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집백연경 제4권
4. 출생보살품(出生菩薩品)
31) 연화왕(蓮華王)이 몸을 버려 붉은 물고기[赤魚]로 된 인연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세존께서 가을이 되어 과일이 익었을 때에 여러 비구들을 데리고 부락에 유행(遊行)하셨는데, 비구들이 과일을 얻어 먹고는 모두들 소화가 되지 않았다. 학질에 걸린 이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갖가지 병이 나서 좌선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도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아난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여래 세존께선 과거세에 어떠한 복을 심으셨기에 모든 음식을 잘 소화시켜 몸에 아무런 여러 환고(患苦)가 없으시며, 이제 위안(威顔)이 더욱 선명하고 윤택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 자신이 기억하건대 과거세에 자비를 닦아 행할 때에 탕약을 지어 중생들에게 보시한 일이 있었으니, 그 과보로 말미암아 지금 병의 과보가 없고 모든 음식을 잘 소화시켜 환고가 없느니라.”
아난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과거세에 어떠한 일을 수행하셨는지 알 수 없사오니, 원하옵건대 해설해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마땅히 분별 해설하리라.
과거세에 바라날(波羅奈) 나라에 연화왕(蓮華王)이 그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려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안락하며 풍요하여 군사가 없으며 서로 정벌하지 않았다.
코끼리ㆍ말ㆍ소ㆍ염소 따위의 6축이 번성하고, 사탕수수ㆍ포도(蒲桃) 등 갖가지 과일도 다 달고 맛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 많은 음식에 탐을 내어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갖가지 병에 걸리자 서로 붙잡고 왕의 처소에 나아가 의약(醫藥)을 요구하였다.
이때 왕이 병든 사람들을 보고 매우 가엾이 여겨 곧 여러 의원들을 불러 모아서 약을 조제해 민중들에게 보시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그 많은 병자를 다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왕이 여러 의원들을 힐책하였다.
‘그대들은 어째서 백성들을 치료하지 못하고 나에게까지 오게 하는가?’
여러 의원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탕약을 갖추지 못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 자신의 병도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병이겠습니까?’
이때 연화왕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실망하여 탄식하고 괴로워하며 여러 의원들에게 물었다.
‘어떤 약을 갖추지 못했는가?’
의원들이 왕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반드시 붉은 물고기[赤魚]의 살과 피를 먹어야 병을 낫게 할 수 있는데, 저희들이 아무리 붉은 물고기를 구하려 해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병자가 더욱 많아지고 사망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연화왕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지금 붉은 물고기를 얻을 수 없으니, 내가 원을 세워 붉은 물고기가 되면 중생들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곧 태자와 대신들을 불러 유언을 하였다.
‘내가 이제부터 국토를 너희들에 맡기노니, 함께 치화(治化)에 힘써서 백성을 그릇되게 하지 말라.’
태자와 대신이 이 말을 듣고는, 슬피 울어 목이 메이고 눈물이 가로막아 말을 제대로 못한 채 왕 앞에 나아가 물었다.
‘대왕이시여, 저희들 대신과 태자가 어떤 법답지 못한 일을 저질렀기에 대왕께서 이러한 유언을 하십니까?’
연화왕이 곧 그들 태자와 대신들에 대답하였다.
‘지금 나의 이러한 결심은 너희들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현재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병자가 많고 사망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반드시 붉은 물고기의 피와 살을 구해야 낫는다고 하니, 내가 이제 이 몸뚱이를 버려 붉은 물고기가 되어서 백성들을 치료하려고 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불러 이 국토를 맡기는 것이다.’
이때 태자와 대신들은 이 말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슬피 울고는, 다시 왕의 발 앞에 꿇어앉고서 목메인 음성으로 말하였다.
‘저희들이 이제까지 인자하신 대왕의 힘을 입어 국토가 풍요롭고 안락하며 백성들이 번성하며 살아왔거늘,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저희들을 다 버리고 아주 떠나가려 하십니까?’
이때 왕이 또 태자와 대신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역시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어찌 너희들은 굳이 막으려 하는가?’
태자와 대신들은 갖가지로 왕에게 진언했으나 마침내 만류할 수 없었으며, 왕은 곧 향과 꽃을 가지고 높은 누각에 올라가 사방을 향해 예배하면서 다음과 같이 큰 서원을 세웠다.
‘제가 이제 이 몸뚱이를 버리겠사오니, 원하옵건대 저로 하여금 저 바라날국의 큰 강물 속에 큰 붉은 물고기가 되어서 그 피와 살을 먹는 백성들의 병을 모두 낫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발원하고 곧 누각 밑으로 떨어져 죽어서 저 강물 속의 큰 붉은 물고기가 되었다.
백성들은 저 강물 속에 큰 물고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자, 제각기 칼ㆍ도끼 등 무기를 갖고 앞을 다퉈 와서 그 피와 살을 베어 먹고 병이 다 나았는가 하면, 그 살을 베어낸 곳마다 곧 새살이 도로 돋아나 이같이 열두 해가 지나도록 계속 백성들에게 피와 살을 보시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급기야 목숨이 끝나서는 도리천(忉利天)에 왕생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알아 두라. 그 때의 연화왕이 바로 나의 전신이었다.
그 당시 내 몸뚱이를 버려 저 중생들의 생명을 구제했기 때문에 한량없는 세간에서 이제까지 질병과 고통을 겪지 않았으며, 또 오늘날 내 스스로가 성불하여 역시 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라.”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