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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2권
변연기품 ②
2. 유정의 종류와 그 전생(轉生)
2.1. 4생(生)
식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설한 온갖 계(界)와 취(趣) 중의 생(生)에는 간략히 네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3)
무엇을 네 가지라 하며, 어떠한 처소에 어떠한 생이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ㆍ5취] 중에는 4생의 유정이 있으니
이를테면 난생(卵生)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과 방생은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며
지옥과 아울러 온갖 천(天)과
중유는 오로지 화생(化生)이며
아귀는 태생(胎生)과 화생의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계(界)는 유정과 비(非)유정 [모두]와 통하며, 취(趣)는 오로지 유정과 통할뿐이다. 그렇지만 [일체의 유정을] 두루 포섭하지 않으며,54) 생(生)만이 오로지 두루 포섭한다. 그래서 [생을] 유정이라고 설하는 것으로, 비유정을 온갖 생[衆生]이라고 이름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정의 유형에는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이 있는데, 이것을 일컬어 4생(生)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이란 말하자면 생류의 뜻으로, 온갖 유정 중에는 비록 잡다한 종류가 뒤섞여 있을지라도 생류(生類)로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즉 생류라는 말은 바로 ‘온갖 생[衆生]’의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와 ‘취’도 역시 마땅히 ‘생’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계’는 유정과 비유정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취’는 비록 유정과 통할지라고 [일체의 유정을] 두루 포섭하지 않기 때문에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지만], 이것은 오로지 유정[과 통하는 것이면서] 두루 [포섭하기] 때문에 유독 ‘생’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상좌(上座)는 “‘생’이란 생인(生因)의 뜻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비유정물의 법도 역시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알[卵]ㆍ탯집[胎]ㆍ습기[濕]는 모두 생인이기 때문이며, 화생은 마땅히 ‘생’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별도의 생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생’과] 구기(俱起)하는 생인도 역시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그 자신은 구생인(俱生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혹 이러한 [구생인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끝내 나타내지(설하지) 않은 것인가? 이는 다만 거짓된 설일 뿐이다. 즉 선행한 업을 떠나 별도의 생인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역시 또한 화생은 업과 구기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계승한 여러 논사[所承諸師]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업과의 화합을 연(緣)으로 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온갖 유정은 알[卵]ㆍ탯집[胎]ㆍ습기[濕]라는 세 가지 연과 화합함으로써 각기 다르게 생겨나게 된 것이다.”
즉 별도의 연[에 근거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업력과 화합하여 4온이나 5온이 상응하는 바대로 단박에 생겨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업력이 강력하여 [알 등의] 연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으로, 지금 여기서 일체의 유정은 모두 업과 화합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부처님께서 ‘유정은 업에 의해 생겨났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업이 결과를 낳는 데에는 알 등의 연에 근거하여 비로소 차별되는 경우도 있지만, 업이 결과를 낳음에 있어 외연(外緣)에 근거하지 않고 스스로 차별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유정이 모두 업과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 무엇을 설하여 난생이나 태생 등이라고 할 것인가? 알 등이 업과 화합함에 따라 생겨난 것을 난생 등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은 비유정물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유정이 오로지 업과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알 따위 자체가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일체의 유정은 모두 업과 화합하여 생겨났지만, 업과 화합하여 생겨날 때 알 등을 조건[緣]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것일 뿐이니, 이러한 조건에 따른 생의 차별을 분별하여 난생 등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업에 의해 생겨났고 설한다면, [생의] 명칭에는 마땅히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곧 난생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알 껍질[卵殼]로부터 생겨난 온갖 유정을 말하니, 예컨대 거위나 기러기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생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탯집[胎藏]으로부터 생겨난 온갖 유정을 말하니, 예컨대 코끼리나 말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습생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가죽ㆍ고기ㆍ뼈ㆍ쇠똥ㆍ기름 찌꺼기ㆍ물 등이 화합하여 따뜻하게 윤택된 기운[氣]으로부터 생겨난 온갖 유정을 말하니, 예컨대 벌레나 누에나비ㆍ모기ㆍ노래기ㆍ지네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화생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세 가지 연(즉 앞서 언급한 알ㆍ태ㆍ습기)에 근거하지 않으며, 없는 듯하다가 홀연히 있으면서도 감관을 모두 갖추어 결함이 없으면서 수족이나 마디마디[支分]가 단박에 생겨나는 온갖 유정을 말하니, 예컨대 나락가(지옥)나 천(天), 중유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화생의 본질[體]은 5온이나 4온 모두가 될 수 있고, 나머지 세 가지 생은 다만 5온을 본질로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모두(4생)는 이숙과 장양 [두 가지]와 통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일체 생의 본질은 오로지 이숙이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온갖 취(趣)에는 각기 몇 가지의 생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인간과 방생의 취에는 각기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즉 인간이면서 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고니의 알에서 생겨난 세라(世羅)와 오파세라(鄔波世羅)와,55) 녹모(鹿母)의 소생인 서른 두 명의 아들과,56) 급고독녀(給孤獨女)의 스무 다섯 명의 아들과,57) 반차라왕(般遮羅王)의 5백 명의 아들 등과 같은 이가 그러하다.58) 인간이면서 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바로 지금 세상의 인간들이 그러하다. 인간이면서 습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만타다(慢馱多), 차로(遮盧), 오파차로(鄔波遮盧), 합만(鴿鬘), 암라위(菴羅衛) 등과 같은 이가 그러하다.59) 그리고 인간이면서 화생인 경우는 오로지 겁초(劫初, 즉 태초)의 인간뿐이다.
이러한 4생의 인간은 모두 성법(聖法)을 획득할 수 있으며, 성법을 획득하면 더 이상 난생과 습생의 두 생은 받는 일이 없으니, 성자들은 모두 수승한 지견(智見)에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ㆍ습의 생류는 대개 우치(愚癡)하다. 혹은 온갖 난생의 생류는 모두 다시 태어나니, 그래서 세간에서는 날짐승 등을 ‘재생(再生)’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자는 다생(多生)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난생을] 받는 일이 없다. 나아가 습생은 대부분 무리를 지어 함께 생겨나지만, 성자는 [온갖 중생들과] 뒤섞여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역시 [습생을] 받지 않는 것이다.
방생의 세 가지 종류(즉 난ㆍ태ㆍ습의 3생)는 다같이 현재 관찰되고 있는 바이며, [방생이면서] 화생인 것은 용(龍)이나 묘시조(妙翅鳥) 등과 같은 것이다.60)
그리고 일체의 지옥과 온갖 천과 중유는 모두 오로지 화생일 뿐이다.
[아귀의 경우] 어떤 이는 “아귀는 오로지 화생에 포섭된다”고 설하였지만, 어떤 이는 “아귀에도 역시 태생이 존재하니, 이를테면 아귀녀(餓鬼女)가 목련(目連)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나는 밤마다 새끼를 다섯 낳아
낳는 대로 모두를 먹어 치우며
낮에도 다섯을 낳아 역시 그러하여
비록 모두를 먹었으되 배부른 일이 없도다.61)
4생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많은 것인가?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습생이 가장 많으니,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혹 고기[肉, 즉 인간이나 방생] 등의 취(趣)가 광대무변하여 아래로는 삼륜(三輪, 기세간을 떠받치는 金ㆍ水ㆍ風輪)을 뛰어넘고, 위로는 5정거천(淨居天)을 지나도록 그것의 수량을 두루 수용함이 있을지라도 단번에 변하여 벌레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습생이 다른 세 종류보다 많은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화생이 가장 많으니, 이를테면 두 가지 취(趣, 즉 천과 지옥) 전부와 세 가지 취(즉 인간ㆍ방생ㆍ아귀)의 일부, 그리고 온갖 중유는 모두 화생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일체의 ‘생’ 가운데 어떠한 생이 가장 뛰어난 것인가?
가장 뛰어난 것은 오로지 바로 화생일 뿐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수족이나 손가락[支分] 등과 온갖 근이 원만 구족하고, [그 작용이] 날카롭고 예리[孟利]하며, 신체의 형태가 미묘하기 때문에 다른 생보다 뛰어난 것이다.
1) 방론(傍論)-최후신의 보살이 화생이 아닌 이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생’을 획득하는데 자재(自在)함에도 화생을 받지 않고 태생을 받은 것인가?62)
[현재세에 태생을 받을 경우]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여러 위대한 석가종족의 친족과 권속을 인도하여 정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교화될 중생으로 하여금 “그(최후신의 보살)는 이미 인간임에도 능히 대의(大義)를 성취하셨다. 우리도 역시 그러하니 어찌 능히 정근(正勤)을 일으켜 정법을 닦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증상심을 낳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화생이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이는 바로 천신[天]일 것이라고 의심함에 따라 부처님의 전법륜(轉法輪)은 쓸모없게 되었을 것이다. 즉 “[법륜은] 천신에 의해 굴려진 것이라거나 천기(天機)를 입은 것으로, 오로지 천신만이 능히 알 수 있을 뿐 인간이 알 바가 아니다”고 말하며, 이에 따라 스스로를 업신여겨 정법륜(正法輪)에 대해 정근(正勤)과 용맹스러운 사택(思擇)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부류(석가족 이외 종족)로 하여금 경애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낳아 세속을 버리고 정행(正行)을 부지런히 닦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보살은 귀족 중에 태어나 능히 존경받는 지위를 버리고 출가 수도하여 등정각을 성취하고 대법륜을 굴렸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우리들도 어찌 기꺼이 따르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이에 따라 세속을 버리고 정행을 닦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교만(憍慢)한 중생을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세존은 바로 전륜왕(轉輪王)의 종족으로 매우 고귀한 종족에 속하였지만, 교만의 산이 무너져버린 분이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설한 것을 듣고 공경하며 받들어 의심하거나 비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만약 화생이었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보살의] 종족을 알기 어려워 아마도 ‘천신인가, 귀신인가?’ 하여 허깨비[幻化]로 의심하였을 것이니, 이를테면 외도의 논(論)에서 “백 겁이 지난 후 마땅히 위대한 환술사(幻術師)가 세간에 출현하여 세간을 집어삼키는 일이 있을 것이다”고 거짓된 비방의 말을 설한 것과 같다. 또한 화생하는 때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할 때 인간들은 화생하는 일이 없으며, 인간들이 화생할 때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지 않는 것이다.63)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른 이들을 요익(饒益)되게 하기 위해 태생을 받은 것이니, 추측하건대 신계(身界, 사리를 말함)를 남겨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한번의 공양을 원인으로 하여 천 번이나 하늘에 태어나게 하고 아울러 해탈을 증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화생의 경우 문득 죽게 되면 더 이상 남아있는 형체가 없으니, 이는 마치 등불이 꺼지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소속되는 것이(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이와 같이 힐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은 지원통(持願通) 갖고 있어 능히 오래도록 그 같은 몸(즉 신계)을 남겨둘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성립될 수 없는 해석이다.”64)
지금 여기서의 해석은 이치상 필시 성립될 수 있으니, 신통에 의해 남겨진 신계는 부처의 공덕인 (10)력(力)이나 (4)무외(無畏) 등의 소의가 훈습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세간을 널리 요익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이러한 남겨둘 만한 법[可留法, 즉 신계]은 신통의 원력[通願]에 의해 능히 남겨진다. 즉 일체의 화생은 찰나의 법과 같아서 필시 남겨둘 만한 것이 없으며, 온갖 유위도 결정코 찰나에 소멸하기에 온갖 부처의 신통력[神力]으로도 역시 능히 남겨둘 수 없다. 만약 오래 남겨두길 원한다면 반드시 [몸을] 달리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같이 다르게 변화된 몸은 부처의 공덕인 (10)력이나 (4)무외 등의 소의가 훈습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간에 대해 크게 요익함이 없는 것이다.65)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응화(應化)도 본래 지녔던 신체적 형태[身形]와 마찬가지로 온갖 공양을 받게 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리들로 하여금 하늘에 태어나게 하거나 해탈을 [증득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품수(稟受)한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모두 “최후신의 보살은 다른 이의 이익[利他]을 위해 화생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러한 뜻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으로서,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생은 어떠한 이유에서 죽어 어떠한 형체도 남기지 않는 것인가?
그는 단박에(몰록) 태어났기 때문에 응당 단박에 멸해야 하는 것이니, 물에서 노는 이처럼 그의 출몰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는 설하기를 “화생은 소조색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어 어떠한 형체도 남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대종이 많은 자는 죽어 단박에 멸하지 않으니, 바로 이 같은 뜻에 따라 하나의 4대종은 다수의 소조색을 낳는 것임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화생은 죽어서 어떠한 형체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계경과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니, 경에서 “화생인 묘시조(妙翅鳥)는 충분히 먹기 위해 화생인 용을 취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66)
그(묘시조)는 [용인 줄을] 알지 못하고서 다만 충분히 먹기 위해 [용을] 취한 것일 뿐 허기를 면하기 위해 취한 것이라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다만 ‘먹기 위해 용을 취한 것이다’고 설하였을 뿐 이러한 용이 식용(食用)이 되는 것이라고는(다시 말해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용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라면 잠시 허기를 채울 수 있겠지만, 죽고 나면 다시 배가 고프게 된다. 즉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먹었다’ 하였는데,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아비달마순정리론 제23권
변연기품 ③
2.2. 중유(中有)
1) 총설
4생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앞(제22권)에서 ‘지옥과 온갖 천(天)과 중유(中有)는 모두 오로지 화생일 뿐이다’고 논설하였는데, 여기서 어떤 법을 설하여 중유라고 일컬은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 중유를 바로 ‘생’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死)와 생(生)의 두 가지 유(有) 중간의
5온을 중유(中有)라고 이름하니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유는 ‘생’이 아닌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중유란] 사유(死有) 이후, 생유(生有) 이전에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그 중간에 존재하는 [5온] 자체로서, 태어나야 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해 이러한 [중유]신(身)을 일으킨 것인데, 두 가지 유(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였다.2)
이러한 [중]유 자체도 일어나기도 하고 몰(沒)하기도 하는데, 어째서 ‘생’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중]유신은 업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업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업은 생의 원인[生因]이 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3) 만약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원인을 갖지 않아야 할 것[無因]이며, 그런 즉 무인외도(無因外道)가 논의하는 과실과 동일하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도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생’이란 말하자면 당래(當來)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처소에 이르는 것으로, ‘이른다’는 뜻에 근거하여 ‘생’이란 명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유신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일어나고 몰하는 것일지라도 아직 그곳(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처소)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중유 자체는 말하자면 이러한 [사유와 생유] 중간의 이숙의 5온으로, 이것은 다만 ‘일어나는 것[起]’이라고만 말하고 ‘생겨나는 것[生]’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 잠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생’이란 바로 ‘일어나게 된 것[所起]’이라는 뜻이지만, 중유는 ‘능히 일어나는 것[能起]’이니, 그래서 ‘생’이 아닌 것이다.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의 5온이 마침내[究竟] 분명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4) 그리고 “‘업은 생의 원인[生因]이 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함은 이치상 옳지 않으니, “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을 모두 ‘생’이라고 말한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보특가라로서 이미 생결(生結)은 끊었지만 기결(起結)은 아직 끊지 않은 이가 있으니, 널리 4구(句)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5) 바로 이러한 사실에 준하여 중유에 수순(隨順)하지만 생유에는 수순하지 않는 업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러한 업에 의해 획득되는 것을 ‘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유가 ‘생’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그러한 경설(經說, ‘업은 생의 원인이 된다’는 경설)과 서로 모순 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것(중유)은 이미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중유를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생겨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6)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게 된 것[所至] 나아가게 된 것[所趣]을 설하여 ‘생’이라 하지만, 중유는 그렇지 않다”고. 또한 하나의 업은 다수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일 찰나의 업에 다 찰나의 결과가 존재하고, 한 가지 무색업에 유색과 무색의 결과가 존재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결과에 ‘생겨나는 것[生, 즉 생유]’도 있고 ‘일어나는 것[起, 즉 중유]’도 있다고 한들 이치상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1) 다른 부파의 중유 무체설(無體說)
그런데 다른 부파[有餘部]의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중유는 존재하지 않으니,7) 이치[理]로 보거나 성교[敎] 상으로 볼 때 이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먼저] 이치와 서로 어긋난다고 함은 [이러하다].
전 찰나의 온이 멸한 곳에서 후 찰나의 다른 [온]이 바로 생겨난다고 하는 경우 [후 찰나의 온과 중유가] 동시에 존재[俱有]하는 허물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다른 곳에서 전 찰나의 온이 멸하고 나서 다른 곳에서 후 [찰나의 온]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어찌하여 사유(死有)와 무간에 다른 곳에서 생유(生有)의 온이 바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만약 이곳에서 전 찰나의 온이 멸하고 나서 이곳에서 후 [찰나의 온]이 생겨난다고 하여도 중유는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즉 마땅히 사유와 무간에 이곳에서 바로 생유의 온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중유는 [전 찰나의 온이 멸한 곳과는] 다른 곳에서든 전 찰나의 온이 멸한 곳에서든, 생겨난다고 하든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든 모두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사유와 무간에 생유가 바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기 때문에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일찍이 중유[를 초래하는] 업에 대해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순현법수업 등의 세 업은 동일하지 않다”고 설한 경은 있지만 일찍이 어떠한 계경에서도 ‘네 번째로 순중유업(順中有業, 중유를 초래하는 업)이 존재한다’고 설한 일이 없다.8) [그렇다고] 중유가 업에 의하지 않고 생겨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일체의 모든 존재로서 원인 없이 스스로[自然] 생겨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모든 유정은 다 신통을 갖추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중유가 만약 존재한다면] 일체의 유정은 공용(功用)을 떠나서도(다시 말해 노력하지 않고서도) 모두 다 마땅히 그 본성[性] 상 신통자재를 획득하였다고 해야 한다.9)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많은 공을 들이고서도 성취하는 바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는 이치상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중유를 부정할지라도] 사유와 생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성취될 수 있다고 인정하니, 요컨대 생(생유)이 있어야 비로소 죽음(사유)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생[유]에 의하지 않고 [중유에 의해]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 경우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온갖 취(趣)에서 비록 단박에 태어나는 일[頓生]은 없을지라도 마땅히 단박에 죽는 일[頓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이 없이 죽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지극히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중유를] 취하는 일이 있든 없든 다같이 허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유와 무간에 중유를 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취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만약 이 몸을 버리고서 다시 다른 몸을 취한다면, 나는 그것을 ‘생’이라고 말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다른 몸을] 취하지 않을 경우 마땅히 반열반에 들게 될 것이고, 이미 반열반에 들었다면 어찌 중유가 존재할 것인가?
또한 그것(중유 실유론)은 마땅히 무한소급의 과실[無窮過]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사유와 생유 중간에 이미 중유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생유와 중유, 중유와 사유 사이의 두 간격도 어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 사이에도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한소급의 과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와 서로 어긋나는 점에 대해 간략히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성교와 서로 어긋나는 점에 대해 논설하리라.
이를테면 세존께서 설하기를 “예류과(預流果)의 유정은 최대한 일곱 번 존재[有]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중유가 존재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최대한 열네번 존재한다’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중유가 존재한다면] 무간업(無間業)도 마땅히 유간(有間) 즉 간격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계경에서 말하기를 “5무간업을 지으면 무간에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만약 중유의 간격이 존재한다면 ‘무간’의 뜻과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중간에 머무는 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계경에 의해 부정되니,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재생(再生)이여! 그대는 지금 성년을 지나
노쇠에 이르고 염마왕(琰魔王)과 가까운데
앞길을 가고자 하여도 자량(資糧)이 없으니
중간에 머무를 곳 더 이상 없구나.10)
만약 중유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그는 중간에 머무를 곳이 없다’고 말씀하였겠는가?
또한 그것(중유)은 숙주지(宿住智)의 연(緣,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숙주를 아는 자는 ‘나는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이곳에 와 태어났다’고 말한다”고만 말하였지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일찍이 중유로 태어났었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이치로 보거나 성교 상으로 볼 때 이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중유는 결정코 획득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다른 부파의 중유 무체설에 대한 비판
앞서 언급한 종의(중유 무체설)에서 주장한 바를 간략히 서술하면 이와 같지만, 그러한 일체의 주장은 모두 다 [중유 무체설을] 증명할 만한 논거가 되지 않는다.
먼저 그들이 첫 번째로 설한 “전 찰나의 온이 멸한 곳에서 후 찰나의 다른 [온]이 바로 생겨난다고 하는 경우 [후 찰나의 온과 중유가] 동시에 존재[俱有]하는 허물을 범하게 된다”고 한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사멸하는 곳과 인접하여 중유가 생겨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중유는 앞서 사멸한 곳과 떨어진 곳[隔]도 아니고 동일한 곳[卽]도 아니며, 인접하여 바로 다음 [찰나]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렇듯 후후(後後) 찰나 내지 결생(結生)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접하여 다음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과실은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종의를 분별하면서 마땅히 다시 현시(顯示)하게 될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일찍이] “중유[를 초래하는] 업에 대해 설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어떤 곳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더러운 몸[雜滓穢身]으로 말미암아 지은 악업, 원하건대 그 같은 일체 악업[의 과보]를 모두 다 현신(現身)에서 받게 하고, 따르지 말게 하며, 태어나지 말게 하며, [태어난] 후 응당 받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어찌 ‘따른다’는 말이 바로 중유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현신 이후 다음 생에 받거나[順生] 다음 생 이후에 받는[順後] 방편으로서의 이숙을 모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11) 바로 중유를 일컬어 ‘방편으로서의 이숙’이라 하였다. 즉 [계경에서는] 중유[의 과보]를 받는 악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원(願)을 발하여 “따르지 말게 하소서”라는 말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혹은 업은 능히 당래 머무르거나 나아가야 할 취[所住趣]를 초래하지만, 이는 능히 중유의 이숙도 초래하니, 중유와 생유의 두 가지 유는 앞서 이미 분별하였듯이 동일한 업에 의해 견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유[를 초래하는]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佛)세존께서 간략히 세 종류의 정업(定業)만을 설한 것은 중유를 초래하는 업이 그 중에 포섭되기 때문으로,12) 그래서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모든 유정은 마땅히 신통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니, 이러한 상태에서는 [신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유의 상태에서 일체의 유정은 업에 의해 성취된 신통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이 또한 무슨 허물이 될 것인가? [설혹] 이러한 상태에 [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상태에 비하면 모두가 그러하지만, 일시 동안 여우[野干] 등이 된다고 하거나 혹은 이생(異生)의 종류는 대부분 항상 그러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13)
혹은 마땅히 그대들 중유를 비방하는 자들도 유정류는 모두 신통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즉 모든 유정은 이곳에서 몰하고서 무량(無量) 억(億) 유선나(踰繕那)를 능히 초월하여 지극히 먼 곳에 태어날지라도 도무지 장애하는 것이 없으니, 이 밖에 다른 어떤 위대한 신통이 있을 것인가?
또한 “[중유를 부정할지라도] 사유와 생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성취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힐난 역시 그렇지 않으니, [우리는 다만 중유를] 생[유]의 차별로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응리론자(應理論者, 유부 비바사사를 말함)는 생[유]를 차별함에 있어 중유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생유는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인취(人趣)로 나아갈 적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동안의 생[유]의 차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바로 생[유]의 방편으로 아직 인취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인(人)이라 말할 수 있으니, 아직 태어날 곳에 이르지 못한 것(즉 중유)도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온갖 취(趣)에서 [태어나지 않고서] 단박에 죽는 일은 없으니, 중유가 바로 생[유]의 방편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역시 “[중유를] 취하는 일이 있든 없든 [다같이 허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는 논거에 답하였으니,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 ‘취한다’는 말은 중유를 차별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14) [또한] 여기(앞의 계경)서 ‘몸[身]’이라고 하는 말은 의미상 오로지 색을 설한 것이 아니니, 색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역시 ‘몸’이라는 말로 설한 경우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 가지 유(有) 가운데 생유와 그 차별(즉 중유와 본유)을 모두 ‘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계경에서] “이 몸을 버리고서 다시 다른 몸을 취하는 것을 ‘생’이라고 말한다”고 설하였다고 하여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오로지 색법을 ‘몸’이라는 말[의 의미]로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색신의] 몸을 버리고 무색의 몸을 취할 경우 어찌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이에 대해서도] ‘생’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인가? 설혹 [여기서의] 몸의 의미가 색법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을 것이니, 이 몸을 버리고 나서 다시 다른 몸을 취하는 것을 불타께서는 다만 ‘생’이라고만 언급하였지 생유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유만을 ‘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생’이라는 말은 다만 죽음에 반대[遮]되는 말로서 설정되었기 때문으로, 마치 “우사(雨師)가 어찌 천(天)과 같다고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중유 실유론)은 마땅히 무한소급의 과실을 범하지 않으니, [사유와] 인접하여 바로 다음 [찰나]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할 경우 이러한 과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유와 중유는 처소 상의 간격을 갖고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한 바와 같은 무한소급의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지만, 사유와 중유는 인접하여 바로 다음 [찰나]에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사이의 간격이 없는데 무슨 소용에서 다시 [그 사이의 간격을] 설정할 것인가? 따라서 무한소급의 과실은 우리의 종의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종의에서는 중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므로 [중유와] 중유 사이에 다시 중유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의 종의에서 오로지 생유만을 주장할지라도 역시 마땅히 생유에는 다시 [그것에 의해 낳아진] 생유가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피차의 허물이 동일하므로 마땅히 그같이 힐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야흐로 중유를 부정하는 이증(理證)에 대해 논파하였으니, 다음으로 마땅히 중유를 부정하는 교증(敎證)에 대해 분별하고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경에서 “예류과(預流果)는 최대한 일곱 번 존재[有]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중유에 대해서도 역시 어긋나는 바가 없으니, 일기(一期)의 생을 설하여 ‘한번의 존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15) 이를테면 중유 등을 전체적으로 일기의 생이라 이름한 것이니, 그것은 형태 등이 동일할 뿐더러 동일한 업(즉 인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4유(有)를 전체적으로는 ‘한번의 존재’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예류과가 최대한 열네 번 존재해야 하는 허물은 없다. 즉 일기의 생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소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분위(分位)의 차별에 근거하여 4유로 나누게 된 것이다.
혹은 일곱 번 존재[七有]한다는 말은 바야흐로 인취(人趣)의 생유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역시 모순 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대들의 종의처럼 예류자(預流者)는 천취(天趣)에서도 일곱 번의 존재를 받는다는 사실을 역시 인정하는 경우 마땅히 최대한 열네 번의 존재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16)
혹 그대들의 뜻이, 이를테면 ‘최대한 일곱 번 존재한다’고 하는 말은 인천(人天)에서 각기 일곱 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별도로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천을 모두 합해 오로지 일곱 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예류과의 유정은 인천에 일곱 번 존재하면서 생사를 치달려 유전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경에서도 마땅히 “예류과의 유정이 생사를 치달리며 유전하는 것은 인천에서 각기 일곱 번이다”고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17)
따라서 경에서 설한 ‘최대한 일곱 번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천에서 각기 별도로 일곱 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18) 이는 그 밖의 다른 경설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말하기를 “견도(見道)를 갖춘 보특가라(즉 예류과)는 여덟 번째의 존재[第8有]에 처하는 일도 없으며, 받을 리도 없다”고 하였지만, [인천에 걸쳐 각기 일곱 번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설과 위배되는 과실이 없으니, 앞의 경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에서는 먼저 “예류과는 인천에서 각기 일곱 번의 존재를 받으며 결정코 여덟 번째의 존재를 받는 일이 없다”고 설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 “견도를 갖춘 보특가라는 여덟 번째의 존재에 처하는 일이 없으며, 받을 리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극칠유경(極七有經)』은 중유의 종의와 역시 모순 되지 않으며, 해손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다.19)
또한 “[중유가 존재한다면] 무간업(無間業)도 마땅히 유간(有間) 즉 간격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무간 즉 간격이 없다고 함은] 다른 취(趣)를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이가 무간업을 지었다면 결정코 다른 취의 간격이 없이(다시 말해 다른 취를 거치는 일 없이) 반드시 지옥 중에 태어난다는 것이니, 내가 이 경(앞서 무체론자가 인용한 경)을 살펴 보건대, 그 뜻이 이와 같다. 혹은 중유 역시 지옥에 포섭되기 때문에 무간업이 간격을 갖는다는 과실은 없으니, [만약 어떤 이가 무간업을 지었다면] 반드시 지옥의 중유로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혹 ‘중간에 조금의 간격이라도 존재한다면 무간이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조금의 간격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무간업은 필경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무간업을 짓고 나서 간격 없이 [무간업의] 찰나와 인접하여 바로 다음 [찰나]에 지옥 중에 태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에서 “신체의 괴멸(壞滅)과 무간에 지옥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과실은 없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신체는] 찰나에 괴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괴멸은 일기(一期)의 종말(즉 死有)에 근거한 것이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일기가 끝나고서 지옥에] 태어나지만, 다만 [지옥의] 중유로 태어날 뿐이다’고 말하니, 경에서는 “신체가 괴멸하면 지옥 중에 태어난다”고만 말하였지 “[신체가 괴멸하면] 바로 지옥의 생유로 태어난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다른 취를 [거치는 것을] 부정하여 ‘무간[업]’이라는 말을 설한 것으로,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마땅히 무간[업]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무간업에 관한 경설은 중유를 부정할 만한 어떠한 공능도 갖지 않는 것이다. 즉 경에서는 “신체가 괴멸하면 지옥 중에 태어난다”고만 말하였지 “[신체가 괴멸하면] 바로 지옥의 생유로 태어난다”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러한 경설에 따라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애들 장난과 같은 힐난의 말을 설하였다. “만약 무간[업]이라는 말이 다른 취를 [거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치상 지극히 잘 이루어진 셈이니, 스스로 중유는 ‘취’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며, 무간[업]이라는 말은 다른 취를 [거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0)
그러나 그의 말은 잘된 것이 아니니, [‘취와는 다른 것’이라는 말과 ‘다른 취’라는 말은]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무간업이라는 말은] 다른 취를 [거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설한 논설자의 뜻은 두 취와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다른 취’라고 말한 것으로,21) 이는 마치 두 마을과 다른 곳을 일컬어 ‘다른 마을’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취에 포섭되지 않는 것(취와는 다른 것, 즉 중유)을 일컬어 ‘다른 취’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이와 같은 종류의 힐난을 ‘애들 장난과 같은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능히 올바로 검토하여 진실 된 뜻으로써 논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유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이와 같은 계경은 쉽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취와는 다른] 이러한 중유는 결정코 존재한다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 [경에서는] 다만 이를 설하여 무간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뇌를 갖는 유정은 신체의 괴멸과 무간에 모두 다 생유를 받을 것이지만, 경에서 오로지 이 같은 사실만을 설하였을 경우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22)
내가 [‘무간업을 지으면 무간에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 이 경을 해석하면 [이와 같다]. 여기서 ‘무간’이라고 말한 것은 중간에 다른 취를 거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이며, 아울러 중유의 연이 결여되어 [양 취 중간에] 머무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경에서 설한 [무간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이러한 [무간업을] 배제하고서 그 밖의 다른 어떤 업도 결정코 이 같은 사실을 부정할 만한 것은 없으니, 그래서 그것을 무간업이라고 설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대는 이 경[에서 설한 ‘무간’이라는 말]을 해석하여 중유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럴 경우 일체의 업은 모두 무간[업]이 되어야 한다.23) 따라서 그대는 마땅히 중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혹은 이 경에서 설한 [무간이라는] 말을 부정할 경우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이러한 [무간]업에서 ‘무간’이라는 말을 관찰하여 이 말이 중유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업은 유간(有間)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중유도 마땅히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경 중에서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24) 이 경의 뜻에 대해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지 글귀에만 집착할 경우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어떤 종류의 유정이 5무간업을 짓거나 증장하게 되면 결정코 반드시 무간에 나락가(那落迦, 지옥)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는데, 만약 단지 글귀에만 집착할 경우 요컨대 다섯 가지 무간업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지옥에 태어나게 되며,25) 그 중의 한 가지라도 결여하거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업을 원인으로 하여서는 [지옥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크나큰 과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무간에 나락가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그러한 업을 짓는 즉시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태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중간에 머문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인용한] 경설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26)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는 가르쳐 말하기를 “그대는 이로부터 몰하면 결정코 신속히 [지옥으로] 떨어져 다른 취에 태어나는 일이 없고, 중유 중에서도 역시 잠시라도 쉬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27)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일체 유정은 모두 죽는 즉시 바로 태어나야 할 것인데, 어찌 홀로 이를 부정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중유가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숙주지(宿住智)의 연(緣)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 말은] 취(趣)에 근거하여 간략히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28) 즉 숙주통이 중유를 반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취에 [근거하여] 간략히 나타내었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이곳(즉 인취)에 와 태어났다”고.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숙주를 아는 이)는 역시 마땅히 “나는 이 생의 갈랄람(羯剌藍) 등을 받았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는 이미 [이같이] 설하지 않았으므로 이(갈랄람)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29) 그러나 이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중유의 경우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이곳(즉 인취)에 와 태어났다”고 하는 말은 이미 중유를 포섭하고 있으니, ‘이곳’은 ‘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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