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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사의 일상-힘날세상 스크랩 [수필] 마라톤, 그리고 아내
미라마 추천 0 조회 13 12.07.23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라톤, 그리고 아내

 

 

세상에 많고 많은 운동 중에서 하필이면 마라톤이냐고 콧방귀도 안 뀌던 아내가 초등학교 운동장을 두어 바퀴 돌고서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던 날부터,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땀에 젖은 운동복 빨래는 물론 집안 일이란 일은 모두 다하며 그야말로 공주처럼 떠받들었고, 오직 아내를 위하여 내 운동은 모두 접어 놓고 아내의 스케줄에 맞춰 모든 훈련 계획을 세우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 때 아내는 처음으로 5km 대회에 참가하여 전남 광양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끝까지 달리더니, 그때부터 아내는 독기를 품고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4월 29일 전남 함평 대회 10km에 참가한 아내는 여자부 40대 3위를 하였는데, 주최측은 얄밉게도 초호화 금박으로 꾸며진 상장을 고급 액자에까지 넣어서 보내왔다. 상장을 받자마자 아내는 닦고 닦아서 거실에서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고는,

" 마라톤 일찍 시작하면 뭐해? 상을 받아야지."

이렇게 아주 도도한 목소리로 콧대를 세우며 비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아내를 추켜 세우며 아내의 기분을 딱딱 맞추어 주었다.

"그래 역시 당신은 대단해. 어쩌면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태어났나 봐. 나 같은 것은 정말이지 족탈불급(足脫不及)이야."

문제는 그 때부터였다. 아내가 피나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삼천(三川) 변에 나가 매일 한 시간씩 뛰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족저근막염의 증세가 있어 달리기를 쉬고 있었고 2주 정도 지나서 회복이 될 무렵에는 어깨에 통증을 느껴 이럭저럭 한 달 가량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아픔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열심히 뛰는 밤달녀가 되었을뿐더러 어디서 들었는지 근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헬스클럽에 나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였다.

아무 말도 않고 훈련만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내는 꼭 한 마디씩하며 남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것이었다.

"연습 때 흘리는 땀과 성적은 비례한다며?"

2001년 9월 2일 ‘2010년 무주전주 동계올림픽유치 추진위원회’라는 이름도 긴 단체에서 느닷없이 도민 건강마라톤대회를 개최하였다. 50위까지 시상을 한다고 써 있는 팜플릿을 내 코 앞에다 바짝 들이대며

"적어도 이 상품 중에 한 가지는 틀림없이 내 것인데.... 어느 것을 받을까? 당신 뭐가 좋아. 비디오? TV? 아니 솔직히 그것은 어려울 것 같고 10위 안에 들어 트로피는 받아야겠지. 그래서 찬란한 트로피를 높이 들고 멋진 사진 한 장 찍어 놓아야겠지?" 하며 내 가슴을 짓눌러대는 것이었다.

대회날 아내는 그 무더운 날씨에도 죽기 살기로 달리더니 정말 10위를 해서 트로피와 부상으로 마라톤화를 받아버렸고, 클럽 회원들은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어대고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트로피를 집에 가져다 놓고 나서 의기양양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니 괜히 힘이 빠지고 어깨가 내려 앉는 것이었다.

아내의 훈련 강도는 더 세어졌다.

“ 여보 삼천천은 사람이 많아 스피드를 낼 수 없어서 안되겠어. 해성고에 가서 좀 세게 달릴건데 나 따라가서 좀 달려보는 게 어때? ”

그 말하는 입이 얄미웠지만 그래도 야밤에 아내 혼자 보낼 수 없어서 같이 따라 나섰다. 사실 그 다음 주에 있는 변산 대회를 위해서 나 자신도 연습을 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부상 때문에 8월 한 달간 겨우 46km 달린 것이 전부이고 보면 언덕이 가파르기로 유명한 변산 코스가 슬며시 겁이 나기도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9월 9일 변산대회에서 나는 초반의 오버페이스와 연습부족으로 후반 10km에서 초죽음이 되었고 17km지점에서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레이스를 펼치고, 내 기록보다 17분이나 늦게 결승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거의 초죽음이 되어 들어오는 나에게, 이미 10km를 다 뛴 아내가 한 말은 ‘힘들었냐, 고생했다, 괜찮냐'하는 말이 아니라 “나 또 상 받았다." 하는 것이었다.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지면서 슬며시 기분이 나빠졌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아내는 여성 9위에다 40대 2위를 했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매년 개교 기념 교내 단축 마라톤을 실시하는데 작년에는 마침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라서 조금 성대하게 치루게 되었다.

대회를 추진하는 체육부장 선생님을 살살 꼬셔 가지고 대형 트로피를 준비하도록 해 놓았다. 3등 트로피만 해도 아내가 받은 트로피의 세 배는 됨직한 초대형이었다. 교무실에 가져다 놓은 트로피를 보면서 나는 음흉한 눈길을 보냈다. '저것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내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연습을 하였는가? 학생들이 변수이지만 나는 틀림없이 3위 안에 들어서 그 찬란한 트로피를 안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하여 아내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말 것이다.'

시상대에서 트로피를 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였다. 내 능력도 생각하지 않고 6km를 25분에 달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심장이 파열되는 느낌 속에서도 ‘이렇게 10km만 달리면 나는 대형 트로피를 손에 쥘 수 있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대회날, 출발 시간 한시간 전에 운동장에 나가서 몸을 풀었다. 충분히 워밍업을 시켜 놓고 출발하자마자 치고 나가서 보란 듯이 선두로 달리겠다는 속셈이었다. 9월 중순이었지만 그래도 햇볕은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상에 대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는 나로서는 더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의 출발 신호를 따라 학생들이 앞으로 뛰어 나갔다. 나는 그들의 뒤에 바짝 붙었다. 약간 빠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트로피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비오듯이 흐르는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반환점을 돌았을 때는 여섯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앞 서 가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불과 백여 미터의 거리였기에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6km지점을 지나면서 우리반 체육 부장인 성진이를 추월하였다.

“선생님 같이 가요.”

“성진아 말시키지 마라.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것이다. 그럼 나 먼저 간다.”

학생들에게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삶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훈계해 놓고 트로피에 눈이 어두워 성진이를 떼어 놓고 달리는 마음이 어떠했으랴? 뒷통수가 간지러웠다. 성진이의 뾰루퉁한 얼굴이 자꾸만 앞을 가로 막았다.

‘성진아, 선생님을 용서해라. 오늘만큼은 선생님이 좀 추악한 모습이더라도 그저 두 눈 꼭 감아 주길 바란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네 명의 학생들은 지치지도 않고 잘 달린다. 이를 악물고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달렸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왔건만 그들은 야속하게도 거리를 좁혀 주지 않았다.

정문을 지나며 옆 반 진철이를 따라 잡았지만, 앞에는 세 명의 학생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운동장 한 바퀴를 남겨 놓았는데 …… .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트로피는?”

“---- 그냥 양보했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고 아내가 보내 올 핀잔의 농도를 떠올려 보며 처분만 기다리는 상태로 목을 빼고 결정타를 맞을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너무 기죽지마. 내 진실은 당신이 트로피를 타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즐겁게 달리고 우리가 화목하게 사는 거야. 우리 이제 나란히 손잡고 즐겁게 달리자구.”

아내는 오히려 미안하고 죄스러운 얼굴로 어깨에 손을 얹어 왔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 내렸다.

 

아내의 생일날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중인리 앞 벌판을 달리다가 미리 가져다 둔 생일 케익을 자르며,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들꽃 향기가 흩날리는 들판을 땀에 젖도록 달리고 난 뒤에 인생은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늘을 향해 외치며, 성실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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