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 더불어 ‘공룡비늘 암릉’에서 노닐다 1200여 년 전 화산 폭발한 산릉 너머에선 유황내 물씬 부관페리 대형 여객선 타고 현해탄 오가는 맛도 남달라
그간 우리의 일본 산 탐승은 우리에겐 없는 해발 3,000m급 북알프스 일대의 고산이 아니면 ‘지옥 풍경 같다’는 유황천 지옥곡을 가진 활화산 지대 구경이 주류였다. 일본 산에 대한 선별 기준을 이러한 기이함이나 새로움이 아니라 산행 대상지로서 갖춰야 할 미덕에 두면, 그간 북알프스만 주로 고집했던 연유가 의아해질 정도로 유후다케(由布岳)의 존재는 새롭다.
이 산은 일본의 무수한 온천장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다고 할 벳푸(別府) 온천을 지척에 두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의 60%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규슈 지방을 찾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벳푸 온천임을 감안하면 유후다케의 낯설음은 뜻밖이다.
▲ 유후다케 서봉 정상 오름길에서 본 기암능선과 동봉 능선. 바닷가 산이어서인지 해발 1500m대의 산 치고는 매우 광대한 조망을 보인다.
▲ 츠루미다케의 이끼 짙은 계곡을 오르는 취재팀.
이 산은 높이가 우선 1,584m로 하루 산행에 적당하다. 3,000m급의 북알프스 쪽 고산들이 내뵈곤 하는 오만함이 이 유후다케에는 없다. 바닷가에 위치한 때문인지 산정은 1,584m란 높이로 펼쳐낼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다고 할 만큼 광대한 조망을 보이며, 산정으로 이어진 바위 능선은 도봉산 포대능선의 한 구간에 견줄 만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 검은 암릉 양쪽 급경사의 산록을 빈틈없이 뒤덮은 고산 교목 숲의 그 진하디진한 초록빛이란……. 초록의 숲도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눈부실 수 있음을 나는 유후다케에서 처음 알았다.
산허리는 부드러운 억새 사면이거나 일부러 조망처를 삼고자 곧추세워둔 듯한 돌출부가 연이어지는 바윗길이거나였다. 이것만으로는 혹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유후다케는 주변에 제주도의 오름 같은 부드러운 굴곡면의 새끼 화산들로 장식을 삼았다. 이 산에 연이어서는 산정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된 츠루미다케(鶴見岳·1,375m)가 산행 거리나 시간을 조절할 덤으로서 존재한다.
▲ 1 유후다케 남사면의 억새밭. 10월에 만발하면 대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2 남측 등산로 입구를 떠나 유후다케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 일행. 유후다케 정상은 운무가 가렸다. 3 유후다케 남측 등산로. 주로 하산길로 이용되는지, 많은 일본인 등산객들이 내려왔다.
일본 3대 온천 중 하나인 벳푸 온천이 바로 이 산릉 기슭에
이러함에도 유후다케는 일본 100명산의 순위 밖으로 밀려나 200명산에 포함돼 있다. 그 이유는 단지 높이에 있지 않나 싶게 유후다케는 명산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여러 매력을 가진 유후다케이기에 3,000m급 산봉만 수십 개가 넘는다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다. 산행 후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는,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인 벳푸 온천장의 매력이 유후다케의 인기도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설악산처럼 사계절 청류가 흐르는 계곡은 없었다. 청류는커녕 바위 틈새에 고인 물조차 드물었다. 그것은 비가 내리기 무섭게 곧 지하로 스며들기 마련인 푸석바위 화산암 산악의 숙명적인 모습이다.
이렇듯 결정적인 결함을 가졌음에도 이 유후다케가 추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은 한편 부관페리의 낭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산 혹은 시모노세키의 현란한 야경을 뒤로 하며 검은 현해탄을 향해 미끄러져 나아가는 멋 하나만으로도 부관페리의 상갑판에서 맞는 밤은 감미로웠다. 가는 길엔 바다가 뵈는 대형 유리창을 낸 선내 해수탕으로, 오는 길엔 1만6000톤급 대형 선박만이 갖출 수 있는 넓은 홀에서의 여흥으로 외려 항공편을 이용한 여행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 1 유후다케 동등산구로 하산하는 길은 가파르고 험하다. 주로 이 길은 등행길로 이용한다. 2 유후다케 동봉 정상의 불상과 복전함. 3 유후다케 서봉 정상에서 내려가고 있는 등산객. 쇠사슬 구간으로 접어들고 있다.
부관페리 하마유호는 일본 규슈섬 북단의 시모노세키(下關)항 외항에서 항만 업무 개시를 기다렸다가 7시30분경 입항, 입국 수속 절차를 밟았다. 그 후 3시간여 버스로 달린 끝에 11시경 유후다케 남쪽의 등산구에 다다랐다. 유후다케 정상부는 잿빛 운무로 가려져 있고, 서쪽 저 옆에는 제주도의 다랑쉬오름을 두어 배 확대시킨 것 같은, 수목 하나 없는 초원을 이룬 기생화산이 불끈 솟았다. 등산로 입구의 안내도엔 이모리가성(1,060m)이라 표기돼 있다. 과거 이 오름 정상에 성채가 있었던 것일까. 이 오름을 왼쪽에 두고 곧장 유후다케 정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9월 초순의 일본 규슈 땅은 우리의 한여름처럼 아직 뜨겁고 끈적였다. 잠시나마 ‘조금 더 쌀쌀해진 다음에 올 걸’ 하는 후회가 들 만큼 햇살이 강렬했다. 제주와 위도가 거의 같은데도 그렇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숲이 나타났고, 일행은 그늘 속의 서늘함에 안도했다. 아름드리 너도밤나무와 개버찌, 서어나무들로 숲은 울창하다.
유후다케는 종 모양을 이룬 종상(鐘狀)화산이다. 그러므로 기슭은 종의 테두리처럼 완경사이다가 곧 가파르게 변한다. 작은 개활지를 지난 다음 길은 그 급경사의 비탈로 붙었다. 그 후 100여m씩 갈지자로 스무 번 가깝게 꺾이며 유후다케 남사면의 등로가 이어졌다. 그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반복의 지루함은 시종일관 장대하게 트이는 조망 덕분에 잊혀졌다. 순식간에 고도가 높아져 해발 1,060m의 오름 이모리가성이 저 아래 구릉으로 내려앉았다.
‘나중에, 10월쯤에 올 걸’ 하는 후회는 산중턱에서도 이어졌다. 여기선 더위가 아니라, 넓은 산록을 뒤덮은 억새풀밭 때문이었다. 10월 들어 억새가 만발했을 때의 풍치는 9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힘들다고 서봉 등정 포기하지 말아야
우리가 산행을 늦게 시작한 탓인지 오르는 이들은 별로 없고 하산하는 이들뿐이다. 대부분 일본인 중장년층으로, 이들은 오르고 있는 우리를 만나면 한결같이, 마치 모두 단체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길 옆으로 붙어서서 “곤니치와” 하며 우리가 모두 지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며 유후다케의 등산로는 마치 교통호처럼 깊게 팬 곳이 많았다. 그럼에도 목재 데크를 깔거나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질긴 억새풀 덕분인지 사태가 난 곳은 없었고, 갈지자 왕복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끈으로 입구를 막아둔 샛길로 곧장 내리닫는 사람도 없었다.
길게 꺾어 오르기를 무려 20여 회 마칠 즈음 작으나마 고산 교목 숲지대가 나타나곤 했다. 20명 일행이 모두 모여 앉을 그늘은 없을 것 같아 삼삼오오 패를 지어 작은 숲에 들어앉아 점심 도시락을 풀었다. 습한 지역의 고산이라 숲속은 퍼런 이끼로 뒤덮여 있다. 길과 숲 할 것 없이 곳곳엔 가시엉겅퀴가 무성하여, 종종 그 날카로운 바늘 끝에 찔려 자지러지는 비명이 튀어나오곤 했다.
길게 꺾기에 이어 짧게 꺾기를 반복할 즈음 저 위로 영락없이 거대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유후다케의 산릉이 바라보였다. 대기는 서늘해졌고 간혹 습한 운무가 몸을 훑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여 만인 오후 3시경 유후다케 동봉과 서봉 능선이 갈라지는 안부에 올라섰다. 여기서 일행의 반은 서봉 구경을 포기하고 그냥 동봉으로 향했는데, 서봉 정상을 구경한 사람의 입장에서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한 돈과 시간을 들여 헛걸음, 헛산행을 했다고 할 것이다.
서봉 정상까지 이어진 ‘공룡 비늘 암릉’은 그야말로 유후다케 산행의 백미이자 노른자위였다. 동봉으로 곧장 오르던 이들은 중간쯤에서 서봉 능선을 뒤돌아보고서는 아차 싶었을 것이다. 서봉 암릉은 그것이 만약 의도적 조탁이었다면 거대한 예술품에 다름아닌 조형미를 뽐냈다. 그 멋은 옅은 운무와 더불어 그 암릉을 직접 걸어오르는 동안 이미 몸으로 느껴졌다.
동봉 오름길은 서봉 암릉을 고도에 따라 달리 감상하는 조망길로나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소수의 서봉 탐승자들이 동봉 정상의 표지목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하자는 다수의 호들갑스런 제의에 어딘가 시들해 했던 것도 그래서다. 서봉 정상 표지목엔 높이가 1,583.3m, 동봉 정상엔 1,584m로 표기돼 있었으니 동봉이 0.7m 더 높기는 한 모양이다.
동봉 정상 능선을 따라 바닷가 쪽 아스라한 조망을 바라보며 가다가 우리는 우측(남동향) 급경사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르고 울창한 산록 숲지대 중간 여기저기엔 일부러 불쑥 내밀어둔 듯한 조망처가 자리해, 하산이 힘들망정 지루하지는 않았다. 유후다케만을 목적으로 등산할 때는 대개 이 길로 하여 올랐다가 우리가 등행을 시작한 남쪽 등산구로 하산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 츠루미다케까지 밟을 욕심을 냈던 것이나 일본 열도의 무더위를 간과했던 게 실수였다. 이미 오름길에 너무 시간을 소모해 급경사 하산을 끝내고 아름드리 거목이 밀집한 원시의 숲지대로 내려섰을 때는 숲속으로 불그스레한 황금빛 노을이 스미고 있었다. 게다가 붉은 노을이 스민, 이끼마저 두터이 뒤덮인 활엽수림의 아름다움에 취한 발걸음은 한정 없이 느려졌다. 동등산구(東登山口)에 내려선 우리는 내일 관광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남은 츠루미다케 등행을 마저 하기로 했다. 특히 서봉의 장관을 본 몇몇 사람이 츠루미다케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동(東)등산구(유후다케 기준으로 지도에는 그렇게 표기됨)’에서 이어간 츠루미다케는 바로 옆 산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유후다케와는 달랐다. 임도를 따르다가 ‘치산공사(治山工事)’ 현장사무소에서 왼쪽 ‘츠루미다케 서(西)등산구’ 안내판을 따라 숲속으로 접어들자 간혹 족적마저 희미해졌다. 자칫 앞 사람을 놓치면 실종될지도 모른다면서 “4~5명씩 조를 짜자”는 엉뚱한 얘기가 나올 만큼. 물론 모두 일하는 월요일이긴 했지만, 정상 능선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도 우리 외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온 계곡이 진초록 두터운 이끼로 뒤덮인 계곡을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반갑잖은 선물도 받았다. 일행 중 서너 사람이 일본 땅벌에 쏘인 것이다. 모두 혼비백산해 산 위로 내달려 벌떼를 피했다. 벌에 쏘인 이들은 쏘인 자리가 호빵처럼 부풀어오르는 등 통증이 심한지 “자연산 봉침을 거저 맞았으니 저녁에 한잔 사야 한다”는 놀림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 (좌) 유후다케 동봉 정상에 오른 취재팀. (우) 츠루미다케 정상. 뒤에 보이는 것은 통신 시설물이다.
츠루미다케는 정상까지 케이블카 이어져
츠루미다케는 유후다케와 같은 장대한 조망도, 멋진 암릉도 없었다. 그 대신 어두컴컴하게 느껴질 만큼 짙은 숲 풍치가 일미였다. 토양이 걸은 덕인지 곳곳에 우리 고산에서 보던 곰취나물 군락도 나타났다.
완경사로 길게 이어지는 숲속 중간 갈림길엔 우리가 가야 할 곳인 우마노세(馬ノ背) 안내판도 서 있다. 설악산 마등령처럼 말 잔등 같은 형상의 능선인가 싶다. 길은 잠시 가파른 계단길로 변하더니 이내 츠루미다케 주릉 위 우마노세(1,270m)였다. 산릉을 넘는 운무 속에는 짙어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유황냄새가 풍겼다. 이 산은 1200여 년 전인 867년경 대폭발을 한 기록이 있다고 하며, 유황내는 산정 북서쪽 지옥곡에서 분출되는 것이라 한다. 이 지역의 땅 밑 그리 깊지 않은 곳에서는 용암이 바글거리며 들끓고 있을 것이다. 규슈 지도를 보면 츠루미다케 동쪽 바닷가 벳푸 일대는 붉은색 온천 표시로 촘촘하다.
뒤돌아서서 산릉을 넘는 운무의 춤사위를 즐기다가 정상으로 올랐다. 그곳 여러 개의 통신시설이 선 츠루미다케 정상은 산 정상이라기보다는 잘 다듬어진 공원이었다. 케이블카로 올라온 이들을 위한 산책로가 여러 갈래 정비돼 있고 벤치, 신사 등이 곳곳에 놓였다. 정상 서쪽 모서리로 나서자 어제 우리가 올랐던 거대한 덩치의 유후다케가 다가선다. 높이 차이가 단 200m인데도 산이 가진 풍모는 어른과 아이에 비교할 정도로 다르다.
남서쪽 조망점의 벤치에 앉아 노을 바라기까지 하고 내려갔으면 했지만 이제 겨우 정오라서 다들 케이블카에 올랐다. 1,816m에 10분 걸린다는 벳푸의 자랑거리 벳푸로프웨이다. 그러나 시계가 흐려서인지 별 감동 없는 경치만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면 등산로’를 따라 숲길을 걸었을 것이다. 초여름엔 연산홍이 만발하고 가을엔 단풍이 기막히다고 한다.
식생에 밝은 김부래씨는 로프웨이 아래의 울창한 숲을 가리키며 “잘 뒤지면 혹 몰라. 산삼이 나올지도……” 했다. ‘아무려면 뜨끈뜨끈한 화산지대에 산삼은 무슨 산삼’ 하며 피식 비웃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어디선가 캐어 든 싱싱한 산삼 한 뿌리를 슬쩍 내보이며 싱긋 웃었다.
부관페리 성희호 전경. 부산항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잇는 부관페리는 일본의 하마유호와 한국의 성희호가 번갈아 운항한다. 톤수(1만6875톤)부터 선내 시설까지 흡사하다. 다만 한국 성희호가 좀 더 늦은 2002년 건조된 신식 배다. 특실, 2인실 등이 있으며, 여러 명 일행이 함께 갈 경우는 인원에 맞추어 다인실을 쓰는 것도 좋다. 부산항 출항시각 오후 8시, 시모노세키항 오후 7시. 1등실(왕복) 23만7,500원, 2등실 18만500원. 홈페이지 www.pukwan.co.kr, 문의 051-463-3161~9.
산행 길잡이 하루 산행 예정이면 동등산구에서 시작
▲ 스기노이노천탕 타나유.
유후다케~츠루미다케는 잘 걷는 건각들만의 팀이면 하루 만에 연결 산행이 가능하다. 각각 따로 화산 폭발해 솟구쳐 오른 산이 두 개이므로 종주의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한편 시모노세키항 입국 수속 후 곧바로 달린다고 해도 11시 이전에 산행을 시작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해가 짧은 계절엔 유후다케 산행만 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래도 연이어 산행할 생각이면 이번 취재팀이 오른 대로 유후다케 남쪽 등산구에서 시작해 유후다케 정상~동등산구~츠루미다케로 이어간다. 그렇지 않고 유후다케에만 오를 생각이면 무릎 건강을 생각해 동등산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유후다케는 GPS로 체크한 평면 도상거리 7.5km(실거리 약 10km)에 5~6시간 잡으면 되고, 츠루미다케는 동등산구~정상 간 도상거리 3.6km(실거리 4.5km)에 3시간이면 넉넉하다.
백두대간 전문산악회인 거인산악회를 이끌고 있는 이구 대장이 운영하는 자이언트 트레킹의 3박4일 패키지 상품은 벳푸 지옥온천 순례, 스기노이, 온천마을 유후인, 우사신궁 관광을 포함해 29만9000원(문의 02-736-3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