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멋 / 세이쇼나곤(清少納言)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은 보기 좋다. 반딧불이가 달랑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 버려 좋지 않다.
-세이쇼나곤(정순분 옮김),『마쿠라노소시-침초자(枕草子)』(갑인공방, 2004.)
[단상]
중국고전문학에『시경(詩經)』과『초사(楚辭)』가 있다면, 일본고전문학에는『겐지 이야기(源氏物語)』와『마쿠라노소시-침초자(枕草子)』가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겐지 이야기에는 일본인의 정신과 내면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의 미학이 있다. 모노노아와레를 아는 것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것, 혹은 마음 속 깊은 애절함과 여운,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세이쇼나곤의 '침초자'는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일 개인의 관찰과 체험, 밝고 명랑한 느낌으로서 오카시(をかし)의 성격이 크게 돋보인다. 거리의 미학으로서, 지적이며 현실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이 책은 일본고전수필의 효시로 지목된다. 세이(淸)의『침초자-베갯머리 서책』은 도합 302단으로 짜여져 있으며, 인용문은 사계의 멋과 정취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서단(序段)에 속한다. 사계 만큼 자연과 우주, 인생의 변화를 잘 드러내는 게 있을까. 그런 사계 중에서도 으뜸은 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있는 입춘절이 되면 특히 제주 탐라에서는 입춘굿이라 하여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해 걸립을 하거나, 큰 무당인 수신방(首神房)이 나와 굿을 벌인다. 앵매도리(櫻梅桃李)의 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이렇듯 제의적인 성격과 의미를 갖는다. 주역 단전 복괘에서는 음기가 쌓여 있는 속에 양기 하나가 돌아와 다시 생하는 데서 천지가 끊임없이 만물을 낳으려는 마음을 말한다.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復其⾒天地之⼼乎]. 봄은 복이다.
한편, 저 박래의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에게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그 하얀 꽃들은 그 나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침묵의 세계』)라면, 침묵의 시인은 “어떤 위치든지 위치를 긍정하지 않고 언제나 위치 앞에 있는”아방가르드이거나, 부정의 부정이거나.
다시 세이가 생각하는 사계의 멋은 어디에 있는가? 봄은 동틀 무렵, 여름은 밤, 가을은 해질녘, 겨울은 새벽녘이다. 부상(扶桑)과 함지(咸池), 달밤과 박명(薄明)의 시간이 갖는 경계의 위험과 아름다움에는 일묘연(一妙衍)이 있다. 이런 시간의 흐름과 아우라를 알고 느끼는 데는 아마 이순의 나이는 족히 넘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계의 빛과 색을 모두 합치면 어떻게 될까? 블랙, 아니 검은빛(invisible light)이다. "고양이는 몸 전체가 다 검은색이고 배만 새하얀 것이 좋다." 구원의 구월이 온다. 베갯머리 서책을 머리맡에 두고 한 단씩 읽어 나가는 당신을 생각해 본다. (김상환)
첫댓글 사계의 멋은 어디에 있는가? 봄은 동틀 무렵, 여름은 밤, 가을은 해질녘, 겨울은 새벽녘이다. 부상(扶桑)과 함지(咸池), 달밤과 박명(薄明)의 시간이 갖는 경계의 위험과 아름다움에는 일묘연(一妙衍)이 있다. ㅡ 채우 김상환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ㅡ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김대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