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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열납되기를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7.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주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주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주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시편을 한 문장으로 된 우리말로 읽으니 시의 맛을 잘 모르고 히브리 시의 운율이나 리듬, 그리고 소리가 주는 감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의미만 되새기고 있다. 고대의 시들은 리듬과 소리까지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우리는 거기까지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C.S 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시편 19편은 시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시어 중의 하나라고 한다.
로마서 3장 1-2절에는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맡긴 백성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점에 있어서는 놀라운 민족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표현해 내고 그것을 지켜서 후대에 전한 민족이라는 점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탁월하게 생각하였다. 비록 그들이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말씀을 그대로 고집스럽게 지켰지만 그들이 그렇게 고집스럽게 지켰기 때문에 문자라도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가 그것을 다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이 뛰어나다는 것이 바울의 평가다.
[창조의 말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말씀에 대한 노래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지를 노래한 것이다.
1-6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했는데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한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분이 하신 일을 발견할 수 있다. 7-14절은 하나님의 율법을 노래했는데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자연계시는 경이로움은 있지만 인격적 친밀함이 없고, 율법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관여해 오신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그 말만 가지고 지키는 계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시편 19편의 결론은 14절에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 말씀처럼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입장과 하나님의 시각을 우리에게 열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사람이 받아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는 이런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눈이 열린 사람의 증언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언어로 기록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경험과 이해의 과정을 거쳤다는 말이다. 이해와 해석을 거쳤다는 것을 깨달으면, 내가 아는 것을 절대적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문자에 매이지 않게 된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생각나서 행하게 되었을 때 그런 것을 요즘 말로 ‘신의 한 수’라고 한다. 사람의 생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가 막히는 방법이 신의 한 수다.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와 바둑을 두었는데 3전 연패를 했다. 첫 판을 지고 나서는 충격을 받았고 두 번 세 번을 지니까 충격을 넘어서 수치와 자괴감이 밀려오는 상황이었는데 4국도 초반에 판세가 알파고쪽으로 기울어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이세돌의 78수 한 수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수였다. 바둑의 고수들이 다 관전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수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 한 수가 판세를 뒤엎어서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한 번을 이겼다. 지금 알파고는 은퇴를 하고 바둑계를 떠났지만 이세돌에게 패한 한판 외에는 전승을 기록했다. 알파고가 한 번 진 것은 이세돌의 78수 한 수 때문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위기의 상황을 뒤집어 놓는 그런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생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신의 한 수, 이 수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신의 한 수가 아니고는 인간의 판세를 이렇게 뒤집어 놓을 수 없다. 그 한 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다.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면서 ‘인간은 도무지 구제불능이야. 인간은 안 돼.’라고 생각하던 인생을 뒤집어엎어서 사탄의 일을 멸하시고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어떤 종교에서도 인간은 육체 때문에 문제라며 육체를 극복하고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육체를 가지고, 우리가 다 싫어하는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되돌리셔서 “인생에게 허락된 것이 축복이 아닌 것이 없다.”는 고백을 하도록 만드셨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이것이 하나님의 한 수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요12:24). 밀알은 죽지 않는 것이 목표다. 어찌 하든지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한 알의 밀이 썩지 않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농부는 그 한 알의 밀을 땅에 심어 죽게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 밀알이 어떻게 그 수를 알겠는가! 자기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어떻게 밀알이 알겠는가? 밀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농부에게는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추수하시는 하나님 입장을 알아야 생로병사의 길에서 희노애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나는 모든 일을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 인생을 해석할 수 없다. 왜 내가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해석이 안 된다.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어려운 일을 당한 형제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말씀을 들으라는 말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이 자기대로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대로 살면 인생을 해석할 길이 없게 된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놓고 유대인들은 그가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다. 자기의 죄 때문이라면 날 때부터 소경인데 날 때부터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고 그렇다고 부모의 죄라고 하기에는 부모가 무엇을 잘못해서 소경을 낳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셨다. 그가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이런 생각은 사람 속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머리 좋기로 유명하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나왔다고 해서 저자를 보면 유대인이고 I.T 산업에 혁명적인 일을 일으킨 사람이라 해서 알고 보면 유대인이다. 이렇게 탁월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 인생에 해석되지 않을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고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한 것인데 우리말로 그냥 읽어도 아름다운 노래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구속의 말씀]
주의 법은 완전(건전, 건강)하여 영혼을 소성시키고
7-10절은 구속의 말씀으로 7절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기에 완전한 말씀이다.
‘영혼의 소생’은 직역하면 ‘숨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숨쉬게 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던 것처럼 우리를 살게 하고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숨을 쉬게 해 주는 일이다.
숨도 못 쉬게 옥죄는 경우도 있다. 잔소리를 너무 심하게 하면 숨을 못 쉬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괴롭다. 율법이 잘못 이해되면 그런 잔소리꾼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해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말씀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은 끝난다. 응급처지 1호는 숨을 쉬게 해 주는 심폐소생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숨을 쉬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요20:22).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아니면 그 말씀을 뒤로 미루어 놓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숨도 못쉬고 있는데 자세가 반듯하니 아니니 하며 잔소리를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해도 될 문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오셨을 때 우리를 숨쉬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해서, 건전하고 건강해서 우리를 소생시킨다. 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아멘이 되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 난치병에 걸린 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나를 가르쳤던 전도사님께서 매일 성경을 읽으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시편은 150장까지 있으니 하루에 다섯 편씩 읽고 잠언은 31장까지 있으니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매달 한 번씩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 꽤 많이 읽게 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살게 하는 말씀을 찾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눈이 가서 시편 37편, 103편, 110편은 밑줄을 치면서 외우게 되었다. 시편 37편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4-6).”라는 말씀이 나에게는 살리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살면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했으니 어찌하든지 병이 나아야 하는 나는 기복적이든 하나님과의 거래든 상관없이 나를 살리는 말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시편 103편에서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라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른 말씀은 몰라도 이 말씀만은 외우고 믿고 살았던 것이다. 그 덕에 지금까지 손가락을 다 쓰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당시는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판단을 받아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서 글 쓰는 것도 힘들었고 자취하면서 양말을 빨아 짜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 말씀에 힘입어서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성경공부를 한 구절 한 구절 하니까 나에게 심판되는 말이 많았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오면 나에게 하는 말씀 같았다. 나는 악한 것 같지는 않은데 게으른 것은 맞는 것 같아서 예수님이 나보고 말씀하신다면 ‘착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실 것 같았다. 말씀이 나에게 계속 심판이 되었는데 심판이 떠나지 않은 말씀 중에 하나가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단5:27).”라는 말씀이었다. 매순간 그 말씀이 나에 대한 심판으로 들렸다. 나는 기도도 부족한 것 같고 열심도 부족한 것 같고 마음도 부족한 것 같으니 말씀이 내게 다 심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종교가 만든 우울증 환자처럼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상 고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 앞에서 늘 말씀처럼 되지 않는 내가 심판되었다. 말씀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늘 심판을 하고 있어서 나는 정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네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들여다보니 정죄하는 말씀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언제 말씀 속에서 살리는 말씀이 들리고 살리는 것을 보게 되는가? 정말 가난해지면 이것저것을 다 공부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려고 하다가 거의 우울증 환자가 되다시피 했다. 말씀이 나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기쁘기도 하고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알수록 말씀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방법은 외식하는 것밖에 없게 되는데 외식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겠는가? 그러니 나를 들여다보면, 나를 저울에 달면 부족함이 드러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를 살리는 말씀을 찾게 된다.
어떻게 우리가 선악의 노선에서 생명나무를 먹는 세계로 옮겨질 수 있는가? 전혀 다른 이 두 세계에 다리를 놓은 사람들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가난한 여인들이다.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전부 돌에 맞아 죽을 사람들이다. 이 여자들이 살자면 율법이 아닌 다른 것을 봐야 했던 것이다. 그들이 간 길은 살기 위해서 갔던 길이다. 다말은 살기 위해서 시아버지라도 유혹해야 했고 라합은 살기 위해서 나라도 배신해야 했다. 그것이 세상의 도덕과 법 앞에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살자면 화염검을 뚫고라도 생명나무를 먹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여자들은 이것이 아니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불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에덴동산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열린 것이다.
자신이 은혜와 긍휼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의 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줄 알면 성경 속에서 영혼을 소생시키는 말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찾게 된다.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바쁘지만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자기를 살리는 말을 찾는다. 주의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 우리를 숨쉬게 해 준다.
주의 증거는 확실(신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과학시대라서 증명되지 않은 것은 싫어한다. 감성적인 말이나 추상적인 말 보다는 이성의 검증을 거치고 과학적인 논증이 뒤따르는 것이라야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렇게 해도 이 세상의 지식은 늘 뒤집어진다. 아무리 절대적인 것 같은 지식도 계속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지니까 요즘 시대는 아예 모든 것을 깨고 새로 생각하자는 식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기초를 두고 설 것인가? 다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서 있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까지도 다 한번은 흔들어 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도 흔들리면서 살 것인가? 무엇이 확실한 것이고 무엇이 반석인가? 어디가 내 기초가 되는가? 고층빌딩을 짓자면 대충 지어서는 안 되고 암반이 나오기까지 기초를 파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야 100층 건물도 지을 수 있다.
우리 인생을 어디에 터를 삼고 세워야 되는가? 사람들은 지금 정보의 홍수,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너무 많아서 홍수라는 말 대신 공해라는 말을 쓴다. 지식의 공해, 정보의 공해 속에서 사람들은 어디에 터를 삼고 살아야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지식이 좋다고 따라가다 보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한 반석을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을 건축하는 확실한 반석위에 기초를 둬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다. ‘확실하다.’는 신실하고 참되다는 뜻이다. 신실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는 예수의 이름을 신실함과 참됨이라 하였다. 예수님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실함과 참됨이라는 것이다. 확실한 자리, 신실하고 진실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다. 확실한 것, 신실하고 진실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다른 지혜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어느 시대에나, 누구에게나 확실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열매로 추수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나고 문제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이 세상의 시대 풍조가 어떠하든, 노아의 홍수 같은 것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확실한 기초 위에 설 수 있다.
주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지혜는 꾀를 부리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일은 계교와 술수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을 쓰고 좋은 방법을 연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내린 결론과도 같이 내가 내린 결론도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는 것이다. 될 일은 아무리 누가 방해해도 되지만 안 될 일은 아무리 술수를 부려도 안 된다. 이것만 알아도 걱정이 끝나고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살면 된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니까 하나님이 될 일은 되게 하시고 안 될 일은 안 되게 하신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볼 때 표면적으로는 이 세상 계교의 승리인 것 같았다. ‘저 사람을 죽이면 되겠다.’ 하는 계교가 승리한 것 같지만 죽임당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 온 인류가 예수의 밭이 되고 영토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를 보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이는 것이다. 잘 보이려고 포장하고 인위적으로 수를 쓰거나 계산된 행위, 남에게 보이려는 정치적인 행위로는 안 되고 나의 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 하였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시겠는가? 다 아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르신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에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다. 왜 모른다고 하시는가? 그 생명과 그 행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나타나니까 “내가 너를 모르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즘 천국에서는 수리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성형술이 하도 발달해서 얼굴을 못 알아보게 되어서 인식 장치를 새로 고치고 있다는 것이다. 다 뜯어 고쳐 놓아서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행위, 의도적인 행위는 한마디로 말하면 술수와 계교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는다. 이것만 알아도,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으로 살면 얼마나 안식이 되는지 모른다. 달리 애를 쓸 필요가 없는 자리로 이끄셨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십자가를 내 운명으로 알고 사는 것이다. 주의 교훈에는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계산된 행위, 정치적 행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가 없다.
주의 계명은 순결(투명, 명백)하여 눈을 밝게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 하였다(마6:22).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의 판단에 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에 눈을 밝게 한다.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만을 취하고 양식이 될 것만 말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순결하고 투명해질 것이다.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라고 하였다(시19:10).
성경의 언어는 연단을 거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순금보다 순도가 높다. 불에 일곱 번 단련한 정금처럼 언어가 정결하고 순결하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주님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성경의 언어만큼 순도 높고 아름다울 수는 없다.
목사님이 집회 중에 심하게 화를 내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목사님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91년인가 92년 여름집회 때였을 것이다. 그때 목사님이 심하게 화를 내셨는데 법궤의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집회에서 사람들의 간증이 너무 충만해서 표현이 과격해지기 시작하더니 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내가 볼 때도 표현이 아슬아슬해서 저래도 되는가 할 정도였는데 당시는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상한 체, 점잖은 체, 반듯한 체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나라하게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보는 분위기가 교회를 압도하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더 자극적인 말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이 아름다운 주님을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로 표현해도 언어가 부족한데 왜 험하고 속된 말로 표현해야 되느냐!”고 하시면서 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성경은 불에 일곱 번 단련한 정금처럼 연단을 거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성경말씀보다 더 정결한 말은 없다고 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주님을 표현한다 해도 성경의 말만큼 주님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성경을 봐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나는 뚜껑이 열리면 욕이 나올 텐데 뚜껑이 열려도 저렇게 아름다운 말씀이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그 말씀이 나에게 너무나 귀한 가르침이 되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아름답고 더 정결한 말로,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는 말로 주님을 표현해야 되지 않겠는가!
시편은 그런 자리에서 나온 말씀이다.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깊은 고난을 통해서, 마치 땅속에 스며들어 많은 과정을 거쳐서 솟아나오는 지하수처럼 우리 영혼을 맑게 하는 말씀이다.
간증 문화라는 것은 우리 교회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을 듣고 쌍방향으로 교통하는 예배는 다른 데서 보기 어렵다. 다른 교회는 하나님 앞에 드리기만 하는 일방적인 선포만 있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를 하나님 앞에 되돌려드리는 쌍방향의 교통은 잘 없다. 우리의 예배는 너무나 복된 예배인 것이다.
표현을 하다 보니까 말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안 해서 부모님은 내가 벙어리인 줄 아셨다고 하는데 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56년을 말해왔어도 어려운 것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말을 해도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고 아무리 조심해서 말해도 걸리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시간을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연구를 해 보니 간증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시원해지기 위해서 자기가 시원한 말로 간증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간증을 안 하면 자기가 답답하기 때문에 자기가 시원해지려고 간증을 하고, 간증을 해도 자기가 시원해지는 말로 간증을 하는 것이 문제다. 말은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인데 옛날에 우리 간증은 자기가 못 참아서, 마치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가는 사람처럼 간증이 마려워서 못 참고 했었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옛날에는 간증이 마려워서 자기가 먼저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마이크 쟁탈전을 했던 것이다. 이런 충만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주일 설교를 듣고 일주일만 지나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교인들에 비하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먼저 간증하려고 다투는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이 넘치는 은혜를 우리가 성숙해질수록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표현해야 할 것이다.
말의 의미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그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듣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듣도록 말해야 되는 것이지 말하는 사람이 시원하려고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가 좋은 것을 해 주었는데 나중에는 “지겹다. 제발 나를 좀 놔둬라.”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랑을 못하면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이 복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도록 흘러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는 말씀대로 조심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누릴 자유도 있지만, 우리의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할 사명이 더 크다. 어느 누구에게만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은 이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하였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같이 못 알아듣는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 같은 방언을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는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하였다. 방언은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알아듣는 말인데 예언의 말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말이다. 우리도 내가 시원하도록 말을 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게 말하는 것을 힘써야 할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다음에 이 말을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로 많은 변론이 있었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것들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만을 전하기 위해서 할례도 내려놓고 다 내려놓자고 하게 되었다. 다만 네 가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외에는 다 내려놓자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내려놓은 것은 그들의 최대의 자랑을 내려놓은 것으로 그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 회의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던 것이다. 우리의 복이 흘러가려면 죽고 다시 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부 자신의 얘기이다. 시편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체질적으로 하나님 하시는 일을 즐거워하도록 지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게 되면 꿀송이처럼 달다고 고백하게 된다.
[새 언약의 말씀]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시편 19장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로 마쳤다.
‘열납되다.’는 말은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말로써 ‘합당하다.’, ‘마음에 들다.’는 뜻이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열납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놓는가? 간증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말을 내놓는 것이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내 생각까지도 하나님 마음에 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에 든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말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지 않겠는가! 임금님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이라면 누가 먹어도 맛있는 음식일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제물이라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것이다. 말과 생각까지도 주님의 마음에 든다면 얼마나 정결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겠는가.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라고 하였다. 몸이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몸과 말씀이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과 우리 몸의 일거수일투족까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고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면 그 얼마나 복되겠는가! 나의 말과 생각, 그리고 몸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완전한 말씀이다. 말과 마음과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은 “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빌3:9)되고 “ 예수와 연합”(롬6:3-5)될 때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하늘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선포하고 궁창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하늘에 있는 말씀에서 그 다음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기록된 말씀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과 내 몸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주께서 받으실만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까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를 늘 소망하게 된다. 이 소망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우리에게 주시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내 생각과 방법과 계교를 동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정결케 하고 순결케 해서 불에 일곱 번 단련한 정금보다 더 정결한 말씀처럼 이제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과 우리 몸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삶이 온전한 찬송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길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