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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7권
28) 선(善) 불선(不善) 무기처(無記處)
선법ㆍ불선법ㆍ무기법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문] 어떤 것이 선법(善法)인가?
[답] 선성(善性)의 5음(陰) 및 택멸법(擇滅法:數緣盡)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이 불선법(不善法)인가?
[답] 좋지 못한 5음이다.
[문] 어떤 것이 무기범인가?
[답] 선도 악도 아닌 5음과 허공과 택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선법ㆍ불선법ㆍ무기법을 말하게 되는가?
[답] 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 그것을 선법이라 하고,
악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 그것이 불선법이며,
착한 곳에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악한 곳에 태어나지도 아니하는 것 그것이 무기법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법이라 하는 것은 유루의 싹 및 해탈의 싹이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고,
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번뇌의 싹이 점점 이룩되는 것을 말하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번뇌의 싹이 점차 이룩되는 것 이것이 무기법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한 과보 및 즐거운 감각 이것이 선법이고,
악한 과보 및 괴로운 감각 이것이 불선법이며,
선한 과보도 아니고 또한 즐거운 감각도 아니며 아한 과보도 아니고 또한 괴로운 감각도 아닌 것 이것이 무기법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네 가지 일 때문에 선법이라 말한다.
첫째는 하고난 성질[性善] 때문이며,
두 번째는 서로 호응하는 대상물 때문이며,
세 번째는 평등하게 일어나는 일[等起善] 때문이며.
네 번째는 최고의 이치[勝義善] 때문이다.
타고난 성질 때문이라 하는 것은 혹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성질 이것이 착한 성질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혹 세 가시 선근의 성품을 선법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 호응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심소법(心所法)과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함께 평등하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몸[身]으로 짓는 행과 입[口]으로 짓는 행이 평등하게 합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최고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열반에 들어 안온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을 선법이라 말하는 것이다.
존자 발도(跋𨃓)도 역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착한 성질의 지혜와
서로 호응하는 식(識)에
몸과 입의 행 함께 일어나니
제일 높은 경지는 열반이로다.
또한 네 가지 일 때문에 불선법(不善法)이라 말하게 된다.
그 네 가지 일이란 타고난 성품이 악한 것과 서로 호응하는 대상물과 함께 일어나는 행동과 승의불선(勝義不善)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타고난 본성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혹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악한 법[不善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 세 가지 악만 근성(根性)이 불선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서로 호응하는 대상물이라 하는 것은 심ㆍ심소법을 말하는 것이며,
함께 일어나는 행동이라 하는 것은 몸으로 짓는 행동과 입으로 짓는 행동을 말한다.
승의라 하는 것은 모든 생사의 번뇌와 안온하지 아니한 마음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불선법이라 말하는 것이다.
존자 발도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좋지 못만 성품의 지혜와
서의 호응하는 식에
몸과 입의 행이 함께 일어나니
제 일가는 생사의 번뇌로다.
이 밖에 나머지는 무기(無記)에 속한다.
존자 구사는 설명하기를,
“법이 정사유(正思惟)의 성질이니 정사유가 상응하고 정사유가 함께 일어나고 정사유에 의거한 과보일지니 그 과보를 선법이라 한다.
반대로 법이 정사유의 성질이 아니며 정사유와 서로 호응하는 것도 아니고 정사유와 함께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정사유에 의거한 과보가 아닐 빅 그 과보를 불선법이라 한다.
그 나머지는 무기법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성질을 지니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서로 호응하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의거한 과보일 때 그 과보를 선법이라 한다.
반대로 법에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성질이 없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지 아니하고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에 의거한 과보일 때 그 과보를 불선법이라 한다.
그 나머지는 무기법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 세 가지 선근[三善根:布施ㆍ慈悲ㆍ智慧, 無貪根ㆍ無瞋根ㆍ無癡根]의 성질을 지니고, 세 가지 선근과 서로 호응하고 세 가지 선근과 함께 일어나고 세 가지 선근에 의거한 과보일 때 그 과보를 선법이라 한다.
반대로 법이 세 가지 악근(惡根)의 성질을 지니고 세 가지 악근과 서로 호응하고 세 가지 악근과 함께 일어나고 세 가지 악근에 의거한 과보일 때 그 과보를 불선법이라 한다.
그 나머지는 무기법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 5근(根:信ㆍ精進ㆍ念ㆍ定ㆍ慧)의 성질을 지니고 5근과 서로 호응하고 5근과 함께 일어나며 5근에 의거한 과보일 때 그 과보를 선법이라 하고,
반대로 법이 5개(蓋:탐욕ㆍ노여움ㆍ수면ㆍ뉘우침ㆍ의심)의 성질을 지니고 5개와 서로 상응하고 5개와 함께 일어나고 5개에 의거한 과보인 경우 그 과보를 불선법이라 한다.
그 나머지는 무기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그 시설(施設)도 역시 선법이라 말한다.
[문] 무슨 이유로 선이라 하는가?
[답] 착한 결과며 법애(法愛)의 결과며 의요(意樂)의 결과며 의욕(意慾)의 결과이기 때문에 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결과[果]의 설명을 끝내고 지금부터 곧 보응[報]을 설명하겠다.
보응의 경우도 또한 착한 보응ㆍ법애의 보응ㆍ의요의 보응ㆍ의욕의 보응이기 때문에 선범이라 말한다.
[문] 불선법은 왜 불선법이라 하는가?
[답] 착한 결과가 아니고 법애의 결과가 아니고 의요의 결과가 아니고 의욕의 결과가 아니기에 이것이 불선법이다.
이미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니 그 보응도 지금 마땅히 설명하여야 한다.
보응도 또한 착한 보응이 아니고 법애의 보응이 아니고 의요의 보응이 아니고 의욕의 보응이 아니기에 이것이 불선법이다.
그 나머지는 무기 법에 속한다.
[문] 무슨 까닭으로 무기(無記)라 말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의 괴로움은 오로지 유기(有記)에 속하며,
결(結)의 모임이 다한 도(道)도 오로지 유기에 속하며,
또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12입(入)도 부처님은 오로지 유기라고 하셨고,
오로지 외길로 분별하시고 건립하시고 또한 뚜렷이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에 무기라 하는가?
[답]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말하는 까닭에 무기라 이름한 것이다.
[문] 만약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선(善)한 것은 선법에 기표(記表)되고 악한 것은 악법에 기표된다.
그러나 이 무기라 하는 것은 선법에도 기표되지 아니하고 악법에도 기표되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기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란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에 선이라 기표된다. 두 가지 일이란 그 성질[性]과 그 결과의 두 가지다.
불선(不善)의 경우도 역시 두 가지 일 때문에 불선이라 기표된다. 그 성품과 그 결과의 두 가지다.
그러나 이 무기의 경우는 비록 그 성질은 기표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기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무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라 하는 것은 착한 세계[善趣]에 태어나는 것이고,
불선이라 하는 것은 악한 세계[惡趣]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무기의 경우는 착한 세계에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악한 세계에 태어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라 하는 것은 좋은 과보를 받는 일이고,
불선이란 좋지 못한 과보를 받는 일인데,
이 무기라 하는 것은 좋은 과보도 받지 아니하고 좋지 못한 과보도 받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무기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설명하기를,
“혹 설명하지 아니하는 것이기에 무기라 부른다.
예를 들면 경전에 이르기를,
”어떤 범지(梵志)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묻기를,
‘구담씨(瞿曇氏)여, 세계[世]란 영구한 것입니까, 영구한 것이 아닙니까?
세계에는 끝이 있다고 해야 합니까? 끝이 없다고 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은 무기(無記)이니라’라고 하셨다.
이에 범지가 다시 물었다.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에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습니까?’
‘범지여, 이는 무기이니라.’
‘구담씨여, 이것이 목숨입니까, 몸입니까?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른 것입니까?’
‘범지여, 이것은 무기이니라.’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래는 종말이 있습니까, 종말이 없습니까?
여래의 종말은 종말이 아닙니까?
여래는 끝나는 것도 아니고 끝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닙니까?’
‘범지여, 이것은 무기이니라.’
이상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이 범지가,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는 영구불변한 것입니까, 영구불변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범지여, 이는 무기이니라’라고 하신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부처님은 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답] 외도들의 생각을 끊기 위해서다.
외도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묻기를,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란 영구한 존재입니까, 영구한 존재가 아닙니까?”라고 하였을 경우,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내가 만약 ≺사람의 존재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 ≺나는 이 존재가 무(無)인가를 묻지는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며,
또 내가 만약 ≺영구불변이다≻ 또는 ≺무상(無常)의 것이다≻라고 말할 경우,
그는 ≺사람의 존재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유상(有常)ㆍ무상(無常)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바라문과 석녀(石女) 사이에 난 아이가 있다면 이를 공경해야 하는가?≻라고 하였을 경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석녀에게는 아기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 ≺나는 여자에게 아기가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할 것이고,
내가 만약 ≺공경하는 경우도 있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한다면,
그는 곧 ≺석녀에게는 아기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공경하고 거룩하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할 것이다’라고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외도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존재는 영구한 것입니까? 영구하지 아니한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내가 만약 ≺인간의 존재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경우,
그는 곧 ≺나는 인간의 존재의 유무를 묻지 아니하였다≻라고 할 것이고,
또 내가 만약 ≺영구하다, 무상하다≻라고 말할 경우,
그는 곧 ≺인간의 존재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유상ㆍ무상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박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진실하지 못한 질문이며 진실하지 아니한 이론이며 진리가 아닌 문답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대답하시지 아니한 것이다.
질문이 진리를 논하는 질문이 아니면 이것을 부실(不實)이라 한다.
진리가 아닌 질문인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아니하셨음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설명한 바와 같이 범지가,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에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습니까?
이 목숨이 곧 나의 몸입니까,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른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는 무기(無記)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문] 왜 부처님은 대답하시지 않았는가?
[답] 외도들의 생각을 끊기 위해서다.
외도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가서 묻기를,
“이것이 목숨[命]입니까, 몸입니까?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른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내가 만약 몸은 있으나 목숨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곤 ≺나는 이것의 유무를 묻지 아니하였소≻라고 할 것이다.
또 만약 내가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몸은 존재하여도 목숨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몸 다르고 목숨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바라문들이 소뿔과 토끼뿔을 놓고 비슷한가 아닌가를 다투는 것과 같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바라문에게 묻기를,
≺소뿔과 토끼뿔은 비슷한 것인가, 아닌가?≻라고 하였을 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소에는 뿔이 있으나 토끼에게는 뿔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곧 ≺나는 어느 것이 뿔이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아니하였다≻라고 할 것이고,
내가 만약 ≺소와 토끼는 다 같은 축생으로 비슷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소는 뿔이 있고 토끼는 뿔이 없는데 어떻게 다 같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박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외도들이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이것이 목숨[命]입니까? 몸입니까?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른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내가 만약 ≺몸은 있어도 목숨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곧 ≺나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아니하였다≻라고 할 것이고,
만약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말한다면,
≺몸은 존재하여도 목숨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사실을 물은 것이나 진실한 질문이 아니며,
사실을 논하는 것이나 진실을 논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진리를 물은 것이나 진리를 물은 것이 아니며,
진리를 논하는 것이나 진리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니고 진리이면서 진리가 아닌 것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지 아니하신 것이다.
또 가령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래는 종말이 있는 것입니까, 종말이 없는 것입니까?
여래의 종말은 종말이 아닌 것입니까?
그래서 여래는 끝나지 아니하면서 또한 끝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은 무기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문] 왜 부처님은 대답하시지 아니하셨는가?
[답] 외도들의 생각을 끊기 위해서다.
외도들은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라 해석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묻기를,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면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여기 있는데 이것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면서 존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유(有)인데도 이것을 무라 하겠습니까?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존재하게 되고 나서는 그것이 영구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없다[無有]는 것은 없으면서 또한 있는 것이다. 이것도 없으면서 존재하게 되면서 영구한 존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물음이 아니며 진리에 대한 논의가 아니며 진리를 물은 것이 아니며 진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실하지 않은 진리라 한다’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대답하시지 아니하신 것이다.
이는 말씀하시지 않은 까닭에 이를 무기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이 설법을 베푸시어 부처님께서 분별하시고 건립하시고 뚜렷이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이 내용을 설명한다면 이는 네 가지로 대답하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첫째는 일향기론(一向記論)이고,
두 번째는 분별기론(分別記論)이고,
세 번째는 힐문기론(詰問記論)이고,
네 번째는 지기론(止記論)이다.
이 가운데서 일향기론은,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부처는 지극히 진실하고 집착하는 곳이 없는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거룩하게 설법하십니까?
부처님의 제자들은 거룩하게 부처님을 따릅니까?
모든 행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법은 무아(無我)이며, 열반은 모든 번뇌가 멎고 사라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매,
이에는 마땅히 오로지 외길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향기론이라 한다.
[문] 왜 오로지 대답하는 것을 논하게 되는가?
[답] 이 논리는 올바른 뜻으로 나아가고 법으로 나아가고 지혜로 나아가고 평등한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오로지 외길로 대답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다음 분별해서 대답하는 것을 논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법은 과거에 속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마땅히 그를 위하여 분별해서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인가?
[답] 과거의 법이란 혹 선법일 경우도 있고 혹 불선법일 경우도 있고 혹 무기법일 경우도 있다.
또 혹 욕계에 계류된 경우도 있고 혹 색계에 계류된 법일 경우도 있고 혹 무색계에 계류된 범일 경우도 있다.
또 혹 유학(有學)의 경지의 법일 경우도 있고 또 혹 무학(無學)의 경지의 법일 경우도 있고 또 혹 유학의 경지도 아니고 무학의 경지도 아닌 법일 경우도 있다.
또 견도(見道)에서 끊게 되는 법일 경우도 있고 혹 사유도(思惟道)에서 끊게 되는 법일 경우도 있고 혹 끊어지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두고 분별하여 대답하는 논리라 한다.
다음 힐문기론(詰問記論)이라 하는 것은,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법은 과거에 속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경우,
곧 도리어 그 현명한 선비에게 따져보아야 한다.
“무슨 법을 묻는 것인가?”라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왜냐 하면, 과거의 법이란 혹 선법(善法)일 경우도 있고 혹 불선법일 경우도 있고 혹 무기법일 경우도 있으며, 혹 욕계에 얽힌 법일 경우도 있고
혹 색계에 얽힌 법일 경우도 있으며 혹 무색계에 얽힌 법일 경우도 있으며,
유학(有學)의 경지의 법일 경우도 있고 혹 무학(無學)의 경지의 법일 경우도 있으며,
혹 견도(見道)의 단계에서 끊는 법일 경우도 있고 혹 사유도(思惟道)의 단계에서 끊는 법일 경우도 있고 혹 끊지 아니하는 법일 경우도 있다.
이것을 두고 따져보고[詰問] 대답하는 논리라 한다.
[답] 분별기론과 힐문기론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 바른 대답에는 차별이 없으나 물어보는 데 차등이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게 된다. 물어보는 내용에 두 가지가 있다.
혹 어떤 경우는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가 있고, 혹 까다로운 일에 부딪쳐 묻는 경우가 있다.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에는,
그가 만약 “나를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경우에,
곧 그에게 “많은 법이 있으니, 혹 과거법일 경우도 있고 미래법일 경우도 있고 현재법일 경우도 있는데 나는 마땅히 어떤 법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그때 그가 만약 “나에게 과거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과거법에는 역시 많이 구별이 있다.
혹 색음(色陰)에 관한 법도 있고 나아가 식음(識陰)에 관한 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법이 있는데, “나는 어떤 법을 설법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본다.
그때 그가 만약 “나에게 색음에 관한 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색음에도 역시 많은 종류가 있으니, 혹 선(善)한 색도 있고 혹 악한 색도 있으며 혹 무기의 색도 있는데 나는 어떤 색음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그때 만약 그가 “나에게 선(善)한 색음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선한 색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니, 살생(殺生)에서 떠나는 일에서부터 시절을 모르는 색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색이 있는데 나는 어떤 색음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그때 그가 만약 “나에게 살생에서 떠나는 색음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살생에서 벗어나는 것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혹 생명을 탐내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혹 생명에 노여워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혹 생명에 어리석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어떤 법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그때 만약 그가 “나에게 태어남을 탐내지 아니하는 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태어남을 탐내지 아니하는 것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니 혹 누가 시켜서 하는 경우도 있고 혹 시키는 사람이 없이 자체로 탐내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어느 것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즉 그가 알고 싶어서 묻는 경우,
그를 위하여 법성(法性)을 분별해서 그 내용을 전개하여 보여주고 훌륭하게 대답하여 그가 알도록 하여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까다로운 일에 부딪쳐서 물어보는 경우라 하는 것은,
그가 만약 “나를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경우,
곧 그에게 “많은 법이 있는데 어느 법을 설법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 그에게 혹 과거나 미래나 현재법을 말해 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만약 “나에게 과거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경우, 곧 그에게 “과거법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니, 나는 무슨 법을 설법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 그에게 혹 색음에 관한 법도 있고 이렇게 식음(識陰)에 이르기까지 많은 법이 있다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이때 만약 그가 “나에게 색음에 관한 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곧 그에게 “색음에도 역시 많은 종류가 있으니, 나는 어떤 색음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도 그에게 혹 선한 색에서부터 악한 색ㆍ무기색까지 있다는 것을 말하여서는 안 된다.
이때 그가 만약 “나에게 선한 색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경우,
곧 그에게 “선한 색에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느 색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도 그에게 “살생에서 벗어나는 선한 색에서부터 시절을 모르는 선한 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이때 그가 만약 “나에게 살생에서 벗어나는 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살생을 벗어나는 법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니, 나는 어떤 것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도 그에게 혹 태어남을 탐내지 아니하는 법도 있고 혹 태어남에 노여워하지 아니하는 법도 있으며 혹 태어남에 어리석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하여서는 안 된다.
이때 만약 그가 “나에게 태어남을 탐내지 아니하는 법을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그에게 “태어남을 탐내지 아니하는 것도 역시 많은 종류가 있으니, 나는 어떤 것을 설법해야 하겠느냐?”라고 물어본다.
이때도 그에게 혹 시키는 사람이 있어서 탐내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고 혹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탐내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즉 그가 까다로운 문제에 부딪쳐서 묻는 경우,
응당 그렇게 그로 하여금 혹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하고, 또 혹 묵연히 말없이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대답에는 짐짓 차별이 없으나 물음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다음 지기론(止記論)이라 하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 무상(無常)한 것입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는 무기(無記)이니라”라고 하셨다.
또 “구담씨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에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이것이 목숨[命]입니까? 몸[身]입니까?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른 것입니까? 부처는 종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의 종말은 종말이 아닌 것입니까, 부처는 종말도 없으며 종말이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범지여, 그것은 무기(無記)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지기론이라 하는 것이다.
[문] 왜 대답을 멈추었는가?
[답] 이것을 논하는 것은 진리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법으로 나아가지도 아니하며, 지혜로 나아가지도 아니하고 평등한 깨달음으로 나아가지도 아니하고 열반으로 나아가지도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대답을 논하는 일을 중지하신 것이다.
[문] 어떻게 이 논리를 지기론이라 부르는가? 즉 이 가운데서는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셨다.
[답] 이것이 진여의 바른 법이며 최고의 이치를 지닌 해답이다. 즉 말없이 묵연한 대답이 최상의 해답인 것이다.
[문] 왜 그런가?
[답] 묵연히 말이 없다는 것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일인데 하물며 대답하여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겠는가?
이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다.
외도 가운데 이름이 상지라(傷坻羅)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논쟁을 하기 위해서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다.
그때 족화림(足畵林)이란 곳에 아라한(阿羅漢)인 존자 발수라(跋修羅)란 스님이 있었는데 이분은 3명(明:宿命通ㆍ天眼通ㆍ漏盡通)을 얻은 법사며, 6신통(神通)으로 삼계의 번뇌를 벗어나서 내외의 법문에서 모든 것을 배워 알고 있는 스님이었다.
그때 상지라는 이 숲속에 이와 같은 대논사(大論師)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곧 가서 그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라고 하고,
그곳에 이르러서 존자 발수라와 함께 서로 인사말을 나눈 뒤에 물러나 한쪽에 앉고 나서 존자 발수라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중에서 누가 먼저 논제(論題)를 세울 것입니까? 내가 세워야 합니까, 그대가 세워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존자 발수라가 말하기를,
“나는 주인의 입장이니 내가 마땅히 먼저 논제를 내세워야 하겠지만 그대는 손님이니 그대로 하여금 먼저 논제를 세우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골 먼저 논제를 내세워 말하기를,
“모든 이론에서 마땅히 따지는 논리[詰論]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존자 발수라는 묵연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에 상지라의 제자들이 곧 큰 소리로,
“굴복하라, 사문이여. 굴복하라, 사문이여”라고 하였다.
이때 존자 발수라가 말하기를,
“상지라여, 돌아가시오. 그대가 상지라라면 그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때 상지라는 곧 되돌아가면서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생각하기를,
‘저 사문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상지라여, 돌아가시오. 그대가 상지라라면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렇게 논제를 세웠었다.
≺모든 논리에서 마땅히 따지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라고.
나의 이 이론에 허물이 있고 갈등의 소지가 있고 잘못이 있었다.
그 사문이 만약 이런 논리를 세웠다 하디라도 그도 역시 이 잘못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상지라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그 사문이 나를 이겼으니 마땅히 함께 그를 찾아가서 그 사문에게 예배드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스승께서는 대중 가운데서 뛰어난 경지를 얻은 분이신데 무엇 때문에 그 사문에게 예배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상지라는 말하기를,
“차라리 지혜 있는 사람을 따라가면서 그에게 굴복할지언정 어리석은 사람을 따라가면서 그들을 이기려 하지 아니하겠다”라고 하고,
곧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발수라 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러 온몸으로 엎드려 땅바닥에 절을 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 되었고 나는 그대의 제자가 되었소. 그대는 나에게서 승리를 얻지 아니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두고 혹 마땅히 말없이 묵연히 앉아 있어야만 논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여기에 다시 대답을 하면서 논리를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이것이 진여의 바른 법이며 최고의 답이 말없는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ㆍ불선ㆍ무기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