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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금 봉투 쓰기
"칠순에는 고희라는 말이 있는데, 팔순 잔치 때는 뭐라고 써야 합니까?"
학회 연구실에 문의해 오는 내용 가운데 상당수가 부조금 봉투 적기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여러 분야의 생활 방식이 서양화 함에 따라 우리의 전통적인 인사말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음에도, 이 부조금 봉투 적기만은 아직까지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들 인식하고 있습니다. 적은 액수의 돈일지언정 부조를 하는 이의 정성을 상대방에게 간곡하게 전하려는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조금 봉투에 적는 인사말 하나에도 대단히 조심을 하게 되는데, 특히 팔순이나 구순을 축하하는 잔치 모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손위 어른의 생일을 높여 부르는 말이 생신입니다. 생신이 곧 '태어난 날'의 뜻이므로 "생신일"은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육순이 지난 뒤에는 특별히 의미 있는 때를 정하여 주변 사람들을 초청, 성대한 생신 잔치를 열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환갑(또는 회갑, 화갑) 잔치와 칠순 잔치입니다. 칠순을 달리 "고희(古稀)"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이름난 문장가였던 두보의 시 가운데 "人生七十 古來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한학이 융성했던 시기에 글줄이나 배운 이들이 칠순을 좀더 문학적으로 표현하느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팔순이나 구순 따위에도 이 같은 별칭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팔구십 살까지 사는 일이 흔치 않았으므로 굳이 별칭까지 만들어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말을 막연히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니,정작 우리말인 "팔순, 구순"은 한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80살은 그대로 팔순(八旬)이며 90살은 구순(九旬)입니다. 일부에서는 팔순을 "산수(傘壽)", 구순을 "졸수(卒壽)"라고도 하는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억지로 별칭을 만들어 쓰려는 심리에서 나온 말이니 권장할 것은 못 됩니다. (칠순이나 팔순, 구순 잔치는 모두 우리의 세는 나이로 각각 70, 80, 90살에 치릅니다.)
또한, 66살을 "미수(美壽)", 77살을 "희수(喜壽)", 88살을 "미수(米壽)", 99살을 "백수(白壽)"라고 하여 성대한 생신 잔치를 치릅니다. 이들 말은 모두 일본말에서 들여 온 것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본디 66살이나 77살, 88살 등을 기리는 전통이 없었습니다. 유별나게 장수에 관심이 많은 일본 사람들의 풍속을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 따른 용어도 일본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환갑(회갑, 화갑)을 앞뒤로 하여 크게 생신 잔치를 치르었습니다. 환갑 잔치는 우리 나이(세는 나이)로 61살(만 나이로 60살)에 열었고, 60살에는 육순(六旬) 잔치를, 62살에는 진갑(進甲) 잔치를 열었습니다. 70살까지 사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71살만 되어도"망팔(望八)"이라 하여 장수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들 잔치에 참석하고자 할 때 마련하는 부조금 봉투에는 무엇이라고 써야 할까요? 다음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는 나이) (봉투에 적는 인사말) 60살 ……… 축 육순연(祝六旬宴) 61살 ……… 축 수연(祝壽宴), 축 환갑(祝還甲), 축 회갑(祝回甲), 축 화갑(祝華甲) 62살 ……… 축 수연(祝壽宴), 축 진갑(祝進甲) 70살 ……… 축 수연(祝壽宴), 축 고희연(祝古稀宴), 축 희연(祝稀宴) 77살 ……… 축 수연(祝壽宴), 축 희수연(祝喜壽宴) 80살 ……… 축 수연(祝壽宴), 축 팔순연(祝八旬宴)
그밖에 88살의 생신 잔치에는 "축 미수연(祝米壽宴)", 99살의 생신에는 "축 백수연(祝白壽宴)" 따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한편, 환갑 이상의 생신 잔치에는 장수를 축하하는 뜻으로 보통 "축 수연(祝壽宴)"을 널리 씁니다.
그러나 이 "축(祝)"을 '축하'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디의 낱말이 가진 뜻과 어긋납니다. "祝"은 '빌다'는 뜻의 동사로서, 예부터 제사를 지낼 때에나 써 오던 말입니다. "축문(祝文)"은 '제사 때 읽어 신명에게 고하는 글'이고, "축가(祝歌)" 역시 본디는 노래의 형식을 빌어 신에게 비는 제례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모두 제사와는 관계없이 '축하하다'는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더라도 "祝"이라고만 할 때에는 '빌다'의 뜻이지 '축하'의 뜻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 환갑"이라고 하면 '환갑을 (맞이하기를) 빌다'는 뜻이 되니, 이미 환갑을 맞은 사람에게는 커다란 실언입니다. 같은 경우로, "축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을 (하기를) 빌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당사자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축 OO' 식의 말은 우리말 어법에도 벗어납니다. 우리는 'OO를 축하하다'라고 말하지, '축하하다 OO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이것은 영어나 중국어의 어법(말법)입니다. "나는 학교에 간다."를 영어권 나라에서는 "I(나는) go(간다) to school(학교에)."이라 하고,중국에서는 "我(나는)去(간다)學校(학교에)."라고 합니다. 아마 우리 한아비(선조)들이 오랫동안 한자로 글자살이를 해 온 까닭에 많은 부분에 이러한 중국식 표현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서 "차 한 잔을 마시며"를 "한 잔의 차를 마시며"로 표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이는 영어의 영향을 받은 미국말입니다. 지난날에는 중국 문화를 신봉하여 우리것이 많이 손상되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잃어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말투를 바로잡는 것은 곧 우리의 겨레얼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생신 잔치에 내는 부조금 봉투 쓰기에 대하여, 글쓴이는 종래의 틀에 박힌 '축 OO' 대신 새로운 방법을 제안합니다. 돈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의 깊이를 담아야 하는 부조금 봉투에는 꼭 제한된 글자 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한글만 쓰기가 보편화 된 요즘 같은 시대에 어려운 한자말을 적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생신 잔치 자체를 축하하는 것보다는 장수를 빌어 드리는 뜻으로 "만수무강하소서"가 어떨까요? 하얀 봉투에 큼직한 한글로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적어 전해 드린다면, 모든 허식을 떠나 마치 부모의 강녕을 비는 자식의 정성을 대한 듯 받는 이의 마음도 한결 따뜻해 질 것이라 믿습니다.
23: 4자 성어 이야기
민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때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일이 있습니다.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속담으로 우리 귀에 익은 중국의 고사성어입니다. 그 후에도 "대도무문"이니 "신토불이"니 하는 따위로 심심찮게 한자말 사자성어가 언론 매체에 오르내렸습니다.
은유와 비유를 위해서라면 이들에 못지않게 풍류적이고 재치있는 우리말 속담이 많이 있음에도 굳이 한자말 사자성어를 남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왕에 사용할 때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고 특히, 표현의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유식함을 뽐내려다 오히려 무식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이면서도 가장 많이 잘못 쓰이고 있는 한자 성어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산수갑산→삼수갑산 "산수갑산에 가더라도 우선 먹고나 보자."는 말을 흔히 듣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수갑산'을 '산수갑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아마도 이 때의 '삼수'를 '산수(山水=경치)가 수려하다'라고 할 때의 '산수'로 오인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산수갑산'은 '경치 좋은 곳'을 말할텐데 어찌하여 '~에 가는 한이 있어도(뒤에 고생하더라도) ~하고나 보자'의 뜻으로 쓰이는 것일까요? 결국 낯선 사자성어를 뜻살핌이 없이 무비판적으로 남용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잘못인 셈입니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둘 다 함경도에 있는 군 단위 지명입니다. 또한, 두 지역이 모두 유배지로 알려진 험한 곳들입니다. 예부터 귀양살이하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올 만큼 험하고, 또한 풍토병마저 지독한 곳이었습니다.삼수군은 오늘날 함경남도 북서쪽 끝에 위치한 지방입니다. 이 지역은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과 험한 봉우리가 많은 고원 지대입니다. 갑산군은 오늘날 함경북도 북동쪽에 있는 지방입니다. 이 지역 역시 삼수군에 못지 않게 험준한 산들로 싸여 있습니다. 이러한 곳들이었기에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야밤도주→야반도주 우리 나라 사람들의 그릇된 언어 습관 가운데, 똑같은 뜻의 한자말과 우리말을 겹쳐서 사용하는 예들이 허다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역전앞(→역전, 역앞), 처갓집(→처가), 약숫물(→약수), …' 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겨레가 오랫 동안 우리말에 맞는 글자를 가지지 못하고 남의 글자(한자)를 빌어 써 온 탓에 생긴 것입니다. 말 따로 글자 따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자말+우리말'의 의미 중첩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예 가운데, 흔히 '한밤중'(깊은 밤중)을 뜻하는 말로 '야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 큰 계집애가 야밤에 어딜 나간다는 거야!"라는 말을 예사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야밤'(夜―)은 '밤' 또는 '한밤'으로 고쳐 써야 올바른 표현이 됩니다.
"야밤도주"도 바로 이러한 오해 때문에 빚어진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야반도주"(夜半逃走)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말 '밤중'에 상응하는 한자말이 바로 '야반'(夜半)입니다. 곧 "야반도주"란, '한밤중에 도망하는 것'을 이르는 한자 성어입니다.
(3) 전입가경→점입가경 입학철을 맞아 새내기 학부모들이 제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 인사하는(물론, 이제 '촌지' 따위는 없어졌으리라 믿고 싶지만)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띄곤 합니다. 아파트 아낙들은 전화통에 매달려 제각기 자기 아이를 맡아 가르칠 담임 선생을 입에 올려 놓고 한바탕 수다를 늘어 놓느라 법석을 떨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지금까지 '담임 선생님'의 '담임'[다밈]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담임'은 모두 '단임'[다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다밈]을 왜 [다님]이라고 할까요? '단임 선생님'이라 하면 한 해 동안만 교사직을 맡기로 한 '단임제' 선생님이란 뜻으로도 들리니, 자기 아이를 한 해 동안 해당 교사에게 맡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딴은 맞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담임'을 [다님]으로 발음하는 현상은 발성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곧, 받침소리 [ᄆ]이 [임], [입] 앞에서는 [ᄂ]으로 소리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데,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발성 구조입니다. 따라서 매우 유의하지 않으면 이러한 말들의 발음을 정확히 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한 예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사자성어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이 말은 '들어갈수록 아주 재미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점입가경"을 "전입가경"으로 잘못 알고 쓰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바로 위와 같은 발음상의 오류 때문인데, "점입가경"을[저밉가경]이라 읽지 않고 [저닙가경]이라 읽어 버릇함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이 한자 성어의 쓰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발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4) 동병상린→동병상련 '동병상련(同病相憐)'의 '憐'을 '린'으로 잘못 읽어 '동병상린'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동병상련'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5) 개발새발→괴발개발 위에서 예든 말들은 모두 한자 성어입니다. 그렇다면 한자 성어의 경우에만 이러한 잘못이 있을까요? 알고 보면 우리말 격언이나 속담, 비유어 등에서도 위와 같은 사용상의 오류가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우리 속담 가운데 "점잖은 개 부뚜막에 오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두고 저마다 부뚜막에 오르는 동물이 '고양이'가 맞느니, '강아지'가 맞느니 말들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지난날 장작으로 아궁이를 지피던 시절에, 집집마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부뚜막에 올라앉아 잠을 자는 모습들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양이나 강아지가 흔하게 부뚜막에 오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비유거리가 되겠습니까? 이 속담은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는 사람이 엉뚱한 짓을 한다'는 뜻입니다. 강아지는 점잖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고양이가 부뚜막에 오르는 것 또한 '엉뚱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속담에 등장하는 동물은 바로 '개'입니다. 그것도 제법 몸집이 큰 놈입니다. 평소 어슬렁거리며 점잖아 보이지만, 밤에 기온이 떨어지고 추위를 못 견디면 부뚜막에라도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커다란 개가 부뚜막에 올라앉은 모습이야말로 진풍경이 아니겠습니까!
글씨를 되지 않게 아무렇게나 써 놓은 모양을 보고 이르기를, "괴발개발 그려 놓았다."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개발새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개 발자국과 새 발자국을 연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새는 마당에 앉았다가도 개가 나타나면 이내 날아가 버릴텐데 어찌 개와 새의 발자국이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이 우리말 사자성어는 "괴발개발"이 맞습니다. 여기서의 '괴'는'고양이'가 줄어든 말입니다. 예부터 개와 고양이는 앙숙간이라, 만나기만 하면 쫓고 도망가며 아웅다웅 다툽니다. 깨끗이 쓸어놓은 마당에 이 두 놈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힌 모습을 상상하면 "괴발개발"의 지닌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4: 일본말 찌꺼기 이야기
우리는 해마다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리고 있습니다. 세종 성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위업을 기리미과 아울러, 겨레의 말글살이에 긍지와 힘을 보태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맘때가 되면 우리의 언론에서는 한글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강조하는라 법석을 떱니다. 한 해 동안 관심조차 두지 않던 천덕꾸러기 한글을 이때만 되면 신문마다 앞다투어 떠받들곤 하지요. 그렇기는 하지마는, 그러나 어차피 바쁜 일상에 묻혀 잊고 사는 것이라면, 이때만이라도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소중함을 함께 생각해 보게 되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1997년은 특히 세종 성왕께서 나신지 600돌을 맞는 해이어서 한글날의 감회는 예년에 비해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52년 전에 일본의 강압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는 곳 우리 말글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되찾은 말과 글은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동안 많은 이들이 일본말 몰아내기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럼에도, 나라가 광복된 지 52돌이 지난 오늘, 우리는 과연 참다운 말글의 광복을 이루어 내었습니까? 슬픈 일이지만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 찌꺼기는 일반의 생각보다 그 정도가 매우 심합니다. 이를 모두 떨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말과 글의 광복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말 찌꺼기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본말 또는 일본말의 영향을 받은 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일본말 발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를 매개로 하여 남아 있는 것입니다.
1. 일본말 발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일본말 찌꺼기를 거론할 때에 흔히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구루마(→손수레), 다대기(→다짐, 다진 양념), 사시미(→생선회), 아나고(→붕장어), 우동(→가락국수)" 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일본말의 발음을 우리가 그대로 쓰는 것인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속에 이런 부류의 것이 많습니다. 이들은 글쓴이가 '→' 표시 뒤에 보인 것과 같이 얼마든지 우리말로 바꾸어 쓸 수가 있는 것들로서, 우리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만이 일본말 찌꺼기는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이 다른 나라 말(특히 서양말)을 자기네들의 소리 체계에 맞추어 받아들여 쓰는 것을 우리가 다시 그대로 받아들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본디 일본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버려야 할 일본말 찌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음 보기를 보겠습니다.
(일본말 발음) (본디 발음) center 센타 센터 cup 꼬뿌 컵 inflation 인프레 인플레이션 muffler 마후라 머플러 nut 낫또 너트 television 테레비 텔레비전
일본말은 홀소리가〔a〕,〔i〕,〔u〕,〔e〕,〔o〕다섯뿐인 데다가 대부분이 받침소리가 없는 음절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서양말의 소리를 제대로 발음하고 표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서양말을 줄이거나 받침 없는 비슷한 소리로 흉내내어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센타, 인프레, 마후라, 낫또, 테레비"라고 하는 것도 분명히 일본말의 찌꺼기입니다. 우리말은 소리가 매우 풍부하여 세계의 어떤 말도 거의 그대로 발음해 낼 수 있으며, 또한 우리 한글도 매우 과학적이어서 어떠한 소리도 다 표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혀짧은 일본 사람을 흉내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 '한자'를 매개로 하여 남아 있는 것 일본의 글자 '가나'는 자유로운 글자살이를 하기에는 다소 불충분한 글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은 한자를 버릴 수 없는 숙명을 떠안고 있는데, 그들이 쓰는 각 한자의 음이나 뜻은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게다가 그들은 한자를 음으로 읽기도 하고 뜻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들이 자기네 방법대로 표기한 한자를 들여다가 그대로 적어 버리거나, 우리의 한자음대로 읽어 버린 데서 비롯된 일본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 '일본식 한자말'이라 합니다.
이런 부류의 낱말은 매우 많습니다. "거래, 검사, 과학, 국회, 농구, 물리, 방송, 배구, 야구, 철학, 판사, 화학, 회사" 들과 같이, 우리들이 날마다 쓰고 있는 말들이 사실은 그런 것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우리말에 거의 녹아들어 일본식 한자말이라는 이유로 몰아내기는 어렵게 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자를 매개로 한 일본말 찌꺼기 가운데에는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바꾸어 쓸 수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일본말이 들어오기 전에 쓰이던 우리말이 있는 것, 같은 한자말이라도 우리말식 한자말이 따로이 있는 것 등은 마땅히 그것을 써야 합니다. 흔히 '일본식 한자말'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몇 개 살펴보겠습니다.
개찰구(→표끊는곳/들어가는곳), 견적서(→추산서), 경합(→경쟁), 굴삭기(→굴착기), 기합(→얼차려), 나대지(→빈집터), 납득하다(→알아듣다/이해하다), 매표구(→표파는곳), 세대(→가구), 수속(→절차), 시건장치(→잠금장치/자물쇠), 절사하다(→잘라버리다), 추월하다(→앞지르다), 타합하다(→의논하다/상의하다), 특단의(→특별한), 행선지(→갈곳/가는곳), …
우리말을 더럽히는 대표적인 일본말 찌꺼기가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인데, 한자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 사람들은 서양말의 소리(발음)를 한자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다음이 그런 보기입니다.
(일본 표기) (본디음의 한글 표기) cholera 虎列刺(고레라) 콜레라 lymph 淋巴(린파) 림프 romantism 浪漫(노망) 로망띠즘 typhus 窒扶斯(지부스) 티푸스
이들은 모두 한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과 글의 체계가 불충분한 일본 사람들의 꽁무니를 잘못 따라간 데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이 일본식 발음에 맞추어 아무 뜻없이 쓰인 한자를 그대로 들여다가 우리식 한자음대로 읽는 바람에 "호열자(설상가상으로 '刺'마저 '刺'로 잘못 읽어서), 임파선(―腺), 낭만, 장(腸)질부사" 들과 같은 웃지 못할 말들이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마땅히 "콜레라,림프샘, 로망띠즘, 장티푸스"로 되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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