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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 개인자전거(MTB) , 라이딩복, 세면도구, 작은배낭(최소옷가지), 참가비 개인당 16만원(포항-울릉도-독도비용)+ 개인용돈(음료, 기타) |
민주평통전주시협의회 신대철 교수님과 인연을 맺은 건 작년 여름 작렬하는 8월 땡볕에 1박 2일간의 전주에서 새만금 까지 자전거 국토대장정에 참여하고부터이다. 지난 봄, 정권이 바뀌자 또 다시 화두가 된 독도문제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을 때, 먼 동해를 홀로 지키고 있는 독도를 하늘에 그리며, 우리 땅 우리 땅만 외치며 망발하는 못된 놈들을 술안주로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내게 자전거로 독도를 간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횡재나 다름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 좁고도 넓은 나라, 걸어서 가진 못해도 자전거로 돌아보리라 다짐만 하고 있던 터라, 2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독도를 매일 다녀오고 있었다.
지난 5월 중순, 인터넷으로 우연히 접하게 된 기회로 막내 딸아이와 함께 유성 발명교육센터에서 주최하는 발명축제장행사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귀엽게 생긴 강아지 로봇을 조립하고, 준비된 레인을 따라 선두를 다투는 경주였다. 조별 예선에서 1등으로 통과한 딸아이는 최종예선에서도 홀로 독주를 하더니 급기야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주최 측에서 오후에 상품을 받아가라며 우리의 일정을 부러 연장시키는 바람에 부득이 축제장을 독파하며 기다렸는데, 놀랍게도 딸아이에게 내려진 선물은 21단 접이식 MTB자전거였다. 와아~하며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받자마자, “이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가면 되겠다!”라고 딸아이와 다짐을 해두었었다. 당초 독도문제가 화두가 되기 전엔 주최측에서 제주도 자전거국토대장정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페에 참가등록을 마친 후 독도로 출발하기 보름 전부터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기초훈련 한답시고 운암으로 가는 길을 몇 차례 오가며 8월 땡볕을 걱정했고, 중인리에서 금산사로 넘는 고갯길을 세 차례 넘으면서는 1500리 길에 버티고 있을 언덕을 걱정해야했다. 그러나 정작 완주군 상관을 지나 모래재 7부 능선을 오르다 체력이 소진되어 포기하며 내려오는 길에는 급기야 자전거를 걱정해야 했다. 새 자전거라지만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무리는 전문 MTB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야말로“꾼”들인데, 그 무리들을 이 자전거로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출발 3일 전, 여차하면 이 기회에 전문 MTB자전거를 구입해볼까 하며 들른 자전거판매 매장에서 주인은 “이것도 어엿한 MTB1)”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 자전거는 문제가 아니다. 출발하자!
2. 오기와 희망
2008년 8월 14일 아침 7시 30분, 중저가의 낯선 유니폼을 입고, 부담스런 고글과 두건에 헬멧, 장갑을 끼고 조금은 어색하게 시청 앞 광장에 도착하자, 이미 여러 명의 행사 참가자들이 제각기 환한 유니폼을 착용하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전 예비모임에서 눈인사를 나누어서인지 어색하지 않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운영진은 각자의 자전거에 태극기를 달게 하고, 플래카드 앞에서 사진촬영도 하고, 전주 MBC와 교통방송의 취재에도 응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더니 단장님의 선창으로 “독도는 우리 땅”을 열창하고, 우리 땅 독도를 향해 패달을 힘껏 밟았다. 스텝 3명을 포함, 여자 5명, 남자 13명이 독도 가는 배를 타러 320킬로미터 떨어진 포항을 향해.
기린로를 거쳐 모래내 방향을 경유, 소양방향으로 향하며 시내를 통과할 때였다. 자꾸 뒤가 근질근질한 느낌이 오며 내 자전거에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자전거에 비해 새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뭔가가 구색이 맞지 않아 대열에 포위되어 그저 밀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신호등 앞 대기선에 설적마다 어색함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정작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소태정 고갯길을 넘는 것이었다. 과연 이들 전문가들은 어찌 언덕을 넘을까? 이틀 전 이보다 가파른 모래재를 혼자 넘으며 무척 궁금했던 사항이기도 하여 대열의 후미를 따라가기로 하였다.
언덕의 시작, 모두는 내 상상만큼 슈퍼맨처럼 언덕을 오르지는 않았다. 거북이처럼 저단기어로 천천히 오르며 2km 가량의 언덕과 체력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두 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길을 처음 올라가는 듯 보였으며, 6년 동안 이 길을 출퇴근 하며 그 거리를 가늠하는 내가 더 유리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을 땐 은근히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해보자, 이를 악물고 올라보자, 올라보자!!!
동호회 회원들끼리 동참한 참가자가 몇 분 있었기 때문에, 홀로인 내가 그들의 무리에 끼어들기엔 아직 무르익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뒤로 쳐진 회원들을 서로 부추기고 응원하며 올라오고 있었지만 몇 몇 은 점점 더 내 뒤로 멀어져 갔고, 난 속으로 신이 나기까지 했다. 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푸른 팔월 하늘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 하늘에 콕 박힌 땡볕을 죄다 반사시키는 지 아스팔트에서 오는 열기도 원망스러웠다. 몇 년 전 새벽 세시 반에 배낭 하나 둘러메고 천천까지 걸어가 보겠다고 나섰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40여 분? 차를 타고 올라가면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길을 낑낑대며 연신 패달을 굴러 저기 고갯마루를 향하고 있는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50여 미터 앞 먼저 도착한 전문가들이 이쪽으로 오라 손짓을 하는 모습이 가물거릴 즈음, 극도로 오른 오기가 다시 발동했는지 오히려 다리에 힘이 솟는 듯 패달을 힘차게 밟아 쉬지 않고 소태정을 자전거로 올랐다.
아, 갈 수 있겠구나, 아직 오늘 갈 거리가 100여 킬로가 남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걱정했던 고개 하나 넘은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내 모습, 아니 내 자전거를 바라보던 한 분의 시선이 안될텐데~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는 모습에 또 다른 오기가 꿈틀거렸다. 아니 가장 걱정했던 언덕 하나를 넘으면서 얻은 희망 한 움큼을 슬쩍 뒤로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소태정의 고비는 작은 희망을 주었다. 땀에 흠뻑 젖은 상의를 찬물에 흔들어 꼭 짜 입은 후, 진안방향으로 향했다. 전주-천천간 출퇴근 길에 느꼈던 차창으로 넘어오는 바람과는 사뭇 다른 그 바람을 맞으며 씽씽 강정골재를 지나 저 멀리 마이산 두 봉우리랑 인사하고, 구룡 교차로 언덕을 지나 도룡삼거리 언덕도 너끈히 넘고, 물곡리 정자나무 아래 모정에서 용담댐 수돗물로 목을 축일 때가 12:38분. 몇 분 동료들이 처음으로 대열을 맞추어가자는 의견과 바로 앞이 점심을 먹게 될 휴게소이니 자유스럽게 가자는 의견이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금방일 것 같았던 마이산휴게소도 20여 분이 지나도 나오질 않았다. 저만치 방곡재를 보고 저단기어로 바꾸어 열심히 오르는데 차량으로 먼저 도착한 전주중학교 진창효학생(스텝 봉사팀장자격으로 동행한)이 손수 언덕 아래까지 얼음물을 들고 걸어내려왔다. 마중물이 생각났다. 얼마나 고맙던지, 그 얼음물 덕분에 쉬지도 않고 방곡재도 무난히 넘을 수 있었다. 뒤에 쳐진 두 분을 위해 스텝진은 손수 자전거를 타고 탁송(?)해주기도 하였다. 방곡재 옆 마이산 휴게소에서의 점심과 휴식을 취한 일행은 한 다름에 천천을 지나 장계소방소에서의 잠깐 휴식을 물리치고 정신없이 패달을 밟다보니 파란 하늘아래 병풍처럼 막고선 경상도로 넘어가는 육십령재가 어깨를 떡 벌리고 서 있었다.
3. 사투 그리고 질주
여태껏 26번 도로를 타고 온 동쪽 끝은 장수 논개 생가 입구인 삼봉삼거리가 전부였었다. 말로만 듣던 육십령재를 승용차로도 넘어본 경험이 없기에 더 걱정이 앞섰다. 얼마나 먼 거리인지, 얼마나 경사가 졌는지도 모른 채 중간쯤 그룹과 속도를 맞추어 오르기로 했다. 한국마사고 옆을 지나 명덕삼거리를 지날 즈음, 정류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은 자전거에 배낭 이외에 또 다른 짐을 싣고 쉬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자전거로 여행하는 듯 보였다. 헉헉 오르는데 같이 오르던 동료들이 먼저 앞질러가나 했더니,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속도를 유지하기로 하며 묵묵히 패달을 밟았다. 300여 미터를 올랐을까, 나만 지치는 줄 알았더니 먼저 오른 동료 몇 분이 장수경주마목장 정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오른 두 명의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무리를 보고 그냥 지나쳐 오르기에 속으로 참 대단하구나 생각하며 나는 휴식을 선택했다. 마침 올라온 스텝진의 승용차에서 얻은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 즈음, 아까 아래서 보았던 두 청년 중 하나가 무거운 짐을 실은 채 우리 앞을 지나가자 우리 일행 중 두 명이 그들을 쫓아갔다.
몇 분 숨을 고른 후, 이젠 구불구불 언덕길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육십령고개를 향해 다시 패달을 밟았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나오고, 구불길을 지나면 또 다시 언덕길이 나오기를 몇 차례, 이제 혼자 싸우며 올라야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이 되었다. 내 앞을 오른 절반의 무리와 내 뒤에 따라오는 절반의 무리가 있었으므로 아마도 중간쯤은 된다고 생각을 하며 오르고 또 올랐던 육십령. 본디 혹시 만날 산적과 대적하기 위해 육십 명이 모여야 넘었다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하는 그 고갯길을 앞서간 동료 두 분을 앞질러 정상을 밟았다. 큰 바위에 새겨진 육십령 세 글자가 내 눈 앞에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렇게 우려했던 소태정과 육십령 큰 고개 둘을 드디어 넘었던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장계 소재지와 그를 둘러싼 우리의 산야, 아득한 능선, 황홀하게 덮은 뿌연 구름들이 내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물과 아이스크림으로 휴식을 취한 무리는 경상도 거창으로 향하는 육십령 긴 비탈길을 물 만난 상어들처럼 훠이훠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빨간 유니폼, 파란 유니폼, 흰 유니폼, 제각기 잔뜩 멋을 부린 유니폼을 펄럭이며 헬맷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머리도 감고,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거창으로, 거창으로 질주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환심장하게 좋았다.
경상남도 서상, 서하, 농월정관광지 옆을 지나 안의를 오른쪽에 두고 논 옆 길 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26번 도로에서 3번 도로로 바꿔 타고, 거창을 넘는 완만하고 긴 고개를 대열 없이 분투하며 넘어야 했다. 동호회 회원들로 구성된 선두그룹을 뒤 따라 가는 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대열의 중간쯤에 홀로 떨어졌을 거라 짐작하며, 내심 자전거 탓만 하고 거듭되는 완만한 언덕과 비탈길을 따라 거창읍내에 도착한 시간은 회색빛 하늘이 노을 없는 석양을 그려내었다. 시계는 6시 40분을 가리켰다.
4. 감자탕, 도리기, 마음 나누기
120킬로미터의 먼 거리를 자전거로 오느라 땀으로 범벅이 된 일행은 거창 모 찜질방에 자전거를 모아 두고 맛난 감자탕으로 하루의 여독을 풀었다. “도리기”감자탕집의 “도리기”라는 의미가 흥미로웠다. “여러 사람이 추렴하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 모두는 경상도의 푸짐한 감자탕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찜질방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각자 맘에 드는 공간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갔다. 하지만 유난히 찜질방의 소음에 민감한 나는 새벽까지 이곳저곳을 헤매며 비몽사몽 새벽을 맞고, 주섬주섬 다시 대구를 향한 일정을 준비해야했다. 그리고 지난 밤 식당 주인집의 세탁기를 이용하여 유니폼을 세탁하기로 했던 계획대신 주최측 섭외로 찜질방에 부탁하여 1인당 천 원씩의 세탁비를 부담한 덕분에 새 아침에 깨끗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복장을 가다듬은 대원들은 친절했던 지난밤의 그 식당을 외면하지 못하고 아침에 다시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자전거를 점검하러 가는 길, 작은 빗방울이 섞인 상큼한 아침바람이 온 몸을 감쌌다. 비가 오려나?
08:00시, 숙소였던 찜질방 앞에서 준비운동을 한 대원들은 다시 무장을 하고 거창읍내를 관통하여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오도산 자연휴양림 표지판이 보이는 봉산면 고개에서 큰 호흡을 해야 했다. 거창에서부터 계속 이어진 평지 같은 완만한 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길고 힘든 고개를 만났기 때문이다. 언덕이 있으면 다시 비탈길이 있는 법, 이젠 언덕을 넘는 재미가 솔솔하기 까지 했다. 하룻밤을 지샜으나 아직 팀웤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지 몇몇 대원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기도 했지만 그도 잠시, 고개를 넘으며 서로를 응원하는 힘으로 화해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이어졌다. 신나게 비탈길을 내려가 묘산교차로에서 다시 26번 도로로 옮겨 타고, 쌍림을 경유 9시 40분, 가야대 정문 옆을 지났다. 가야대를 지나기 직전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한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큰 형님뻘 되는 전문가들의 순발력으로 위기를 물리치는 노련함을 보였다. 대가야통문을 빠져나가면서 보이는 대가야박물관이 가야와 신라의 숨결을 느끼게 하나 했더니 어느새 고령군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는 이정표에는 “대구 48킬로”라 적혀 있었다. 전주에서 부안거리! 작년 같았으면 반나절 꼬박 달려간 거리였는데 점심도 먹기 전이므로 여유가 많겠다 싶은 생각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지만 평온함도 잠시, 대구를 얕보지 말라는 뜻인지 고령을 빠져나가는 회천교를 건너자 낮은 산 하나가 병풍처럼 가로 막고 있었고, 대원들은 일제히 아! 짧은 신음을 뱉어냈다. 다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거북이처럼 오르는 땀냄새 풍기는 인간들이 재미났는지 모기가 앵앵거리며 귀찮게 굴었다. 언덕은 중인리-금산사를 넘는 고갯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원들 간의 거리는 조금씩 떨어지고 이젠 지그재그 전법(?)으로 바뀐 내 전략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기어자전거에도 일의 원리가 들어 있으니 지그재그 전법으로 비탈길의 거리를 늘리면 힘이 덜 드는 게 또 하나의 과학이 아닌가? 11:50분, 헉헉 정상에 오른 뒤에야 고개 이름이 금산재임을 알았다. 숨을 고르는 사이, 이미 앞서 달려가 점심 식사 장소를 물색한 선발대가 다시 되돌아왔다. 식당이 멀지 않았고 이제부턴 비탈길과 평지뿐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속이 뻥 뚫리는 냉수를 공급하여 대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젠 대구까지 40여 킬로!!! 비탈길을 씽씽 내려가는 재미를 또 맛보았다. 월척을 낚는 낚시꾼의 기분이 이럴까, 홈런을 쳐낸 야구선수들의 느낌도 이럴까? 한편으론 스카이다이버들이 느끼는 그 바람이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한 도로변 가로등에 게양된 태극기의 환영을 받으며 자전거행렬은 오후 1시 12분, 녹원산장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주문된 돼지주물럭과 논매기 매운탕은 전라도 음식 못지않았다. 식사도중 걸려온 전주교통방송사의 전화인터뷰에 응하는 신대철교수의 선창에 맞추어 “독도는 우리 땅”을 힘주어 외쳐댔다. 후식으로 내어놓은 농사지은 신선한 참외에 감동하는 것도 잠시, 30여 분의 휴식을 취한 일행은 주섬주섬 복장을 갖추고 다시 대구로 향했다. 그런데 출발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행 중 일부는 우의를 갖추고, 일부는 그냥 비를 맞기로 작정을 하고 고령을 출발하였다.
빗줄기가 가끔씩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며 하늘은 음침한 잿빛으로 변해갔다. 이젠 가끔씩 만나는 작은 언덕은 언덕쯤으로도 보이질 않았고, 길어도 완만한 경사는 익숙한 발놀림으로 달릴 수 있었다. 화원 달성을 통과하는 도중 선두차량이 휘날리는 태극기의 흔들림을 본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빗줄기를 헤쳐 나갔다. 하지만 달성을 지나 대구시내를 진입할 즈음은 거의 폭우로 변하였으며, 금새 도로를 적시고 고인 바닥의 물이 신발에 채이고, 앞사람의 자전거 바퀴가 회전하면서 튕기는 물방울까지 끼얹어져 온몸은 그야말로 도로의 구정물로 뒤범벅이 되었으며, 그 구정물을 하늘에서 쏟는 물줄기로 다시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번화가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차량은 점점 많아져 갔고, 시내를 통과하면서 대열은 서로를 보호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좁혀졌지만 선두차량과의 대열은 더 이상 맞출 수가 없었다. 빗속을 질주하는 열여덟 명의 이상한 이방인들을 구경하는 듯 어떤 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채 오후 다섯 시가 되기 전인데도 하늘은 밤처럼 어두워져 갔고,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는 듯, 대열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빨라졌다. 덕분에 대열은 그 폭우를 이겨내며 예정보다 빠르게 대구월드컵 경기장 옆에 있는 월드피아 사우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드컵 경기장까지의 길을 몰라 헤매던 일행을 도와준 이는 재미있게도 자전거를 타고 홀로 하이킹을 하는 한 외국인 청년이었다. 하지만 숙소 입구의 방향을 알려준 그 청년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일행은 무사히 월드피아 사우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영진은 오늘 주행거리도 120 여 킬로 정도 된다 일러주었다. 오후 5시 30분! 두 시간 여 동안 폭우를 거스르며 물 범벅이 된 몸을 정리하고, 6시, 남자양궁의 아까운 은메달 소식을 전해 들으며 알솥밥과 신교수님 지인이 전해주셨다는 수박과 피로 회복제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은 둘째 날 밤 , 뇌우(雷雨)를 뚫고 온 덕분인지 찜질방의 코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꿈속에서나마 내일은 비가 오지 않기를 빌며 기도하느라 숨죽이고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5. 달려가 보자~! 포항으로.
또 새 아침이 밝았다. 8월 16일 8시 40분, 아침 식사는 찜질방 옆 해장국집에서 해결했다. 전날 밤 해치우지 못한 수박까지 후식으로 든든히 채워 넣은 후, 밤새 비를 맞은 자전거를 점검하고 하나 둘 셋 넷! 몸을 풀었다. 첫째 날 이후 어김없이 제공되는 간식. 쏘시지, 물, 비스킷 등 등. 이대옥, 한성민, 진상효님 트리오의 척척 맞는 보조진행으로 밤새 울었던 하늘이 금방이라도 걷힐 듯 했다. 919번과 69번 도로를 타고 가는 대구 외곽의 풍경은 한가롭고 초록으로 푸르렀다. 길게 늘어선 경산 참외밭 가판대 대열도 지나고, 금호를 지나 4번 도로로 바꿔 타나 했더니, 영천을 지나 35번 도로로 접어들고, 눈 앞 이정표에는 포항까지 41킬로미터라 적혀있었다. 모두, 지난 밤 꿈속에서 기도했던 덕분인지 하늘의 먹구름은 알맞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11시 51분 고경면 창하리 육군삼사관학교를 지나 작지만 긴 언덕을 넘어 경사진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다시 한차례 바람을 안고 스르르 미끌려 갔다. 잠시 길가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일행은 선두인도차량을 배경삼아 한 장 한 장 사진을 담기도 했다. 이젠 제법 흐트러지지 않고 대열을 갖추게 되었고, 가끔씩 뿌리는 가랑비는 더 이상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 밞아보는 포항 땅이 지척이라는데 패달에 얹어진 두 발이 더 신이 나서, 이젠 자전거가 나를 데려가는 듯도 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운영진은 길가 작은 식당 앞으로 일행을 인도하면서 점심식사시간을 알렸다. 고경식당! 식당의 재료가 바닥나 삼겹살을 제공하려던 계획을 접고, 김찌찌게, 추어탕으로 중식을 해결해야했다. 약간의 부족함은 있었지만 시장을 반찬삼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몇몇은 식당 골방에서 오침을 취하고, 일부는 2층 건물 계단아래서 오락을 즐기며 휴식을 취했다.
오후 2시, 출발 준비 신호가 들렸다. 바깥에선 하하 호호 어디서 구했는지 일명 재미고스톱을 즐기던 몇 분이 약간 부족한 표정으로 판을 접고 다시 포항으로 출발했다. 2:57분, 28번 국도변 경주시 안강읍을 10여 킬로미터 앞 둔 만남의 주유소에서 저수지를 배경삼아 사진 찍으며 휴식! 자 달려가 보자~!라고 외치는 동료의 외침에 다시 힘을 얻어 포항으로, 포항으로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동강IC를 지났다. 4:15분, 일행은 처음으로 차량과 같이 질주하는 긴 유강터널을 만나 갓길을 이용 아슬아슬하게 곡예 하듯 통과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포항 공대 쪽으로 안내하는 진입로 앞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겨우 자전거 한 대 통과할만한 갓길을 이용하여 터널 속으로 통과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스턴트맨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터널을 통과하자 펼쳐지는 포항!! 어서 오이소~! 하며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유강대교가 큰 손으로 우리를 맞았다.
포항의 갓길은 자전거를 타고 온 손님을 맞기에는 어설픔이 있었다. 포항 MBC와의 만남을 향하여 시내를 헤매다가, 다시 굵어지는 빗속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취재차량의 카메라 앵글 속으로 통일의 염원을 담아 보냈다. 시내 외곽쯤으로 보이는 작은 골목에서 굽은 길을 돌자마자 파도가 넘실대는 흙빛 포항 앞바다가 펼쳐졌다. 아, 포항이다. 모두는 함성으로 포항여객터미널에 입성했다. 잿빛구름 속에서도 신교수님은 자전거를 타고 900리 길을 달려온 대원들의 기쁜 표정들을 놓치지 않고 일일이 카메라에 담아주셨다. 아, 전주에서 우리나라 동남쪽 끝까지 사흘의 여정이었다. 초록의 산야와 푸른 강, 그리고 크고 작은 도시를 하나하나 눈에 담고 온 여정이어서인지 피로도 잊은 채 서로를 격려하고 이제 바다 저 편에서 우뚝 기다리고 있을 우리 땅 독도를 그리며 큰 함성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산호 대게나라 식사 후, 그 집 뒷마당에 자전거를 보관하고 대원들은 <시원청> 찜질방으로 안내되었다. 거창, 대구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지만 찜질방 관리인의 배려로 옷과 신발을 정비하며 3일간의 벅찬 일정을 꿈속 서랍에 접어 넣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8월 16일 저녁 스텝의 일원인 한성민님의 생일파티와 함께 일행의 소감을 듣는 시간이 주어져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솔한 고백을 듣게 되었다. 나는 딸아이가 마련해준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포항에 도착한 벅찬 기쁨을 전해주었다. 준비한 케잌과 음료로 뒤풀이를 하고 제각기 공간을 찾아 흩어질 즈음, 대한민국의 역도를 세계에 알린 장미란의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소식과, 한일 야구 5:3 승리 소식을 베이징발로 전해 듣고 울릉도 입성을 위해 깊은 잠을 청해야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찜질방 잠을 청하지 못하는 내가 꿈속을 헤맬 리 만무했다. 이른 새벽부터 아직도 젖은 신발과 일행의 옷가지를 바구니에 담아 날라다 주고 울릉도 뱃길을 준비했다.
6. 울릉도, 그리고 우리 독도
8월 17일 아침, 시원한 포항의 바닷바람을 느끼며 찜질방 주차장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습을 나타내며 지난 밤 안녕을 물었다. 8:30분, 차량으로 이동하여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 후, 자전거를 챙겨 타고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 열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이대옥, 한성민님은 이른 새벽장을 보면서 준비한 음식과 간식박스를 대합실로 옮기고 있었다. 울릉도에서의 비싼 물가를 절약하기 위한 주최 측의 빈틈없는 준비에 모두는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10시 15분, 개인의 자전거까지 배에 싣고 포항을 출발한 선플아워 호는 지난밤 높은 흙빛 파도가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울릉도로 미끄러져 갔다. 남빛 바다, 동해의 물은 깊고 푸르렀다. 파도가 아니어도 큰 너울에 배는 몹시 흔들렸다. 승선하자마자 일행에게 배 멀미가 심할 수도 있다며 경상도 사투리로 “아마 멀미가 시껍할낀데예~”라며 준 경고가 실감이 났다. 꼭 닫힌 여객선이라 바깥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더욱 답답한 뱃길이었다. 900리길, 힘차게 달려오신 박헌신님과 백종봉 고문님과 함께 선두에서 대원들을 이끌었던 여성위원장 김길녀씨도 사색이 되어 멀미를 호소했다. 가끔씩 선창으로 비춰지는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고 넘실대는 너울은 매일 잊지 않고 이 길을 지나는 배가 예뻐 죽겠다는 듯 여객선이랑 장난치듯 흔들어 댔다. 어찌어찌 선내방송은 울릉도 도착을 예고했고, 선창 밖으로 비쳐지는 울릉도 땅이 신기해 멀리서나마 울릉도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지만 울릉도의 한 귀퉁이일 뿐이었다.
포항으로부터 217킬로미터 떨어진 섬, 말로만 듣던 울릉도에 도착한 시각은 1:19분. 땡볕으로 무장한 푸른 하늘이 그리 밉지 않았다. 멀미하며 3시간을 버티던 김길녀님은 힘에 겨웠는지 부두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영기님은 그 모습이 더 재밌다는 듯 사진에 담아주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부두, 저만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의 모습만으로도 섬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야말로 울릉군소재지가 손바닥만 했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성인봉 자락이 어서 오라 손을 내미는 듯 했다. 곡예를 하듯 생활용품을 나르는 트럭들도 배안에서 속속 빠져나오고, 천 여 명쯤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에 떠밀리듯 부두를 빠져나와 뒤돌아본 풍경은 그야말로 요새가 따로 없었다. 울릉도 군민들이 택한 선착장, 동해바다의 거센 파도와 수도 없이 싸웠을 선조들의 피와 땀 냄새가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듯 했다. 이 자전거를 타고, 싣고 三無(뱀, 도둑, 공해), 三豊(맑고 깨끗한 물, 오징어, 향나무), 三高(산, 파도, 물가) 三多(돌, 바람, 미인)의 섬, 울릉도에 우리가 와 서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울릉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식으로 중식을 마친 후 2:30분, 멀미로 더 이상의 뱃길을 거부하시는 박헌신님을 제외한 21명의 대원들은 우리를 위해 뱃길을 열어놓은 듯 맑아진 하늘을 지붕 삼아 독도로 향하는 삼봉호에 몸을 실었다. 왕복 5시간 반의 뱃길이라며 꼭 사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옥수수 오징어 호객행위가 이젠 이 모습이 관광지로 닳아 변색해버린 울릉도의 진짜 모습이라 전해주는 듯 했다. 하긴 그들만 순박하게 남아있으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이젠 이 또한 그들의 생계수단인 것을.
여객선과는 달리 유람선은 갑판에 나가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 더 매력이 있지만 멀미는 더 심한 법이다. 작년 새만금 자전거여행으로 인연을 맺은 후, 이번 일정 중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져 옆자리에 앉아 오시던 이근모님도 급기야 멀미를 하며,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여 안타까웠지만 금새 회복하시는 모습으로 건장함을 자랑했다. 삼삼오오 사진을 담고, 담소를 나누며 독도로 향하는 사이 누군가 “독도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하며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저만치 엄지 손톱만하게 독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상 스피커에서는 항해 중간 중간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지만 배에서 나는 소음에 가려져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섬에 까까와지면서 흘러나오는 “독도는 우리땅!!”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심심해지면 한번 씩 국력을 앞세워 시비를 거는 일본의 오만과 만행에 치를 떨었을 우리 땅, 그 독도가 우리의 눈앞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일 번지 동경 132 북위 37
평균기온 12도 강수량은 1300 독도는 우리 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 알 해녀 대합실
십칠만 평방미터 우물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지증왕 십 삼 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 지리지 오십 쪽 셋째 줄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겨레의 아침을 앞서 맞는 섬, 독도! 울릉도로부터 다시 88킬로미터를 달려온 지 3시간여 지난 4시 50분, 드디어 삼봉호가 독도에 도착했다. 안내방송에서는 지정된 구역이외는 절대 출입금지임을 연거푸 강조하였고, 해안 가 돌 하나 채취도 용납이 안 된다는 경고방송을 내보냈다. 안내방송에서는 우리 일행을 행운의 관광단으로 치켜세웠고, 그 동안 주워들은 풍월로 미루어 우리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 3 시간여를 달려온 배품치고는 매우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20분의 독도관광. 내리는데 5분, 승선하는데 5분을 빼면 10 여분이 아닌가? 방송으로 보았을법한 계단을 따라 독도의 동도 정상으로 올라갈 기회는 고사하고, 보호펜스와 태극기로 둘러놓아 독도 해안 바닷물과 돌맹이 하나 만질 수가 없었다. 우리 땅 독도에 와서 말이다. 단순히 정부가 1999년 12월 독도를 천연기념물 제 336호,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는 이유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이전 군사독재시절부터 일본과의 외교관계라인 선상에 독도가 있었고, 그 뒷거래가 공개되고 있지 않으니 확실하지는 않으나 외교문제로 인한 강제 보호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추측이 들어 은근히 약이 올랐다. 2003년에야 비로소 799-805의 우편번호를 부여 받고, 2005년 독도의 동도를 개방하며, 입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된 우리의 섬 독도. 전주에서부터 1500리길 독도에 우리 국토통일대장정 대원들은 우뚝 서게 되었다. 기꺼이 앞장서 봉사하며 일을 추진하신 신대철 단장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멋진 총각 이대옥 진행팀장, 그의 친구 한성민 홍보팀장님, 어리면서도 당찬 진창효 봉사팀장, 대원들을 무사히 이끄신 백종봉 고문, 진학모 준비위원장, 김길여 여성위원장님, 남자들 틈에서도 결코지지 않으신 김영희, 이영숙, 김진숙님, 시원시원하신 정성윤 총무님, 옆에서 늘 동행해주셨던 이근모님, 팀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추억을 사진에 담느라 늘 바쁘셨던 이영기님, 잊혀지지 않을 이름 박헌신님, 옆집 형님처럼 듬직하신 허해욱, 송윤섭, 박규만님, 그리고 포항에서 합류하신 박찬호선배님 부부, 전길용님 부부, 모두가 하나 되어 독도에 도착하였다.
독도에서도 신교수님은 개인사진과 그룹사진을 담기 위해 짧은 시간을 분주히 움직였다. 200여 명 정도의 관광객이 독도의 동도를 가득 메웠지만 왠지 낯설고, 경찰들에 의해 통제받는 듯 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광복절을 기념하여 세워놓은 듯한 독도의 태극기 물결은 광복 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같아 보여 씁쓸하기 까지 했다. 우리 땅을 두고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몸부림. 정부의 현명하고도 치밀한 독도 수호전략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대원들도 허가된 공간이나마 독도의 동도를 구석구석 살피기 위해 바삐 움직였지만, 경찰과 함께 독도를 지키고 있는 토종 삽살개와 더불어 박찬호선생님과 사진을 담고 있는 사이 승선을 알리는 뱃고동소리가 야속하게 들려왔다.
부랴부랴 사진 몇 장을 더 담고 승선을 마친 후 뱃머리가 돌려지자 독도의 동도 선착장 맞은편이 선명하게 보였고, 독도지킴이 2가구 3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2층 건물이 보였다. 섬의 뒤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설픈 디자인으로 서있었지만, 독도가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즉 <거주주민, 물, 나무>의 한 요소가 되었다고 하니 대견스러워보였다. 하지만 천년 신라의 역사와 고려 500년, 조선 500년 역사를 내세우기에는 부족한, 급조한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으며, 이 넓은 동해에 독도도 겨레의 자존심으로 외롭게 서있어 왔지만, 독도의 <주민>을 자청하며 외롭게 살아갈 그들을 생각하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다. 거의 모든 관광객들이 갑판에 올라 사진으로 독도를 담는 사이 배는 동도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독도의 겉모습을 보여주며 독도와의 거리를 벌려가고 있었다. 아뿔싸, 그리고 보니 독도의 땅을 밟은 것이 아니라 독도의 시멘트길만 밟고 왔다.
울릉도로 귀항하기 전 동도주변을 돌면서 보여주는 독도의 또 다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섬 한 켠에 병풍처럼 한반도 지도를 그려놓고 우리 땅이라 말해주는 기특한 한반도바위, 독립문바위, 코끼리바위, 촛대바위, 숫돌바위, 그 곳에서 자생하는 돌피, 왕해국, 섬제비쑥, 술패랭이꽃, 번행초, 왕호장, 땅채송화, 사철나무와 섬괴불나무 등의 69종의 식물 종, 괭이갈매기, 슴새, 바다제비, 흑비둘기와 천연기념물 제323호 매를 비롯, 환경부 지정 보호종인 솔개, 물수리, 노랑지빠귀, 노랑발도요, 쇠가마우지 등의 129종의 조류, 호리꽃등에, 꼬마꽃등에, 긴꼬리꽃벼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등 58종의 각종 곤충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자연의 숨결이 모두 독도지킴이로서의 증거를 내세워줄 뚜렷한 우리 땅의 증거들이 아닐까 싶었다.
5:30분 출발한 삼봉호는 독도와의 이별이 익숙한 듯 섭섭함으로 자꾸 고개를 돌리는 관광객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던 길을 되짚어, 8:10분 울릉도 도동항으로 복귀하였다. 도동항의 경비원들은 마지막배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관광객들의 꼬리를 급히 자르고 출입문을 닫았으며, 관광객들의 대열에 밀려 우리 대원들도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식사와 함께 진행위원들이 포항에서 준비해온 횟감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오붓한 파티를 마련했다. 소주와 담근 술로 이젠 제법 절친해진 회원들처럼 마음 속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나누던 술자리를 파하고, 자정이 막 넘어서면서 4번째 밤을 맞아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갔다.
7. 귀향, 해단식 그리고 독도 아리랑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 6:30분,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나리분지까지 이동한 후 성인봉으로 등반을 해보자 다짐했던 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8:30분, 아침 식사 후, 혼자 카메라를 든 채 성인봉 가파른 길을 택해 올랐으나 안개비와 궂은 날씨로 8부 능선에서 포기하고 하산하고 말았다. 흐린 날씨도 문제였지만 울릉도에서 자생한다는 섬초롱꽃을 만나긴 했으나 거의 시든 상태였고, 계속 올라가도 멋지게 나를 맞아주는 야생화 한 점 없었으며, 반대편에서 정상으로 넘어오는 일행을 만나 돌아오리라 예측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기 때문에 정상 길을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혼자 등반하면서도 휴대전화까지 숙소에 놓고 온 준비성 없는 나를 탓하면서.......7-8월 야생화가 넘치는 시기에 꽃을 거의 보지 못한 이유가 북동쪽 능선을 잡아탄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성인봉 오르는 길가의 고사리 숲은 원시림을 닮아 음산하기까지 했다. 언제 성인봉을 다시 올 수 있을까? 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성인봉 쪽을 자꾸만 되돌아보며 내려오는데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져 왔다.
오후 한 시,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돌아온 등산팀과, 해안도로를 둘러보고 돌아온 팀까지 모두 합류하여 점심식사를 마친 대원들은 짐을 꾸리고 자전거를 정비한 후 8월 18일 15:00, 선플라워호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내 좌석번호는 <1층 일반석 마-4>라 씌여 있었지만 주변에 있어야할 대원들은 대부분 울릉도 입항 전 치뤘던 심한 멀미를 기억해서 인지 누워서 가는 객실로 향했고, 멀미에 게의치 않을 법한 일부 몇 명만 좌석에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사색을 하며 5시간을 갇힌 채 포항으로 향했다.
오후 7:17분, 아직은 환한 시각, 포항에 도착한 대원들은 7:45분, <대게나라>식당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준비된 트럭에 자전거를 실려 보내고 관광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피곤함에 못 이겨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비몽사몽 고속도로 휴게소 한 군데를 들러왔나 싶더니, 23:00시, 출발했던 장소인 전주시청 노송광장에 도착하였다. 3일에 걸쳐 달려간 길을 불과 세 시간에 달려오는 버스의 괴력에 감탄하며 해단식을 마친 일행은 섭섭한 마음을 손으로 전하며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향했다.
포항에서 전주로 돌아오던 길의 풍경은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 단지 그 큰 길은 우리가 2박 3일, 자전거로 지나던 어느 국도 옆 고속도로였을 거라는 생각 뿐. 또한 딸아이 덕분에 얻은 자전거 한 대로 22명의 대원들의 틈에서 낙오하지 않고 900리 길을 거뜬히 달릴 수 있었고, 그 자전거 덕분에 1,500리 독도를 밟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내 하나의 뜻으로 통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독도에 시비를 거는 일본의 만행을 잠재울 수는 없겠지만 전주에서 포항까지,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달리며 그리워하고 고대하는 우리의 산야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 마음들이 합해지면 그 어떤 소망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젠 나 혼자 독도 아리랑을 부를 차례다. 어느 해, 아리도록 독도가 그리워질 즈음, 다시 자전거 손잡이를 움켜쥐고 혼자 힘으로 찾아와야겠다. 아리아리 쓰리쓰리를 힘차게 외치면서 덩실덩실 만나러 와야겠다. 만 천하에 한반도 땅으로 공인된 우리 대한민국의 땅, 독도를 향해.
[읽어보기1: 독도: 獨島(Dokdo)]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번지-96번지(우편번호:799-805, 101필지). 우리 영토의 동쪽 끝 섬으로,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동해안의 죽변에서는 동쪽으로 216.8km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의 오키섬으로부터는 북서쪽으로 157.5km 떨어져 있어, 울릉도에서는 맑은날 독도를 볼 수 있으나 오키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독도는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독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도와 서도 2개의 큰 섬과 주위에 89개의 부속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좌표는 동도가 동경131°52′10.4″ 북위 37°14′26.8″, 서도가 동경 131°51′54.6″ 북위 37°14′30.6″이다. 독도의 총 면적은 187,554㎡(동도 73,297㎡, 서도 88,740㎡, 부속도 25,517㎡)이며, 해양수산부 소유의 국유지이다. 동도와 서도 간의 해협은 폭 151m, 길이 약 330m, 수심 10m 미만이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유인등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해양수산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도의 높이는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로 장축은 북북동 방향으로 약 450m에 걸쳐 경사 60°로 뻗어 있고 중앙부는 원형상태로 해수면까지 꺼진 수직홀이 특징이다. 서북쪽으로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약 450m, 동서방향으로 약 300m 가량 뻗어 있다. 서도의 정상부는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고, 주요 시설물로 어민숙소가 있다. <http://www.dokdo.go.kr 내용 편집> |
[읽어보기2: 독도가 우리 땅인 근거 셋]
첫째, 역사적 근거로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에 귀속하여 왔다.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을 정벌하러 가면서 나무로 사자를 깎아서 우리에 넣고 항복하지 않으면 사나운 사자를 풀겠다고 하여 항복을 받아 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관리 하에 있다. 일본이1905년 시마네현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
둘째,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을 보면 폭력과 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으며,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카이로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겼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되어야 한다. 당시 일본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예가 '고종강제퇴위'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그들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회복을 위해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한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궁궐밖에 대포를 배치한 채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켰다.
셋째, 지정학적 근거로 우리 영토인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48해리인데, 일본 은기도에서는 이 거리의 약 2배인 82해리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이와 같이 독도는 일찍이 우산국의 일부였다가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와 더불어 신라에 의해 영유화되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
1) MTB(Mountain Bike, 산악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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