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염불(念佛)
4. 염불삼매(念佛三昧)
○ 염불삼매(念佛三昧) :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의
이종(二種)이 유(有)함.
1. 인행삼매(因行三昧) : 일심(一心)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觀)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함.
2. 과성삼매(果成三昧) : 인행(因行)의 염불삼매가 성숙(成熟)되면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함.
이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불삼매에는 인(因)․과(果)의 두 경계가 있습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을 하거나
또는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實相)을 관(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거나
혹은 일심으로 부처의 명호를 외우는 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닦아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견성하기 전에,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의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에 계합되는데
이것을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염불로도 견성(見性)하고 천수경으로도 견성하고
마음에서 업장만 녹아지면 다 견성합니다.
그러나, '시방불이 현전(現前)한다,
부처가 앞에 나온다'는 말이 표현될 때는 또 의단을 품습니다.
부처란 상(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부처가 상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때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상이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이 허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화신으로 6도중생(六道衆生)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실상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본래의 몸뚱이 이대로 바로 공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따라서 부처님도 역시 필요한 때는
바로 부처님 상호를 우주에 가득 차게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부처님의 몸은 크기가 육십만억 나유타신(那由陀身)이라 합니다.
나유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큰 몸이 부처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바로 시방여래 시법계신(十方如來 是法界身)이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경을 볼 때도
경의 말에 너무나 집착을 말고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는 작게는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부처님은 들어가신다고 말합니다.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세계(虛空世界)란 것은 그냥 공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춘, 상이 없는 세계가 바로 허공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허공이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량공덕을 갖춘, 상(相)을 떠난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경계(境界)를
바로 허공(虛空)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모공중에 무량불찰이 광연안립
(一毛空中 無量佛刹 曠然安立)이라,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를 다 원만히 갖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작고 적은 것으로 부처님 법은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장무애란 것은 작고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그 생명자리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에 가득 차있는 그것은 ‘작다’, ‘크다’를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티끌 가운데나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으로는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품으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더러는 부처님 상호가 방안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영상(影像)에 집착하고 맙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냥 악화가 됩니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 실상(實相)은 상(相)이 없습니다.
또한 일정한 고유(固有)한 상(相)이 없다고 해서 허무(虛無)가 아니라
만상(萬象)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모신다거나 그런 분들은 경험을 더러 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금색(金色)으로 훤히 빛나는 부처님도 보이는 것이고
어떤 때는 밤인데도 훤히 밝아서 방안이 다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부처가 그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선 닦아나가는 수행법(修行法)인 인행(因行) 공부를 하다가
좀 하기 싫거나 빨리 성취하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래 못 닦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니이체(Nietzsche)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 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 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도반(道伴)이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심을 두어야 되겠지요.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達磨)의 9년 면벽(面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석존(釋尊)의 6년 고행상(苦行像)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짐짓코 우리가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행삼매(因行三昧) 이것은
처음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實相)으로 관조(觀照)하는 것을 말하고
과성삼매(果成三昧)는
그렇게 일심으로 함으로 해서 인행이 성숙해서
마음이 선정에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스러워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부처님의 광명신(光明身)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라,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티벳의 불교처럼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고
또는 간경자혜안통투(看經者慧眼通透)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근본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경만 읽어도 마음을 본체에서 안 여의면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지만,
본(本) 성품(性品)을 관조(觀照)하는
그 마음을 지속(持續)시켜야 됩니다.
동시에 부처님 이름의 실상에 계합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과성삼매라, 앞서 말한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가지고서
결과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합니다.
우리가 불경을 보고 조사어록을 보면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을 안 해도
절로 부처님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화두도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하면
불거이거(不擧而擧)라, 화두를 안 드는데도
저절로 화두가 들린단 말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하다가 말아버립니다.
그래서 무슨 공부나 끈기가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염불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화두도 무(無)라, 무(無)라, 하다 보면
바람소리도 무자화두로 들린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대중이 다 자는데 가만히 들으면
화두하는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無)라, 무(無)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불념이념(不念而念) 불거이거(不擧而擧)라,
그렇게 익어지면 놓아버려도 놔지지가 않고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래 일심(一心)으로 한 사람들은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항시 염불,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이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우리 피가 맑아져서 항시 시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온전히 증명을 할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삼매에 들어가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천 팔십 개로 꿰인 염주를 들고 몇 시간이고 헤아리면서 염불을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저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가득히 넘칩니다.
왜 그럴 것인가?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니 삼매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持續)을 시키는 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자기한테 가장 유익한 공부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을 해야 합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본래 부처거니 부처가 돼 버려야지,
부처가 될 바에는 다툼도 많고 전쟁도 많은 이 불안스러운 금생에 되어야
인간계의 여러 재앙도 막을 수 있습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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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광혜의하루님 참 좋은 날입니다
행복하소서..나무아미타불 ()
광혜의하루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히 배웁니다 ()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길 함께합니다 정혜신님
부처님되소서..나무아미타불 ()
정혜신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_()_
이처럼 좋은 날 함께하여 행복합니다 가온해님
큰공부이루소서...나무아미타불 ()
가온해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고운인연에 두손모읍니다 약수터님
행복한 부처님되소서..나무아미타불 ()
약수터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길상행님
세상을 밝히는 밝은 빛이 되소서..나무아미타불 ()
길상행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축원드립니다 남강님 나무아미타불 ()
남강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염불삼매는 염불이 인因이 되어 과果로 삼매를 얻게 되어짐을 봅니다
원인을 심어야 결과를 얻듯이
염불을 끊어지지 않게 꾸준히 해야 인행 염불삼매, 과성 염불삼매를 얻을수 있음을 봅니다
하면 할수록 점점 깊어지고, 안락해지며, 평안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청정해짐을 봅니다
염불수행으로 염불삼매 이루고 반야언덕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예! 참마음님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큰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보리수나무님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정각심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