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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8권
17. 도섭품 ②[2]
[한 게송으로써 통틀어 앞의 뜻을 말함]
여섯 가지의 게송은 따로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는 한 게송으로써 통틀어 앞의 뜻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넓고 크고 구함이 없음과
가장 뛰어남과 다함없는
하나하나의 바라밀에
네 가지의 덕이 다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네 가지의 공덕’이라 함은
첫째는 넓고 큰 공덕이요, 둘째는 구함이 없는 공덕이요, 셋째는 가장 뛰어난 공덕이요, 넷째는 다함없는 공덕이다.
앞의 여섯 게송에서 첫 번째 글귀는 넓고 큰 공덕을 나타내었으니, 그것은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글귀는 구함이 없는 공덕을 나타내었으며,
세 번째의 글귀는 가장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었으며,
네 번째의 글귀는 다함없는 공덕을 나타내었다.
또는 여섯 가지의 바라밀에 다시 청정한 공덕이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얻어 봄과 원을 성취함과
구함과 아울러 세 가지의 기쁨이다.
보살의 기쁨은 서로 번복하니
그 물러섬은 자비가 극함이다.
[釋] 이 게송은 보시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빌어 구하는 자가 보살에게는 세 가지의 기쁨을 내니,
첫째는 얻어 볼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소원을 성취할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셋째는 보기를 구하고 수성을 구할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수성하지 못할 때에는 기쁨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온갖 경우에 빌어 구하는 자이기에 그 세 가지의 기쁨을 번복시켜서 또한 세 가지의 기쁨을 내니,
첫째는 얻어 볼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원을 수성할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고,
셋째는 보기를 구하고 수성할 때에 기쁨을 내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마땅히 알 것은
구하는 자의 세 가지 기쁨이 보살의 세 가지 기쁨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큰 자비를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몸과 재물과 권속을
자비롭기 때문에 항상 기쁘게 보시한다.
그 세 가지 멀리 여의는 행을
어느 인(因)인들 금해 지키지 않으리오.
[釋] 이하는 계율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 게송은 몸의 세 가지 악한 행동을 밝힌 것이다.
보살이 자기의 몸과 재물과 권속 가운데서 큰 자비 때문에 항상 기쁘게 남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하거든 하물며 남의 몸과 남의 재물과 남의 권속의 세 가지 멀리 떠나는 행에서 금하여 지키지 않겠느냐?
게송으로 말한다.
돌아보지 아니함과 평등과
두려움 없음과 또한 널리 베풂에
자비가 극하니 무슨 인연이 있어
남을 괴롭히고 허망하게 말하겠는가?
[釋] 이 게송은 망어(妄語)의 악한 행을 멀리 여읨을 밝힌 것이다.
무릇 망어를 일으키는 데 네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몸과 목숨에 연연하는 것이요,
둘째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두려움 때문에 임금의 법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재물을 구하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살은 그러하지 않다.
첫째는 돌아보지 아니함이니 몸과 목숨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평등함이니 남의 몸과 자기의 얻음이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요,
셋째는 두려움이 없음이니 다섯 가지의 무서움을 벗어났기 때문이요,
넷째는 널리 베풂이니 일체의 물건으로 일체에 베풀기 때문이다.
보살은 자비와 애민(哀愍)이 항상 깊으니 다시 무슨 인이 있어서 망어를 일으키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평등하게 이익을 지으려고
큰 자비로 남의 괴로움을 두려워한다.
또한 부지런히 중생을 성숙하게 하기에
세 가지 말의 허물을 극히 멀리한다.
[釋] 이 게송은 나머지 세 가지 말의 악한 행동을 멀리 여읨을 밝힌 것이다.
보살은 일체 중생에게 항상 평등하게 이익됨을 짓는다. 그러니 어찌 남의 권속을 무너뜨리고자 하여 거짓말을 하겠는가?
보살은 큰 자비로 항상 일체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려 하여서 남의 괴로움 가운데서 극히 두려움을 내거늘, 어찌 남을 괴롭히기 위하여 악구(惡口)를 짓겠는가?
보살은 항상 정근을 행하여 일체 중생들을 성숙시키고자 하거늘, 어찌 남을 성숙시키지 않게 하려 기어(綺語)를 짓겠는가?
그러기에 보살은 이 세 가지 말의 허물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널리 베풂과 자비가 있음과
극히 착한 연기(緣起)의 법이니
무엇으로 인하여 뜻의 땅에 세 가지의
번뇌를 능히 참지 못하겠는가?
[釋] 이 게송은 뜻의 세 가지의 악한 행동을 멀리 여읨을 밝힌 것이다.
보살은 일체의 물건을 널리 베풂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탐욕의 번뇌를 벗어나게 되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성내는 번뇌를 여의게 되고,
극히 착한 연기(緣起)의 법으로 말미암아 삿된 견해의 번뇌를 벗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의 파계(破戒)를 대치하는 차별이니, 이는 보살의 계가 청정한 공덕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손해 있는 자에게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을 얻고
괴로운 일에 기쁜 생각을 내서
보살이 이미 이와 같이 하거니
참는 이는 누구이며 무엇을 참지 못하리오.
[釋] 이 게송은 인욕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손해 있는 자에게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을 얻는다’고 함은
보살이 요익하지 못한 자에게 요익되겠다는 생각을 얻어서 마땅히 인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욕의 인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괴로운 일에 기쁜 생각을 낸다’고 함은, 보살이 괴로움을 받는 일 가운데서도 다시 기쁘다고 생각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이롭게 하는 인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보살에게는 이미 요익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킬 것과 괴롭다는 생각을 일으킬 곳이 없다.
그러니 누구 쪽에서 참음을 일으키며, 무슨 일에서 참음을 일으키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에게는 남이라는 생각이 끊어져서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함보다 더한다.
남에 있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도
정진을 하면 곧 어려움이 없다.
[釋] 이 게송은 정진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보살이 남을 위하는 어려운 행에서 정진을 하면 어려움이 없음을 얻는다. 왜냐하면 남이라는 생각이 끊어졌으며, 항상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함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남을 위하여 정진하니, 어찌 다시 어려운 행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정진이 청정하다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즐거움이 적음과 2승의 스스로 즐거움과
집착하고 물러서고 다하고 어리석으니
이를 세 가지 사람의 선정이라 말하나
보살의 선정은 그를 뒤집는다.
[釋] 이 게송은 선정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즐거움이 적다’고 함은 이른바 세간의 선정이다.
‘2승의 스스로 즐겁다’고 함은 이른바 성문의 선정과 연각의 선정이다.
‘집착한다’고 함은 만일 세간의 선정이면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고 만일 2승의 선정이면 열반에 집착한다.
‘물러선다’고 함은 이른바 세간의 선정이다.
‘다한다’고 함은 이른바 2승의 선정이니 무여열반에 들어간 때에 다하기 때문이다.
‘어리석다’고 함은 세 가지 사람의 선정은 응하는 대로 물든 어리석음이 있기도 하고 물든 어리석음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선정은 그를 뒤집는다’고 함은 이른바 세 가지 사람의 선정을 뒤집는 것이다.
즐거움이 많고 스스로 즐기고 남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요,
집착하지 아니하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다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선정의 청정한 공덕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어둠 속에 부딪치고 두 등불이니
이와 같은 것은 세 가지 사람의 지혜이지만
비유하면 햇빛이 비치듯이
보살의 지혜는 견줄 데 없다.
[釋] 이 게송은 지혜 바라밀의 청정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어둠 가운데서 손으로써 물건을 부딪치듯이
범부들의 지혜는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얻은 경계를 적기 때문이요, 명료(明了)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항상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두 등불이 방 안의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성문의 지혜와 연각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얻은 경계를 적었기 때문이요, 점차 명료하기 때문이요, 극히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햇빛이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보살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변만(遍滿)함을 얻기 때문이요, 명료하기 때문이요, 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견줄 데가 없는 것을 보살의 지혜의 청정한 공덕이라고 이른다.
또는 여섯 가지의 바라밀에 다시 여덟 가지의 위없는 공덕이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依)와 유(類)와 연(緣)과 회향과
인(因)과 지(智)와 전(田)과 의지(依止)이니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뛰어남은
더 위가 없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라.
[釋] ‘여덟 가지의 위없다’고 함의 첫째는 의(依)요, 둘째는 유(類)요, 셋째는 연(緣)이요, 넷째는 회향이요, 다섯째는 인(因)이요, 여섯째는 지(智)요, 일곱째는 전(田)이요, 여덟째는 의지(依止)이다.
[문] 이 여덟 가지가 여섯 가지의 바라밀에서 무엇을 일러 위없음을 얻는다고 합니까?
[답] 보시의 의(依)라 함은 보살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보시의 유(類)라 함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건으로 보시함이니 자기의 몸과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두려움 없는 보시이니 악도의 생사의 두려움을 구제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법의 보시이니 대승의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보시의 연(緣)이라 함은 큰 자비로써 연기를 삼기 때문이다.
보시의 회향이라 함은 큰 보리를 구하기 때문이다.
보시의 인(因)이라 함은 먼저 세상의 보시의 업이 종자를 훈습(薰習)함으로 인을 삼기 때문이다.
보시의 지(智)라 함은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3륜(輪)을 관찰해서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와 보시하는 물건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시의 전(田)이라 함에서 전에는 다섯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구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괴로운 사람이요, 셋째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요, 넷째는 악한 행을 하는 사람이요, 다섯째는 덕을 갖춘 사람이다.
이 가운데서는 덕을 갖춘 뛰어난 사람으로 위없음을 삼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시의 의지(依止)라 함은 세 가지의 의지가 있으니,
첫째는 신향(信向)을 의지함이요, 둘째는 사유를 의지함이요, 셋째는 삼매를 의지함이다.
신향을 의지한다는 것은 분별의 닦음 가운데 신사유(信思惟)에서 말한 것이다.
사유를 의지한다는 것은 분별의 닦음 가운데 미사유(味思惟)와 수희사유(隨喜思惟)와 희망사유(希望思惟)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삼매를 의지한다고 함은 이른바 금강장(金剛藏) 등의 정(定)에 의지하는 것이니, 세력의지(勢力依止)의 닦음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의지들은 다 같이 위없다. 그러기에 보시가 위없음을 얻는다.
보시의 여덟 가지 위없음과 같이 계 등의 다섯 가지 바라밀의 여덟 가지 위없음도 마땅히 그러한 줄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계의 품류의 위없음은 이른바 보살계요,
인욕의 품류가 위없다는 것은 이른바 보살을 죽이려 온 자가 비하(卑下)하고 열약(劣弱)한 것이다.
정진의 품류가 위없다는 것은 이른바 여러 바라밀을 닦을 때에 대치하여 끊기 때문이요,
선정의 품류가 위없음은 이른바 보살의 삼마제요,
지혜의 품류가 더 위가 없다는 것은 여여(如如)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계 등이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전(田)의 더 위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대승의 법이다.
나머지 여섯 가지 바라밀의 위없음은 보시 바라밀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다.
또는 보시 바라밀과 정진 바라밀에 다시 함께 하지 않는 차별의 공덕이 있다.
보시 바라밀의 차별은 어떠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하나에게 보시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
많은 겁에 자기가 괴로움을 받는다.
버림을 숭상함은 사랑이 깊기 때문이니
어찌 하물며 이익으로 자신을 번복함이리오.
[釋] 만일 모든 보살이 한 중생에게 베풀어 주어 그가 즐거움을 얻게 하고 자기의 몸은 많은 겁 동안 가난하고 궁한 고통을 받더라도 오히려 보시하여 바람이 없다. 그것은 사랑이 깊기 때문이다.
사랑이 깊다고 함은 이른바 자비의 차별이다.
어찌 하물며 한 중생에게 베풀어 주어 그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자기의 몸이 많은 겁에 큰 복과 이익을 얻음이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비는 자에게 그가 바라는 대로
보살이 일체를 희사한다.
구함은 자기 몸을 위함이지만
자신을 이롭게 하여 백 가지로 보시한다.
[釋] 이 게송의 위의 두 구절은 통틀어 말한 것이니, 그의 구함을 따라 보살이 다 희사하는 것이다.
아래의 두 구절은 해석한 것이니, 이른바 자신이 비는 것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를 얻고자 하지만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에 백 가지를 다 희사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몸을 버려도 오히려 괴롭지 아니하거니와
어찌 하물며 나머지의 재물이겠는가?
출세간을 기쁘게 얻으니
괴로움을 일으킴, 이것이 위없다.
[釋] 보살은 몸을 버릴 때에도 괴로움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은 보살이 세간을 벗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환희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 이 기쁨은 어디로부터 얻는 것입니까?
[답] 괴로움이 일어남을 따라서 얻는 것이다. 그러기에 괴로움을 일으키니, 이를 보살의 위없다고 이른다.
그러기에 보살은 세간을 벗어난 위에 있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는 자가 일체를 얻어서
기쁨을 얻으나 큰 기쁨이 아니다.
보살은 일체를 버려서
얻는 기쁨을 기뻐함이 크기 때문이다.
[釋] 비는 자가 바라던 것을 보살이 다 베푸니 비는 자가 기쁨을 얻지만 이 기쁨은 큰 기쁨이 아니다.
[문] 무엇 때문입니까?
[답] 보살이 일체를 다 버려서 자신의 공덕[財]을 얻는 것을 기뻐하니 이 기쁨이 커서 그 기쁨을 빼앗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는 자는 일체를 얻어서
재물이 있지만 부자임을 보지 못하나
보살은 일체를 버려서
재물이 없지만 큰 부자임을 본다.
[釋] 이 게송은 보살의 재물이 다함없는 차별임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는 자는 일체를 얻지만
크게 요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보살은 일체를 버리지만
크게 요익하다는 생각을 한다.
[釋] 이는 보살의 큰 자비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는 자가 자재하게 취하는 것이
마치 길가의 과일을 취함과 같고
보살은 능히 크게 버리니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이 없다.
[釋] 이는 보살의 집착이 없는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문] 보시의 함께 하지 못하는 공덕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정진의 함께 하지 못하는 공덕의 차별은 다시 일러줌이 어떠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뛰어남ㆍ인(因)ㆍ의지ㆍ업ㆍ종류
대치가 다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뜻으로
정진에도 차별이 있다.
[釋] 정진에 여섯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뛰어남의 차별이요, 둘째는 인의 차별이요, 셋째는 의지의 차별이요, 넷째는 업의 차별이요, 다섯째는 종(種)의 차별이요, 여섯째는 대치의 차별이다.
이 게송은 종합하여 든 것이요, 나머지의 게송은 따로 해석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백법(白法)은 정진이 우두머리가 되고
정진이 또한 뛰어난 인이다.
온갖 착한 법을 얻음에 미치어
정진이 의지가 된다.
[釋] 이 게송은 정진의 뛰어난 차별과 인의 차별과 의지의 차별을 말한 것이다.
‘백법은 정진이 우두머리가 된다’고 함은 가장 뛰어난 차별을 말한 것이니, 일체의 착한 법 가운데서 정진이 가장 뛰어남을 말한 것이다.
‘정진이 또한 뛰어난 인’이라 함은 인의 차별을 말한 것이니 정진이 위없는 인임을 말한 것이다.
‘온갖 착한 법을 얻는 데 미치어 정진이 의지가 된다’고 함은 의지의 차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정진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착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현재의 즐거움과 세간의 법과
세간을 뛰어넘은 법과 자재와
움직이고 고요함과 해탈과
보리 등 일곱 가지가 업이 된다.
[釋] 이 게송은 정진의 업의 차별을 말한 것이다.
이 업의 차별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법(現法)의 즐겁게 머묾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세간의 법을 얻는 것이고,
셋째는 출세간의 법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자재를 얻는 것이고,
다섯째는 움직이고 고요함을 얻는 것이니, 움직이고 고요하다는 것은 이 세간이 구경에 이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여섯째는 해탈을 얻는 것이니, 해탈이라는 것은 신견(身見)을 끊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보리를 얻는 것이니, 보리라는 것은 큰 보리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더하고 덜함과 증상과
장애를 버림과 또한 참에 들어감과
전의(轉依)와 큰 이익의
여섯 가지는 정진의 종류라고 말한다.
[釋] 이 게송은 정진의 종류의 차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종류의 차별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더하고 덜 하는 정진이니, 이른바 네 가지의 정근(正勤)과 두 가지의 악한 법은 감(減)하고 두 가지의 착한 법은 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증상하는 정진이니, 이른바 다섯 가지의 근(根)이 해탈의 법으로 말미암아 증상하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장애를 버리는 정진이니, 이른바 다섯 가지의 역(力)은 장애가 능히 걸리지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참에 들어가는 정진이니, 이른바 일곱 가지의 각분(覺分)이 견도(見道)로 말미암아 건립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전의하는 정진이니, 이른바 여덟 가지의 성도분(聖道分)이 수도(修道)로 말미암아 구경에 전의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크게 이익되는 정진이니, 이른바 여섯 가지의 바라밀이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종류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다름이 있으니
큰 서원(誓願)과 장차 발행(發行)함과
아래가 없음과 움직이지 아니함과
다섯째의 말이 싫음이 없는 것이다.
[釋] ‘다섯 가지의 다름’이라 함은
첫째는 큰 서원의 정진이니 이른바 새로이 일어나고자 하여 행을 일으킴이요,
둘째는 행을 발하는 정진이니 이른바 현재 여러 착함을 행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아래가 없는 정진이니 이른바 큰 과를 얻어서 아래의 체가 없기 때문이요,
넷째는 움직이지 않는 정진이니 이른바 춥고 더움 등의 괴로움에 능히 움직이지 않음이요,
다섯째는 싫음이 없는 정진이니 이른바 적게 얻는 것으로써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는 경 가운데 말한 것에 큰 서원의 정진이 있고, 현재 일어나는 정진이 있으며, 용맹의 정진이 있고 견고한 정진이 있으며, 부처님의 도를 버리지 않는 정진이 있다.
모든 착한 법 가운데 그 순서와 같이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인 하와 중과 상은
3승으로 말미암아 그러하다.
또한 두 가지 하와 상의 깨달음이 있으니
이롭게 하는 데 소승과 대승이 있기 때문이다.
[釋] 정진은 사람을 의지하여 차별한다.
또는 세 가지와 두 가지를 말하니
세 가지라 함은 3승(乘)의 행하는 사람을 의지하여 차별하는 것이니 그 순서대로 하(下)와 중(中)과 상(上)의 정진이 있다.
[문] 무엇으로 인하여 다시 두 가지를 말합니까?
[답] 하와 상의 깨달음이니,
하의 깨달음은 2승의 행하는 사람을 의지하고,
상의 깨달음은 대승의 행하는 사람을 의지한다.
그 순서대로 소승의 이익과 대승의 이익을 말하는 것이니, 자기를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며 남을 이익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재물에 집착하고 번뇌에 집착하고
싫어함에 집착하고 만족할 줄 아는 데 집착하니
네 가지의 집착이 물러설 수 없기에
대치하는 데 네 가지로 나눈다.
[釋] 이 게송은 정진의 대치하는 차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네 가지의 집착을 대치함으로 말미암기에 네 가지의 물러서지 아니함이 있다. 그래서 네 가지의 대치하는 차별을 말한 것이다.
[문] 이것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답] 보시 바라밀 등의 여러 행이 네 가지의 집착 때문에 장애가 되어서 행함을 얻지 못한다.
네 가지의 장애라고 함은,
첫째는 재물에 집착하는 것이니 재물에 있어서 극히 인색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번뇌에 집착함이니 재물에 있어서 물듦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셋째는 싫어함에 집착함이니 보시 등의 행에 있어서 후퇴하여 굴복함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만족할 줄 아는데 집착함이니 보시 등의 바라밀에 있어서 조금 베풀고도 기뻐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정진을 행하는 자가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집착을 대치하여야 능히 물러서지 않음을 얻는다.
그러기에 네 가지의 대치하는 차별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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