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바다 위로 해가 지려 한다. 늦은 외출 준비를 하려는데 오늘따라 얼굴이 푸석하다. 며칠째 잠을 설쳐서 그런 거로 생각했다.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정체 모를 마음에 음악을 틀었다. 아무 세션 없이 기타 선율만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내 귀는 여러 차례 들어 익숙한 그 소리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슬퍼지는 중이다. 이렇듯, 익숙했던 사람을 잃는 건 반복할수록 더 낯설다.
바다로 향했다. 해가 지는 걸 볼 것이다. 서쪽 바다는 정확한 경계를 긋지 않고 모호하게 물든다. 해변을 걸을 계획까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걷고 있다. 그것도 풍경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우겨댔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발엔 검은색 구두가 신겨져 있다. 걸으면 걸을수록 구두가 자꾸 모래 속으로 푹푹 빠졌다. 그때, 휴대전화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한국에서 온 것이었다. 할머니의 사진. 분명 모래를 먹은 건 구두인데 괜히 내 목구멍이 껄끄러워졌다.
알고 있다. 모든 길 끝에서 우린 누구나 헤어져야 한다는 걸. 하지만 내 시간 어딘가에서 함께 걸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망설여진다.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똑같은지. 물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얼굴엔 볼이 움푹 팼다. 손과 발은 가지런히 모여 있다. 두 눈은 자는 것처럼 평온히 감겨 있다.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데 있어요? 딱 한 군데 있기는 해. 미국 손녀네. 하지만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그 꿈을 이룰 순 없었다. 그건 주변인들의 걱정이었고, 결정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우리 맏손녀. 그나마 화상채팅이 있어 할아버지의 그 꿈은 이룰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선 화면 속의 나를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꺽꺽 소리를 내며 우셨다. 궁금했다. 왜 나였을까? 그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리우셨던 걸까? 아니면 아들만 위하셨던 마음이 생의 마지막에 와서야 괜히 미안해지신 걸까?
모르는 소리 마라. 널 얼마나 예뻐하셨는데. 네가 맏손주잖니. 하지만 여전히 날 예뻐하신 이유가 그저 아래로 남동생을 보게 해 주어서라는 어른들 말이 떠올라 걷던 길의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려 잡는다. 다 인사 왔다 갔는데 너만 못 왔어. 그런데 아직도 저렇게 못 가시는 걸 보면 혹시 널 기다리시는 게 아닌가 싶다. 걸음이 뚝 끊긴다. 어정쩡하게 선 마음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검은 구두를 신고 땅에 붙박여있었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마다 파고든다. 불편하다.
독(Dock)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모래가 들어간 구두 한 짝을 벗어서 털었다. 그런데 힘없는 손에 미끄러져 구두 한 짝이 그만 물 위로 떨어져 버렸다. 그건 물결을 타고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울었다. 그리고 구두 때문이라고 탓했다.
지는 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자 그림자가 내 등 뒤로 조용히 물러섰다. 돌아보진 않았지만, 그림자 안에서 할머니와 난 손을 잡고, 서로 마주 보고 있을 것이다. 그 표정이 궁금하다. 하지만 그림자에는 표정이 없다. 이젠 물 위의 해가 붉은 머리끝만 겨우 보인다.
홀로 돌아가는 길에 짝 잃은 오른발이 어떻게 디뎌도 아프기만 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이제 황혼의 시간은 끝났다. 주변은 어둑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서는 예순다섯 살에 고아가 되셨다. 오늘은 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