서 임견 묘역도 같다.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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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부분 간신으로 불린사람들은 총명했던것같아요!
글구 그기준이 사림에 의한거라면 공평치는 않은듯하네요~
잘보았어요~~^^♥
역사 이야기에는 그 끔찍한 부관참시 기록이 왜캐 그리 많은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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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요.
이 글과같은 역사를 읽자니 공부도 많이되는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게 많지 않은게
그래서 공부도 때가있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능지처참도~~ㅠ
우리네 사람들이 왜 그리 남의 험을 잘 잡나~~? 했더니만.....당파싸움이 원인제공이군요.
그옛날에도 너그럽지 못했던 우리네 인심을 많이 느끼고 갑니다.
특히 있는 사람들~~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공부좀해야겟네요..ㅋ
이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실 수 있는 능력을 대단히 높게 평가 합니다.
제가 젤 좋아하는 역사이야기에 비회들입니다.
충신이든 간신이든 모두 사람사는 이야기입니다.
이리서면 충신이요 나도 모르게 저리서면 간신입니다.
지금 우리가 결정해야될 일이 아닌 책임감 전혀없는
지난 이야기들을 보면서 온고이지신입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잇느니 앞으로도 마니마니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보면서 이조가 시작될 무렵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엇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적당히 목숨부지하는 차원에 머물러 잇어야
뭔가 나중에 더 보여줄 것이 있지 죽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맞아요.
암튼 살아 남으면 이긴 거라는,,,,,
충신이든 가신이든~~ 끝가지 살아남아야합니다.
역사를 보면 오래 살아 남은사람이 결국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 대표적인분들이 황희정승, 한명회, 그밖에 많은데요.
전 또하나이기때문에 그많은 분들 이름을~~~못외우네요.
자식의 죽임을 지켜 보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싶었을까?
제가 넘 감상적인가요?
역사의 장을 재밌고 흥미롭게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 드립니다.....
무모한 아집의 달인도 출세 할 수 있었던 그 시대를 음미 하면서...
언제 이글이...
음..애들 내보내고 다시 올게유..
이렇게 많은 자료와 글로서 써 주심에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구요
그 똑똑함을 좋은쪽으로 더 많은 공을 남기도록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자녀들에게 본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히 읽고 갑니다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